송유찬의 무리수
당연하지. 이 몸은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지만,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청렴한 인물이었고 원래 욕심 자체가 없었으니까.
이 당시 군의 내부에는 여러 문제가 많았고 육사 8기를 중심으로 한 젊은 장교들의 불만이 터져 정군 운동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10만 규모였던 군이 미국의 대규모 군사 원조를 받아 60만 규모까지 급성장하였다.
또한, 많은 젊은 군 간부들이 미국유학을 통해 선진 문물과 근대적 사고방식을 배워 왔으며 이로 인해 군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며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사 8기를 비롯한 후배 장교들은 극심한 인사 적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육사 8기 앞 기수들은 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빠르게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8기부터는 진급이 적체되어 중령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516 당시 참모총장이던 장두영 중장과 김중필의 나이 차이는 겨우 3살이었다.
중장인 나도 41살이니. 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다행이군. 육사 8기가 주축이라며?”
“네. 그렇습니다.”
“자네도 동참한 건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육사 8기는 기수끼리 단결력도 좋다며?”
“단결력이 좋은 건 사실입니다.
육사 8기는 총 1300여 명이 졸업했지만 소위 임관한 지 얼마 안 되어 전쟁이 터졌고 많은 동기들이 전쟁통에 사망하여 살아남은 동기들 간에 정이 유독 남다릅니다.
하지만 전 동기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명분은 그럴듯하게 315 부정 선거에 관여한 정치군인과 부정부패한 군인을 몰아내어 군을 깨끗이 정화한다는 거지만 제가 보기에는 진급 등 자신들의 이익을 목표로 한 자기 밥그릇 싸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그런 군인들은 몰아내야 하지만 순순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동조하지만,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기들도 일부 있습니다.”
남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한 의도 같지만, 김태승 중령은 그동안 동기 모임에 나가 그들의 불평불만이 뭔지 잘 알기에 그들의 의도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진급에 대한 불만이 많았을 테고 장성들을 욕했겠지. 고인 물이 나가야 새 물이 들어올 테니까.
물론 일부는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군과 국가를 생각하고 동참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 밥그릇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이들은 얼마 안 지나 총리실에 ‘국방부 장관 임명에 있어서 고려사항’이라는 건의서를 보내는 등 정치에도 개입하고 또 ‘육군 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에 관한 의견서’를 국방부 장관실에 보내는 등 군 인사에도 개입하는 등 선 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영관급 장교들이 요구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결국은 나중에 16인 하극상 사건으로 김중필을 비롯해 일부 장교들이 전역을 당하게 된다.
만약 이들이 강제 전역을 당하지 않았으면 이후에도 선 넘는 행동을 계속했을 것이 뻔하고 전역을 당하자 결국은 쿠데타밖에 없다면 함께할 동지들을 은밀히 포섭하게 된다.
“그들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야.”
만약 순수한 의도라면 이대로 정군 운동만으로 끝이 나겠지만 불순한 의도가 있다면 정치나 군 인사에도 관여하려고 할 거야.
그렇다면 욕심으로 가득 찬 교만하고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야. 지켜보면 알겠지.”
“각하는 관여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지금 이 일로 인해 송유찬 참모총장이 무척 화가 나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육본에 동기들이 얼마나 있지?”
“120명 정도가 있습니다.”
내년에 내가 권력을 잡으면 육사 8기를 전부 제거하지는 못하겠지만 정군 운동에 앞장선 놈들은 무조건 전부 전역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런 놈들은 뭘 해줘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봤자 조직의 분위기만 흐리는 미꾸라지 같은 존재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태승 중령이 그들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믿어도 되겠다.
내가 정치나 군 인사에 개입한다며 그건 불순한 행동이라고 밑밥을 깔아놨으니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를 믿고 내 말을 더욱 따르게 될 거다.
“120명 전부 어떻게 하겠어?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
송유찬은 화가 잔뜩 난 채 소파에 앉아 혼자 씩씩거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있던 애먼 신문을 내동댕이쳤지만,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는지 얼굴이 벌겠다.
‘감히 이것들이 누굴 보고 물러나라고?’
오만방자한 그들의 행동을 도무지 그냥 볼 수가 없어 방첩부대장하고 헌병감을 불러 그놈들을 국가 반란 음모죄로 당장 체포하라고 했으나 오히려 자신을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큰소리를 쳤다.
“부관!”
문이 열리고 부관이 뛰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서울지구 방첩대장 당장 불러.”
“알겠습니다.”
한 시간 후 박청국 서울지구 방첩 대장이 들어왔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자네도 연판장 사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그놈들을 가만히 둬?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당장 국가 반란 음모죄로 체포해서 조사해야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쿠데타 모의한 것도 아닌데 국가 반란 음모죄는 적용하기는 힘들 겁니다.”
“뭐가 힘들어? 장교라는 수십 명의 작자들이 모의해서 군 내부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했으니 이는 당연히 국가 반란 음모죄지.
군이 분열되고 혼란스러우면 누가 좋아하겠어? 김일성이 좋아하겠지.”
“각하! 그들은 군 내부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 419 이후에 군에서도 정군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 그들을 국가 반란 음모죄로 체포한다면 중견 장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더 군 내부 질서가 무너지고 분열될 겁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자네 연판장 주모자가 누군지는 아나?”
“김중필 중령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 자네 김중필에 대해 얼마나 아나?”
“네?”
“김중필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당했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남로당 관련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아나?
그러다 경찰을 피해 입대한 거야.”
“네?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미국에서 준 정보야. 확실해. 나도 듣고 놀랐다니까. 그런 걸 왜 방첩대는 모르고 있었어?”
“정말이라는 겁니까?”
“내 말을 정 못 믿겠으면 미국에 확인해 봐. 그리고 김중필은 박종회의 조카사위란 말이야. 박종회도 남로당이었잖아.
이제 뭔가 거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김중필 뒤에는 박종회가 있다는 말이야. 그들의 의도가 뭘까?
이런데도 가만히 있겠다고? 체포해 철저하게 무슨 의도인지 조사해야지. 그게 자네 일이야.”
“알겠습니다. 체포해 조사해보겠습니다.”
박청국 서울지구 방첩 대장이 나가자 잠시 생각하던 송유찬이 전화기를 들었다.
(네. 각하.)
(1군 사령관 연결해.)
(알겠습니다.)
*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는데 김태승 중령이 들어왔다.
“각하! 참모총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 알았어.”
전화기를 들었다.
(진민재입니다.)
(나야. 진 장군. 1군 사령관직은 마음에 드나?)
(그러네. 웬일인가? 요즘 육본 시끄럽다며?)
(내가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파. 조금 전에 그놈들 국가 반란 음모죄로 체포하라고 지시 내렸어.)
결국, 악수를 두네. 내가 무시하라고 했는데.
진작에 전화할 걸 그랬나? 아니지. 내년에 참모총장으로 송유찬보다는 장두영이 더 나으니까.
역사대로 흘러가는 게 좋겠지.
(왜 무리하는가? 내가 뭐라고 했는가? 그냥 무시하라고 했잖은가.)
(나도 무시하려고 했는데 감히 중령 놈들이 나보고 물러나라고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네.
박종회까지는 참았지만 내 인내심이 여기까지인 것 같네. 자네도 그놈들을 비호 하는 건가?)
(그건 절대 아니네. 나도 그놈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네. 난 자네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조언하는 걸세.
지지를 못 받을 거네. 화가 나겠지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생각해보게. 그놈들이 의도하는 게 뭘지?
그냥 무시하고 지금이라도 당장 명령을 취소하게.)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닭 모가지라도 베어야지.)
(그 칼에 자네가 다칠걸세. 모두가 자네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네.)
(내가 다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네. 그래도 자네는 내 편이지 않은가?)
(난 끝까지 자네 편이네.)
(자네가 있어서 외롭지 않고 든든하네. 고맙네. 다음에 다시 전화함세.)
통화하다 보니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는 것 같았다. 알면서도 가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까?
(알겠네. 힘내게.)
전화를 끊었다.
이 일로 송유찬이 물러나고 차기 참모총장은 최용희가 된다. 최용희도 영어 군사학교 동기이다.
최용희도 몇 개월 못하고 물러나고 장두영이 참모총장이 된다.
김태승 중령이 들어왔다.
“통화 끝나신 겁니까?”
“그래.”
“조금 전에 연판장 주도 장교들이 국가 반란 음모죄로 방첩대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알아?”
“방금 동기한테 연락이 와서 알았습니다. 8기 동기생들에게 전부 연락한 것 같습니다.”
“동기들 반응은 어때?”
“무척 격앙된 상태입니다.”
“격앙되었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동기들과 함께할 건가?”
“모르겠습니다. 이번 체포는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 참모총장 각하께서 무리수를 둔 것 같습니다.”
“자네에게 조언이자 충고 하나 하겠는데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게. 저번에 말했지만 난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네.
그러니 지켜보고 나중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걸세.”
“알겠습니다. 저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각하! 참모총장 각하는 어떻게 하시겠다고 합니까?”
“별일 없이 잘 끝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만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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