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버리신다면, 북부에서 살아남겠습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새글

무치코
작품등록일 :
2024.08.25 23:49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308
추천수 :
2
글자수 :
107,789

작성
24.09.18 00:00
조회
7
추천
0
글자
13쪽

봄의 기운

DUMMY

18. 봄의 기운




로라메리는 은제 상자를 손에 들고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할지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사과를 하는 건 멋진 일이니까. 하지만 테오 경이 무례했던 건 맞잖아! 그의 진짜 출신은··· 황족이니 괜찮은 건가? 어찌 되었건!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 감사를 전하는 게 맞을 거야.’




한 껏 마음을 다잡고 정원에 이르자, 그곳에 앉아 있는 테오를 발견했다. 그는 훈련을 마친 후 한적한 곳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미세한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반사했고 그의 옆모습은 고요하고도 단단했다. 테오는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부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지만,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대지에는 조금씩 봄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로라메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테오를 멀찍이 바라보았다.




홀로드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로라메리는 은제 상자를 손에 꼭 쥐고 천천히 다가갔다. 테오의 곁에 다다르자, 그가 눈을 천천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로라메리를 아주 짧게 마주쳤다.




“테오 경.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돌리고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대공녀님.”




마음을 다잡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레오니드와 게라드라면 몰라도 이제 막 입단한 테오 경에게 사과라니. 그렇지만··· 자신의 오만함을 직접 고백하지 않는다면 로라메리 스스로의 마음이 불편할 것만 같았다.




테오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침묵이 오히려 로라메리를 더욱 압박했다. 그녀는 상자를 내려다보며 결심한 듯 작은 숨을 내쉬고는 테오를 마주 보았다.




“테오 경. 내가 오만했습니다. 그리고 오해했습니다. 경이 나를 얕본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는 그녀의 사과를 예상하지 못한 듯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헨릭 경과 대련을 하고 왔습니다. 내게 알맞은 검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건 작은 보답입니다.”




로라메리가 손에 쥔 상자를 테오에게 건넸다. 테오는 무심결에 자신의 앞에 놓인 은제 상자를 받아버렸다.




그가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자 가죽으로 쌓인 단검이 보였다.




“루나피라 1세의 축복으로 대륙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지만··· 아! 그러니까 제 말은,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테오 경을 보호해 줄 단검이라는 뜻이었어요.”




당황한 로라메리가 말을 얼버무렸다. 황가의 먼 친척인 테오가 아르카디아가 아닌 이곳에 있다는 건 필히 현 황제와의 문제가 있을 터인데 미처 그 부분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테오는 그 말을 못 들었는지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단검을 살펴보기만 할 뿐이었다.




“좋으신 분입니다. 주군께서는. 그래서··· 저는 북부가 좋습니다.”




감사의 인사는커녕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테오였다. 평소와 달랐다. 늘 뻣뻣한 목으로 뚫어져라 눈을 마주치고 끈질길정도로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이상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테오 경! 나는 이 검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계획을 세워보겠습니다.”




짧은 대답을 마친 테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내성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로라메리는 왠지 그가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선물도 준비하고 사과도 했는데··· 테오 경은 속이 좁은 편인가······.’




테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을 뒤흔드는 듯한 그녀의 체취가 버거웠다. 그리고 그는 발레리안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








다음날 아침, 로라메리는 역시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태양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봄이 오고 있다고 한들, 새벽의 서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늘 그렇듯 기사들과 반가운 인사를 한 그녀는 연무장 한 구석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테오를 발견했다.




“테오 경!”




로라메리는 밝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테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내렸다.




“테오 경! 테오 경! 검을 가르쳐주기로 했잖아요!”




나고 자라 거절을 배워본 적 없는 눈치 없는 로라메리는 끈질기게 테오의 곁을 맴돌며 말했다.




“그 훈련이 끝나면 시작할 건가요? 준비를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테오는 무심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려치는 검이 전과 달리 흔들리고 있었다. 훈련을 하는 테오의 뒤편에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테오가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쭉 뻗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바닥으로는 차가운 땅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릿하게 떠 있었고, 아침 햇살이 서서히 비쳐오고 있었다. 그녀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테오 경의 개인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저도 경의 훈련을 방해하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주변의 다른 기사들은 로라메리의 당돌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이 익숙한 듯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반적인 귀족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을 행동을 로라메리는 거리낌 없이 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경계심을 자꾸만 허물어뜨렸다. 테오 또한 그녀를 멀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가족이 될 테니까.’




테오는 자신을 다독였다. 가족애라는 것이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때, 반대 방향에서 누군가 아주 느린 속도로 걸어왔다. 아르토스였다. 홀로드의 거대 바위라 불리는 기사였다.




아르토스가 거대 바위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크고 다부진 체격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바위처럼 잘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그는 기사단 중 가장 느긋한 성격으로 남들에게 게으른 것처럼 보이기 쉬웠다.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흙바닥에서요.”




흑발의 아르토스가 갑옷을 벗어 바닥에 내던지며 로라메리의 옆에 철퍼덕- 나란히 앉았다.




“아르토스 경! 몸이 좋지 않았다면서?”




“저는 원정과는 맞지 않습니다, 대공녀님. 한참을 앓았지 뭡니까? 그나저나 이곳은 제 자리인데 대공녀님께서 앉아계시면 저는 어떡하라는 겁니까?”




“아르토스 경, 경이 그러니까 큰 바위라고 불리는 거야.”




“힘은 최대한 비축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거대 바위입니다.”




“숲에 마물이 많이 늘었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같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보다야 낫지요. 역사 공부 열심히 하셨지요? 루나피라 1세 전에는 영지전이 부지기수···”




“아! 테오 경이 훈련을 마친 것 같네! 나는 테오 경에게 배울 게 있어서 이만!”




로라메리가 급히 말을 끊으며 테오에게로 향했다. 테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훈련 준비를 했다.




차가웠던 북부의 겨울은 점차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한낮의 해가 뜨자 연무장 주변에 남아 있던 눈더미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메마르고 굳었던 땅은 서서히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낮이 되면 따뜻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어 있던 나뭇가지들은 간간히 작은 새순을 틔우고 있었다.








***








2주가 지났다. 봄이 오는 움직임이 완연했다. 발레리안이 신전에 입양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홀로드의 사람들에게도 명명백백히 전달되었다.




그사이 로라메리와 테오는 연무장에서 매일 같이 검술을 함께하며 한층 더 가까워졌다.




약간 상기되어 보이는 테오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다시 한번 시범을 보였다.




“무게가 가볍고 날렵한 무기니까, 방패를 들지 않고도 상대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빠른 공격이 중요해. 힘보다는 기술과 정확함이 관건이야. 다시 봐, 나를 잘 봐.”




테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라메리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시범을 보였다. 그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손목의 스냅을 활용해 칼을 휘둘렀다. 레이피어의 얇고 긴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빠르고 정확하게 목표를 찔렀다.




“대공녀님, 이렇게. 검의 끝을 상대의 급소에 정확하게. 상대가 느끼기도 전에 끝내야만 해.”




그녀는 그가 말한 대로 검을 들어 몸을 낮춘 후, 빠르게 움직였다. 테오가 방어 자세를 취하자, 로라메리는 재빠르게 테오의 빈틈을 노려 찔렀다.




“잘했어! 손목을 더 유연하게!”




테오는 칼을 받아내며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을 교정해 주었다.




“방어할 때도 상대방을 견제할 수 있어. 단순히 막는 것이 아니라, 검으로 상대의 흐름을 끊어야 해. 봐, 이렇게.”




테오는 로라메리의 공격을 받아내며 몸을 틀어 레이피어의 칼끝으로 상대의 칼을 밀어내듯 움직였다. 그러자 로라메리의 동작이 잠시 느려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테오는 순식간에 그녀의 옆구리를 스쳤다.




그녀는 테오의 동작을 곧바로 따라 했다. 그녀는 칼을 빠르게 휘두르며, 손목의 무게를 실어 테오의 검을 밀어냈다. 테오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기술을 칭찬했다.




“훌륭해. 이제 대공녀가 날 가르칠 수 있을 정도야.”




만족스러운 대련에 둘은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땀 흘리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편안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 맞다. 테오 경. 경이 프레데릭의 양자가 될 것이라고 실바니아에도 소문이 났대!”




“에디아르 블랑시엔이 다녀갔나 보군. 아직 허가 나지도 않은 일이야. 대공자님은 요즘 어때?”




“여전히 심술이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아. 물론 나도 디몬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처음에··· 테오 경을 보았을 때는 말이야, 이상한 감정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어. 가족이 될 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복잡한 감정이겠지. 그러니 디몬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테오의 눈이 잠시 물결쳤다. 아무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로라메리의 전담 하녀인 안나벨이 연무장을 향해 달려왔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과 주름 진 치마가 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에 따라 흔들렸다.




“대공녀님!”




“안나벨,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하게······.”




안나벨은 헐떡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굽혀 숨을 고른 뒤, 급하게 말을 꺼냈다.




“뇌블랑 영애가 찾아오셨습니다!”




“레이디 데스데모나?”




“예, 대공녀님! 티파티 초대장을 직접 드리겠다고 자꾸 우기셔서요. 그레이트 홀에서 한 시간째 대공녀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난 또 뭐라고. 참석하지 않을 것이니 돌아가라고 전해.”




“당연히 그리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공녀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게 아니라면 믿을 수가 없다고······.”




“데스데모나 뇌블랑이 올해 몇 살이지? 티파티를 처음 주최하는 건가? 경우 없군, 경우 없어. 뇌블랑 후작도 알고 있을 텐데, 제 딸을 막지 않은 것인가. 믿을 수가 없다고··· 네게 말했다고? 무례하기 짝이 없군.”




“대공녀님은 티파티에 가봤어?”




멀찍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테오가 안나벨과 로라메리의 사이에 불쑥 고개를 껴들며 물었다.




“아니? 난 그런 건 질색이야. 뒤에서 수군거리며 음흉하게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들 말이야. 영지전만 가능했으면 그런 음흉한 인간들을 애초에 싹 몰아치웠을 텐데 말이야.”




“어머! 대공녀님! 또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저리 고운분이 어찌 매번 말씀을 저렇게 하시는지······.”




안나벨이 대공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타박했다. 그 순간 과도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테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난 사실 한 번도 못 가봤거든. 그런 모임은 말이야. 난 외딴곳에 살았고 늘 혼자였으니까······.”




잔뜩 풀이 죽어 침울하게 말하는 테오를 보고 깜짝 놀란 로라메리는 테오의 늘어진 어깨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물었다.




“테오 경, 혹시 그런 곳을 구경해보고 싶어? 진작 내게 말하지! 안나벨, 지금 당장 그레이트 홀로 갈게. 뇌블랑 영애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전해줘.”




사실 테오는 검을 찌르고 험악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다정하고 순진한 그녀가 평범한 귀족 여성들처럼 우아한 생활도 즐겼으면 했다.




물론 그녀의 강인한 모습도 좋았지만, 경험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검을 휘두를 때만큼 숨이찬일이니 그녀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모두가 버리신다면, 북부에서 살아남겠습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 봄의 그림자 속에서 NEW 18시간 전 3 0 13쪽
» 봄의 기운 24.09.18 8 0 13쪽
18 지나간 시간과 마음 24.09.17 10 0 12쪽
17 북부의 왕과 마탑주 24.09.16 10 0 13쪽
16 돌아온 레오니드 (2) 24.09.13 11 0 12쪽
15 돌아온 레오니드 24.09.12 13 0 12쪽
14 마탑주의 방문 24.09.11 12 0 12쪽
13 기억의 파편 (2) 24.09.10 14 0 12쪽
12 기억의 파편 (1) 24.09.09 15 1 12쪽
11 디몬의 마음 (3) 24.09.06 10 0 12쪽
10 디몬의 마음 (2) 24.09.05 10 0 12쪽
9 디몬의 마음 (1) 24.09.04 10 0 12쪽
8 오늘부터 24.09.03 14 0 12쪽
7 마탑에서 생긴 일 24.09.02 16 0 12쪽
6 북부는 어떤 곳입니까? 24.08.30 16 0 13쪽
5 원정에서 생긴 일 24.08.29 15 0 12쪽
4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24.08.28 14 0 12쪽
3 북부의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24.08.27 27 0 12쪽
2 북부에서의 첫만남 24.08.26 36 0 12쪽
1 프롤로그 24.08.26 45 1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