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크의 반격1
"이번 사태가 얼마 지속할 거로 추측합니까?"
네크로의 질문에 역천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치 않은 정봅니다. 원래 황제였던 우르크 왕이 드래곤을 죽이고 레어 하나 털었답니다."
"군자금 넉넉하니까 빠르게 세를 불리겠군요."
"철혈팔기랑 가까우니까 그쪽에 불벼락 떨어진 겁니다."
"가미카제에 식량과 무기를 판 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역천의 감사 인사에 네크로는 피식 웃어버렸다.
"다 그쪽 길드 상인이 너무 잘나서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시스템이 허락하는 최고 가격으로 팔고 있는데, 역천 길드 가격보다 훨씬 싸거든요."
사치품과 달리 생필품은 최저 가격과 최고 가격 모두 정해졌다. 최저 가격보다 싸게 사고 최고 가격보다도 비싸게 파는 건 상인 스킬에 달렸다.
역천도 가미카제를 열심히 응원했다. 가미카제가 무너지면 역천 역시 우르크의 침략을 받는다. 기껏해야 3개 도시가 동시에 공격받기에 넉넉히 대응할 수 있지만, 돈 한 푼 안 팔아도 되는 지금 국면이 가장 만족스럽다.
역천이 아무리 모든 걸 혼자 결정하며 독재한다고 해도, 길드원 그리고 세력 구성원의 눈치를 전혀 안 볼 수 없었다. 가미카제의 뒤통수 행위에 분노한 유저들에게 가미카제에 식량이랑 무기 판 걸 걸리면 민심이 흔들릴 수도 있다.
비싼 고급 동맹석 2개 구하고 에픽 아이템 하나까지 건넨 네크로는 가미카제가 절대 무너지지 말기를 바랐다. 가미카제가 무너지면 역천은 수비하러 돌아가야 한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어느새 30분이 지나 망치 머리가 변했다. 네크로는 해동청을 타고 전장 한복판에 떨어졌다.
레어 방패로 원격 공격을 막으면서 망치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십여 대 때리니 진공 스킬이 터졌다. 지름 3미터 정도의 우르크들이 모조리 데미지를 입고 대부분 땅에 누웠다.
곧이어 절대영도가 터지며 더 넓은 범위의 우르크를 얼렸다. 동태처럼 꽁꽁 언 우르크들은 네크로가 손쓸 겨를도 없이 동족들에게 밀쳐져 쓰러지며 박살 났다.
전투의 흥분으로 모든 걸 잊고 달려들던 우르크들은 얼마 안 가 지옥불에 타서 재도 남기지 못했다.
상대에 따라 대인 공격도 되고 범위 공격도 되는 앞선 세 스킬과 달리 훼멸은 무조건 대인 공격이었다. 좀 괜찮은 놈 하나 죽이고 돌아가려는데, 우르크 우두머리가 주술사 둘을 거느리고 네크로에게 돌진했다.
"죽음의 군단."
네크로는 국왕이다. 죽으면 NPC 사기가 확 떨어진다. 유저가 NPC보다 많기에 전력 손실이 그렇게 큰 건 아니지만, 우르크의 사기가 올라가며 전투력이 강해지는 게 문제였다.
'상대 숫자가 많으니 죽음의 군단도 힘을 못 쓰는구나.'
군대는 숫자가 많을수록 개개인의 전투력이 강해졌다. 아무리 오합지졸이어도 숫자에 따라 저항이 상승했다. 병사 수준에 따라 방어력과 생명력 그리고 전투력 상승 폭이 달라지는데, 예전과 달리 죽음의 군단은 3천인데 우르크는 백만이 넘었다.
아주 쉽게 해치우던 우르크를 조금은 힘겹게 처리했다.
대장군은 소환되자마자 지휘를 포기하고 우르크 우두머리에게 달려들었다. 둘이 용호상박으로 대등한 싸움을 벌일 때, 네크로는 주술사를 덮쳤다. 높은 저항과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믿고 공격에만 전념했다. 훼멸 스킬이 터지자 주술사 하나가 즉사했다.
남은 주술사도 그새 죽음의 군단 친위대 손에 죽어버렸다. 어느새 제이크가 모습을 드러내고 주술사 몸에서 아이템을 추출했다.
대장군과 우르크 귀족의 싸움은 수준이 너무 높고 공방 전환이 빨라서 네크로가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 컨트롤로 전투에서 이득을 꽤 봤던 네크로지만, 이젠 고등급 몹 상대로 아이템이나 스탯에 의지해야 했다.
죽음의 군단이 빠르게 줄었다. 전장 한복판에서 소환하는 바람에 방패병과 장창병 그리고 궁수가 쉽게 죽어 규모는 금세 작아졌다. 다행히 도부수나 친위대 그리고 독전관을 비롯해 기마병까지 고급 병종은 건재했다.
시간이 몇 분 흐르자 기동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기마병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장군과 우르크 귀족의 동작도 느려졌다. 적당한 기회를 포착한 네크로는 둘이 무기를 부딪치고 떨어지는 순간에 끼어들었다. 망치로 우르크 귀족의 무릎을 힘껏 때렸다.
우르크 귀족의 무기를 막은 레어 방패가 깨졌다. 네크로는 바로 허리띠의 아이템 슬롯에 넣어뒀던 방패를 꺼냈다. 마법과 원거리 공격 데미지를 줄이는 옵션이 붙은 레어 방패였다. 웬만한 방패 옵션은 네크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수리비 등 여러 방면으로 가늠해서 레어 방패를 선택했다.
둘이 합심하니 우르크 귀족은 곧바로 쓰러졌다. 네크로가 평범한 유저라면 무시해도 괜찮지만, 공격력이 강하고 망치 옵션도 훌륭했으며 공격 타이밍도 예술이었다. 제이크가 귀족 사체에서 아이템을 추출한 후 해동청을 불러 성벽으로 돌아갔다.
대규모 전쟁에선 그저 놔둬도 드랍 아이템이 알아서 인벤토리로 들어오지만, 제이크가 직접 추출하면 드랍 확률이 높아졌다.
우르크 귀족이 쓰러지자 우르크에게 걸렸던 버프 몇 개가 사라졌다.
"전차 부대 출격."
드워프에게서 사들인 최신형 전차. 예전에 초인동맹이 어설프게 선보였던 전차와는 천양지차였다. 전면뿐 아니라 바닥까지 철판을 댔고 안에 궁수 여섯 명이 들어갔다. 속도는 얼핏 느려 보였지만, 뒤에 따라가는 유저들이 달음박질해야 할 정도는 되었다.
전차들이 둥그렇게 늘어서며 간이 성벽이 되었다. 화살 구멍으로 궁수들이 공격하고, 전차 사이에 들어온 우르크는 따라간 성기사와 전사들이 도맡았다. 어느 정도 공간을 확보한 후 원거리 유저들도 성벽 밖으로 나갔다.
공간을 확실히 확보하고 더 많은 전차가 쏟아져 나왔다. 전차들이 성문을 기준으로 반원 모양을 유지하며 전진했고 유저들은 그 뒤를 따라가며 우르크를 학살했다.
마법사나 사냥꾼 등 원거리 캐릭들이 마나가 떨어졌을 때는 성기사나 전사로 버텼다. 그렇게 전차를 이용하여 느리지만 확실히 전진하며 우르크를 해치웠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우르크가 후퇴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유저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날이 밝으면 재개할 전투를 대비해 로그아웃해서 쉬거나 가수면 모드로 잠을 자는 유저가 많았다.
그러나 밤이 되자 마을을 점령하러 분주히 움직이는 세력도 있었다. 네크로도 미리 선정한 길드들과 함께 도시 점령하러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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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형운은 회의 시작 후 한마디도 안 하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원래부터 말하기보다 듣는 걸 좋아하는 반형운이었기에 처음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회의는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상무님, 무슨 문제라도?"
"음. 솔직한 생각 듣고 싶어. 네크로 말이야."
반형운은 한참 더듬거리다가 말을 겨우 이었다.
"네크로는 어떻게 오늘 자리까지 왔을까?"
수많은 경로로 네크로 본인이 자서전을 써도 더 자세히 쓸 수 없을 만큼 낱낱이 알아냈다. 물론, 그 이유가 되는 스킬 20개라든가, 테스트 레벨 유저여서 뻐드렁니가 퀘스트 시작 아이템을 드랍했다든가, 역시 테스트 레벨 유저여서 헤아로부터 능동형 퀘스트를 뽑아냈다든가 등 네크로와 인공지능만 아는 비밀까지는 몰랐다.
"정보도 우리가 훨씬 많았고. 네크로에게 외부 자금이 흘러 들어간 흔적도 전혀 없고. 머릿수나 실행 능력도 우리가 훨씬 뛰어났고."
"제가 보기엔 배포입니다."
"자세히 말해봐."
"예전에 빙하시대 세트의 마지막 조각을 고작 1억에 넘겼습니다. 이번엔 에픽 아이템을 넘겼습니다. 그 대가로 요구한 게 열흘 수비를 도와달라는 거였죠. 확실히 원하는 걸 위해 소중한 것도 서슴없이 포기하는 배포라고 봅니다. 게다가 우르크와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는 지금, 누구나 수비 면적을 줄여서 소모를 줄이려는데 네크로만은 확장을 생각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배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단순히 배포라면 저도 네크로 못지않습니다. 그 배포에 걸맞은 실력까지 보유했습니다. 저는 네크로가 누구보다 자기 주제를 잘 파악했다고 생각합니다. 탄광이나 전함처럼 자기가 갖고 있어도 큰 소용없는 물건은 적당한 가격에 넘겼고, 자기가 지킬 수 있거나 꼭 지켜야 하는 건 어떻게든 지켜냈습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칭찬 일색이었다. 반형운은 보신에 급급한 자신의 선택과 네크로의 선택 중 어느 게 더 나은 건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가미카제와 손 안 잡았다면? 나도 네크로처럼 여러 세력을 품었다면 지금 상황이 달라졌을까?'
우르크 사태가 끝날 무렵에 가미카제 뒤통수를 칠 예정이다. 그리고 그때 네크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에픽 아이템을 받아버렸기에 그 이상의 물건을 내줘야 한다.
"대한제국과 여인국은?"
"둘 다 수도 하나만 남았습니다. 수도 함락되면 NPC 왕이 죽고 나라 재건하려면 퀘스트를 다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 필사적입니다."
"대한제국에 무기와 식량 지원해. 그리고 게시판에 크게 홍보하고. 가미카제가 나간 것도 내가 쫓아낸 거로 각색해서 이미지 좋게 만들고."
"여인국은요?"
"거긴 놔둬. 뭘 계획해도 계획대로 안 되는 것들이야. 괜히 건드리지 말고 놔두자."
"네크로가 가미카제에 식량과 무기 판 거 게시판에 작업할까요?"
"아냐. 어차피 그쪽은 그런 거로 타격 안 받아. 그리고 당분간 친하게 지내야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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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기가 끝났다. 열흘이 되어 고구려 소속 유저들이 돌아갔다. 네크로는 'ㅁ' 형태를 완성했고 내부 정리에 들어갔다.
"형, 도시 세 개랑 마을 몇 개가 국가 귀속을 거부했어."
"다미안, 12시간 뒤에 밀어버린다고 공지해."
"반발이 있지 않을까?"
"우린 처음부터 대놓고 얘기했잖아. 우르크 도시나 마을이 많은데, 우리 조건 싫으면 다른 데 점령하라고 해. 우리 보호받으며 도시 키워 돈 벌겠다는 헛된 꿈 꾸지 말고."
우르크의 공격은 일부에겐 좋게, 일부에겐 나쁘게 작용했다. 초인동맹은 반반으로 볼 수 있는데, 도시나 마을을 반값에 넘겨버렸다. 계속 우르크 마을로 두면 귀찮고 직접 점령하자니 운영하기 벅찼다. 직접 점령한 도시와 마을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가둬둔 부분의 도시와 마을을 전부 처리했고 수비선도 안정화했다.
네크로 역시 'ㅁ'에 가둔 마을과 도시를 전부 점령했다. 외곽 도시 중에서 두 개를 직접 점령하고 남은 도시는 북미나 유럽에서 온 세력들이 점령했다. 마을은 한국이나 중국 심지어 일본 유저들이 점령해서 국가에 귀속했다.
이에 초인동맹은 도시 백 개가 넘는 최강 국가가 되었다. 네크로는 도시가 80개 정도 되는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
철혈팔기는 가장 많은 우르크를 죽였지만, 20여 개 도시를 잃었다. 도시 밀도가 높은 중앙이어서 면적은 네크로 왕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실력만큼은 여전히 최강이었다.
"대한제국이 이쪽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동맹 세력 중에서 가장 큰 싸울아비 길드장이었다. 대부분이 전투 유저로 구성된 길드로 도시를 점령할 엄두를 못 내고 마을만 세 개 키우고 있었다. 진돗개의 조언을 받아들여 NPC를 영입해 길드 사무를 보고 마을 관리도 맡게 했다.
초반에는 NPC보다 유저가 직접 운영하는 게 확실히 나은데, 싸울아비 길드에는 마을을 운영할 능력을 갖춘 유저가 한 명도 없었다.
"만리장성 정보 아는 분 계신가요?"
만리장성은 최근 왕의 혈통 퀘스트에 올인했다. 직접 확보한 유저의 퀘스트를 돕는가 하면, 다른 유저들의 퀘스트도 방해해야 했다.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어서 수십만 유저를 모두 왕의 혈통에 투입했다.
"대한제국과 만리장성 사이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만리장성은 걱정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대한제국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아니고, 만리장성이 왕의 혈통을 얻으면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걱정되어 그럽니다."
서북부의 초인동맹과 서남부의 네크로 사이에는 꽤 많은 우르크 도시가 있었다. 두께로 치자면 도시 3개에서 많게는 5개까지 되는 거리였다.
동남부는 가미카제와 고구려가 합쳐서 70개 정도 차지했다. 그리고 중부는 철혈팔기가 이미 둥지를 틀었다.
만리장성이 곱게 서북부나 북부로 간다면 참 다행이지만, 서남부에 오면 네크로에겐 정말 날벼락이다.
이게 강이냐 싶을 정도로 넓은 강이 흐르는 대륙 중부가 가장 노른자고 그다음은 동남부였다. 따뜻한 바다가 있고 사냥터로 훌륭한 드래곤 산맥이 있으며, 중부 다음으로 농사가 잘되는 지역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네크로 세력이 차지한 서남부였다. 남쪽과 서쪽에 바다를 두고 농사짓기도 편했다. 사냥터만 따지면 드래곤 산맥이나 하얀 뿔 산맥에 못 미치지만, 유저가 대량으로 몰렸기에 가장 많은 던전을 발견한 지역이었다.
정보가 부족하니 토론이 원활하지 않았다. 흐지부지 회의가 끝나고 로그아웃하니 현성이 소파에 기대 멍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봤다.
"야, 뭐해?"
"형, 토템 주술사 그거 물릴 수 없을까?"
토템 주술사는 안타깝게도 전투직업이 아니었다. 신령한 나무나 돌에 스킬을 사용한 후 배치하는 비전투 스킬이었다. 현성은 매일 로그인해서 나무나 돌을 찾아다녔고, 찾아낸 돌과 나무에 스킬을 사용한 후 성이나 마을에 배치했다.
아직 좋은 재료가 많지 않아서 마을 위주로 배치했는데, 마을에서 일정 범위에 있을 때 네 스탯 모두 조금씩 올라갔다.
"현성아, 그거 숙련도 올리면 이동형 토템도 만들 수 있다며. 그때까지 꾹 버텨라. 스탯 1씩만 올려줘도 네 몸값 장난 아니다."
지금은 고정형 토템밖에 못 만들지만, 이후 이동형 토템을 만들면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맨날 혼자니까 적적해서 그래. 동해는 어떻게 오랜 시간 혼자 돌아다닐 수 있을까?"
광해도 같은 사냥터에 푹 박혀있는 동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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