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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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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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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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DUMMY

생명이 내 손안에서 스러지는 흥분이 가실 때 쯤, 나는 형태를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신전을 둘러보았다. 푸른 마수가 날뛰는 것도 겨우 버티던 건축물은 내 마지막 공격에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참이었다.


이 정도로 세계급 재해로 불릴 수 있다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 공격을 주고받은 정도로 죽어버리는 짐승이 세계의 위기를 불러온다면 내가 이 세계에 전생한 시점에서 이미 세계의 명운은 결정된 것이다.


불합리함에서 그치지 않는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능력. 거기에 모든 상호작용을 무효화시켜버리는 고유스킬까지 있다. 나를 되살린 그 사무적인 남자도 내 성격을 안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도 예측하고 있었겠지.


장난감이 있다면 가지고 놀고 싶어지는 건 당연지사잖아. 내가 스스로 세운 계획을 따라 마음대로 주무르는 세계는 내 장난감이다. 내 행동에서 숭고한 의지나 야망은 없다. 단지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이다. 재미있기까지 하면 안 할 이유가 없어.


제어권을 갖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시되게 강제할 수 있다면. 내 원리원칙으로 세계를 내 앞에 굽힐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건 목숨과 뒤바꿔서라도 하고 싶은 게임이다.


세계의 불합리함을 내 불합리함으로 꺾는다는 것. 이미 충분히 뒤틀린 것이 더욱 뒤틀린 것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한 바퀴 돌아서 정상으로 돌아올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옥도가 펼쳐질 것인가.


답은 당연하다.


그런 거, 해보지도 않고 알 수는 없잖아.


해보면 된다. 내가, 내 의지로, 내 철학으로, 내 힘으로.


나는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얼음 부스러기들을 짓밟으며 걸었다.


중요한 건 의지다. 생명에게 의지가 없다면 그건 빈 껍질에 불과하다. 의지 하나만으로 그 보유자의 가치가 결정된다. 그 의지가 반영된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다면 그건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런 면에서 에델가르드, 너는 단지 패배했을 뿐이군.”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고 소멸했지만 방금 전까지는 서있던 마수에게,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짖는 짐승을 문답무용으로 죽여버리는 게 신의 대행자로서 알맞은 행동인지는 모르겠군, 가브리엘. 조금 극단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주인은 한 종족을 위협하는 괴물을 쓰러뜨렸을 뿐이다.”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천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 또한 저들의 시선에서는 인족을 위협하는 괴물. 너를 내게 보낸 신은 나 이상으로 이 세계의 끝을 보고 싶은 모양이군.”


인간을 감싸야 할 천계의 신이 어째서 전 인류의 적인 마왕의 편을 든 것인가. 가브리엘이 소환됐을 때부터 계속 생각했던 것이지만 지금 보면 간단했다.


“오만을 심판하는 건 주인의 역할이며 권리다.”


내 수족이 되기를 자처한 작은 천사를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디에서나 의견은 갈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인류의 끝을 보고 싶은 신도 있겠지.


“마왕님. 세계수의 흔적은 역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장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요.

아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전부 말한 것도 아니지만 거짓은 없었지. 꽤나 원식적인 마법으로 숨기고 있고 있지만 말이야.“


나는 에델가르드가 서있던 곳의 공간에 손을 내질렀다. 무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공간이 내 개입을 견디지 못하고 뒤틀려간다.


“저건...?”


내가 뭘 하려는지 모르는 류아는 물음이 가득한 얼굴을 했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공간이 비틀려 그 안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하자 류아는 탄성을 질렀다. 은은한 초록빛 색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그걸 끄집어냈다.


다음 순간, 내 손에 들려있는 건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씨앗이었다.


단순히 크기만 한 씨앗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것에선 영롱한 초록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게... 세계수?”


엘프의 고대 마법을 담고 있는 건 나무가 아니고 씨앗인건가. 하긴, 라그나로크가 있었으니 나무가 무사할 리는 없을 것이다.


마수를 쓰러뜨려야 볼 수 있는 세계수. 우리가 세계수를 원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마수를 쓰릐뜨린 수밖에 없었다. 혹시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제안을 꺼낸 건지도 모른다.


“가브리엘, 너는 라그나로크 때는 없었지. 그땐 천사 대신 발키리들이 있었으니 말이야. 그 천계의 기록인지 뭔지를 써서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이 씨앗이 계속 마수의 몸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면 이걸 어떻게 쓸 건지를 알아야 할 테니 말이다.”

“태초의 대전이 끝나고 저승을 제외한 모든 세계가 멸망했다.”


전투 내내 시킨 대로 카니앗 앞에 서있던 가브리엘이 말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쓰러지며 남긴 수많은 씨앗들은 소실됐지만 살아남은 하이엘프들이 그걸 일부러 구해서 계속 보관하고 있었다. 소중한 마법을 전부 기록해두기 위해서는 신성한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정보는 씨앗에 접촉만 하면 익힐 수 있다.”

“접촉? 하지만 나는 이렇게 계속 들고 있는데.”

“그 마법은 엘프를 위한 것. 엘프가 아닌 다른 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엘프가 아니니 엘프만을 위한 마법이 가득 채워진 세계수의 씨앗을 들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의문점이 남는군. 접촉을 통해서만 그 힘을 전수받을 수 있다면 이 씨앗을 평생 볼 일도 없는 이 섬의 엘프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높은 마법 적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지? 단지 종족의 특성이라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주인이 쓰러트린 마수와 같다.”

“... 그런가.”


짧은 답이었지만 나는 가브리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바로 이해했다.


“네? 방금 걸로 전부 설명이 된 건가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류아가 끼어들었다.


“가브리엘이 말한 건 잠들어있는 와중에도 넓은 일대에 눈을 내리게 하던 에델가르드와 비슷한 경우라는 것이다. 비록 씨앗이라고는 하나 위그드라실이 보관된 이 섬에서 태어나고 일생을 보내는 엘프들은 자연스레 그에 담긴 마법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겠지.”

“그럼 저도...? 하지만 하이엘프가 전부 똑같은 수준의 마법을 구하는 건 아닌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섬의 비밀에 류아의 머릿속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건 개인의 마법 적성이라는 요소가 들어가겠지. 아무리 좋은 학교라도 모든 학생이 최고점을 받는 건 아니니까.”


천계의 지식을 열람할 수 있는 가브리엘이 긍정했으니 이론은 곧 사실이 되어 있었다.


아홉 개나 되는 세계를 떠받치던 나무다. 거기에서 떨어져나온 씨앗이 작은 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지. 보통은 그 영향을 받아 천천히 익히는 마법을 다크엘프에게 단숨에 주입하겠다는 우리의 요청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장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낯선 지식이 강제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건 고통스럽고 끔찍한 경험이었지. 그 지식 덕분에 여기까지 왔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카니앗을 비롯한 다른 다크엘프들에게 그 씨앗을 들게 하면 되겠네요. 세계수의 씨앗이 행사하는 힘이 천천히 스며들도록 기다릴 여유는 없으니까요.”


스키잔은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그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스키잔. 레야 장로의 말을 잊었나?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부적합자가 사용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했지. 단지 겁주려고 그런 말을 지어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는 먼저 카니앗의 생각을 들어봐야 한다.”


물론 다크엘프인 카니앗이 하이엘프만큼의 강한 마력을 지니게 된다면 전력 증강의 의미로는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같은 엘프라고 해도 위그드라실의 씨앗에 담긴 마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단지 부적합자로서 죽게 될 뿐이다.


지금의 카니앗은 그녀의 아버지 대신 하나의 부족을 이끄는 장본인이다. 다크엘프가 마왕군에 속해있게 하는 구심점이라고 봐도 되겠지.


마왕군의 거점에 건물을 세우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건 그녀가 고대 엘프 마법의 적합자가 아니라면 자발적인 죽음을 택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인적 자원을 허투로 낭비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카니앗은 계속 들고 있던 활을 뒤로 매며 말했다.


“한때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을 뿐입니다. 망설임은 들지 않습니다.”


그건 카니앗 답다고나 할까,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대의 마법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다크엘프는 저위 마법밖에 다루지 못한다. 중급 마법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카니앗도 그 중에서는 뛰어난 범재인 것이다.


마법을 상당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신체를 단련시켜 악착같이 살아온 다크엘프에게 마법을 되찾는다는 것은 곧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겠지. 문자 그대로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을 만큼.


“부탁드립니다.”


카니앗은 내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 대답하기 전에 나는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하이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류아, 너는 몇 급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지?”

“급...? 아, 대륙에서 쓰이는 단위 말이신가요. 저는 4급까지 사용할 수 있지만 다른 하이엘프들은 보통 6급이나 7급 언저리에서 그쳐요.”


숫자가 낮아질수록 상급 마법, 높을수록 저위 마법이다. 다크엘프들은 9급 정도의 저위 마법밖에 구사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차이였다. 저위 마법과 중급 마법에는 하늘과 땅 정도로 엄청난 위력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시이나의 대검에 문제없이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 카니앗이 위그드라실 씨앗의 영향을 받고도 무사할 수 있다면 마력이 대폭 강화되어 훨씬 강력한 존재가 되겠지.


하지만 이건 도박이다. 충실한 부하를 하나 잃을 수 있다는 리스크를 가진 도박.


나는 카니앗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겠지?”

“물론입니다.”


고려할 점은 많았지만 결국 그걸로 충분했다. 카니앗은 스스로의 의지로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부하의 의지를 짓밟을 생각은 없었다.


“행운을 빌지.”


내가 씨앗을 건네자, 카니앗은 주저 없이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변은 곧 발생했다.


씨앗이 내는 초록빛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나 싶더니, 사방에 널려있는 얼음 조각들을 전부 날려버릴 정도의 충격파가 몰아치며 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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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11 8 9쪽
99 적발 +1 20.01.05 298 9 9쪽
98 잠입 +1 19.12.29 314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31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22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10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21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6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5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42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8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9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50 9 10쪽
87 난투 +2 19.11.21 34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5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44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8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5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9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85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92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7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94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14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93 11 10쪽
» 세계수 +1 19.10.10 427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7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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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설원 +1 19.09.29 444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74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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