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워지는 그림자
“침공은 순조롭게 되고 있네. 그 오크는 지금쯤 콧대가 엄청 높아져있겠지.”
가름은 뒤로 드러누운 채 중얼거렸다.
제국에 가 있는 대부분의 마왕군 간부들과 달리 가름은 광맥지대의 개인실에 있다. 침공을 위해 많은 병력이 빠지는 바람에 매우 조용해진 참이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전투원으로 참전하는 것도 아니고, 지휘관으로 후방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제국의 침공에 관련해서 군무부 총사령관 권한대행으로서 할 일은 작전대로 전쟁이 흘러가는 걸 방관하는 것뿐이다.
그라 해서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놔두고 집 지키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모든 인원을 침공에 할애할 수는 없는 법.
“누님은 지금쯤 재미 좀 보시고 계실랑가 모르겠네.”
승리는 확실했다. 하지만 단지 이 전쟁의 목적은 단지 이기기 위함이 아니다. 마왕군의 위용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가름이 띄워둔 영상에는 작은 점들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지도가 보이고 있었다. 이미 제도는 함락. 남은 건 주변 지역의 나머지 병력들을 무력화시키는 작업뿐이다.
“소장님, 황국 파견 부대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느닷없이 들려온 건 노크할 줄 모르는 비서병의 목소리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린과 가브리엘의 합동 작업으로 저번에 광맥지대에 기어들어온 쥐새끼들의 동향은 파악했다. 천벽인광이라는 이름의 결사라고 했던가. 제국 침공 건으로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부러 놓아주는 수고까지 들여가며 본거지의 위치를 파악했으니 이제 남은 건 철저하게 부수는 것뿐이다.
마족사냥꾼 비슷한 집단이라고 들었지만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여줄 것인가.
사실 붉은 머리의 계집부터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안타깝게도 유리에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이다. 제국의 황실에 심어둔 첩자를 통해서도 확인이 안 된다.
“천사한테는 조금 기다리라고 해둬. 금방 갈테니.”
가름은 크게 하품을 했다.
카니앗의 증언에 따르면 천벽인광의 두번째 빛인 리우 에스타는 심상치 않은 기술을 사용한다고 했다.
간부가 둘이나 따라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성기사가 쓸만한 기술이라면 가브리엘이 알고 있기도 하고.
“그게... 이미 여기 와계십니다.”
비서병의 말에 화들짝 놀란 가름이 몸을 일으키니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있었다.
“악, 깜짝이야! 언제 온 거냐, 넌?”
“방금.”
하도 같이 지내다보니 이제 천사의 냄새에도 익숙해진 건가. 가름은 자신의 코의 적응 능력을 저주했다.
“다른 놈들은?”
“대기중이다.”
성기사 집단의 섬멸에 뽑힌 병사들은 전부 빛 마법에 크게 취약하지 않은 종족이다.
“유디아 황국으로 직접 전이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전이 준비는 됐겠지?”
“그건 전이가 아니다. 신의 권능을 양도받아ㅡ”
“아, 그랬었지 그랬었지. 이름은 별 신경도 안 쓰니까 빨리 가기나 하자고.”
작게 항변하는 가브리엘을 무시하고 가름은 의자에 걸려있던 재킷을 대충 걸쳤다. 견장에 박힌 별 두개가 반짝하고 빛났다.
“잘됐어, 안 그래도 심심했던 참이야.”
◆ ◆ ◆ ◆ ◆ ◆ ◆ ◆ ◆
“대주교님, 제국에서 긴급연락입니다.”
서류를 살피고 있던 페이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뜻밖의 소식에 놀란 얼굴을 했다.
“긴급회선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쓰이지 않을 텐데요? 연결해 보세요.”
정중하게 무릎을 꿇은 신도는 두 손으로 푸른 오브를 바쳤다.
“연결은 이미 끊어져 있습니다. 저희 측으로 받은 메시지는 14초 정도의 짧은 음성뿐입니다.”
루드게이트 대주교가 서둘러 메시지를 재생한다.
“치직ㅡ유디아 황국에게 알린다... 치직,,”
잡음투성이인 메시지였지만 하는 말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제국 황제, 레스트 바실루스ㅡ치직,, 제국은 공격을 받고 있다. 제도가 이미 함락됐다ㅡ”
“제도가...”
제도는 제국의 수도. 함락된다고 한다면 제일 마지막이고, 제도의 몰락은 곧 제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적은 아마도ㅡ마왕군.”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눈을 찌푸렸다.
“제국은 이미 글렀어. 황국, 치직,은 지금이라도ㅡ”
뚝.
갑작스레 메시지가 끊어진다.
“통신에 방해가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남아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제국이 마왕군에 의해 함락... 곧이곧대로 믿을 이야기는 아니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무시할만한 내용도 아닙니다. 제국 근교로 사람을 보내서 진위여부를 확인하세요. 움직이는 건 그 다음에도 늦지 않습니다.”
차라리 황국을 혼란시키려는 제국의 정보였으면 루드게이트도 마음이 놓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소식은 없다.
앞서 제국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알트레아 왕국은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전력이 되지 않는다.
막강한 군사력의 제국까지 함락되었다면 이제 대륙에서 의지할 나라가 많지 않은 것이다. 아일란즈 공국같은 소국을 제외하면 공화국 정도일까.
“리우, 듣고 있었겠죠?”
“네, 대주교님.”
커튼 사이로 걸어 나온 건 분홍 머리의 소녀. 가는 몸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직위는 마족 섬멸 전문집단 천벽인광의 부단장이자 두 번째 빛.
신벌의 대행자인 리우는 유일하게 루드게이트 대주교가 믿을 수 있는 심복이기도 했다.
“어떤가요, 마왕군이 제국을 침공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은. 직접 간부와 싸워본 당신이라면 잘 알겠죠.”
“신ㆍ마왕군 앞에 제국은 무력합니다. 단 하루 만에 전부가 무너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납을 쏘아대는 묘한 무기까지 있으니 그건 틀림없을 겁니다. 황제 말대로 도와주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저번에 보고받았던 내용인가요... ”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분한 듯 책상을 내리쳤다.
“더 빨리 제국에 지원부대를 보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황국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엘이 알면 상황의 긴급성을 이유로 명령권을 독차지하려 들테고... 정말 진퇴양난이네요.”
레인 아엘 추기경은 원래부터 권력에 관심이 많은, 야욕에 가득찬 남자다. 적을 제거하고 아군을 늘리며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아엘의 힘은 지금도 강대하다. 그가 제1성기사단을 움직인다면 교황조차도 반론의 여지 없이 그의 말을 따라야할 정도니 말이다.
아엘 추기경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성기사는 없다시피할 정도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건 문제였다.
제국까지 떨어진 게 맞다면 대륙 바깥의 세력에게도 구원을 요청해야겠지만 아엘의 성격상 루미아교를 믿지도 않는 나라들에 손을 벌릴 가능성은 작다. 동방의 원숭이들이라며 무시해버리겠지. 황국은 그대로 이기지 못하는 싸움의 선봉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용사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지금이 당장 필요한 시기라고 하는데.”
용사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는 순간, 교회는 루미아의 권능으로 용사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마왕군이 활개 치기 시작한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라는 건 용사로 지정된 인물이 자신의 임무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우. 첫 번째와 함께 제국에 가보세요. 할 수 있겠죠? 저는 대륙의 각 나라들에 공문을 보내놓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대마왕군 인간연합을 만들지 않으면 몰락의 길을 걸을 테니 말이에요.”
“네, 대주교님. 루미아께서 계시는 곳이 제가 있을 곳.”
황국에서 흔히 쓰이는, 당연한 일을 한다라는 뜻의 구절을 읊은 리우는 번쩍임과 동시에 사라졌다.
“늦었지만 저희라고 아무 준비도 안 하지는 않았다는 걸 보여드리죠, 마왕.”
그렇게 다짐하는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이미 천벽인광의 본거지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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