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
“황제, 황제 폐하!”
레스트에게 그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타닥, 타닥.
알현실에 자랑스레 걸려있는 제국의 국기에까지 불이 옮겨붙어 타들어 간다. 수 세기 동안 쌓아 올린 제국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나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다.
“당장 피신하셔야 합니다! 성의 경비도 위태합니다! 마족 놈들이 코앞까지 쳐들어왔단 말입니다, 폐하!”
시끄럽게 소리지르는 건 그의 충직한 부하이자 여동생.
일국의 정보국장으로서 언제나 철벽같은 얼음장을 유지하던 얼굴도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성의 사용인 태반은 폭격이 시작되고 금방 줄행랑을 쳤지만, 지금도 알현실 밖에는 레이아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인 근위병들이 모여있다.
제도가 불타더라도 끝까지 임무를 다하려는 바보 녀석들이.
“빨리 움직이라고, 레스트!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야?”
거친 말을 내뱉으며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려는 레이아. 레스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미 끝났다, 레이아. 제국 각지에서 달려온 전령들의 보고는 너도 들었겠지.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은 타 지역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어. 제국은 이걸로 끝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 없는 황제가 무슨 말이겠어. 그래도 난 지켜보고 싶군. 이 나라의 마지막을.
“레스트!”
레이아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려는 황제의 의지를 깨달았기 때문일까.
“콜록, 숨쉬기가 힘들군. 이럴줄 알았으면 창문이라도 몇개 달아둘걸 그랬어.”
쓴웃음을 지으며 레스트는 기침한다.
“레스트...”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 레이아. 서둘러 여기를, 제국을 벗어나라. 이미 제국은 놈들의ㅡ마왕군의 것이니까.”
결국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거창한 건 필요 없었다.
고위 인사들에게까지 숨겨져 있는 통신소의 위치 발각, 선제폭격, 그리고 불을 뿜는 막대의 등장이다.
지휘 체계와 정보 전달에 혼란이 생긴 와중에 받은 전면 공격 앞에 제국군은 처참히 무너지고, 민간인들은 짓밟혔다.
레이아는 이를 꽉 물며 외쳤다.
“오라버니를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움직이지 않겠다면 나도 여기 있겠어!”
“레이아도 참, 기특한 소리를 하는군.”
레스트는 이미 살아갈 의지를 잃은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동생까지 목숨을 버리겠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냐, 레이아.”
“근거리 전이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아직 있어. 그걸로 마차까지 이동한 다음엔 아직 막히지 않은 경로로 이 나라를 빠져나가는 거야.”
“그 다음에는?”
“그건... 생각해봐야지. 황국이라면 우리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해줄지도...”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건 레이아도 잘 알고 있다. 와해된 제국은 황국에게 가져다줄 이득이 별로 없는 존재.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 보통 어떻게 취급받는지는 제국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아아아악!”
들려온 비명소리가 둘의 대화를 끊었다.
불타는 성이니 그런 비명이 들려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레스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 무슨 놈이냐! 억ㅡ”
“괴, 괴물!”
“폐하를 빨리 이곳에서 탈출시켜! 적이 여기까지 쳐들ㅡ”
다급하게 지르던 소리가 중간에서 끊긴다. 무거운게 쓰러지는 소리가 수차례 들리더니, 곧 쥐죽은듯 잠잠해졌다.
파방ㅡ!
알현실 문이 부숴졌다. 특제 금속으로 보강했던 황성의 최후의 보루가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진다.
또박또박.
느리게 걸어들어온 건 근위병이 아니다.
“제대로 발악해주셨군요, 인간들.”
시꺼먼 군복. 붉은 선. 견장에 달린 세개의 별. 아름다운 푸른 장발. 그리고, 머리의 늑대 귀. 그 얼음장같은 시선이 바실루스 황가의 남매를 향했다.
“적의 간부인가...!”
빨리 알아차린 레이아가 검을 빼들었다. 전투에 직접 나서진 않지만 최소한의 제국군 훈련을 마친 레이아의 자세는 흠잡을데 없다. 상대가 여느 병사와 같다면 1대1에서 쉽게 쓰러지진 않겠지만.
털썩.
손에 들린 근위병의 시체를 놓은 늑대 마족은 고개를 젓는다.
“저라면 저항하지 않을 겁니다. 잘못해서 황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이 도시의 병사들은 아무 의미없이 목숨을 내던진게 될테니까요.”
무예와는 연이 없는 레스트도 알 수 있다. 저 마족과의 실력차는 엄청나다는 것을.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고있지 않지만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 보는 이들의 심장을 죄어오게 했다.
몸은 얼어붙고, 속은 긴장으로 타들어가게 만들고 있다.
게대가 그녀는 이 둘을 적으로 보고있지조차 않다. 저건 좋게 쳐줘야 벌레를 보는 눈이다.
마족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걸 보기 좋게 들어보였다. 그 물건의 정체를 깨달은 레스트의 표정이 무너졌다.
피가 묻은 시미터. 제국군에서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건 레스트가 아는 한 한명 뿐이다.
“인간치고는 꽤 충직한 부하를 두셨더군요, 황제. 질 걸 알면서 그렇게까지 덤비는 인간은 오랜만이었어요.”
“티아레트...!!”
“죽기전까지도 계속 황제의 안전을 걱정했어요. 그런 의지를 존중해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레이아는 핏발 선 눈으로 마족을 노려보았다.
“그 계급장, 꽤 높으신 분인가봐... 그런 분이 호위도 없이 적진 한가운데 행차한건 잘못이었어. 우린 아직 진게 아니니까!”
“제 소개는 딱히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만.”
“하다못해 너 하나라도ㅡ!”
레이아가 온힘을 다해 휘두른 검을 가뿐히 피해내며, 마족은 넌지시 말했다.
“실력의 차를 보여둘 필요는 있을까요.”
마족이 쥔 오른손을 크게 덮으며 푸른 화염이 발생했다.
마치 거대한 늑대의 앞발과도 같은 형태다. 너무 터무니 없는 크기라 환영이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지만 그것이 실체가 있다는 건 곧 확실해졌다.
부웅ㅡ
가볍게 휘두른 앞발이 레이아를 덮치고, 날려버린 것이다.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채 쓰러진 레이아는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레스트는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를 살려둬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너희들의 마왕에 바치기라도 할 텐가?”
“아무 힘도 못썼다고는 하나 당신은 황제. 패배한 제국을 통치하는데 도움이 될 테죠.”
숨길 생각도 없는지 마족은 술술 말했다.
“저희라고 해서 제국을 잿더미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이만큼 쌓아올린 기반을 그냥 무너뜨리는 건 운용 가능한 자산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당신은 그 조력자가 되어줘야 겠어요.”
“내가 순순히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오.”
푸른 장발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쪽엔 제국 전 국민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자신의 국민이 죽게 놔두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당신이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다소 거친 수를 쓸 수밖에 없겠죠. 필요한 수만 남기고 몰살시켜도 저희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몰살이라, 원래라면 제국이 얼마나 큰지 알기는 하는거냐고 비웃음이 나왔겠지만 상대는 아마도 왕국에서 30만을 몰살시킨 범인이다. 레스트는 차마 그 위협을 허풍으로 넘길 수 없었다.
황제가 말이 없자 마족이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만, 당신이 기르는 붉은 계집은 어디에 있죠? 황제가 있는 곳까지 적이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모습을 보일 기미가 없다니.”
“나를 지켜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유리에는 원래 호위에 적합하지 않다. 미친 전투광에겐 더 어울리는 장소가 있지.”
“...”
레스트가 시사하는 바를 깨닫고 표정이 변한 마족은 바로 등을 돌렸다.
“용무가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죠. 안내는 제 부하들이 해줄겁니다.”
전이 마법진이 한바탕 빛나고, 마족의 모습은 사라졌다.
돌연 모습을 감춘 마족을 대신하듯, 붉은 선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같은 군복을 입은 마족들이 알현실의 문을 통해 물밀려오듯 들어왔다. 전원, 보고에 있었던 묘한 무기를 들고 있다.
“타깃, 확보했습니다.”
중위 계급장을 단 마족이 통신석에 그렇게 보고하는 걸 흘려들으며, 레스트는 눈을 감고 탄식했다.
“여기까지 전부 보고 있었나, 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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