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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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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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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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바르포르도

DUMMY

한때 자이언트 드래곤에 점거당해 고요했던 광맥지대.


오랫동안 눌러앉아있었던 불청객이 사라졌으니 원래대로라면 광부들이 벌써부터 몰려들었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막아냈다고는 하나 제국의 침공 덕분에 큰 피해를 입은 왕국은 아직 이곳의 광물을 캘 여유가 없었다.


만에 하나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왕실의 승인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광맥지대는 이제 하나의 군사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으니까.


정작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왕실에 없었지만, 왕국의 권력의 최고봉이어야 할 국왕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그 위의 결정권자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런 광맥지대의 제5계층.


마왕군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이래 훈련장으로 쓰이기 마련이었지만, 근래에는 남아도는 자리에 새로운 시설이 하나 생겨있었다.


부동의 자세로 자리를 지키는 하이오크 둘을 지나쳐 단층 목재 건물에 들어가면 어둡게 밝혀진 복도가 나오고, 좌우로 늘어선 쇠창살 너머에는 방이 하나씩 마련되어있다.


포로의 필요성으로 인해 새롭게 마련된 이 감옥에 수감된 건 단 한 명. 쇠창살 사이로 바람이 계속 맴도는 제일 끝 방에 있는 전쟁포로가 전부다.


오직 그 방만 스키잔의 결계가 쳐져있는 건 수감자의 특성을 고려한 결과.


감방에 갇힌 장신의 여자는 아무렇게나 긴 흑발을 늘어뜨린 채 벽을 보고 서있었다.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던 그녀는 누가 창살 밖에 서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날 비웃기라도 하려고 온 걸까. 다른 할 일도 있지 않겠어?”


식사는커녕 물도 제공되지 않는 혹독한 수감에 정신이 마모되었는지 피로가 묻어나는 말이었지만 독기는 여전했다. 그 적의에도 방문자는 차가운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지만.


“비웃어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직접 온 건 당신을 이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심문이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날 여기서 꺼내고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후후, 멋지네.”

“그런 허세는 제게 통하지 않습니다, 흡혈귀.”


린은 손을 살짝 펴보였다. 고도로 밀집된 마나가 작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주인을 닮아 차가우면서도 뜨거울 것 같은 마나다.


“도망치는 것 하나는 일품이라는 흡혈귀라 해도 저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잿더미가 되고 싶다면 저는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말이죠.”


바르포르도는 한숨을 쉬더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가끔 죄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는 것일 뿐인 푸른 머리칼의 여자. 그 정체를 깨달은 지는 꽤 되었지만 신화적 존재와 말을 섞는 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펜리르. 까마득한 옛날에 죽었어야 할 괴물이 어째서 다시 여기서 나와 대화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걸. 그 소년이 보낸 거야?”


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녀와 바르포르도 사이를 가로막은 창살에 손을 내밀었다.


그 창살에 감도는 바람이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바르포르도는 왼쪽 어깨에 난 상처를 무심코 문질렀지만, 린이 스키잔의 결계에 피해를 입는 일은 없었으며, 그녀의 주인에게 하사 받은지 얼마 안 된 군복에 생채기가 나는 일도 없었다.


파삭.


그 소리와 함께 바르포르도의 감방을 지키던 바람의 결계는 사라졌다.


이게 힘의 차이라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도 부수지 못하던 결계를 이리 간단하게. 이런 힘이 지금 존재해도 되는 걸까.


“해제.”


린이 이어 말하자 둘 사이의 두꺼운 쇠창살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걸 바라만보고 있자, 그대로 걸어 나오라는듯 시선을 준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죽입니다. 오히려 그래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절차는 절차니까요, 전이.”


린이 발동한 전이마법은 너덜너덜한 복장의 바르포르도에게도 닿았다. 한때 빳빳이 다려 휘황찬란한 훈장들이 달려있던 제국군의 군복은 지난 전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이 그을리고 찢어진 상태였다.


마법진에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린 바르포르도는 이미 전이가 완료되었음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여긴...”


그들이 어디로 전이했는지 깨달은 바르포르도는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에 심어두었던 첩자로부터 얻은 정보대로다.


이곳은 알트레아 왕국의 알현실에 들어가기 전에 대기 및 몸수색을 위해 꼭 들려야 하는 응접실. 절대 심문실이 아니며, 전쟁포로를 데려올 곳은 더더욱 아니다.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무슨 생각으로ㅡ”

“말은 아껴두세요. 당신을 심문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접실의 반대쪽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백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겠지만 바르포르도와는 구면인 게 문제였다.


바르포르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못보던 사이에 많이 야위셨네요, 바르포르도 씨. 린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바르포르도가 동요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발부터 인사를 했다.


그 천연덕스러운 인사를 받은 린이 조금 짜증스러운 눈을 했다. 괴물과 인간은 결코 사이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심문은 시이나 양과 함께 진행할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하지만 시이나 씨를 들여오기 전에 잠깐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답니다. 별 거 아니에요, 말 나온 김에 괜찮다면 잠시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을까요?”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흡혈귀, 혼자서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는 네가 대처할 능력이 있기는 하냐는 의미가 깔려있었다. 절대 걱정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라는 게 어조에서 묻어났다.


“걱정해주시니 고맙네요, 린 씨. 하지만 괜찮아요, 아무리 제국의 번견이라 해도 적진의 한복판에서 저를 공격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인품은 아닌걸요. 시이나 씨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잠시 인사라도 나누고 있어 주세요.”

“...”


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 문이 닫힌 다음에야 은발은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더 일찍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이제야 뵙네요.”


어렸을 때 제국군에 거둬져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인간군상을 본 바르포르도였지만 이 소녀처럼 나긋나긋하면서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 독특한 어조를 쓰는 사람은 달리 본 적이 없었다.


절대,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 참, 그쪽에서는 아무것도 대접받지 못했을 테니 차를 준비할까요. 분명 얼그레이 밀크티였죠? 설탕은 두 조각으로.”


오랜만에 만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는 소녀를 바라보며, 바르포르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스...?”


푸른 괴물이 자신을 심문하려고 데려온 곳에 있을 거라곤 결코 상상 못한 인물이었다. 전투에서 꼴사납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이다.


“당...신이 어째서. 서있을 자리는 거기가 아니었을 텐데.”


물어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태껏 절대 굴하지 않던 제국군 중장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배신한... 거네.”


각설탕을 차에 넣고 스푼을 젓던 이스는 완성된 밀크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르포르도에게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이전의 저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시니 그리 생각 하는 게 맞겠지만. 실망하셨나요? 제국에 충실해야할 제가 여기 서있는 것에.”


바르포르도는 이스의 권유를 따라 필요 이상으로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리 쉽게 배신할 줄은 몰랐달까. 솔직히 실망하는 것보다 충격이 더 큰걸. 누구보딘 제국에 충실하던 당신이 배신하게 된 경위가 궁금해졌어. 내 부하였으면 고문해서 다 불게 한 후에 잘게 썰어줬을 텐데.”

“그건 아쉽네요.”


바르포르도는 밀크티를 조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은 갈아탔어도 차 타는 실력은 여전하네.”

“몸에 익은 거예요. 요즘도 종종 하는 취미기도 하고요. 국무가 바빠서 이전처럼은 아니지만요.”

“검은 머리 소년은 네 충성을 높이 산 모양인 걸. 왕국에서 높으신 분이 되었구나.”


자연스레 바르포르도의 맞은편에 앉으며 이스가 미소를 보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알현실에 딸린 응접실을 마음대로 쓸 정도면 뻔해. 그래서, 직위는 뭘까?”

“숨길 필요는 없겠죠. 제가 맡은 위치는 알트레아 왕실 직속 국무총리.”


이스는 새롭게 자신을 소개하듯 눈인사를 했다.


“호칭은 거창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그렇지 않아요. 나라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짜고 보고를 듣는 지루한 업무가 대부분이니까 말이에요.”

“그래서. 적국의 총리가 나를 일부러 부른 이유는?”

“그렇네요, 시간도 없고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으실 테죠.”


배신자가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걸 보자니 뻔뻔스러울 정도였지만 일단 바르포르도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감옥에 감금된 이후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으니까.


“일단 제일 궁금하실 전쟁의 결과예요.”


이스는 태연하게 충격적인 사실을 입에 담았다.


“이번에 알트레아 왕국에 침공해온 제국군은 바르포르도 씨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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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5 7 10쪽
112 의외의 고백 +1 20.02.23 308 6 11쪽
111 온천 +1 20.02.20 291 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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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방아쇠 +1 20.02.06 285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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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꽃잎은 천천히 떨어진다 +1 20.01.16 301 8 12쪽
101 어쩔 수 없는 희생 +1 20.01.12 310 10 10쪽
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10 8 9쪽
99 적발 +1 20.01.05 296 9 9쪽
98 잠입 +1 19.12.29 313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30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20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9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20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5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53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40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7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95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9 9 10쪽
87 난투 +2 19.11.21 340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4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42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7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4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7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84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91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6 13 10쪽
» 바르포르도 +1 19.10.20 394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12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91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25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6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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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류아 +2 19.09.26 473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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