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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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9.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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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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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섬광의 리우 에스타

DUMMY

황제가 체제하는 성의 일부가 불타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인해 제도 전역에 비상이 걸렸다.


대외적으로는 시중인이 떨어뜨린 등불 때문에 발생한 화재라고 발표됐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 국민은 별로 없었다.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성에 내리꽂히는 걸 본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황제가 신의 뜻에 거슬러서 천벌이 내렸다고 믿는 자들이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바람에, 규율과 질서가 잡혀있던 제도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힌 레스트 바실루스는 책상 앞에 앉아 몇 개비 째 일지 모를 시가를 피워대고 있었다.


정오를 한참 넘긴 지금은 평상시 같았으면 이미 집무실에 있을 시간이지만 알현실의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닷새째 밖에 얼굴을 보이고 있지 않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방문하는 소수의 부하들이 전부다.


“레스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레스트는 그의 침실 입구에 누가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아인가.”


방문객의 얼굴을 본 그는 바로 고개를 내렸다.


“통신으로 답이 없어 직접 찾아왔습니다. 기분은 어때요.”


그의 여동생이자 제국 정보국장은 드물게 상냥하게 물었다.


“... 모르겠어.”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을 하나로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판테온의 상태는? 깨어났나?”


레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낮이고 밤이고 의사들이 달라붙어서 치료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금방 깨어나지는 못할 거예요. 그 몸으로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니.”

“그런가...”


왕국 사절의 방문 덕분에 피해만 늘었다. 제도의 든든한 방위군 사령관은 행동불능 상태고, 황실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깊어지고 있다. 불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은 왕국이 언제라도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하는데도.


“기분은 잘 알지만 들어주세요, 레스트.”


레이아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왕국에 아직 남겨둔 정보원으로부터 받은 보고에 신경쓰이는 점이 있었어요. 왕국군은 침공 때 거덜 난 병력을 보충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사절을 보내온 것 치고는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아무리 제국군이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의 왕국군으로는 전면전을 벌이긴 힘들 텐데요.”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하군.”


레스트의 동의에 힘을 얻었는지 레이아는 한층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광맥지대로의 출입이 원천 금지되었다는 소식이 있어요. 채굴 사업도 진행되고 있지 않은 곳에 수상하리만큼 많은 물자가 흘러들어가는 경황도 파악됐죠.”

“광맥지대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소리군.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레이아?”


레스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국 제일의 기사들이 손도 쓰지 못했어. 고작 마족 한 명이 낼 수 있는 힘을 봤지 않은가. 지금 왕국엔 그런 괴물이 소년 휘하에 얼마나 있는지 몰라.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은 이미 산산이 깨어진지 오래. 더 이상 우리가 싸우는 게 왕국인지조차 불확실하다. 그 붉은 유령조차 목숨을 겨우 건졌다고 하는데.”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레스트. 괴물을 사냥하는데 특화된 놈들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은 건 당신이잖아요.”


레이아는 살며시 레스트의 등을 쓰다듬었다.


“저도 처음엔 반대했었지만 물불 가리지 않을 상황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온 회신도 마침 가지고 있어요.


여동생이 내민 편지 봉투는 황국에서 온 게 아니랄까봐 밀랍까지 순백이었다.


대충 편지를 뜯어 연 레스트는 급하게 휘갈긴 것 같은 필체를 읽어 내려갔다.


“교황이 쓴 글이군. 마왕의 강림이 사실이라면 전폭 지지하겠다고. 가능하다면 제국으로부터의 원군도 가세하라고. 하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은데?”

“그건ㅡ”

“그를 위해 제가, 왔습니다.”


레이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 이 시간대 레이아 이외에 방문해오는 사람은 없으니 의아해하며 레스트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창가에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침실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있는 채. 설마 이 까마득한 높이의 방을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인가?


“당신, 설마?”


레이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소녀와 반쯤 열려있는 창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레이아.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어요.”


싱그럽게 웃고 있는 건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녀. 사이드 테일로 묶은 머리는 매우 드문 연분홍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제복을 닮은 검은 의상에 흰 망토를 걸치고 있었으며, 무슨 영문인지 도신이 없는 검을 차고 있었다.


소녀와 눈을 마주친 레스트는 흠칫했다. 금색 눈에는 선명한 십자가가 새겨져있던 것이다.


“레이아, 이 아이는?”


여동생과 면식이 있는 손님인 것 같아 레스트는 일단 물어보았다.


“자기소개가 아직 이었네요?”


소녀는 허리를 살짝 굽혔다.


“네, 저는 리우 에스타. 천벽인광의 두 번째 빛.”

“천벽인광... 두 번째...?!”


상대는 묘하게 들뜬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레스트는 잔뜩 긴장했다.


소녀가 소속된 단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천벽인광은 유디트 황국에서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비공식 비밀조직.


소속된 이 전부가 비할 자가 없는 실력자인 동시에 광신도며, 이교도와 마족은 민간인이라 할지라도 재판없이 살해하는 잔혹성을 지닌 전투단이다.


심판이라는 맹목하에 큰 무력을 마음껏 행사하는 그 특수성 때문에 교황 외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고 하는 이질적인 집단.


“어째서 두 번째 빛이 여기에 온 건가? 사전 협약 없이 전투인원의 파견은 금지했었을 텐데?”


천벽인광을 구성하는 건 총 12명의 성기사로, 최하위인 열두 번째 빛조차 혼자서 백의 마물을 상대하는 게 가능하다는 소문이다. 그러니 갑자기 두 번째 빛이 제국에 온 건 중대사였다. 다른 때였다면 자신을 암살하러 온 건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상황. 말씀하셨지요? 마왕의 강림은 무엇보다 급선무인 문제.”


리우 에스타는 명백하게 자신을 경계하는 레스트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왕은 마족의 왕. 주님의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 즉 처단은 평화의 지름길. 황제는 마왕으로 의심 가는 소년을 직접 보셨다고 했지요.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의 소재를 알고 나면 정확히 뭘 어쩔 셈인가? 마왕을 쓰러뜨리는 건 용사가 아니면 안 돼.”

“저와 제 동료들이라면 충분. 마왕 따위 두렵지 않아요. 어서 그의 위치를.”


다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의아해하겠지만, 천벽인광의 두 번째 빛이 하는 소리라면 단순한 허세는 아니다. 전 용사까지 소속되어 있다는 소문이 도는 조직이니까.


“레이아... 말도 안 되는 걸 불러들였군.”

“황국은 저번의 제안을 꽤 진지하게 생각해준 것이겠죠. 한번 의지해보는 건 어떨까요.”


천벽인광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건 전혀 개의치 않고 난장판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 마족 하나를 잡자고 마을 하나를 불태운 경력도 있다.


정보를 알려준 뒤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일까 걱정되었지만 공통된 적을 둔 아군이 늘어난다면 마음이 놓이는 것도 사실이다. 레스트는 그 이상 고민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좋다. 황국의 협력은 고맙게 받아들이지.”


레스트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리우 에스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알트레아 왕국은 아마도 지그문드 폰 알레인 왕의 즉위를 기점으로 류셀이라는 소년의 지배하에 있어. 공적인 자리에 나서지는 않고 왕국 혹은 그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왕국 외부에서 제일 유력한 곳은 광맥지대지. 내 생각대로라면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고 있고.”

“과연, 과연. 그럼 왕국기사단도 꼭두각시라는 건가요.”

“소년의 수족 노릇을 하는 알레인 국왕부터가 즉위 전에는 기사단장이었으니. 아무리 기사단이라 한들 이미 장기말 신세가 된지 오래겠지.”


긴장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리우 에스타에게 레스트는 경고했다.


“하지만 맞서야할 건 마왕뿐만이 아니다. 태초의 대 전쟁 때 이미 죽어 없어졌을 헬하운드를 부하로 부리고 있었지. 그것 말고도 강력한 마수를 얼마나 부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아아, 그건 정말 기다려지는 일이네요. 가슴이 마구 뛰어요.”

“...?”


리우는 상기된 표정으로 십자 눈을 빛내며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하늘을 거스르는 짐승들의 처단은 황국의 의무. 그걸 집행하는 영광을 얻게 되다니! 이보다 더한 선물이 있을까요? 제 기도를 들어주신 신에게 감사를. 감사를 하지 않으면.”

“헬하운드라고? 저승 문을 지킨다는 그 괴물의 힘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신께서 하사하신 힘으로 어둠의 짐승을 쓰러뜨려 신의 권위를 드높일 기회! 저는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간인걸까요?”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사이 흥분했는지 숨까지 가팔라져 있다.


안되겠다. 이 소녀와 더 이야기하자니 자신의 머리까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레스트는 리우와 직접 눈을 마주치는 걸 피했다.


“일단 묻겠지만, 용사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게 확실한가?”


황국으로부터의 발표는 없었으니 용사의 도래도 아직이라 생각하며 레스트가 확인삼아 물었다.


“용사는 이미 있어요. 고귀한 부름을 받고 신성한 힘을 나누어받은 분이.”

“뭐...?”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레스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어서 용사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조직하지 않고 무얼하나? 사태는 일각을 다투고 있다고! 당장ㅡ”

“아쉽지만.”


리우는 레스트의 말을 끊었다.


“용사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에. 그 자각이 이루어지기전까지 용사의 행방은 황국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자신이 용사라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교회가 파악할 수 있어요.”

“그런...”


황국이 용사를 추적하는 것에 그런 제약이 따른다고는 알지 못했던 레스트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 후.”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피곤한 얼굴을 보이자 리우가 당당하게 양 팔을 허리에 짚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마왕의 상대는 저희가 할 테니 안심하시길, 황제. 마는 확실히 멸해요.”

“제국의 지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아, 그건 황국이 예의상 임의로 집어넣은 문장. 지원은 필요 없을 겁니다.”


리우는 연분홍 머리를 흔들며 딱 잘라 거절한다.


“바로 움직이지 않으면. 소중한 정보, 감사히 받았습니다.”


허리를 숙인 리우의 모습이 번쩍이나 싶더니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과연 두 번째 빛이군요. 전혀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어...”


레이아는 감탄했지만, 레스트는 황국의 정규군도 아닌 천벽인광의 손을 빌리기로 한 결정이 옳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결국 곰을 쫒자고 범을 불러들이는 건 아닐까.


“... 유리에를 다시 불러라. 리우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전부 황국에 맡겨둘 수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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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난입 +1 20.02.16 293 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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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피바람 +1 20.02.09 310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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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현자 +1 20.01.31 287 12 8쪽
104 임무 실패 +1 20.01.23 302 9 9쪽
103 용의 이상향 +1 20.01.19 305 11 10쪽
102 꽃잎은 천천히 떨어진다 +1 20.01.16 301 8 12쪽
101 어쩔 수 없는 희생 +1 20.01.12 310 10 10쪽
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10 8 9쪽
99 적발 +1 20.01.05 296 9 9쪽
98 잠입 +1 19.12.29 313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30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20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9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20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5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53 8 11쪽
»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41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7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95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9 9 10쪽
87 난투 +2 19.11.21 340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4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42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8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5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7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84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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