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
느리게 걷는 회색 드래곤의 뒤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시이나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류셀...? 저번에야 한 마리는 쓰러뜨렸다지만 여기엔 많아도 드래곤이 너무 많은데.”
“결과적으로 잘됐으니 문제없잖나.”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정작 나도 드래곤이 이 정도로 쉽게 태세를 바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방금 전까지는 나를 작살낼 기세로 노려보던 놈이 얌전히 안내 역할을 한다고?
“저 드래곤. 현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었죠?”
이스는 놈이 한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드래곤 사이에 그런 게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족장 비슷한 걸까요. 우두머리 격의 드래곤이 있다는 건 그럴듯한데...”
“본래 무리지어 사는 놈들이 아니건만 오순도순 모여 있는 걸 보면 네 생각이 맞겠지.”
힘이 강한 만큼 자존심도 하늘을 찌르는 놈들이다. 그런 것들을 모아 통솔한다면 어지간히 강하지 않아서야 불가능하다.
그렇다는 말은.
나는 생각했다.
마왕군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건 이 현자라는 놈이 분명하다. 여차하면 처리대상 1순위라는 소리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바꿔서 내 힘이 되어주면 무척 든든하겠지만 말이다.
회색 드래곤의 뒤를 좇아 도착한 푸른 건물은 실제로 쓰인 다기보단 거대한 현대미술작품 같았다.
짓고 나서 분명 오랜 세월이 흘렀을텐데 흠도 없다. 키루아가 여기 있었다면 어떤 소재를 사용했기에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 방방 뛰고 있겠지.
쿵.
앞서가던 드래곤이 걸음을 멈췄다. 손잡이도 없어 도저히 열 방법이 없어보이는 문을 앞에
두고.
@#%&?
놈이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공통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뜻을 지레짐작할 수는 있었다.
거대한 문이 좌우로 갈라진 것이다.
드래곤은 들어가라는 것처럼 몸을 비켰다.
“이 앞이다. 아무쪼록 현자님에게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너는 들어가지 않는 건가?”
주저 없이 드래곤을 공격한 나를 홀로 들여보내도 되냐는 의문이 담긴 말이었지만 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현자님께서 들이라 하신 건 네놈들뿐이다. 장수하고 싶다면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겠지.”
“류셀... 정말 들어갈 거야?”
시이나는 영 내키지 않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드래곤의 우두머리가 우리를 보고 싶다고 하는데 얼굴 정도는 비춰도 되지 않겠어.”
나는 가볍게 넘기려 하지만,
“이 앞에서 굉장히 불길한 게 느껴지는데...”
시이나는 저 안에 있는 것을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마나의 흐름은 본적이 없어. 냄새가 전혀 달라.”
“냄새라고?”
초ㆍ지각마법으로 후각 정보를 살펴보지만 딱히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이나가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다. 웨어울프의 육감으로 무슨 위화감을 탐지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거절하는 선택지는 없어 보이는 걸요.”
우리를 잔뜩 노려보고 있는 거대한 눈동자들을 흘낏 보며 이스가 말했다.
붉은 용을 쏘아 떨어뜨린 이후로 우리에 대한 무관심을 유지하는 용은 더이상 없었다.
라드레이드의 용 전부가 살의, 적의를 가지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해오지 않는 건 회색 용과 마찬가지로 현자라는 것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겠지.
“걱정할 것 없다. 네 신변은 내가 지키기로 한 약속,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랬...었지.”
숨을 크게 들이쉰 시이나의 손을 이스가 잡아주었다.
“가보죠, 시이나 씨.”
안으로 들어서자 시이나가 몸을 떠는 게 내게까지 전해져왔다.
빙결의 마수, 에델가르드 때와는 다른 종류의 차가움이다.
정말 온도가 낮다기보다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의 완전한 부재가 가져오는 한기. 굳이 따지자면 정신적인 종류다.
생물이라면 당연히 있는 오류가 전무해서 본능적으로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고, 생활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안녕들 하신가요, 지상의 손님들.”
입은 듯 안 입은 듯 가볍게 몸에 걸쳐진 하늘색 드레스가 살랑이며 주인을 따라온다. 신발은 신지 않고 맨발인 채다.
나란히 선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건 긴 크림색 머리칼을 가진, 가련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간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겉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 그 부분에서는 꽤 충실하게 재현해놓았으니까. 장인이 정성들여 빚은 인형 같은 미모에 흠은 없다.
그저 풍기는 분위기가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 상상이 갈까.
길고 얇은 손가락. 혼자서는 가구도 밀 수 없을 것 같은 팔. 손님을 맞이하는 안주인처럼 엷게 띤 미소까지.
어디까지 무해한 여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 뒤에 숨은 실체는 무해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게 느껴져 온다.
무게중심을 다른 다리에 바꾸지도 않고, 눈을 깜박이는 건 정확히 4초마다 한 번씩이다. 호흡과 동시에 따라오는 가슴의 들썩임도 없어서 숨은 제대로 들이쉬고 있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연기에 충실하게 본인의 마력을 숨기려는 노력도 전혀 없다. 그릇에 전부 담기지 못해 단지 흘러나오고 있을 뿐일 마나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일방적으로 들인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그대로 밖에 두면 다툼이 일어날 것 같아 불렀습니다.”
생물의 범주에 속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그녀는 부드럽게 우리를 보며 말을 걸었다. 그 시선이 내게 잠시 멈췄다.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이라고는 하나 동족을 공격하는 것을 달갑게 여길 아이는 없으니 말이지요.”
“저기, 당신이 현자님, 인건가요?”
시이나가 물었다.
“네. 이곳 라드레이드의 통치를 맡고 있습니다. 너무 격식 차리실 필요는 없으니 간단하게 디라고 불러주시지요.”
현자는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인간으로 의태하고 있는 건 양해해주시길. 본모습이라면 본의 아니게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테니까요.”
디, 라고 이름을 댄 현자는 바깥에 있던 용들과는 어딘가 원천적으로 달랐다. 단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계속 신경을 긁어대는 위화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 저는 시이나 렌이라고 해요. 이쪽은ㅡ”
“이스입니다.”
시이나와 달리 이스는 자신의 성을 대지 않았다. 이유야 짐작은 가지만.
“그리고 그쪽은?”
“블레이크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일부러 성을 사용한 게 의외인지 시이나가 곁눈질을 하지만 벌써부터 정체를 까발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이름ㅡ류셀은 상급마족에 한해서 알리도록 명했다. 이 현자라는 년이 그걸 모를 리가 없으니 말이지.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티끌만한 놈들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치면 화가 날 법도 할텐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다.
“외부인을 맞이하는 건 오랜만이에요. 마족과 인간으로 구성된 모험자 팀이 무슨 연유로 라드레이드에 오시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그건...”
설마 이 단계에서 어딘가 수상한 걸 눈치 챘을 리는 없지만 도둑놈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시이나가 괜한 변명을 내뱉에 의심을 사기도 전에 디는 손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드래곤의 징표를 제출한 방문객에게 더이상 요구되는 건 없습니다. 기왕 온 이상 마음껏 즐기고 가주시면 그걸로 만족할 뿐. 징표를 받았다니, 여러분과는 꽤나 '연이 깊은' 아이였나 보군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이스가 예를 표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먼길 오시느라 많이 지치셨을 테지요. 그에 앞서 식사를 준비해드릴 테니 그 다음 다시 보는 걸로 하죠.”
그 말이 끝나는 걸 신호로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를 안내해줬던 회색 드래곤이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보인다.
“아,”
시이나도 인사를 하러 고개를 돌리지만 그곳에 현자는 없었다. 멀어져가는 인기척은 전혀 없었을 텐데도.
“어라?”
나는 아무것도 없는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분 나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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