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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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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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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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8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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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뜻밖의 개입

DUMMY

유리에가 이변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발밑은 바닥 대신 난데없이 나타난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벽과 천장은 온통 불에 휩싸인 바람에 도망칠 곳도 없었다.


찰박.


몇 걸음 내딛은 유리에가 질린 얼굴을 했다.


“이거 뭐야? 냄새 너무 심해.”


불평을 담던 유리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눈치 챘겠지.”


가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번 빠지면 그걸로 끝. 몸 전체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 다리는 점점 깊숙이 빠져든다. 단순한 늪이 아니야.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씀.”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느새 말투가 성인 여성의 그것으로 바뀐 유리에가 물었다.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 추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텐데. 이 밑에 뭐가 있는지는 인간들도 잘 알고 있잖아?”

“설마,”

“그래, 밑은 지옥. 저승. 어떻게 부르던 상관없어, 원래 칙칙한 곳이니까. 저승으로의 문을 감상하는 기분은 어떠냐, 꼬맹이.”


유리에가 발버둥치지만 오히려 더 깊게 빠져들 뿐이었다. 가름은 그리운 것처럼 늪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뒤로 밑 동네는 꽤 난장판이 됐다 하더라고. 그래도 죽은 자가 갑자기 일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누군가 문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모양이지만. 산자의 몸으로 내려가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생각은 미리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싸움에 말려들어 쓰러져있던 병사들의 몸은 이미 늪에 삼켜져 있었다.


그 질척이는 늪이 단단한 바닥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걷는 건 가름 하나 뿐이다.


유리에의 손에서 작은 마법진이 빛났지만 곧 흩어져 없어졌다.


“소용없으니 단념하시지.”


가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늪에 빠진 시점에서 전이는 막혀있다. 이미 아랫동네로 가는 중인데 어딜 가시려고?”


이대로 시건방진 꼬맹이를 없애고 보스의 적도 동시에 제거한다. 저승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여행길에 거부권은 없는 것이다.


“그러네.”


유리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황천길로 보내버리는 건 비장의 수단이라고 할 만해. 하지만 아쉽네, 나는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남아있거든.”

“뭘 잘난 듯이...”


유리에가 치켜든 검의 도신이 빛나고 있는 걸 보고 가름은 미간을 좁혔다. 고급품이긴 해도 분명 단순한 무기였던 아까와는 달리 확실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런 지저분한 마법은 좋아하지 않아. 유리에가 말한 것처럼 냄새도 심하고.”


푹.


늪지에 검을 냅다 꽂으며 유리에가 중얼거렸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렴.”


검이 꽂힌 곳을 중심으로 빛이 퍼져가며, 순식간에 바닥을 뒤덮었던 늪지가 점점 사라져간다.


“뭐...?!”


가름이 놀라는 와중에도 빛은 계속해서 늪을 감쌌다.


원래의 대리석 바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승으로의 문은 너무나도 싱겁게 닫혀버렸다.


“칫, 무슨 짓을 한 거냐...!”

“상급 정화 마법인데? 이승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낸 것뿐이야.”


유리에는 빛나는 검을 들어 가름을 겨눴다.


“당신, 역시 위험한 것도 정도가 있어. 프리스트의 스킬을 익혀두지 않았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갔을 거야. 미남과 어울리는 건 싫어하지 않지만 노는 건 이걸로 끝. 슬슬 결착을 내자.”


가름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맨몸으로는 저 검을 상대할 수 없다.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저건 마치 용사가 쓰는 성검처럼 높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 몸을 구성하는 마나가 암 속성에 치우친 가름에게는 최악의 상성이다.


“아... 정말 짜증나게 하는구만!”


가름은 홧김에 상의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여덟 발 전부 갈겨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에가 눈부신 속도로 휘두르는 검에 총알이 전부 튕겨났다. 인간의 영역을 이미 오래전에 초월한 반사 신경이었다.


“그 소년이 만든 장난감이구나. 하지만 그 정도 속도의 납덩이는 통하지 않아.”


저 소녀에게 이런 무기가 통할 거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괜스레 등골이 아파왔다.


가름은 생각한다.


의태를 풀어야 하나.


제도가 박살이 나겠지만 저 계집은 반드시 없애둘 필요가 있는 위험인물이다. 지금 해치워두지 않으면 분명 미래에 화를 초래할 것이다.


창, 검, 마법까지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하는 빙의는 틀림없이 성가신 능력이긴 하지만 진심을 내서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게 다행이었다.


자꾸 피한다면 그냥 이 도시까지 한 번에 없애버리면 된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하던 가름은 불현듯 변화를 멈추었다.


그의 주인은 확실하게 분부했다.


붉은 유령, 혹은 그에 준하는 전력이 있을 경우 혼자서 싸우려하지 말라고. 또한, 제국은 이용가치가 있으니 막무가내로 파괴해선 아니된다, 라고.


더 이상 혼자서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리는 건 보스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가름은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안주머니에서 새하얀 깃털 하나를 꺼냈다.


“응? 그거 뭐야?”


궁금해 하는 유리에를 무시하고 가름은 깃털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더니 위로 던졌다.


팡!


섬광과 함께 복잡한 마법진이 순식간에 전개되며 알현실 내부를 채웠다.


살랑이는 깃털이 내려앉기도 전에, 작은 맨발이 바닥에 섰다.


등 뒤로 활짝 펼쳐진 날개와 함께 찬란한 후광을 내며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는 건 방금 전까지는 이곳에 없던 자그마한 금발의 소녀.


갑자기 나타나긴 했지만 사용에 있어 다소 제약이 따르는 전이마법은 아니다. 저건 자신의 신체 일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천사의 권능이다.


“정말 부르면 바로 오는구만...”


가브리엘의 신속함에 가름은 감탄하다 헛기침을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면 알겠지만 보스가 경고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일단 저 꼬맹이를 제압해야 해.”


이건 미리 상정했던 가능성 중 하나로, 끝까지 제국이 반항하며 굽히지 않을 경우의 시나리오.


간단히 말하자면 무력행사를 통해 굴복시킨다는 전개다.


“이해했다.”


대천사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천지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신의 권속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전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의 수치였겠지만 일단 이 천사와는 같은 편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 정도는 가름도 이해하고 있을 참이었다.


한편, 유리에는 차분했던 방금과 달리 다시 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방방 뛰고 있었다.


“천사? 저거 천사 맞지? 뭐야뭐야, 나 저런 거 처음 보는데?! 왜 갑자기 천사가 나온 거야?”


가브리엘이 손바닥을 펴자 물 덩어리가 생겨났다.


그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가더니, 갑자기 유리에의 몸을 노리고 여러 갈래의 물줄기를 쏘아 보냈다.


잽싸게 물의 촉수를 요리조리 피하는 유리에의 검은 더 이상 빛나고 있지 않았다.


빙의를 해제한 것이겠지. 천사 상대로 신성력은 있어서 독만 되니 알맞은 판단이다.


빗나간 촉수들은 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대리석에 큼직한 구멍을 내고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공격해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니까!”


유리에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다음 순간, 가브리엘의 목덜미를 노린 검격이 날아들었다.


팅.


검이 튕겨나는 것과 동시에, 반응조차 하지 않은 가브리엘의 목에 흰 방어막이 순간 빛났다.


“뭐야 그거, 자동 방어야?”


웃으며 뒤로 물러나는 유리에를 사로잡으려 촉수들이 재차 공격하지만, 상대가 너무 재빠르다.


“저 년... 물에 젖어 미끄러운 바닥인데도 잘도 피해내고 있네.”


과연 이 천사는 저 성가신 계집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가름은 흥미롭게 전투를 지켜보았다.


마침 가브리엘의 손에 냉기가 도는 것 같더니, 작게 휘둘러지는 참이었다.


“응?”


벌써 수십 갈래로 나뉘어 공격을 계속하는 촉수를 회피하던 유리에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의 발밑이 얼어있었다. 젖은 바닥이 어느새 빙판이 된 것이다.


빨리 발을 빼려한 유리에였지만, 냉기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유리에의 하반신을 통째로 뒤덮었다.


힘으로 빠져나가는 짓은 할 수 없다.


완전히 얼어버린 다리로 그런 짓을 한다면 허리 밑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릴 테니까.


“자, 잠깐만. 이거 반칙이잖아!”


유리에가 외치지만 천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 이제 제대로 한대 먹일 수ㅡ”

“물러서라.”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나서려던 가름은 가브리엘에 제지당했다. 무슨 생각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가브리엘은 시선을 유리에에게 고정시킨 채 말했다.


“저것은 확실히 파괴해야 한다. 살아있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가브리엘의 이마 위에 광원이 천천히 모이고 있었다. 주변의 마나를 남김없이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는 그것의 정체를 눈치 채고 가름의 얼굴이 굳었다.


저건 존재 자체를 소멸하는 성스러운 빛.


천국에도, 지옥에도 보내지 않고 그 존재를 이 세계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천벌의 한 종류다.


라그나로크에서 같은 공격에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동료와 부하들은 절대 잊을 수 없다.


“하늘의 화살. 그 첫 번째.”


가브리엘이 되뇌고, 눈부신 광원은 빛의 광선이 되어 발사되었다.


콰콰콰쾅!


광선의 경로에 있는 것들이 부서지고, 형태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갔다.


타깃이 한 명인 것을 감안해서 범위를 좁힌 것 같지만 그럴 생각으로 쏜다면 도시 하나는 가볍게 없애버리는 공격이다.


동급의 신성력을 가진 신이라고 해도 저걸 정통으로 맞고 멀쩡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인간이면 말할 것도 없다.


쉬이이익.


연기가 걷히며 보기 좋게 파인 파괴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좋아. 이걸로 드디어... 어?”


가름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불투명한 막이 멀쩡한 유리에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얼어붙은 하반신도 빠르게 녹고 있었다. 하늘의 화살을 막은 막은 그와 싸울 때 쓰던 방어막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어이, 저거 어떻게 된ㅡ”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오른팔을 들어 비슷한 막으로 자신과 가름을 감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다음 순간, 불타는 알현실의 천장을 뚫으며 빛의 광선이 둘에게 빗발쳤다.


파사삭, 하고 밝은 입자들이 막에 부딪혀 흩어져갔다.


그 입자들에 닿았을 뿐인 지면은 빠른 속도로 마모되고 있다.


이건 이쪽에서 쏜 것과 동류다. 가브리엘이 미리 방어막을 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


그게 머리 위에서 갑자기 쏟아져내려온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 자리에서 다른 누가 천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인가.


가브리엘은 위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역시, 천계가 개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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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연극의 막을 올리다 +1 20.03.18 292 7 9쪽
117 함락 +1 20.03.15 293 8 8쪽
116 드리워지는 그림자 +1 20.03.12 431 7 8쪽
115 전장에 울려퍼진 총성 +1 20.03.08 294 5 9쪽
114 불타는 도시 +1 20.02.29 282 9 9쪽
113 마왕군의 침공 +1 20.02.26 305 7 10쪽
112 의외의 고백 +1 20.02.23 308 6 11쪽
111 온천 +1 20.02.20 291 7 10쪽
110 난입 +1 20.02.16 293 8 8쪽
109 분노 +3 20.02.13 313 8 9쪽
108 피바람 +1 20.02.09 310 8 9쪽
107 방아쇠 +1 20.02.06 286 10 9쪽
106 용족 소녀 +1 20.02.02 325 9 11쪽
105 현자 +1 20.01.31 287 12 8쪽
104 임무 실패 +1 20.01.23 302 9 9쪽
103 용의 이상향 +1 20.01.19 306 11 10쪽
102 꽃잎은 천천히 떨어진다 +1 20.01.16 301 8 12쪽
101 어쩔 수 없는 희생 +1 20.01.12 310 10 10쪽
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10 8 9쪽
99 적발 +1 20.01.05 296 9 9쪽
98 잠입 +1 19.12.29 313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30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21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9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21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5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53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41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7 10 10쪽
» 뜻밖의 개입 +2 19.11.28 39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9 9 10쪽
87 난투 +2 19.11.21 340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5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42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8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5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7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84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91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7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94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12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91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2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6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5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43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73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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