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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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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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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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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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국의 대위

DUMMY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폭풍은 컸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제국의 공세를 받은 알트레아 왕국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드래곤을 몰아낸 광맥지대를 통해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린다는 계획도 빠른 시일에 실천하기는 어려워졌으니 말이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좀처럼 가라앉고 있지 않았다.


한번이라도 왕국의 거리를 걸어본 자라면 알 것이다.


일거리를 구하려는 모험자들이 바글대던 길드도 지금은 조용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남정네들이 모여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던 술집은 문이 굳게 닫혔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부터 제대로 물자를 들여올 방도가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여파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한번에 나아질 기미는 없다.


자의로 전쟁에 참전한 시이나의 마음도 전혀 편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지는 마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상자의 숫자를 종이에 적어 정리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그걸 직접 목격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신의 결정이 불러온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군이 왕국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걸 방지한 건 류셀이 쓴 대량 살상 마법 덕분이다. 결국 왕국은 자력으로 제국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제국에 대항해서 이길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왕국은 류셀이 꾸민 쿠테타가 아니었더라도 파멸의 길을 걸었겠지.


그런 와중에 왕성에서는 승전 축하 연회를 연다니, 참석할 수 있을쏘냐. 이전 숙청을 면한 일부 관리들이 어떻게든 현 상황을 좋게 보이게끔 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승전. 승전이라고? 타들어가는 생명줄을 겨우 붙잡은 것뿐이다.


정오에 열리기로 한 연회에는 그녀도 초대받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시이나는 아침 일찍부터 왕도를 벗어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전과 달리 군에 속한 몸이었지만 오늘은 비번이니 자리를 비워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류셀에게서 넘겨받은, 국왕의 권한과 같은 힘을 가지는 문서를 아직 갖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시이나는 전쟁으로 파괴되지 않은 가도를 달리는 마차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승전국’ 알트레아 왕국이 입은 피해는 막대.


전체 인구의 2할이 사망. 양측 모두 엄청난 숫자의 시체가 쌓였다.


제국군을 몰아냈다고는 하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친구를, 동료를, 가족을 잃은 왕국 국민들의 슬픔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거리는 고요함만을 담고 있었다. 그러한 종류의 슬픔이 분노로 바뀌어 불합리한 보복 대상이 되는 일을 수없이 겪어온 마족들이 사는 곳은 더욱 더.


새로운 국왕ㅡ지그문드 폰 알레인이 즉위한 이래 마족차별 금지법이 제정되었지만 국정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새로운 법이 바로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 류셀의 입김이 닿은 게 확실한 일련의 법안은 왕국민이 가지는 권리를 왕국 내 거주하는 마족에게도 동등하게 부여하는 게 요지였다.


마족들을 노예로 부리던 자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런 차별 자체를 뿌리 뽑는 게 목표인 법안인 만큼 장기적으로는 마족도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시이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피를 흘리던 간에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내는 소년이었으니까, 그는.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마족의 부흥을 노리는 것 같단 말이지... 아, 여기서 멈춰주세요.”


친숙한 거리에 접어들었을 때 시이나는 마차를 멈췄다. 마부는 고개를 한차례 숙여보였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렌 님.”


마차를 제자리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다니, 이런 특혜도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정말, 많은 것이 변해버린 것이다.


시이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거리를 걸었다. 그녀의 눈에 밟힌 건 저만치 움푹 파여 있는 도로. 긴 도로를 날려버린 피해를 어떻게 덮어보려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지금은 멈춘 상태다.


시이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둘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무뢰한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려는 그녀를 구해준 류셀의 흔적이 남아있다. 짧은 대화만으로 앞뒤사정을 파악하고 여러 명을 인정사정없이 상급 파괴마법으로 태워버리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지만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째서 자신을 구해줬는지도 모른 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인데 그녀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간간이 모험자 길드에서 잡일을 맡아 생계를 이어가던 시이나는 일국의 백작에게마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올라 있었으니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군복은 왕국군의 복장과도 현저히 다른 것이었지만, 자주 왕성에 드나들던 모습이 소문을 탔는지 이전처럼 시비를 걸리는 일은 없어졌다.


꽉꽉 걸어 잠근 민가의 창에서 그녀를 힐끔 보는 눈이야 있었지만 감히 간섭하려 하는 사람은 전무했다. 이런 시국에 누가 군의 대위와 엮이고 싶을 것인가.


“...아.”


딱히 목적지를 정한 기억은 없지만 익숙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친숙한 광경이 있었다.


시이나는 열쇠를 꺼내 잠겨있던 문을 열었다.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갈 동안 한 번도 돌아오지 못했던 곳은 한때 집으로 불리던 곳. 거실 흉내를 낸 공간에 있는 낡은 소파는 전혀 고급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단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여기에 발을 들이는 게 얼마만인지.


그녀의 옛 거처는 전혀 변하지 않은 채였다. 시이나에겐 자이언트 드래곤의 토벌 보상금을 사용해서 류셀, 이스와 함께 이사한 저택보다 역시 이곳이 집이라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크기야 훨씬 작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보금자리였으니까.


시이나는 자주 소파 건너편의 의자에 앉아서 자신이 뒹구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곤 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엄마.”


이미 떠나간 사람에게 하는 소리인지 단순한 혼잣말인지 모를 중얼거림.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어.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이런 나를 보고 뭐라고 해줄까. 어쩌면 위험한 일에 자진해서 말려들었다고 혼날지도 모르겠네.”


시이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그는... 류셀은... 분명 엄마가 줄곧 이야기했던 걸 현실로 만들어줄 거야. 그 앞길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따라가기로 정했으니까. 그는 냉혈한처럼 보일 때는 있어도 실은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인 걸. 이 시대에서 마족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걸 척척 해내는 능력자기도... 하고.”


근래 피로가 쌓인 탓인지 시이나의 말은 점점 느려졌다. 눈이 조금씩 감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른다. 계속 놓고 있지 않았던 긴장의 끈이 순간 풀려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푹 잘 수 있었던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소파에 몸을 뉘인 채로 자던 시이나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맞은편의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잘 주무셨나요.”

“이스...”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일어난 시이나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미행을 붙였다는 건 아닐 테고.”

“에이, 설마요. 소중한 친구인 시이나 씨를 감시하는 건 절대 하지 않아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이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류셀 씨도 어디 멀리 가신 모양이고, 왕성도 한산해서 오랜만에 이야기나 할까 했었는데 저택에 계시지 않길래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한 거야?”


이스가 그냥 웃는 걸 본 시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볼 일이 있었으면 깨워줬으면 좋았을 텐데. 자는 사람 얼굴 구경이라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하핫, 완전히 부정은 못하겠네요. 시이나 씨, 아주 편안한 표정을 하고 주무시고 계셨으니까 저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시이나가 거리를 거닐던 건 늦은 아침이었지만 밖에선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그만큼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웨어울프는 잠결에도 코와 귀가 예민하다. 불청객이 있다면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도 용수철처럼 일어나는 것이 본능인 것이다. 그럼에도 장시간 수면을 취했다는 건 이스의 존재는 자신에게 있어 전혀 위협이 아니라고 무의식중에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 승리를 아직 축하해드리지 못했네요, 시이나 씨. 제국군을 멋지게 몰아낸 것, 축하드려요.”

“별로.”


시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제이드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나 때문에 마족이 꽤나 죽었어. 그 흡혈귀 여자를 얕보고 있던 내 실책이야. 내가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 류셀이 도움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패배했을 거야 분명.”


그 말에는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이스도 그걸 알아차렸겠지.


“반성을 하는 건 좋은 자세지만 너무 얽매여서는 안돼요. 그게 위에 선 자의 책무라는 것이랍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포커페이스의 이스였지만 그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과거에 끌려 내려갈 거예요, 시이나 씨.”

“이스...?”


한번 웃더니 이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찾아온 건 굳이 잡담을 하러 온 건 아니에요. 시간이 된다면 잠시 저와 가주실 수 있을까요?”

“간다니... 어디로?”

“바르포르도.”


이스는 조금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시이나 씨가 사로잡은 제국군의 장군의 심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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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11 8 9쪽
99 적발 +1 20.01.05 297 9 9쪽
98 잠입 +1 19.12.29 314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31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21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10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21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6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5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41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7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9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9 9 10쪽
87 난투 +2 19.11.21 341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5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44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8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5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8 1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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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바르포르도 +1 19.10.20 394 1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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