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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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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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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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와 술

DUMMY

카니앗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우리들은 이미 하룻밤을 보낼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층은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술집인 반면, 중앙의 계단과 연결되어 있는 2층에는 방 두어 개에 간단하게 침대 따위의 가구가 준비되어있다.


원래는 엘프의 섬에서 숙박까지 할 만큼 길게 머무를 예정은 없었지만, 위그드라실의 씨앗을 만지고 한번 쓰러지기까지 했던 카니앗의 상태를 정확히 숙지하지 않고 섣불리 돌아갈 수는 없었다.


스키잔은 마왕이 묵을 만큼 사치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설이 불만인 것처럼 보였지만 단출하게 사는 하이엘프들 인만큼 많은 걸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기본적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이곳에서 작다고는 하나 숙박시설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봐야겠지. 역시 궁금해서 우리를 안내한 심부름꾼에게 물어보니, 이곳이 생긴 건 섬을 자주 떠나 대륙에서 임무를 맡아야하는 이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아무리 고독 속에 사는 하이엘프라 해도 외부동향을 지속적으로 감시할 필요는 있다나.


섬에는 임무 사이사이에 들어와 잠깐씩밖에 머무를 수 없는 그들은 배를 탈 수 있는 항구와 제일 가까운 이 술집을 선호했고, 다음 임무를 받아 다시 섬을 나서기 전까지 서로 어울리며 밤을 새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위층에 침대가 놓이고, 간단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일이다.


도착했을 때는 내가 묵는다는 점을 의식했는지 청소가 미리 깔끔하게 되어있었으며, 바깥 술이 귀하다는 섬에서 겨우 구해온 와인 병들이 열을 맞춰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나는 엘프들이 주로 마신다는 전통주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건 처음 먹어보는 맛이로군. 과실주는 과실주인데 무슨 과일인지 도통 모르겠어.”


레야에게 맡겨둔 카니앗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벌써 다섯 병을 비웠지만 다행히 전통주는 하이엘프가 매일같이 마시는 음료인 덕분에 찬장에도 수십 병은 보관되어 있었다.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는 몸이 아니었으면 이미 몇 번은 들락거렸겠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술을 잔뜩 찾은 나는 오랜만에 기분이 들떠있었다.


“장로에게 말해서 기념품으로 몇 병, 아니, 제조법을 전수 받아야 되겠는데 이건. 스키잔, 한잔 마셔보는 건 어떤가? 기대 이상의 맛이야.”


나는 묵묵히 내 뒤에서 서있던 정령을 불렀다. 처음에는 계속 자신이 술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내 술잔이나 채우기 위해 휘하에 둔 심복이 아니라며 사양한 뒤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기하고 있다.


“황공합니다, 마왕님. 기쁜 제안이긴 하나 저는 술이라는 걸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마실 수 있으련지...”


하긴 정령이 먹고 마시는 건 마나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나로만 이루어진 나와 마찬가지로 정령도 실제로 육신을 가졌다기 보다는 그 존재가 마법에 가까웠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식사도 물도 실은 필요 없는데 심심풀이로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내가 별나다는 거다.


스스로 납득하고 다음 병의 마개를 따려 팔을 뻗은 내게 작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만...”


궁금하긴 한 거냐.


잔 하나를 꺼내 스키잔에게 쥐어주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든 잔 가득, 좋은 냄새가 나는 술을 따른다.


“감사히 받겠나이다.”


나는 흥미롭게 술잔을 드는 스키잔을 바라보았다.


정령이 음주라니,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키잔도 나처럼 독에 내성이 있으니 쉽게 취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맛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스키잔은 조금 홀짝이나 싶더니 금세 잔을 비우고, 입맛을 한번 다시기까지 했다.


“오, 이건 꽤 진미군요.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달짝지근하면서 톡 쏘는 맛이 있습니다.”

“너도 모른다는 건 이 섬에서만 자라는 과일일수도 있겠군. 이런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맛있는 술을 발견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아, 한잔 더 할 텐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스키잔의 빈 잔을 채워주고, 내 잔에도 술을 따랐다.


레야 녀석,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술집으로 안내한 게 틀림없다. 긴가민가하며 섬에 찾아온 나지만, 이렇게 좋은 술을 대접받으면 마음이 누그러지기 마련이다.


“참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자야.”


스키잔이 처음 마왕군 참가를 권유했을 때 결정을 미룬 것도 나중에 나를 섬에 끌어들여 에델가르드 건으로 도움을 받으려는 레야의 속셈이 크게 작용했었을 것이다.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걸 전부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약삭빠른 여자가 앞장서서 내 편에 붙으려 한다는 건 좋게 받아들여야 하겠지.


“스키잔. 이렇게 마주 앉은 김에 하나 물어볼까 하는데.”


나는 잔을 찰랑이며 말했다.


“네 생각으로는 언제쯤 마왕군을 대대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보나? 대외적인 군사행동은 최대한 피해왔지만 결국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는 건 피할 수 없겠지.”

“외람되지만, 지금도 눈치 빠른 자들은 마왕님의 강림을 깨달았을 거라고 봅니다. 현명한 지도자가 있는 나라는 슬슬 인간연합군의 준비를 시작하겠지요.”

“제국, 말이로군.”

“바로 그렇습니다.”


스키잔의 말을 듣고 바로 생각난 건 제국의 레스트 바실루스 황제.


유리에라고 이름을 댄 어린 암살자는 내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고 마왕이라 불렀다. 선전포고문을 남기고 가기까지 했으니 제국의 사주를 받고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건 확실.


황제가 그 보고를 받았다면 아무리 유리에 개인의 의견이라 해도 내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야심차게 알트레아 왕국에 보낸 대군이 전멸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처음에 암살자를 보낸 것도 위험인물을 미리 배제하기 위해서겠지.


“확실히 그 황제의 감은 거슬리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제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어. 그 나라의 기반은 부수기 아까울 정도다.”


여러모로 알아본 결과, 제국은 단순히 크기만 큰 이웃나라는 아니었다. 여러 면에서 알트레아 왕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해 있었다. 그건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는 능력주의 관료제뿐만이 아니다.


졸병에게까지 사슬갑옷을 보급할 수 있는 자본, 내수는 물론이고 먼 타국과도 정기적인 거래를 이어온 대규모 시장, 그리고 그걸 전부 수용할 수 있는 경제. 권력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발전한 결과였으며, 내가 탐나는 건 바로 그 경제 체제였다.


“그건 왕국처럼 적당히 써먹고 버릴만한 시스템이 아니야. 손에 넣으면 분명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 이번 패전으로 우리와의 힘의 차이는 잘 알았을 테고, 그럼 어떻게 나올지.”

“저자세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장군까지 포로로 잡고 있으니 함부로 큰소리치지는 못하겠지요. 괘씸한 행동을 보인다면 상응하는 벌을 내리면 됩니다.”


최대전력 중 하나인 가름을 굳이 사절로 보낸 것도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조금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암살자 유리에. 타인의 영혼을 자신의 몸에 빙의시키는 방법으로 마법에도 무예에도 능한 소녀.


몇 번 검을 맞댄 것만으로 내가 마왕이라는 걸 바로 눈치 챘으며, 나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고 무사히 도망친 유일한 적이다.


단순한 암살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그 힘은 간과할 수 없다. 자신의 몸을 그릇으로 삼아 자유자재로 유령의 생전 능력을 써대는 그 영매는 인간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있다. 그 소녀가 제국에 이미 귀환해있다면 헬하운드라고 해도 고전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가름이 유리에와 싸울 것을 대비해 B 플랜도 준비해두긴 했지만 역시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바깥에서 날개가 한번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왔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가브리엘과 카니앗. 깨어난 카니앗을 이곳까지 데려오라는 임무를 완수한 가브리엘은 나를 한번 보더니 내 옆에 와서 섰다.


“수고했다, 가브리엘. 카니앗도 고생 많았군.”

“아닙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자신이 쓰러진 것을 신경 쓰고 있는지 카니앗은 답지 않게 우물거렸다.


“몸은 어떤가?”

“아, 염려하지 않으셔도 멀쩡합니다. 레야 장로의 말에 따르면 외상은 없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세계수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마력이 확실히 올라갔습니다.”

“오.”


기쁜 소식에 내가 감탄사를 냈다.


“이미 시험해본 거겠지. 어때, 만족할만한 성과는 있었나?”

“그게, 자세한 건 좀 더 시험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카니앗은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책 하나를 들어보였다.


“그건?”

“레야 장로에게서 받았는데, 여기 실린 마법으로 몇 급 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카니앗이 건넨 책을 대충 훑어보았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자는 없고, 전부 고대 룬으로 쓰여 있다.


“잠깐 읽어보니 상급 마법 위주로 영창 마법이 적혀있는 것 같습니다. 시험해볼거면 안전한 장소에서 하라고도 얘기하더군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준비해 준건가.”


우리의 환심을 살 생각인건지. 그 의도를 경계할 필요는 있겠지만 기껏 제공받은 마법서인만큼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씨앗의 성과는 내일 확인하는 걸로 하지.”


책을 카니앗에 되돌려주고 나는 다시 테이블에 놓인 술병으로 손을 향하다, 뭔가 생각나 옆의 의자를 두드려 보였다.


“그래. 기왕이니 한잔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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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11 8 9쪽
99 적발 +1 20.01.05 297 9 9쪽
98 잠입 +1 19.12.29 314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31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22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10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21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6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5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41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7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9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9 9 10쪽
87 난투 +2 19.11.21 341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5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44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8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5 11 11쪽
» 엘프와 술 +1 19.11.03 389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85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92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7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94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14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92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2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7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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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설원 +1 19.09.29 443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74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60 1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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