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붉게 물들었다
적어도 마력을 간파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정체를 밝혔지만, 드래곤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는 목숨을 건지려고 그런 소리냐? 추하다, 인간.”
“즉, 믿지 못하겠다고?”
“당연한 소리를!”
나를 겁주려는 듯 날카로운 꼬리가 내 바로 옆을 박살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 증명이 필요하다는 말이군.”
말보다는 행동이다.
검지를 들어 버스트를 쏘았다.
닿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파괴의 광선.
드래곤의 머리 바로 옆에 둥근 구멍이 생겼고, 그 틈으로 바깥 빛이 흘러들어왔다. 미처 반응할 시간도 없었겠지.
“지금 건 일부러 비껴 쏜 거다. 미천한 파충류 따위가.”
자이언트 드래곤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무척 동요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전해져왔다.
“서... 설마, 방금 건... 진짜 마왕? 아니 그럴 리 없다...!”
망설임이 커졌는지 드래곤이 다급하게 내게 브레스를 뿜었다.
이스에게 쓴 것에 비해 크기도 엄청났고 훨씬 뜨겁다. 물론 그 공격이 내게 닿는 일이 없었지만.
가만히 서서 브레스를 직격으로 받고도 상처 하나 없는 나를 보고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렀다.
가공할만한 속도로 날아오던 꼬리는 내 몸 바로 근처에서 강제로 멈춰졌다. 아까보다 몇 배나 위력을 늘린 공격이 어이없게 멈춰버리자 드래곤은 경악한다.
“어째서 닿지 않는 거냐?! 네놈, 무슨 잔꾀를 부리고 있나!”
어쩌면 이렇게도 멍청한 건지. 고유스킬의 존재까지 모른다.
“너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 그렇다면 참 미안하게 됐다.”
“...!”
말을 잇지 못하는 드래곤.
“아니?! 인간 주제에 그 공격을 막았다고?”
“어리석군. 공격을 막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니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것의 지배하에 놓인 이공간에는, 네 세계의 공격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리법칙, 마도 무엇 하나 공유하고 있지 않으니 같은 선상에서 간섭이 허용될 수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게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이 세상에는 없지.”
실력 차를 체감시켜줄 시간이 왔다.
내 손에는 순수 내 마력 소재인 검이 소환되었다.
그걸 휙, 하고 휘둘렀다.
나와 드래곤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드래곤의 앞발이 모조리 잘린 것이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내... 내 팔이...!”
“팔이 아니고 발이겠지. 짐승새끼가.”
붉은 피바다 속에서 내 눈이 붉은 빛을 담았다. 하급 마물에겐 무조건 통하는 절대 명령의 마안을 본 드래곤은 그게 뭔지는 아는 눈치였다.
나는 명령했다.
“엎드려라.”
드래곤은 살짝 주저하더니 엎드렸다.
그걸로 알았다. 저 복종의 표시가 내 마안 때문이 아니고 속으로 고민하고 내린 결과라는 걸. 마안이 통했다면 주저 따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상급 마물이 맞긴 한 건가. 아니 보자, 이렇게 약한데 상급이라고? 안과를 가봐야 되는 건가.”
“그... 큭, 그대가 마왕이 맞다면 인정하지... 나의 패배다...”
파충류의 말은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건 전장에서다.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돼야 패자라도 자칭할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싸움이 되지 않는다. 이 드래곤은 너무나도 약했다. 드래곤이라면 물리공격과 브레스 말고 마법 한두 가지라도 쓸 수 있을 텐데.
생각하고 있으니 내 탐지마법에 다른 마법의 사용이 포착됐다.
하급 전이 마법의 발동이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이번엔 드래곤의 왼쪽 날개가 없어졌다. 영창을 생략해서 위력은 살짝 경감됐지만 저딴 쓰레기의 신체 부위를 날려버리는 데는 충분한 무영창 버스트다.
“잔뜩 가오 잡더니 왜 먼저 가버리려고 하는데. 너는.”
내가 있는 곳까지 피가 쏟아졌지만 고유스킬을 아직 발동시켜두었으니 내가 천한 놈의 피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다.
나와 드래곤 사이에 있는 이세계의 공기.
그건 다른 세계에서 왔기에 이 세계에서 전력으로 거절당한다. 무적의 방패를 사이에 두고 드래곤이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런 아픔에 익숙하지 않은 건가? 그렇게 비명을 다 질러대고. 아픈가?”
노는 기분으로 드래곤에 천천히 다가가니 귀 아프게 지르던 비명을 멈추고 애원하는 목소리를 냈다.
“드, 들어주시오. 마왕이여. 거역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몰랐을 뿐이다...!”
내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이 천천히 다가오는 걸 느끼는지 드래곤의 말이 빨라졌다.
“이곳의 재화 전부를 바치지!”
“쓰레기가 앉아있던 돈은 필요 없다. 적어도 세탁이라도 해.”
“그럼 다, 당신의 산하에 들어가겠다!”
바로 앞까지 오자 목숨구걸은 거의 비명과 동급이 되어있었다. 짧던 말도 존대로 변모했다.
“처음부터 마왕, 마왕님인걸 알았다면 바로 들어갔습니다! 마왕님, 마족의 구세주시여! 제발 목숨만은...!”
비행 마법으로 날아오르니 드래곤의 얼굴에 내 손이 닿을 정도가 됐다.
이 얼마나 한심한 꼴인가.
그 거대한 몸을 가지고 신체 부위 몇 개 잘린 것으로 이 정도로 태도가 180도 바뀌다니.
“모험자들을 갖고 놀 때는 재미있었나? 골렘을 사용하는 드래곤이여.”
“마... 마왕님? 그 건은ㅡ”
“아니아니, 탓하려는 게 아냐. 하나하나 주제도 모르고 찾아오는 도전자들. 그걸 네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 개미를 짓밟는 기분으로 재미있었겠지. 그 마음은 너보다 잘 이해해. 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 너를 도덕적으로 비판할 자격은 없다.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참이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근데 그거 아나? 지금 나도 정말 재밌거든.”
“마왕님!”
드래곤이 뒷걸음질 치려 하지만 뒤는 벽. 갈 곳은 없다.
“그래봤자 인형놀이밖에 못하는 파충류. 너 같은 놈은 여기서 죽는다.”
“으윽ㅡ!”
내가 검지를 올리자 드래곤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십 초 정도 검지를 세운 채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바로 죽지 않은 것에 이상한 걸 느낀 드래곤이 고개를 다시 든다.
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특별히 봐주지. 지금은 부하가 필요하니까.”
그 한마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벌벌 떨던 드래곤은 아직도 절단부위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최대한 고개를 조아리려 했다.
“가, 감사합니다 마왕님... 이 관용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비행 마법을 해제하고 땅에 발을 디디자 드래곤이 자신의 생존을 확신하고 입가가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무례는 잊어주십시오. 인간 따위와 비교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ㅡ”
지금이 때다.
과실은 무르익었다.
나는 계속해서 감사의 말이 이어지려는 걸 끊었다.
“ㅡ라는 건 거짓말. 죽인다 했으면 죽이는 거다.”
“...예?”
“그거에 속았어? 병신새끼, 내가 너 같은 폐기물 부하가 필요할 거 같았나?”
나는 그 말을 들은 드래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잘 보인다. 파충류라 표정 보기가 참 힘들었는데.”
“사, 살려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 표정이 보고 싶었어.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그 찰나에 짓는 표정이 내게 있어 극상의 포상이다.”
“마, 마왕님ㅡ”
“아 그거야! 그래, 그 표정. 그 표정이 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웃어재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 흥은 바로 식었다.
나는 표정을 싹 바꾸며 검지를 들었다.
그 검지가 가리키는 곳은 드래곤의 머리.
나는 입에 익은 주문명을 외웠다.
“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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