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
“콜록, 성공... 한 건가?”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셔 기침을 한 시이나가 먼지가 자욱하게 낀 가도를 쳐다보았다. 류셀의 발명품의 위력은 몸소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일전에 화약의 원리를 대충이나마 들었기에 안전을 기한 것이 정답이었다. 타이밍을 재서 탄약을 한데 모은 수레를 지하 수로에 설치해두고 대피한다는 시이나의 작전을 가능하게 해준 건 작은 돌이다.
화약 수레에 넣어둔 것과 비슷한 크기의 돌이 하나 더, 시이나의 안주머니에 들어있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돌은 전에 모험자 협회에서 미리 구입해둔 게 남은 것으로, 단순한 일회성 마법이 담겨있을 뿐이었지만 자력으로는 마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시이나에겐 꽤 쓸 만한 도구였다. 이스와 대련했을 때도 방어막을 소환하는 용도로 썼었지.
발화의 마법이 부여된 돌이 남아있었던 건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자 완전히 무너져 지하가 훤히 드러난 가도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 붉은 살점들이 퍼져있는 걸로 보아 폭발에 직접 휘말린 병사들은 사망 확정이다.
“적 지휘관이 말려든 건 확실하지?”
“내가 직접 봤는 거얼.”
제이드의 옆에 딱 달라붙은 채 마타고트가 시이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저런 걸 정통으로 맞고 살아남을 수 있으면 그거야말로 대단한거라고오.”
지휘관을 제거한다면 우두머리를 잃은 제국군은 제대로 통제될 수 없다. 저 정도의 숫자를 부리는 자리에 아무나 앉혀놓을 수도 없을 노릇. 잘만 하면 적을 후퇴하게 할 수도 있었다.
“제국의 1익을 맡아온 흡혈귀도 생각보다 허무하게 가버리는 구만. 하긴 그것도 무리는ㅡ”
제이드가 말을 하다말고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이나가 그의 안색을 살피자 딱딱하게 굳은 시선이 파괴된 가도에 고정되어 있다.
무거운 석조 파편들 사이로 인영이 하나 일어섰다.
적의 생존자다.
군복에 잔뜩 매단 훈장들과 화려한 계급장을 보고 시이나도 표정이 굳었다. 옷이 먼지로 살짝 더러워졌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한 순간에 고깃덩이들로 변한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고개를 한번 흔들더니 바로 시이나가 있는 쪽을 본다.
그 얼음장 같은 눈빛에 시이나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귀. 네가 시이나 렌이구나?”
탕!
누가 제일 먼저 방아쇠를 당긴 건지는 모른다.
자신의 부하가 다 죽은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원 이해했겠지. 한시라도 빨리 죽이지 못하면 아주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모르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 세례를 맞은 바르포르도의 몸이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진다. 공격으로 인해 소멸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조금 떨어진 위치에 다시 나타난 바르포르도가 흥미롭다는 듯 아인들이 든 총기를 보았다.
“조심해! 흡혈귀의 마법이야!”
흡혈귀들이 저런 술수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시이나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표적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아인들의 몸이 여러 조각이 나서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열댓 명이 살해당했다.
“이런 곳에서 마족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걸. 그 군복, 왕국군의 것이 아니네. 새로 나라를 만들기라도 한 걸까.”
태연히 말하는 바르포르도의 손톱에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시이나는 리볼버를 장전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등에 맨 대검을 내렸다.
“그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은 더 이상 쓰지 않을 생각이야?”
권총이 다시 허리춤에 돌아가는 걸 본 바르포르도가 묻는다.
“일단 확인을 위해 물을게. 당신이 제국의 바르포르도 중장?”
시이나는 대검을 쥔 손에 힘을 넣으며 되물었다. 바르포르도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나머지 아인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 소년이 꾸린 비밀부대치고는 인선이 너무 꽝인데? 그 묘한 무기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실행이 너무 늦었어. 처음부터 나를 노렸어야지.”
“제이드.”
시이나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달려들어서 시간을 벌게. 그 사이에 너는 도망쳐.”
“뭐?”
웨어하이에나인 제이드를 포함해서 그 외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흡혈귀에게는 이기지 못한다. 그나마 실력에서 나은 셈인 시이나도 자신이 없었다. 웨어울프와 흡혈귀의 상성은 최악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홀로 돌격한다니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 그건 시이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대로면 전멸이야.”
류셀이 준비해준 무기는 자유자재로 몸을 변이시킬 수 있는 흡혈귀 상대로는 통하지 않는다. 검이나 활도 마찬가지.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마법 공격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에 능한 자는 여기에 아무도 없다.
“그래도ㅡ”
“됐으니까!”
제이드의 말을 끊은 시이나는 몸을 날려 대검을 바르포르도에게 꽂으며 외쳤다.
회피동작을 전혀 취하지 않고 있던 바르포르도의 몸은 역시 검은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다.
상대의 위치를 찾기도 전에 육감이 먼저 적의를 탐지하고, 대검이 주인의 목을 노린 공격을 막아냈다. 그런 와중에도 시이나는 자신의 말을 따라 아인들이 후퇴하고 있는 걸 확인했다.
발을 움직이지 않으려는 제이드를 마타고트가 억지로 잡아끄는 걸 본 시이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3분 안에 이쪽으로 증원이 올 거야.”
손톱에 마력을 담은 원거리 공격을 날려대면서도 바르포르도는 친구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뒤로 도망치고 있는 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시이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십의 부하를 데리고 내 전력을 이 정도로 깎은 건 칭찬해줄게. 하지만 이제 끝이란다. 왕국은 이미 끝났어.”
“그거... 당연한 거잖아.”
시이나는 웃어보였다.
“왕국은 한참 전에 무너졌어. 그리고 제국 너희도 이대로면 같은 길을 걸을 거야.”
“네 그 믿음은 역시 그 모험자 소년이 있기에 나오는 건가. 흥미로워.”
큼직한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바람에 시이나는 발을 헛디디는 일이 없도록 심혈을 기울여야했지만, 바르포르도는 매끄럽게 움직이며 그녀의 참격을 손쉽게 피한다.
전투 경험도, 전투 능력도 압도적으로 차이 났다.
“그 큰 걸 잘 휘둘러대고 있지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바르포르도는 아직까지도 뽑지 않았던 검에 손을 댔다.
순간, 시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방어 태세를 취했다.
쨍, 하고 뼈까지 울리는 타격음이 대검을 통해 전해져왔다.
대검의 전면에는 예리한 흠집이 생겨있다. 막는 게 한시라도 늦었다면 그걸로 끝이었을 것이다.
“너만... 너만 없으면!”
대검으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시이나. 너무나도 무방비한 모습에 바르포르도가 엷은 미소를 띠려는 순간이었다.
즈쾅.
발밑이 흔들리는 것에 바르포르도가 눈을 찌푸렸다. 시이나가 도약한 곳으로부터 균열이 크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길을 부수지 말아줄래. 군의 전진속도가 늦어져.”
그녀의 몸이 그림자로 바뀌고, 시이나의 대검은 역시 애꿎은 곳을 부수며 꽂혔다.
다시 몸을 원상태로 되돌린 바르포르도는 다시 자세를 잡고 있을 터인 시이나가 어째서인지 위에서 내리꽂던 속도 그대로 자신에게 쇄도하고 있는걸 알아차렸다.
다시 그림자로 몸을 변형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가까스로 검을 들어올려 대검과 정면으로 충돌한 바르포르도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
사뿐하게 착지는 했지만 바르포르도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져있었다.
아무리 웨어울프의 신체능력이라고 해도 저런 묘기를 부릴 수 있다는 건 그녀의 지식 범주 안에 없었다. 대검의 공격속도가 느리고 공격 후 빈틈이 많은 걸 염려한 시이나가 잠을 줄여가며 익힌 기술.
그 정체를 모르는 바르포르도는 경계해야할 것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 시이나는 실전에서 처음 선보이는 자신의 기술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을 순 없었다. 실체화를 풀었을 때의 흡혈귀를 아무리 베어봤자 허공을 베는 것밖에 안 된다.
시간은 촉박했다. 벌써부터 말들의 발굽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여자만 없어진다면 성공한다.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다.
『꽤 애먹고 있는 것 같네요, 렌.』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시이나가 균형을 잃을 뻔했다.
“누구...?!”
『놀랄 필요 없습니다. 제 이름은 카니앗. 류셀 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검에 일시적으로 마법을 부여할 테니 가만히 있어주세요.』
류셀의 이름을 들은 시이나는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대검에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휘두르는 것으로 부여마법이 발동됩니다. 당신의 신체능력이라면 이제 저 흡혈귀를 상대하는데 무리는 없겠죠. 그럼 마무리를 지어주세요.』
상대는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쪽의 변화를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았다. 시이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주머니에 하나 남은 돌을 꺼냈다. 머릿속의 목소리를 믿는다면 지금이 숨겨둔 수단을 쓸 때였다.
아까 쓴 것과는 달리 흰 빛을 내고 있는 돌을 힘껏 던지며 시이나는 눈을 감는다.
날아가는 도중에 발동한, 돌에 담겨있던 빛의 마법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바르포르도가 강렬한 빛에 굳어있는 것을 보며, 시이나는 있는 힘껏 대검을 휘둘렀다.
겁화와도 같은 거대한 불길이 바르포르도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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