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생존자
기분 나쁜 꿈을 꿨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런 몸을 갖고 나서도 꿈이란 걸 꿀 수 있었던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느 샌가 꿈의 내용은 잊혀져가고, 단순히 기분 나쁘다는 느낌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불쾌해진 마음을 다스리려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고개를 조아리는 건 알트레아 왕국 기사단의 단장. 아니, 그건 어제까지다.
“대관식은 잘 진행됐겠지. 국왕이 된 기분은 어떤가?”
“예, 블레이크 각하.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만 느낍니다.”
정직하게 대답하는 사내는 자신이 나, 류셀 블레이크의 마안에 홀려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의지를 잃게 되는 건 얼마나 불합리한 능력인가.
“이제 돌아가 보아도 좋다.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겠지.”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각하.”
단장의 칭호를 버리고 국왕이 된 사내가 떠나자 왼편에서 방울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이나 씨는 찾았어요.”
“알고 있다.”
이스는 언제나처럼 잘 정돈된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유독 기분이 나쁘신 것 같네요. 무슨 일 있었나요?”
“...”
“밤시중도 필요 없다 하시고. 류셀 씨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에요. 아차, 사람이 아니었죠...”
“그런가. 네 눈에는 아직 내가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쿠테타는 성공했지만 우리의 거처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나는 저택의 복도를 빠르게 내려가며 따라붙으려 하는 이스를 애써 무시했다.
“류셀 씨, 정말 괜찮은 건가요?”
“조금... 지쳤을 뿐이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눈이 휘둥그레진 이스를 놔두고 널찍한 거실로 들어갔다. 세 명의 기사들에 둘러싸여 양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왕족은 전원 처형하라고 했을 텐데.”
내가 앙칼지게 말하자 서둘러 따라온 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시이나 씨가 하도 시끄러워서...”
“기사단장, 아니 국왕은 뭐라 하지 않았던 건가?”
“류셀 씨가 제게 내린 명령이 시이나 씨의 확보라는 걸 듣고 나서는 한 발짝 물러났어요.”
이스에겐 마의 계약이, 현 국왕에겐 마안이 걸려있다. 역시 전자가 후자보다 우선순위를 가지는 건가.
그렇다는 말은 저 소녀에게 다가가기 전에 마주해야할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시이나.”
나를 가로막고 선 흑발의 아인. 웨어울프 소녀는 더 이상 후드로 그 귀를 가리고 있지 않았다.
“류셀.”
단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대화가 오갔을 뿐이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겼겠지. 시이나의 굳은 표정을 보면 아무리 나라도 알 수 있다.
“류셀은 저 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무슨 소리지.”
“아까 처형한 왕족들처럼... 그대로 처형할 생각이야?”
“그런가. 보고 있었던 건가.”
대관식 전에 열린 기존 왕족의 처형식에 시이나는 있었던 것이다. 보면 가슴에 상처가 남을 게 분명한데도 굳이 그걸 보러간 시이나의 의도를 읽지 못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체제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불안정하다. 네가 ‘저 아이’라고 부르는 자는 전 국왕의 손녀다. 왕위 계승권은 7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존재다.”
“...”
이번엔 시이나가 말이 없었다.
“실망했나? 내가 사실 네가 생각했던 자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해버렸나?”
나는 검은 코트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해버려. 이건 어느 세계든지 똑같군.”
“이야기를 이상한 데로 돌리지 말아줘, 류셀.”
가라앉은 시이나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원하는 대로. 그래서 ‘저 아이’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도 생각을 많이 해봤어. 기사단장 씨는 바로 처형할 생각이었지만 막는데도 고생했어. 그래서 생각해봤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연연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시이나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다.
“류셀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죄라고, 그렇게 생각해?”
정적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받아치려던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젠장.
젠장.
전부 다 그 꿈의 탓이다. 죽고 나서도 전생의 기억에 유린당하는 나는 얼마나 꼴사납나. 이럴 거면 왜 전생의 기억 유지를 택한 건지. 그 앞에 고통만이 있는 걸 알면서도 나는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미련을.
“원해서 태어나고 싶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마족도 마찬가지일터. 의지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그걸 죄라고 하는 건 불합리하겠지.”
“그럼...!”
시이나가 기대에 가득 차 눈을 크게 뜨는 걸 나는 노려보았다.
“하지만 세상은 불합리하다. 의지가 개입되지 않아도, 내가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해도 모든 게 결정되어 버린다. 네가 원하는 것처럼 세상이 아름다웠다면 그것도 볼만했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어둠으로 얼룩져있다. 의지가 없는 것이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결정지어 버린다. 마피아ㅡ는.”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찔려 새어나온 단어는 시이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마...피아?”
“아니. 말이 잘못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르는 감정. 모르는 개념. 잊혔어야 할 기억.
그런 것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앞으로 당분간 수면은 취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류...셀, 왜 그래? 마치...”
“닥쳐라.”
내게 가까이 다가가려던 시이나는 내 기세에 눌려 발을 멈췄다.
“의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저 왕족이 살고자 하는 의지. 네가 그걸 도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내게도 의지는 있다.”
밤보다 짙은 색의 검이 내 손에서 생겨난다.
“한번 시작한 일을 끝내지 않으면 반드시 불상사가 생긴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시이나. 인마 전쟁에서 마족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에 너는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잠깐, 류셀!”
왕국기사단은 내가 다가서자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블레이크 각하. 국왕의 명령으로 왕족 하나를 이곳에 구금시켜두고 있었습니다.”
분홍 머리칼의 여자가 하나. 동양인의 분위기가 나는 남자가 하나, 그리고 남은 하나는 기사단장과 똑 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나는 전원 왼쪽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며 왕녀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왕녀와 단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 물러나 있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저 둘은 내버려 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불신의 향기가 살짝 보였다. 마안을 건 것은 전 기사단장이자 현 국왕인 그 사내 하나뿐이니, 지금의 왕국기사단은 조금 어리둥절해하는 감이 있겠지.
국왕이 각하라고 부를 정도의 조력자. 드래곤을 혼자서 쓰러뜨린 소년. 내 정체가 무엇인지 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을 것이다.
“둘은 상관없다.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마라.”
하지만 상급자로부터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기사들은 일제히 명령을 받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내 손에 들린 검이 누구를 향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불안하게 검은 오오라를 내뿜는 것도 한몫했겠지.
“알리시아 폰 지오돌프. 고개를 들어라.”
자신의 친족이 전부 처형당한 충격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녀는 겨우 나와 눈을 마주쳤다. 9살이다. 겨우 9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겠지.
“내가 어째서 너를 살려두고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네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은 전부 시이나 덕분이다.”
옅은 미소를 띠고 벽에 기대있는 이스와 대조적으로 시이나는 왕녀와 나 사이의 의자 뒤에 서있었다.
“기분이 어떤가? 그토록 무시했던 마족에게 구해진 기분은?”
“그렇군요.”
왕녀가 꺼낸 첫마디가 그거다.
“역시 이번 사건에는 마족이 얽혀있던 것이군요. 저를 일부러 남긴 이유는 보다 큰 치욕을 주기 위해서인가요?”
9살 아이가 하는 말 치고는 당돌했다.
“아니야, 나는ㅡ”
“빠져있어라, 시이나. 둘이서 대화 중이다.”
나는 냅다 검을 휘둘렀다.
“류셀!”
왕녀의 목 바로 앞에 멈춰진 칠흑의 검이 불안정하게 빛났다.
“겁을 먹었군, 왕녀.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겁을 먹었어. 죽음이 무서운가?”
“흐.... 크...”
“산다는 것에 가치를 느끼고 있는 거겠지. 타인과의 관계. 명성. 재화. 그 외의 것들. 이런 것 따위에 고집하려는 이유는 뭔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그런 추상적인 것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나?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공포. 그걸 마족들은 매일같이 느끼고, 견디며 악착같이 살아왔다는 것을. 네 할아버지의 폭정 아래 아주 기본적인 권리까지 빼앗겨야 했던 그들의 기분을.”
나는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본 적 없겠지. 자신은 안전한 곳에서 구경하는 기분으로 크게 와 닿지도 않았겠지. 나는 말이지, 알리시아 폰 지오돌프. 그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방관했다는 것도 하나의 죄목이야. 왕녀의 목을 전시해두면 마족의 분노도 어느 정도 풀리겠지.”
“죽일 거면... 편하게 죽여주세요...”
“호오?”
“합리성을 따지는 당신이라면... 알겠죠...?”
“굳이 치욕을 보일 필요는 없다는 소리인가. 그건 합리적이다. 이해할 수 있어.”
검을 잡지 않는 손의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늑대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히극!”
“이 아이들에게 먹이로 던져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군.”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늑대들을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왕녀 너는 운반꾼의 역할을 맡아야겠다.”
“운반꾼...?”
나는 머리를 한차례 쓸어 넘기며 차갑게 대답했다.
“네가 짊어진 죄의 운반이다.”
- 작가의말
예리한 독자 분이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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