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실내 연못을 보며 잠시 누워있을 겸 거실로 향하던 나는 이스와 마주쳤다. 이스의 손에는 큼지막한 냄비가 들려있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별 것 아니야. 오늘도 아침 준비 중인가?”
“네, 저택 한 귀퉁이가 날아가긴 했지만 그걸로 끝나서 다행이에요. 수리에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방이야 많이 남아있고... 아, 아침 만드는 거 구경이라도 하실래요?”
해맑게 대답하는 이스의 눈에는 아무런 어두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이스가 앞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메이드를 매번 쓸 수는 없으니까요. 저희, 저번에 크게 벌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모험자 팀으로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돈을 벌 이유가 사라졌다. 국고의 모든 것이 내가 처분 가능한 자산이 된 지금은 말이지... 모험자라는 대외적인 직업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터다.”
“솔직히 조금 감동이네요, 류셀 씨가 제 걱정을 해주시고.”
이스는 주방에 들어서서 냄비를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요리와 차를 준비하는 건 제 취미예요. 집에서 그 정도는 하지 않으면 손이 심심해요.”
나는 이스가 냄비를 씻고 물을 담아 불에 올리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입을 열었다.
“제국이 선전포고를 했다.”
분주히 움직이던 이스의 손이 멈췄다.
“오늘, 말인가요?”
나는 대답 대신 품속의 선전포고문을 꺼냈다. 돌돌 말린 금색의 종이를 건네자 이스는 망설임 없이 그걸 받아들어 읽어 내려갔다.
“왕족을 죽이는 대죄를 범하면서까지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기강을 무너뜨린 지그문드 폰 알레인의 만행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제국과 알트레아 왕국 사이에 두텁게 맺어진 협약에 의거, 폭군을 몰아내고 왕국 국민들에게 따스한 빛을 다시 한 번 보여주리라... 이거, 조금 억지 같은 걸 봐서는 제국의 선전포고문이 맞네요. 어젯밤의 그 암살자가 놓고 갔던 건가요?”
“그래.”
“그런가요. 벌써...”
이스가 말을 흐리자 나는 눈썹을 올렸다.
“내가 너와 마의 계약을 나눴을 때 말했지. 명령이라면 친지도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때 너는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라며 동의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네,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내 말에 담긴 의미를 너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제국의 일부인 네가 제국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너는 그럼에도 내 협력을 구했다. 그건 제국이 절대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가?”
이스는 배시시 웃는다. 얇은 손가락으로 꼬는 흰 머리칼이 계속 풀렸다.
“처음 봤을 때도 그렇지만 류셀 씨는 정말 예리하시네요. 주어진 사실들을 가지고 추리하시는 걸 보니. 하지만 제 속마음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 올곧은 눈에 비탄도 후회도 없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너무 올곧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레 찔려 고개를 돌리게 하는 눈이었다. 이쪽에서 아무리 깊게 파고 들려해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눈.
“나는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스. 마의 계약이 걸려있는 이상 네게 명령만 한다면 언제든지 진실을 들을 수 있다. 지금은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요? 지금 류셀 씨가 그러지 못하는 건...”
이스가 한쪽 눈을 감아 윙크했다.
“저를 잃기 두려우신 것 아닌가요?”
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스의 말은 맞았던 것이다. 마의 계약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이스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나는 아마 이스에게 죽음을 선고하겠지. 확실하지 않은 도구는 빨리 쓰고 버리는 게 합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스의 유능함은 몇 번이고 봐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왕국이 기반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는 건 7할이 이스 덕이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민중을 살살 달래가면서도 위험요소를 하나씩 없애가는 수완에는 감탄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닐 거라고 생각할 정도다.
역시 이 시점에서 이스를 잃는 건 뼈아프다. 아마도, 그게 이유다.
“제국 신민의 안위와 제국의 이익을 누구보다 따지는 너다. 이번 전쟁에서 제국이 내리막길을 걸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내가 이 세계에 가져온 기술 앞에서는 아무리 네가 믿는 천하의 제국이라고 해도 저항할 수 없어.”
“이것, 말인가요.”
이스는 허리 뒤에서 은색 리볼버를 꺼냈다.
“납덩어리를 엄청난 속도로 날려 갑옷이든, 사람의 피부든 뭐든지 뚫어버리는 무서운 무기예요. 류셀 씨가 명하신 대로 이번 전쟁에서 아인들에게 맡길 복제품은 이미 준비해두었어요. 제아무리 제국군이라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상대로 이기기는 힘들겠죠. 전부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이스에게 자신의 감정을 왜곡시키라는 명령은 내린 적 없다.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는 감정은 전부 본인의 생각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류셀 씨라면 무의미한 살육은 벌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뜻밖의 말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이스가 작게 웃었다.
“류셀 씨는 본인이 악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를 꽉 물었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에요. 제 질문에 답해주세요.”
“...”
이스는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한숨을 폭 하고 쉬었다.
“류셀 씨. 세상에는 완벽한 선도, 악도 없어요. 그런데 자신이 한 행동들을 돌이켜보며 마치 자신이 완전한 악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곤란해져요.”
은발의 소녀는 말문이 막힌 나를 찬찬히 뜯어본다.
“류셀 씨는 단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뿐이에요. 그것마저 지금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지만요.”
“그렇다고 한들... 제국이 위험에 처한 것은 변함없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반박했다. 내가 한평생 믿어온 신념을 늘어놓는다.
“한번 덤빈 적은 철저히 짓밟는다. 불태우고 죽인다. 후환을 남겨두면 미래에 큰 위협이 되니까. 설사 덤비지 않은 적이라고 해도 위협이 될 가능성이 보이면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그게 바로 효율적인 조직의 운영이며 성공의 지름길이다.”
이스는 “음음, 맞는 말이네요.”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군이라 할지라도 조직 전체의 이익이 되면 가차 없이 쳐낸다. 버림말로 쓴다. 결과적으로 전체는 앞으로 나아가고 더 위에 설 수 있다. 틀린가, 이스?”
“틀리지 않아요. 제국도 비슷한 방침으로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쾅, 하고 찬장을 내리쳤다. 유일하게 익숙한 감정인 짜증이 범람하고 있었다.
“어째서 겉뿐인 말로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거냐. 제국은 자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해왔다. 내 적이다. 내 적이 된 이상 파멸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적에게 동정 따위 하지 않는다. 건물 하나하나까지 타서 무너지고 제국이란 나라는 없는 게 될 거다. 내게 거스른 자는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류셀 씨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단신으로 드래곤을 쓰러뜨리실 정도니까요.”
“모순이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그건 누구의 가치관인가요?”
돌발 질문에 당연히 내 가치관이다,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은 무겁게 닫혔다. 내 뼛속 깊숙이 새겨진 가르침의 기원을 물어온 것이다. 그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류셀 씨,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크게 와 닿지 않으실 거예요. 아직 자기 자신을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딱 한마디만 할게요.”
이스는 내 어깨에 양손을 얹고 귀에 속삭였다.
“제국은 이름이 없어요.”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이스가 내게서 떨어졌다.
“지금은 그 정도로 놔두는 건 어때요, 류셀 씨.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쟁이 코앞에 닥쳐온 지금 이런 철학 놀음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잖아요. 저는 류셀 씨의 충실한 노예로서 일하고, 싸울 거예요. 류셀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게 제 국가며, 친지라 할지라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다.”
“가까운 미래에 스스로 알게 되실 거예요.”
나는 쥐었던 주먹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 나쁜 녀석이군, 너는.”
“류셀 씨는 정말 기분 좋은 사람ㅡ아 실례, 마족인걸요. 밸런스를 맞추고 있을 뿐이에요. 저희 둘, 꽤 닮은 것 같지 않나요?”
“전혀.”
다시 식사 준비로 돌아간 이스였다.
“아, 류셀 씨. 이제 여러 가지로 바쁜 건 알지만 시이나 씨도 챙겨주세요.”
“시이나를?”
“요새 통 기운이 없어요.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죠? 어제 일까지 겹쳐서 지금 류셀 씨를 엄청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이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시이나 씨는 저랑은 많이 다르지만 류셀 씨를 엄청 많이 생각해주고 있으니까요. 풀죽어 있는 아군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도 위에 선 자의 책무라고요, 류셀 씨.”
방에 돌아오고 나서도 이스의 말은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젠장, 뭐냔 말이다. 그 녀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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