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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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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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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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6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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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다크엘프

DUMMY

“마왕님. 지명하신 대표를 불러왔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제9계층의 문 너머로 내 목소리를 들은 스키잔이 조심스레 육중한 돌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건 두 명의 마족.


길고 뾰족한 귀. 그리고 갈색 피부와 대조적으로 눈이 부시게 흰 머리칼을 가진 남녀다.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린 쪽은 메고 온 활과 퀴버를 동굴 벽에 가지런히 세워두었지만, 부모뻘 되어 보이는 남자는 굳어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 되면 스키잔의 눈총이 따가울 텐데도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다크엘프의 대표, 에론 이그ㆍ시 피아와 그 딸,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입니다.”


말이 없는 에론을 대신해 소개를 마친 스키잔은 이번엔 제대로 정령답게 흐르는 것처럼 미끄러져와 내가 앉은 왕좌 옆에 섰다.


마왕군의 집결지를 광맥지대로 옮긴지 어연 한 달.


엄청난 크기의 동굴에 임시로 만들어진 지휘통제실은 아직 가구도 별로 없이 삭막했다.


아니, 삭막하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찬일 것이다.


파충류가 모으고 있었던 재보를 다른 곳에 치우고, 사방에 남아있었던 핏자국은 스키잔이 온힘을 기울여 지우긴 했지만 단지 그것뿐으로, 도저히 왕국의 알현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두컴컴하고 살짝 피비린내가 남아있는 이곳은 아무 생각 없이 본다면 마치 끔찍한 악몽의 장면을 재현한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서일까, 나름 200의 다크엘프를 다스리는 족장인 에론 이그ㆍ시 피아는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다.


“크흠. 어전입니다. 부름을 받았으면 이름을 대십시오.”


겁먹은 족장을 보며 왕좌의 팔 받침대를 두드리고 있자 스키잔이 헛기침을 살짝 하고 재촉의 말을 꺼냈다.


세게 맞은 것처럼 에론이 멈칫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이렇게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 마왕이시여. 이번에 정식으로 마왕군에 합류하게 된 바, 바이만 사ㅡ산맥지대 다크엘프를 통솔하는 에론 이그ㆍ시 피아라 합니다. 이쪽은 제, 제 딸인ㅡ”


“카니앗입니다.”


이전에도 본 적 있는 포니테일의 다크엘프 소녀. 당돌하게 에론의 더듬거리는 말을 끊어버렸다. 잔뜩 경직돼서 겨우겨우 말하고 있는 자기 아버지가 매우 한심하다는 속내가 조금 묻어나오는 건 내 기분 탓이 아니다.


“스키잔. 저 둘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역시 그건가? 왕에 대한 예의 말이다.”


“그렇습니다, 마왕님. 보통은 허가가 떨어지기 전까지 함부로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똑같은 촌극을 매번 반복하라는 건가...”


이곳에 처음 마왕군을 전이시켰을 때, 불경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던 게 조금 후회스러웠다. 내 명이 있어야 고개를 들 수 있다니, 왕좌의 게임도 아니고 조금 과장스럽다.


아시아의 나라에서는 그런 예의범절이 일반 가정에서도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들었지만, 역시 익숙하지 않은 건 할 게 안 된다.

인사야 눈치껏 잘 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나하나 할 때마다 내 허가가 필요하면 그건 내가 귀찮다.


“스키잔. 무슨 중요한 행사가 있는 게 아니면 무릎 꿇는 건 생략하도록 하지. 아무리 내 앞이라고 해도 서서 목례하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나는 다크엘프를 불러놓은 걸 제쳐두고, 보다 우선도가 높은 이야기를 꺼냈다.


“서서... 목례 말씀이십니까?”


바람의 정령의 푸른 눈방울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려울 것 없다. 뒤로 열중쉬어를 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면 돼. 이렇게ㅡ말이지.”


대뜸 왕좌에서 일어난 나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익숙한 인사법을 보여주었다. 전생의 부하들이 내게 하던 걸 떠올리며.


“아, 펜리르와 헬하운드가 곧잘 하는 인사법 말씀이십니까. 그 둘에게 조언을 구하면 되겠군요.”


“그래, 가름은 몰라도 린이라면 성실하게 가르쳐주겠지. 효율성과 거리가 먼 건 하나씩 고쳐나가자고 얘기했었지? 아무리 겉치레를 화려하게 해봤자 중요한 건 알맹이인 것이다.”


스키잔이 적당히 추켜세우는 걸 흡족해하며 나는 다시 왕좌에 앉고,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2인조를 보았다.


“이상하군. 방금 이쪽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던 건가?”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에론 이그ㆍ시 피아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대답을, 지금 해야 될 행동을 고민하고 있을 그 몸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다시 질문을 반복했다.


“들리지 않았던 건가?”


또 불편한 정적이다. 족장의 대답을 기다리는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또박, 또박.


왕좌에서 일어나 상대를 향해 걸어간다.


걸음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족장은 점점 작아져보였다.


“들리지. 않았던 건가?”


내가 속삭이는 것처럼 말하는 게 들릴 정도의 거리다.


“죄... 죄송합니다... 마왕님... 저는ㅡ”


여전히 느린 대답이다. 강제로 고개를 잡아 내 얼굴을 보게 하니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가 여실하게 보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나?”


“마, 마왕님ㅡ”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 거야.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고 있는 기분이거든. 마지막으로 묻지. 내 말이 들리지 않았던 건가?”


“아버지 대신 발언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왕님.”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가 일어서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하자 무뚝뚝한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도 이렇게 가까이서 마왕을 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제가 족장 대리로서 아버지 대신 말씀을 들어도 괜찮겠지요?”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기를 30초.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잡고 있던 족장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좋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는 족장을 카니앗이 받쳐주었다.


이쪽은 오자마자 서리거인을 날려버린 걸 비롯해 지난 한 달간의 전적이 있다. 조금만 더 있었어도 죽였을지도 몰랐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생각하고 있겠지.


“마왕님, 에론 이그ㆍ시 피아는 관대한 처우를 부탁드립니다. 옛날에는 저렇게 줏대가 없는 남자가 아니었습니다만...”


“아, 그래. 생각났다. 마왕님, 마왕님 하는 호칭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이 많은 인원에게 하루 종일 그렇게 불리자니 손발이 다 움츠러들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스키잔?”


“예? 아, 예... 그렇다고 사료됩니다. 바로 지침을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는 스키잔을 멈춰 세웠다.


“잠깐, 그렇다고 아예 호칭을 빼버리면 불편하잖아. 저번에 얘기한대로 보스는 어떤가?”


“아아... 보스, 말씀이십니까?”


“뭐 그건 린한테 물어보도록. 나중이라도 상관없다, 스키잔. 군복의 이야기도 정리한 후에 전달하지.”


나는 목을 가다듬고 족장 대리를 자처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슬슬 본 안건이다.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내가 너희를 부른 건 군의 통솔 체계와 현 상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나는 눈을 감고 고뇌하는 얼굴을 만들었다.


“계속해서 인원을 받아들이고 있다지만 지금도 마왕군의 수는 2천을 넘지 못한다. 아무리 좋게 봐도 계속해서 떼로 몰려들 인족의 군대와 싸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단순히 숫자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말이야. 카니앗, 그나마 물자를 모으고 있는 다크엘프 마저 식량조달이 어려운 사정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반쯤 기절한 족장을 바닥에 뉘인 카니앗이 금색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광맥지대는 식량을 수급하기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애초에 마족은 먹는 게 각자 달라서 저희 다크엘프에게 충분한 식량이 있다고 해도 천명의 병사를 수용하는 건 무리겠죠.”


“부가설명을.”


“저희는 주로 소동물을 사냥해 잡거나 채집한 것을 요리해서 먹습니다. 바이만 산에서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하지만 하이오크나 플래시이터 같은 종족은 짐승의 날고기밖에 먹지 않고, 본래 늪지에 서식하는 바이드의 경우 생선이 주식입니다. 언데드의 경우 인간의 썩은 고기밖에 먹지 않습니다.”


카니앗은 술술 말했다.


“이때까지 마왕군이라는 개념은 있었으나, 이렇게 통합해서 체계를 잡으려는 시도는 처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탄 발언.


“이렇게 볼 수 있겠지요. 이때까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던 데는 전부 이유가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직설적인 말에 스키잔이 멍을 때렸다. 마왕에게 이 정도로 말하는 마족은 처음 본 것이겠지. 나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사족이 섞여있군. 나는 사실관계를 물었지, 네 의견을 물은 적은 없다만.”


내가 ‘웃으며’ 물었다.


“말하고 싶은 게 뭔가?”


분명 내 말에는 살기가 묻어났겠지.

내가 카니앗에게 지은 웃음은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마왕님...”


스키잔마저 긴장한 채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정령에게는 잘 보이는 것이다. 범람하려고 하는 기분 나쁜 색의 마력이.


“마왕께서 마왕군의 편성을 계속해서 추진하신다면, 의 이야기입니다.”


검은색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다크엘프 소녀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직 저희에겐 알리지 않은 계획이 있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숨기시는 겁니까?”


“무례합니다!”


광풍이 일었다. 단단한 돌바닥이 두부처럼 찢기고 바람소리가 귀를 찌른다.


호통을 친 스키잔은 오른팔을 카니앗에게 향한 채로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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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선전포고 +3 19.05.22 956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75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43 23 8쪽
» 다크엘프 +2 19.05.16 1,022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15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74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41 24 9쪽
34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68 29 10쪽
33 죄의 운반 +2 19.05.05 1,208 2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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