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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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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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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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운반

DUMMY

그곳은 이름이 없다.


다른 나라들이 흔히 그렇듯 나라를 창시한 사람의 성을 앞에 붙이지도 않고, 단순히 정치형태를 따서 붙여진 명칭이 있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이 헷갈릴 일은 없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이런 특이한 정치형태는 그 나라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속한 나라인데 이름이 없다는 건 좀 어떨까 싶지만, 이름의 부재는 국가를 이루는 가치관과도 일맥상통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몇 번째의 황제였을까.

그 때는 터무니없게 들리고 지금도 많은 곳에서 마찬가지인 그 정책을 처음 입에 담은 건.


출신도 부도 보지 않는다.


계급제가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그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개인의 능력.

빈민가 출신이어도, 한술 더 떠 마족이어도 능력만 있다면 국가 요직에도 채용한다. 반대로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집안이어도 좌천되거나 해고되어 버린다. 이런 정책을 실행할 수 있기까지 많은 시간과 피가 흘렀다.


물론 이런 걸로도 비리를 원천 차단할 수는 없겠지. 사람이 모이고 연을 쌓는다는 건 그 목표가 아무리 순수해도 곧 비위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걸 뜻했다.


그래도 권력의 물이 완전히 고여 썩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라의 존엄을 제일 크게 위협하는 건 쳐들어오는 외적이 아닌 썩은 내부 권력이었으니까.


천년이 흐르도록 강대국의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 덕이다.


모 이웃나라와는 전혀 다른 이 정책 덕분에 귀족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집권체제가 확실하니 머리 큰 귀족들도 이제와선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제아무리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이라 해도 개인이 사병을 거느리는 건 금지되어 있다.


반면에 국가가 가진 힘은 강대했다. 수뇌부가 내린 결정이면 하루아침에 사람이 실종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지고, 아무도 그걸 감히 시위하지 못한다.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걸 실천할 능력이 없으니 국가 권력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건 불가능했다. 말도 가려서 해야 할 지경이다.


말을 잘못하면 성난 민중으로부터 화형을 당하든지, 높은 확률로 그러기 전에 정보부 요원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해가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지하실에서 있는 고문은 다 받고 정보를 털어놓은 후에 사형 당한다.


수뇌부와 그것을 통솔하는 남자의 힘은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능력제를 실시한 덕분에 계급제의 유지와 방대한 영토를 자랑하면서도 대중과 기득권 모두로부터 큰 반항을 일으키지 않은 이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제국’이라고 불렀다.



제국의 52대 황제, 레스트 바실루스는 밀정이 가져다준 내용을 심각한 얼굴로 들었다.


“아직 진위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왕족이 전부 광장에서 사형되고, 죽은 국왕과 친분이 있었던 귀족들까지 끌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왕위를 이은 건 왕국기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던 지그문드 폰 알레인 단장입니다. 황제도 아실 테지만 단장과 국왕의 사이는 매우 가까웠다고 합니다만...”


바실루스 황제는 부하의 말이 한마디 끝날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좁은 집무실이 더 좁게 느껴질 정도의 소식이었다. 왕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아직 국민은 알지 못한다. 이런 내용을 큰 알현실에서 보고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 당연했지만 문제가 하나 없어졌다 싶었더니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 것 같아 골치 아팠던 것이다.


“황제. 담배는 끊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밀정이 급히 휘갈겨 쓴 종이를 잘도 읽고 있던 20대 여성이 눈을 찌푸렸다. 도저히 황제에게 보여도 될 표정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바실루스 황제는 시가에 불을 붙이려던 자신의 손을 내렸다.


“레이아. 아무리 둘만 있다고 해도 일단 나 황제라고?”

“둘만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레스트.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의 유해함은 저번에 제국대학 연구자들이 실시한 실험에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정말이지 귀염성이라곤 없는 여동생이야...”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제?”

“아니, 아무것도. 보고를 마저 들어볼까.”


조금 불만이라는 얼굴을 한 레이아 바실루스는 탐탁지 않다는 듯 고개를 한번 젓더니 편지를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왕국기사단에 의한 쿠테타라고 보는 게 제일 적합합니다만, 기사단 말고도 조력자가 다수 있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기사단에 향한 평이 꽤 박하네.”

“검을 휘두를 줄만 아는 놈들이니까요.”


바실루스 황제는 레이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왕국기사단이 좀 더 제대로 된 놈들이었다면 옛날 옛적에 폭정 지오돌프의 목을 땄을 것이다.


“그 조력자는 누구일까. 짚이는 곳은?”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황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제일 밑의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보였다.


“레이아. 얼마 전에 이 소식을 들고 온 건 너였지?”


갑자기 바뀐 주제에 눈을 가늘게 뜨던 레이아 바실루스는 그러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한다.


“광맥의 자이언트 드래곤 토벌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 보면 단 셋이서 드래곤을 토벌했다고 나와 있는데... 뭐, 한 명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두 명의 이름이 신경 쓰여. 어디보자, 류셀? 이라는 인족 마법사와 시이나 렌이라는 웨어울프라고 주석이 붙어있군.”

“그 아이를 다시 불러들일까요?”

“아니. 그녀는 잘해주고 있어. 평소에 말하던 건 단순히 호기롭게 한 소리가 아니라는 거야. 괜한 행동을 했다가 그 아이가 하고 있을 작전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지.”


황제는 불을 붙이지 못한 시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커튼으로 가리고 있었던 창을 열어젖혔다. 날씨가 흐렸다. 금방이라도 비, 아니 태풍이 올 것처럼 불길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실루스 황제는 말을 흐렸다.


“문제는 지금 그게 아니야. 나는 이 마법사와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이름만 들었을 뿐이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제...?”

“아직 풋내기인 둘을 데리고서 일방적으로 드래곤을 쳤다.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아. 웨어울프와 인족 하나 가지고는 답이 없는 상대를 두고서 말이야. 정말 셋이서 자이언트 드래곤을 퇴치했다는 건 사실이겠지?”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국이 그토록 혐오하는 마족을 영웅으로 떠받들 리 없습니다.”

“위험하군, 위험해. 내가 너무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좋으련만.”

“...”


황제가 집무실을 나서기 전 중얼거린 물음은 레이아 바실루스의 머리에도 한동안 맴돌았다.

“그 류셀이라는 마법사. 정말 인족인가?”


작은 몸은 등에 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짐의 무게는 어깨를 짓누르고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니, 실제로 몇 번이나 쓰러졌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의 정체에 대한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울부짖은 적도 있다.


눈은 이미 힘을 잃었다. 정신은 미쳐가려고 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월요일인지 금요일인지. 3월인지 11월인지.

자신이 지금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깨어있는 건지조차 모르게 되어버렸다.


시간의 감각이 애매해지고, 현실이 뒤틀려간다.

처음에는 있었지만 이제는 배고픔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무척 야위어있다는 것쯤은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짐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곳이 어딘지도 잊어버린 채, 오로지 그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집념만을 가진 채 소녀는 걸었다.


“잠깐, 꼬마야. 여기부터는 제국령이야.”


그게 환청이 아니라는 건 무언가에 부딪혀서 쓰러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낯선 아저씨의 투박한 손이 자신을 부드럽게 일으켜주고 나서야 알리시아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깨달았다.


와본 적은 딱 한 번 있다. 제국의 국경으로 통하는 관문소다. 아저씨가 입고 있는 건 제국의 군복이다.


“부모님은 어디에 있니? 지금은 왕국령으로부터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어서 허가증이 필요한데...”


여느 때라면 당장 피할 생각부터 하겠지만 알리시아의 눈에는 눈물부터 핑 돌았다.

도착한 것이다, 자신은.


“꼬, 꼬마야 괜찮니?”


비틀거리는 알리시아의 몸을 받쳐주려던 제국 군인은 그녀가 멘 짐이 이상하게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왠진 모르겠지만 고약한 냄새가 그 짐으로부터 나고 있었다. 밑은 검붉게 얼룩져있다. 저건 마치ㅡ


“전... 알트레아 왕국의 제7왕위 계승권을 가진 알리시아 폰 지오돌프입니다.”


그의 딸보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한층 더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눈을 크게 뜬 제국군에게 알리시아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 호소한 것이다.


“부탁입니다... 왕국을... 구해주세요...”


그날,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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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대(對)인간병기 +1 19.06.01 808 17 11쪽
44 전쟁의 피스 +1 19.05.30 817 17 11쪽
43 밤하늘 +1 19.05.26 878 21 10쪽
42 신화의 괴물 +2 19.05.25 914 20 11쪽
41 선전포고 +3 19.05.22 956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75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43 23 8쪽
38 다크엘프 +2 19.05.16 1,023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15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74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41 24 9쪽
34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68 29 10쪽
» 죄의 운반 +2 19.05.05 1,209 29 9쪽
32 유일한 생존자 +7 19.04.25 1,233 3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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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모두 죽었다 +4 19.03.25 1,448 35 8쪽
29 피의 연회가 열렸다 +3 19.03.24 1,427 38 10쪽
28 명령을 내리다 +4 19.03.23 1,404 35 8쪽
27 연회는 시작되려고 했다 +2 19.03.23 1,461 37 9쪽
26 선배의 텃세는 통하지 않는다 +2 19.03.22 1,418 3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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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제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19.03.20 1,477 3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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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두 붉게 물들었다 +4 19.03.18 1,539 37 8쪽
21 던전의 주인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 19.03.17 1,545 37 8쪽
20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만나다 +3 19.03.16 1,577 3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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