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33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3.11.07 20:56
조회
3,088
추천
32
글자
24쪽

해의 그림자 142

DUMMY

다음날, 숙종은 아침 일찍부터 편전 안에 들어서는 순간이 발밑이 꼭 다람쥐 쳇바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선지, 어좌에 앉아서 어탑 아래에 엎드린 신료들을 내려다보니, 꼭 도토리에 사모를 씌워놓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숙종은 두손에 상소를 한장 펼쳐들고, 이하진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꿇어엎드린 남용익과 강수학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조판서 남용익."

"예 전하."

"어제 저녁에 정원에서 여지노정기를 검토한 결과, 채하징의 배소에 문제가 있다 보고한 일을 아는가?"

"문제라 하오면..."


어리둥절한 남용익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숙종은 천천히 말하였다.


"채하징의 강계가 이동형의 경원보다 무려 아흐레나 덜 걸리더군."

"아흐레요?"


남용익은 놀란 얼굴로 도승지를 쳐다보았다. 도승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내리뜬 눈이 비웃었다. 남용익은 등골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변명했다.


"하오나 극변의 배소가 모두 겹쳐서, 부득이 강계로 정하였사옵니다."

"그래?"

"예 전하. 더는 보낼 곳이..."

"헌데 참의 강수학은 경이 채하징의 배소를 임의로 편의를 봐주었을 뿐 자신은 무관하다 상소했다. 여기 이렇게."


숙종은 형조참의 강수학의 친필로 올라온 서계를 펼쳐 남용익의 눈앞에 펼쳐보였다.


"예에?"


멍청한 얼굴이 되어버린 남용익의 표정을 확인하고, 숙종은 도승지에게 계서를 건네었다. 도승지가 걸어내려가서 남용익에게 계서를 전하였다.


떨리는 손으로 계서를 펼쳐든 남용익은 전날 날짜를 확인하고,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강수학이 먼저 이 계서와 함께 여지노정기를 승정원에 건네었고, 승정원은 왕에게 자신들이 알아낸 척 왕에게 고한 것이 분명했다.


"..."


남용익은 기가 차서 이하진의 어깨너머로 참의 강수학을 쏘아보았다. 그리 험상궂게 경고를 하더니, 이리 뒷통수를 칠 줄이야.


"모두 동배가 되어 부득이 강계로 정했다는 경의 대답은 잘 들었다. 알았으니 이만들 물러가라."

"..."


왕의 부드러운 옥음을 듣고도 남용익은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그는 빠드득 이를 갈며 강수학을 노려보았다. 저자로선 열네살이나 어린 상관을 모시려니 눈꼴이 시었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대놓고 도끼질이라니.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숙종은 그날 저녁 조반을 마치고 곧바로 두광을 데리고 소각으로 향하였다. 이제는 다 떠나고 없고, 노쇠한 송이영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눈이 침침해진 송이영은 성혈탁본을 그리는 데엔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결국 소각은 이번에도 썰렁할 터였다.


소각 앞에 이르러 숙종은 한숨을 머금고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미 시들어버린 불두화 덤불을 지나는 순간 숙종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니앵니앵.


어디서 또 고양이가 우는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고양이의 형체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고양이는 없었다. 오히려 거무튀튀한 매지구름만 눈에 들어왔다.


"비가 올 것 같구나."

"예?"


두광은 두눈을 멀뚱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채 굳지 않은 두부같은 먹구름이 금세라도 부서져 내릴 듯하였다.


그때 불두화 졸가리 틈새로 희푸른 빛이 스쳐가는가 싶더니 안에서 흰 손이 창살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창살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전하?"

"중궁?"


숙종은 기가 막혀 진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희고 깨끗하던 얼굴이 콧잔등이며 귀밑이며 검은 먹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왜 거기 있소?"

"고양이 울음이..분명 저쪽..."

"고양이는 그만 찾고 대답이나 하시오. 왜 거기 있소?"

"전하를 기다렸사옵니다."

"나를?"

"예 전하. 가끔 불두화 꽃잎이 전하의 옷자락에 묻어나서...여기서 어느 궁녀와 밀회를 즐기시나 했사옵니다."

"아쉽게도 궁녀가 아니라 사내들이었소."

"그러게 요새는 심심하신 듯 하여 신첩이 왔사옵니다."

"흐음..."


숙종은 진홍의 먹물투성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얼굴은 이민철이 성혈탁본을 베끼느라 씨름할 때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창살을 잡은 손가락 틈새에도 시꺼멓게 먹물이 번져 있었다.


"뭐요 그건? 손가락에 옥가락지도 아니고 웬 먹가락지요?"

"먹가락지요?"

"대체 뭘 한 거요?"


그는 나머지 손에도 진홍이 무언가 기나긴 종이를 붙든 것이 눈에 들어와서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이 별의 꼬리처럼 늘어진 성혈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신첩의 손을 빌려드릴까 하여..."


숙종은 피식 웃었다. 이민철이 평소 그림 잘 그리는 사람 하나만 데려와 달라더니...등잔 밑이 어둡긴 하였다.


비밀문을 통해 소각 안으로 들어가서 진홍이 그린 성혈을 보니 더더욱 실감이 났다. 이민철이 한장에 세시진이나 허비하고도 망쳐서 자신을 탓하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수월하게 또 정밀하게 그려보이는 진홍의 솜씨가 마냥 신기했다.


숙종은 다시금 진홍의 가락지 없는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출산과 소산으로 줄곧 손가락이 퉁퉁 부어 가락지도 끼지 못하는 손이라더니. 이제는 붓기가 다소 빠진 느낌이었다.


그는 대뜸 소각에 여기저기 널린 대나무 붓두겁 세개를 줏어들어 자신의 가운뎃손가락과 진홍의 가운뎃손가락에 번갈아 끼워보았다. 그럭저럭 들어갔다.


"두광아!"

"예에?"


숙종은 문간에 선 두광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두광이 의아히 되묻고선 총총히 달려왔다.


"이걸 가늘게 자르거라. 십등분해서"

"예에? 이걸요?"

"어서어서!"


숙종이 두눈을 반짝이며 보채자, 두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품을 더듬어서 주홍빛 어피로 칼집을 씌운 단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탁탁 내리쳐서 붓두껍을 무우 채썰듯이 썰어내어 십등분을 해내었다.


진홍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맨날 허허, 실실 웃고 다니던 두광이조차 예사롭지 않은 칼솜씨의 소유자라니.


"너도 칼을 쓸 줄 알았더냐?"

"잘하진 못하옵니다."


두광이 자신의 매미관 밑 이마를 괜히 긁적이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답하였다. 진홍은 할 말을 잃은 채로 두광의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헌데 뭘 만드는 것이옵니까?"

"열개의 가락지."


붓두겁의 단면은 가락지처럼 가운데가 뚫려 손가락을 넣을 만하였다. 숙종은 만족스런 웃음을 입가에 띠고 손을 뻗어 집어들었다. 진홍이 멀뚱히 쳐다보는데, 숙종은 자신의 오른손 다섯손가락에 하나씩 끼우더니, 진홍의 왼손도 덥썩 붙들고 다짜고짜로 다섯손가락에 하나씩 끼워버렸다.


"전하?"

"이것으로 열가락지."


숙종이 모처럼 장난기가 동한 눈빛으로 진홍을 쳐다보았다. 진홍은 숙종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보곤, 숙종의 다섯손가락, 그리고 자신의 다섯손가락에 빽빽하게 끼워진 붓두껍 가락지를 내려다보며 시무룩히 답하였다.


"열가락지...신첩은 논개가 아니옵니다."

"논개?"


진홍이 눈을 흘겼지만 숙종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의 붓두껍 가락지 낀 손에 자신의 붓두껍 가락지 낀 손을 포개더니 와락 손깍지를 껴버렸다.


"어디, 손을 풀어보시오."


숙종은 사악하게 씨익 웃었다. 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도, 풀지도 못하는 열가락지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진홍이 인상을 쓰면서 깍지손을 풀어보려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앞으로 절대로 손에서 빼면 안되오."

"전하..."


숙종은 그저 진홍이 손을 빼려 용을 쓰는 것을 사악하게 즐길 뿐이었다. 심지어 안 부리던 앙탈까지 부리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두광은 한숨을 삼키면서 가만히 돌아섰다. 앙상한 불두화가지 사이로 촉촉한 먼지잼이 폴폴 흩날리는 풍경에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했다.



다음날 아침도, 편전 어좌에 앉아 도토리 같은 대신들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숙종은 그나마 어제와는 조금 다른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번에 그의 손에 잡힌 상소문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형조판서 남용익이었다.


"형조참의 강수학."

"예 전하."

"이번엔 남용익의 상소로군."

"무슨..."


강수학의 눈밑이 꿈틀했다. 이하진의 어깨너머 남용익의 뒷통수를 노려보는 눈매가 살아있는 것이, 그래도 전날 남용익 만큼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채하징의 배소를 협의할 때 하관인 강참의가 상관인 남용익을 괄시하고 겁박한데다가 모함까지 하였다는 내용이다. "


숙종이 강수학을 힐끗 쏘아보며 남용익의 상소를 들어보였다. 도승지가 숙종의 손에서 상소를 건네받아 남용익에게로 가져가 전달하는 장면에 편전 안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뭐야. 보복상소?"


상소 내용을 확인한 강수학이 고개를 쭉 빼고, 이하진의 어깨너머로 남용익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남용익도 뒤돌아보며 강수학을 마주 노려보았다.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두사람의 모습에 숙종으로선 꼭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뭔가? 어제는 강수학이 남용익을 상소로 욕하고, 오늘은 남용익이 강수학을 상소로 욕하고."

"..."

"하다하다, 이제는 편지가 아니라 상소로 싸우는가? 그럼 나는? 중간에서 그대들 싸우는 편지를 전달하는 천한 전인인가?"


서슬퍼런 숙종의 일갈에 강수학과 남용익이 황망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마가 땅에 닿나 싶을 정도였다.


"송구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남용익은 고개만 슬쩍 틀어서 강수학을 뒤돌아보며 눈이 빠져라 노려보았다. 강수학 역시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남용익을 쏘아보았다. 중간에서 이하진만 난처한 노릇이었다.


"경들 생각은 어떠한가?"


숙종이 편전 안에 질문을 던져놓자, 도승지가 기다렸다는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전하,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판서와 참의간의 불목不睦(반목)은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음)이옵니다. 둘다 추고하시옵소서!"

"추고하시옵소서!"

"추고하시옵소서!"


나머지 승지들까지도 입을 모아 아뢰었다.


추고?


숙종은 기가 차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참의 강수학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남용학은 얼굴이 벌개져서 뒤를 돌아보고 강수학을 쏘아보는데도 그 어깨너머로 강수학은 이미 각오하였는지 그저 차분히 두손을 모으고 엎드려선 고개를 조아리고 미동도 하지 않는 참이었다.


숙종은 참의 강수학의 두손을 쳐다보더니, 눈길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더 자세히 보려고 아예 왼쪽눈을 찡그리고 왕이 물끄러미 강수학의 두손을 지켜보자, 곁눈질로 왕의 반응을 살피던 승지들은 서로 얼굴을 의아히 마주보았다.


"강참의, 좀더 가까이 와보라."


숙종은 강수학에게 손짓하여 앞쪽으로 다가와 엎드리도록 하였다. 강수학은 의아하여 두눈을 깜빡이며 도승지와 허적의 눈치를 살폈다. 허적도 영문을 모른 탓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학이 엉거주춤 정2품 남용익 옆으로 다가와 부복했다.


"좀더."

"예 전하..."


계속해서 정1품인 민희와 귄대운 쪽으로 다가와 부복했다. 하지만 왕은 계속해서 손짓할 뿐이었다.


"좀더."

"예? 예에..."


강수학이 허적 옆으로 다가와 엎드렸는데도 왕은 눈을 찡그리며 계속하여 그 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좀더."

"하오나..."

"내 강참의의 손을 좀 보려는 것이다."

"주름투성이인 신의 손은 어이하여..."


강수학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왕이 책벌레라더니 눈이 그리 나쁜 건지. 뭐가 그리 안 보여서 자꾸 앞으로 끌어들이는 건지.


"잔말 말고 오라."

"예에 전하."


강수학이 자신의 두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쭈글쭈글한 손이었다. 마디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동글동글한 주름이 자글자글하였다. 이런 늙은 손을 무엇하러? 손에 먹물 조금 묻은 것 빼고는 남다를 것도 없었다.


강수학은 고개를 갸웃하며 도승지가 서 있는 지점까지 다가와 엎드렸다. 도승지도 어느덧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뚫어져라 강수학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딱히...손에 먹물 좀 묻었을 뿐이온데..."

"좀더 오라."


강수학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꾸 엎드려서 무릎꿇다시피하여 걷다보니 궁둥이가 뒤로 불룩하게 빠져서 뒤뚱뒤뚱 걷게 되는 참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왕이 시키는 일인데.


마침내 강수학이 도승지를 지나쳐 왕의 눈앞으로까지 기어왔다. 비로소 왕의 서안 앞에까지 이르자, 그는 얼핏 왕의 두눈에 살짝 떠오르는 비웃음을 보았다.


"두손을 서안에 올려보라."

"예..."


강수학이 머뭇머뭇 서안 위로 두손을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왕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습관처럼 두손을 맞잡아 깍지를 꼈다. 기다렸던듯이 왕의 두눈이 얄궂게 반짝였다.


"역시 경은 깍지끼는 습관이 있었군."

"네? 아...네..."

"이왕이면 열손가락에 열가락지를 끼지 그랬는가? 논개처럼 남용익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투신하려면."

"..."


나직하게 속삭이며 으르렁거리는 왕의 옥음에 강수학은 모골이 송연했다.


"전...하?"

"덕분에 또 다시 서인 한사람을 잃게 되었군. 이젠 데려다 쓸 서인도 없으니...이제 되었다 싶겠지? 허나 아직도 좀 남았거든.."


날선 음성은 강수학의 등골을 후벼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손의 깍지를 풀었다.


"..."

"왜, 누구누군지 궁금한가?"


왕의 옥음이 계속해서 가슴을 들쑤시자, 강수학은 이내 열손가락이 모조리 후들거려서 도로 엉거주춤 손깍지를 하고 말았다.


"신은 그저..."

"물러가라. 손깍지는 이제 소용없으니까 그만하고."

"..."


강수학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왕이 자신들의 수를 읽었다. 일부러 남용익을 도발하여 끌어내려는 술수였다. 하지만 방금 왕의 얘기로도 왕은 다음 형조판서도 서인을 앉힐 요량이었다.


"형조판서 남용익과 형조참의 강수학을 둘다 종중추고하라."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강수학의 등뒤로 왕의 옥음이 서슬퍼렇게 들려왔다. 순간 이담명과 허적의 입가에 여릿하게 비릿한 웃음이 스쳐갔다. 되었다. 이제는 남용익과 강수학 둘다 체차시키는 일만 남았다. 다음 형조판서는 남인으로...


이때 강수학이 허적의 곁을 스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적은 흠칫하여 강수학의 눈빛을 다시 한번 살폈다. 하지만 강수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열가락지?"


그날밤 허적은 강수학이 은밀히 인달방으로 찾아와서 고한 얘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강수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부랴부랴 편전을 나서더니 이제서야 찾아와서 토로했다.


"허튼 수작 말라는...경고가 아닌지요?"

"..."


허적은 두눈을 내리뜨고 강수학의 열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아침에 왕이 강수학을 붙들고 뜬금없이 손을 구경하던 일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래서, 그 한마디에 지레 겁을 먹고 어디 숨었다가 이제 나타난 건가?"

"아니 꼭 겁먹었다기보다는..."

"전하의 겁박이 무서워 한발 뒤로 뺐다가는 그 자리에 송시열의 떨거지들이 치고 들어올 걸세."


변명하는 강수학에게 허적은 차갑게 경고했다. 하지만 어르고 달래고...누구보다 노련하게 사람 다룰 줄 아는 허적이었다.


"..."

"내일 아침이면 승정원에서 자네와 남용익의 파직을 주청할 걸세."

"..."

"끼니 걱정은 말게. 내 약속은 지킬 걸세."

"아...예...믿습니다."


그제야 강수학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적은 집안에 문객들을 들이는 대신에 인달방 인근에 거주하게 하면서 파루가 울릴 무렵 노비들을 시켜 집집마다 돌면서 쌀 한자루씩 담너머로 던져주었다. 강수학 역시 이번 사건을 치르면서 이미 이삿짐을 싸두었다.


"이삿짐은 싸두었겠지?"

"예 대감. "

"자네도 내 이웃이 된 걸 환영하네."


허적이 피식 웃는 순간, 장지문 너머로 시원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채 앞에 흩뿌려지던 먼지잼이 점점 굵어지며 빗방울이 되고, 다시 빗줄을 내리긋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나 봅니다?"


강수학이 묻기 무섭게 허적은 툇간쪽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밤비가 주룩주룩 내리긋는 모습에 가슴 속 더러운 때가 모조리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헌데 함께 툇간 바깥을 내다보던 강수학이 고개를 흠칫했다.


"응?"

"왜 그러는가?"

"웬 여자비명이...?"


강수학은 말끝을 흐렸다. 환갑을 넘기긴 하였어도 가는귀가 아주 먹진 않았다. 분명히 여인의 비명이었다. 아마도 이댁 망나니 자제분의 소행이리라. 언제부터인지 이집에 드나들던 수십의 문객들이 발을 못 붙이고 집 근처로 나가 살기 시작했고, 허적은 그나마 예우로 숙식제공은 하였지만 한집안에 기거하게 하진 않았으니.


"요즘에도 문객을 안...받으시지요?"


강수학은 곁눈질로 허적을 쳐다보곤 살살 떠보듯이 물었다. 허적은 한순간 날카로워진 눈초리로 강수학을 쳐다보았다.


"왜, 자네가 식객 노릇 하려고?"


고상한 '문객'이란 명칭 대신 공격적인 '식객'이란 명칭을 쓰는 허적의 언사에 강수학은 움찔했다. 괜히 자신이 비명소리를 들은 티를 내었나 싶었다. 사헌부 감찰에 형조참의까지,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벼슬길이 이대로 막히거나 샛길로 빠지겠거니...불길한 예감이 뒷통수를 간지럽혔다.


"허면 이만..."

"가 보게나."


허적은 돌아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대꾸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좋게좋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당장 마음이 급하였다. 그렇게 강수학을 내보내고 그는 별채로 걸어갔다. 헌데 가까이 갈 수록 계집의 흐느낌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흐흐으흑!


허적은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아들을 부르지도 않고 바로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아버지...!"


허견은 한손엔 가위를 쥐고, 또 한손엔 계집의 저고리 앞섶을 붙잡고 방바닥을 뒹굴던 허견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네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치고..."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치던 허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들의 밑에 깔린 계집의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새 얻어터졌는지 눈밑이 시뻘겋고 시퍼렇게 변하긴 하였어도, 틀림없는 아들의 첩실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맺어준.


"넌 애랑이 아니냐?"

"아버님...흐윽..."


계집, 애랑이 허적을 보고 울먹였다. 허적은 숨이 턱 막혔다. 그 와중에도 아들 허견의 오른손에 들린 가위와, 나머지 왼손에 붙잡힌 애랑의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너...뭐하는 게냐?"


허적이 묻는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허견은 천연덕스레 가위를 놀려 애랑의 저고리 앞섶을 세모꼴로 잘라냈다.


"너, 너 지금..."

"접포蝶布(처첩을 내쫓을 때 이혼의 표식)요."


허견이 건들건들 답하였다. 허적은 순간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접포? 접포? 접포오?"

"네. 그 접포요. 나비접蝶, 옷포布."


허견은 아예 자랑스레 애랑의 찢어진 저고리 앞섶을 손가락으로 툭툭 찌르며 덧붙였다.


"나비모양, 확실하죠?"

"허...내 기껏...널 위해서 저 상당上黨(청주)까지 가서 양첩을 들여다 주었건만...한달도 안되어 벌써 내치겠다고?"


아비가 치를 떨며 묻는데도 아들은 마냥 천연덕스러웠다.


"지겨워서요. 딴년 좀 업어다 주세요."

"이..."


허적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는 한달도 지겹다고? 기가 차서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그런 허적을 비웃으며 허견은 목청을 돋워서 소리쳤다.


"여봐라! 황가야! 황가야!"


허견이 소리쳐 부르자 마름 황씨가 잽싸게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일로..."


황씨는 허적과 허견의 눈치를 동시에 보며 어정쩡히 물었다. 그러자 허견이 허적을 번들거리는 눈초리로 노려보며 말하였다.


"이 계집을 끌고나가 도성 밖 성황당 앞에 버려다 놓아라!"

"예예...에..."


늘상 있는 일인 것처럼, 이미 적응된 일인 것처럼, 마름 황씨가 습관적으로 답하다 말고 흠칫 놀라 허적의 눈치를 보았다. 허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노로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허견은 가위를 잘그락거리며 태평하게 짐을 지고 혼잣말했다.


"뭐...아무나 줏어가겠지."


허견이 건들건들 내뱉는 말에 첩은 기겁을 하여 바짓가랑이를 끌어안고 눈물로 호소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잖아."


그렇게 말하는 허견의 눈은 너무도 건조했다. 그간 살을 섞고, 또 서로를 탐하던 사이에, 고작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해버린 사실이 믿어지질 않아서, 계집은 두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이 여태 알던, 그 다정한 사내가 아니었다.


"나으리, 소첩을 버리지 마시어요."

"나도 널 버리기야 싫지. 근데 저기 계신 나으리 덕분에 처첩 거느리고 살기엔 빠듯하더라고."

"..."

"하나를 쥐려면 하나를 버려야지."

"나으리이...근데 왜 저예요? 네?"


첩이 애원조로 매달리는데도 허견은 다리를 확 걷어차서 난폭하게 떨궈내버렸다.


"아! 아아!"


첩이 고통에 겨워 끙끙대는 모습도 허견에겐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 잔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아비 허적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치댈 뿐이었다.


"그만 좀! 그만 좀 하거라!"

"뭘 그만해요?"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다. 왜 자꾸..."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허적은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움찔해서 돌아보았다. 곱디 고운 자신의 늦둥이딸이 눈앞에 있었다. 어느덧 혼기가 찼지만 비첩의 소생이라 번듯한 가문 정실로는 시집보낼 수도 없는 아이였다. 그나마 자신의 위세로 재상가 첩실이나 몰락한 양반가의 정실로 들여보내줄 수는 있겠지 싶었다.


"애기씨, 도와주세요! 이이가 절...저 이대로 쫓겨날 순 없어요!"


애랑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윤이는 입모양으로 '또?' 하고 되물었다. 벌써 첩실 내쫓는 게 몇번짼지. 정실은 그 언니가 대비김씨의 서모라서 함부로 내쫓지 못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이제 그만 좀 하시어요. 네? 언제까지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실 거예요?"

"이게..."


허견은 윤이를 보고 콧마루를 실룩이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금세라도 손찌검을 할 기세로 오른손을 쳐들었다.


"견아!"


허적이 두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서 소리쳤지만, 허견의 주먹은 번개같이 윤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윤이가 비명을 지르며 두눈을 내리감는 순간, 허견의 주먹은 윤이의 귓불을 스쳐지나가서 그 옆 나무기둥을 짚어버렸다.


"..."


윤이의 가슴이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진 와중에 오라비 허견의 나머지 손끝이 그녀의 턱에 닿았다. 정신이 도로 번쩍 들어 윤이가 고개를 쳐들자, 허견의 두눈에 스쳐가는 상처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어찌 그 얼굴을 때리겠느냐? 15년전 그 얼굴 그대로인데."

"..."


하지만 오라비의 음성은 다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울대가 갈기갈기 찢겨져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거 참...때릴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


허견은 자신의 저고리 앞섶을 쥐어뜯었다. 가슴속 한구석에 켜켜이 쌓인 먼지들이 한데 뭉쳐 나뒹굴 뿐인데 가슴이 온통 긁혀서 쇳소리가 나고 또 쇳내음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문 탓이었다.


이미 하얗게 굵어져버린 빗줄기가 뜨락으로 쏟아지는데도 허견은 참담한 얼굴로 섬돌로 내려섰다.


"견아!"

"오라버니!"


아비와 누이가 소리쳐불렀지만, 그들의 걱정섞인 목소리가 더 허견의 속을 울컥 뒤집어놓았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고양이 쥐 생각 하고 있네.


"저, 작은 나으리..."


마름 황씨가 문옆에서 허견을 보고 졸졸 따라나와 나직이 소근거렸다.


"뭐? 최석정의 행방을 찾았어?"

"예 나으리. 어후 진짜...동촌 일대에 문객들 싹 풀어서 최석정 집앞을 염탐시켰다가...최석정이 보낸 전인을 붙잡아서..."

"그래, 어디 있다더냐?"

"그게..."

"말하거라."

"규암면 엿바위골입니다."

"엿바위골? 거긴 그 유명한 태자방이 있는 곳이 아니냐?"


허견은 눈밑을 실룩이며 되묻고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다 멈춰선 윤이를 문득 쳐다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도 오라비라고 걱정되어 따라나선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윤이가 졸졸 따라다니는 게 너무도 싫었다.


"가만...그래...그러면 되겠군."

"네?"

"재미있는 계획이 생겼어."

"계획이라뇨?"

"우리 윤이 시집보낼 계획."


윤이는 허견의 스산한 눈빛에 놀라 한순간 숨이 멎었다. 마치 대보름날 하늘 높이 띄운 연이 갑자기 실이 뚝 끊어져 멀리멀리 날아가버릴 때와 똑같았다.


작가의말

1. 앞서 남용익의 주소인설은 실제로 남용익이 썼다는 주소인설을 참고한 것입니다. 


2. 허견의 누이는 실존인물입니다만. 나이, 이름, 외모, 출신 등은 상상을 가미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11.07 21:58
    No. 1

    허견이 저렇게 망나니 짓을 해도 숙종이 이리저리 들었다 놨다 한거 보면 쓸 곳이 있어서 그랬던거겠지요?
    서후행 다음 악역으로 허견이 둥실둥실 떠오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12 02:10
    No. 2

    허견도 잔머리는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숙종에겐 당장 허적이 더 존재감이...요즘 허견이 악역으로 손꼽히네요. 투표 다시 해봐야 할 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3.11.07 22:41
    No. 3

    오랫동안 눈팅만 했습니다. 빈약했던 제 역사 지식탓에 이해도 슬슬 빠듯해지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곧 다시 정주행을 해볼까합니다. 댓글을 잘 쓰진 않아도, 항상 지켜보고 응원하고있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지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12 02:12
    No. 4

    디오지크님 반갑습니다. 그간 어렵다는 얘길 덜 들어서 너무 마음 푹 놓고 썼나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11.08 12:50
    No. 5

    일손 부족한 소각, 최석정, 윤이, 음모, 중궁? 허견은 주인공들이랑 마주친지 오래 되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악역 포스는 착실히 쌓아왔네요. 이제 터뜨릴 일만 남았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12 02:13
    No. 6

    다들 허견 밉다고들...하지만 아직 포텐 터뜨릴 악역들이 대기 중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11.08 17:15
    No. 7

    햐~
    정말 정신없는 조정이네요
    예나 지금이나... 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11.12 02:14
    No. 8

    그쵸. 요즘 정치판도 비슷한 듯...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4 해의 그림자 163 +5 14.02.03 2,361 33 38쪽
163 해의 그림자 162 +5 14.01.30 2,157 34 37쪽
162 해의 그림자 161 +4 14.01.26 2,161 26 40쪽
161 해의 그림자 160 +6 14.01.22 2,411 35 38쪽
160 해의 그림자 159 +5 14.01.18 2,205 31 40쪽
159 해의 그림자 158 +7 14.01.14 2,524 33 39쪽
158 해의 그림자 157 +4 14.01.10 2,097 33 38쪽
157 해의 그림자 156 +4 14.01.06 2,460 30 37쪽
156 해의 그림자 155 +7 14.01.02 3,414 32 38쪽
155 해의 그림자 154 +6 13.12.29 2,489 40 38쪽
154 해의 그림자 153 +4 13.12.25 3,128 35 39쪽
153 해의 그림자 152 +4 13.12.22 2,491 43 35쪽
152 해의 그림자 151 +6 13.12.17 3,966 102 37쪽
151 해의 그림자 150 +5 13.12.13 2,122 36 38쪽
150 해의 그림자 149 +6 13.12.09 1,971 30 38쪽
149 해의 그림자 148 +6 13.12.04 2,107 34 36쪽
148 해의 그림자 147 +8 13.11.29 1,968 35 37쪽
147 해의 그림자 146 +10 13.11.25 2,623 30 37쪽
146 해의 그림자 145 +11 13.11.21 2,294 30 33쪽
145 해의 그림자 144 +5 13.11.16 2,286 33 34쪽
144 해의 그림자 143 +5 13.11.12 2,680 32 31쪽
» 해의 그림자 142 +8 13.11.07 3,089 32 24쪽
142 해의 그림자 141 +6 13.11.05 1,872 37 39쪽
141 해의 그림자 140 +6 13.10.30 2,350 61 38쪽
140 해의 그림자 139 +6 13.10.26 1,973 41 33쪽
139 해의 그림자 138 +6 13.10.23 3,544 33 34쪽
138 해의 그림자 137 +6 13.10.20 3,221 41 34쪽
137 해의 그림자 136 +8 13.10.18 2,100 37 36쪽
136 해의 그림자 135 +8 13.10.13 3,191 36 36쪽
135 해의 그림자 134 +10 13.10.10 2,332 34 3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