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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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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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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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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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75

DUMMY

"장杖 일一!"

"장杖 이二!"

"장杖 삼三!"


또 다시 정오의 햇살이 뜨겁게 국청 마당을 달구었다. 형틀 위의 복선군은 둔부를 내려치는 둔장臀杖의 호된 맛에 신음했다. 왕가의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잇새를 무참하게 비집고 나와버린 신음이 수치스럽고, 또 목울대를 뒤집고 터져버린 비명이 치욕스러워도, 둔장은 멈추질 않았다.


"장杖 십사十四!"

"장杖 십오十五!"

"장杖 십육十六!"

"장杖 십칠十七!"

"장杖 십팔十八!"


복선군에게 형장을 집행하는 나장들은 여느때보다 신명이 난 모양이었다. 그동안 끽해야 사대부의 볼기를 치는 게 고작이었는데, 어엿한 왕족의 볼기를 치다니. 그들은 손맛에 느껴지는 격한 진동을 만끽했다. 복선군의 입가에서 터져나오는 신음과 비명을 들을수록 반쯤 정신이 나간 듯이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멈추어라!"


복선군에게서 고작 삼척 정도의 거리에 서 있던 석정은 차마 두눈뜨고 지켜 볼 수가 없어, 일단 형신을 중지했다. 왜 벌써 멈춰세우냐는 힐난의 눈초리가 나장들의 두눈에서 회초리처럼 석정의 등짝을 내리쳤다. 하지만 석정은 속이 울렁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비틀대며 형틀 옆 모서리를 오른손으로 짚고, 석정은 망건 앞싸개에 맺힌 축축한 땀을 왼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바닥 가득 흥건하게 땀이 묻어나자, 이번에는 별 생각 없이 오른손으로 땀을 훔쳤다. 하지만 망건 앞싸개에 닿는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의아히 오른손을 내려다보니 찐득하게 끈적거리는 검붉은 피가 그의 손금들 사이로 맺혀 있었다.


이건?


석정은 자신이 짚고 있던 형틀 모서리를 내려다 보았다. 복선군의 엉덩이에서 흐른 피가 하필이면 모서리로 흘러내리는 참이었다.


피? 피?


석정의 얼굴에서 한순간에 핏기가 가셨다. 파리하게 질려버린 얼굴로 석정은 자신의 입을 꾹 눌러막았다.


그런데 입을 가리고 보니 하필 또 오른손이었다. 또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탓에, 오른손에 묻은 피가 고스란히 아랫입술에 묻어버렸다. 진한 피비린내가 코끝과 잇새를 파고들었다.


석정은 현기증이 나서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나머지 왼손으로 다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속이 진탕되어 벌써 목울대에 뭔가가 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


왼쪽 나장이 두눈에 묘한 비웃음을 머금고 석정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은 애저녁에 단련된 일이었다. 한번, 두번 내리칠 때마다 손목에 얼얼하게 전해지는 진동에 놀라고, 작살맞은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는 죄수들의 몸부림에 머뭇거리고, 그러다가 자신들의 팔뚝이며 얼굴에까지 튀는 핏방울과 살점에 움츠러들고, 마지막 순간 숨이 끊어지는 모습에 소스라치고...하지만 이제는 '손맛'이라 부른다.


헌데 이 젊은 문랑은 그저 손에 피 좀 묻었다고 새파랗게 질리다니. 심지어는 손으로 입을 가린 본새가 아침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낼 태세라니.


"..."


석정은 괜찮다는 말도 못한 채로 계속 입을 막고 서 있었다. 입을 열면 바로 넘어올 것 같았다. 시척지근한 것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침을 꿀꺽 삼켜서 내려도 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더욱 거세게 넘어왔다. 석정은 급히 판의금 이정영을 돌아보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도 못하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혀를 차고, 또 탄식하는 웅성거림이 등뒤로 들려왔지만 신경쓸 여유도 없었다. 당장 휘청이는 걸음으로 버드나무 사이를 지나 우물가로 달려갔다.


다시 최석정이 국청으로 돌아왔을 때는 주위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두눈이 번들거리는 걸 보니 석정 자신을 비웃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이정영의 호의적인 시선도 미적지근해졌다.


"문랑은 형신을 속개하라."


그나마 이정영 자신이 직접 문초하긴 싫었기에, 최석정에게 계속 일임할 뿐이었다.


"예 대감."


석정이 형틀에서 삼척 정도의 거리에 다가서자, 나장들의 비웃음어린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석정은 얼굴이 벌개져서 나장들의 시선을 피했다.


"장杖 십구十九부터 다시 하라."

"허이구, 횟수는 용케 기억하고 계시구먼요."

"뭐라?"

"아니, 아니구먼요. 장杖 십구十九!"

"장杖 이십二十!"


왼쪽 나장과 오른쪽 나장이 교대로 복선군의 둔부를 내리치는 가운데, 왼쪽 나장의 둔장 첫머리가 하필이면 복선군의 둔부 윗부분을 내리쳤다. 복선군이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질렀다. 형틀 모서리를 타고 흐르는 핏물도 더욱 굵어졌다.


이거, 둔장이 맞나? 석정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왼쪽 나장 앞으로 황급히 다가들었다. 핼쑥한 얼굴로 번뜩이는 눈빛으로 바짝 다가서니 나장은 움찔 놀라 상체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이미 문랑의 손길이 번개같이 둔장을 낚아채버렸다.


"줘보게!"

"왜, 왜 이러셔유?"


왼쪽 나장이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 젊은 문랑은 이미 둔장에 새겨진 명칭을 확인해버렸다. 버젓이 척장脊杖이라 새겨진 글귀를 본 문랑의 두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왜, 둔장이 아니라 척장으로 치는 것이냐?"


형틀에 엎드려서 두눈을 맥없이 감던 복선군의 두눈이 크게 홉떠졌다. 둔장이 아니라 척장이라니...잘못 휘두르는 척 자신의 등허리를 절단하려 했단 말인가. 너무도 놀라서 눈가에서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예? 그거 둔장인디요."


왼쪽 나장이 두눈을 멀뚱거리면서 발뺌했다. 오른쪽 나장은 움찔해서 자신이 손에 쥔 둔장의 글씨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것은 볼기둔臀자가 맞았다. 한자를 잘 몰라도, 형장에 쓰이는 몇자 정도는 익히 아는 터라 능히 분간할 수 있었다. 왼쪽 나장한텐 안된 일이지만, 자신은 제대로 둔장을 잡은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볼기둔臀자와 등척脊자도 모른단 말이냐?"

"까막눈이 별수 있간요. 암만 봐도 비슷비슷하구만."

"허!"

"똑똑한 분들은 이래서 문제구먼요. 다 자신들 같을 줄 알고, 어려운 건 쉽게 생각하고, 쉬운 건 어렵게 생각하고."


왼쪽 나장이 궁시렁대는데, 석정은 차갑게 척장을 거꾸로 뒤집어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오른쪽 나장의 둔장도 빼앗고선, 척장과 둔장의 첫머리를 서로 비교해 보였다.


"보이는가? 척장의 끝머리 둘레는 9푼, 둔장의 끝머리 둘레는 7푼...두푼의 차이가 난다. 매일같이 둔장을 휘둘러 온 자네들이 착각할 리가 있나. "

"아니 둔장이나 척장이나 거기서 거기지..."


왜 자꾸 따지냐고 대들고 싶은 것을 왼쪽 나장은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힐끔 형틀 위 복선군을 노려보았다. 헌데 장 스무대쯤 맞았다고 복선군은 그새 실성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실오라기 같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서 복선군이 힘겹게 말했다.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 돌려준다 이건가?"

"..."


최석정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된 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왕족을 상대로 농간을 부리다니. 미친 자들이었다. 왕족이 아니어도 보잘 것 없는 필부라 해도, 이리 해선 안되었다. 척장을 둔장으로 속여 내려치다니, 그게 겨우 두푼의 차이라 해도, 아마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둔장이 척장으로, 척장이 소곤으로, 소곤이 중곤으로 조금씩조금씩 바뀌었을 지도 몰랐다. 설마 이놈들 뒤에도 김석주가 있는 건가. 어지러이 동공이 흔들리는 채로 허공을 응시하던 최석정의 귓가로 복선군의 쓴웃음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공초를...바치지."

"..."


최석정은 곧바로 복선군의 음성을 새겨듣지 못하였다. 형신 하루만에, 고작 형장 스무대 만에 복선군이 공초를 바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던 탓에, 방금 복선군이 한 말이 그저 아득하게 들렸다.


"지필묵을 주게."


연이어 들려온 복선군의 음성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그제야 앞서 복선군이 한 말까지 알아듣고 최석정은 놀란 눈빛으로 복선군을 돌아보았다.


"대감?"

"이 치욕을...끝내주게."


복선군의 음성이 동굴에서 울리듯이 음울하게 진동했다. 석정은 흠칫 놀라서 복선군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렇게 쉽게 자신을 포기할까. 자신은 물론 구족까지 멸할 일이었다. 헌데도 당장의 굴욕을 참지 못하고 공초를 바치겠다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복선군의 얼굴을 내려다 보니, 이미 체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대나무는 부러질 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법이던가. 여기서 치욕을 끝내겠다고 결심한 복선군의 얼굴을 바라보는 석정의 눈빛은 손끝에 검은 숯가루처럼 부스러졌다.


- 지난 가을, 나와 정원로, 허견 삼인三人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허견이 말하기를, '서인들이 임창군 형제를 앞세워서 역모를 모의하니, 남인들은 성상이 후사없이 불행을 당하실 일을 대비하여 복선군이라도 지켜야 한다.' 하여, 실없는 소리라 여기고 그냥 흘려넘겼을 뿐, 그 뒷일은 모릅니다.


"다 되었으이..."


복선군이 형틀에 엎드린 채로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공초를 적어내더니 힘없이 붓을 떨구었다. 먹물이 묻은 붓털이 대호지 위를 뒹굴더니 형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석정이 무릎을 굽혀서 웅크리고 앉아 붓을 줍다가 가만히 두눈을 치뜨고 정원로를 쏘아보았다.


"..."


정원로는 어쩐지 기분이 오싹했다. 승정원에 고변서를 넣자마자, 왕명으로 의금부 서간西間에 갇혀서 이틀동안 하루 온종일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국청마당으로 불려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복선군의 공초도 받아내었으니 자신은 도로 서간으로 돌아가든지, 옥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헌데 자신을 보는 최석정의 눈길이 어쩐지 오장육부를 후비는 느낌이 들었다.


최석정은 붓을 줏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공초를 집어들고 위관석으로 다가들어 이정영에게 공손히 바쳤다.


"끝났군."


이정영은 복선군의 공초를 훑으면서, 나직이 혼잣말했다. 계집이 사내에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추어 속살을 내비치듯, 그렇게 역심 한자락이라도 내비치면 역모죄를 씻을 수 없는 일. 헌데 복선군의 공초에선 허견의 참람한 말을 복선군이 그저 듣고만 있었던 일이 적혀 있었다. 보나마나, 복선군이 그일을 왕에게 고했을 리도 만무했다. 이미 왕은 이번 역모를 곱게 덮을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실수로 고작 한올 풀려버린 역심이라도, 왕은 바로 들추어 얼기설기 짜인 역모로 몰아갈 심산이었다. 이것으로 복선군은 완전히 끝났다.


"죄인들을 도로 가두어라."

"예 대감!"


판의금 이정영의 명이 내리기 무섭게 나장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답하더니, 복선군을 남간으로, 정원로를 서간으로 각각 데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국청 마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청아한 음성이 뒷덜미를 훑어내렸다.


"잠깐, 정원로도 남간南間에 가둬라!"

"..."


정원로는 갑자기 얼음물을 뒤집어쓴 느낌이 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문랑을 맡은 최석정이 분명했다. 정원로를 서간으로 데려가던 나장들이 꺼림한 표정으로 석정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판의금 이정영의 눈치를 보았다. 이정영 역시 영문을 몰라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터였다. 하지만 최석정의 눈동자는 판의금 이정영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소생은 서간입니다만."

"이제 남간이다."

"뭐라구요? 아니 왜 소생이 남간인 겁니까?""


정원로가 억울한 빛으로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문사낭청 최석정은 냉랭한 빛으로 응시했다.


"복선군은 분명히 이 공초에서 지난 가을 자네와 허견이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하였다고 적었다. 반년동안 너는 입을 다물었다가 이제야 고변을 하였으니, 허견이 역모를 꾸민 것이 맞으면, 너는 필시 그 역당逆黨의 무리가 틀림 없으렷다...?"

"..."


정원로의 온몸이 굳었다. 불똥이 자신에게 튀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병판대감의 밀명을 받고 허견의 무리에 잠입했을 뿐이었다. 헌데, 허견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무리로 몰렸다.


이러시깁니까?


정원로가 석정을 노려보며 입모양으로 소리없이 따졌다. 하지만 최석정의 눈꺼풀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차갑게 눈동자를 굳히면서 자신을 마주했다. 그 눈꼬리도 서늘했다.


머리를 잡지 못한다면, 꼬리라도 잡아야지. 미안하지만 나는 놓아줄 생각이 없으이.


정원로는 몸서리를 치면서 눈앞의 서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장들이 자신의 옆구리를 뒤로 잡아당기는 참이었다. 서간이 아니라 남간으로 데려가려 한다. 남간으로 가면 죽는다. 정원로는 그 이치를 너무도 잘 알았다. 지금 저 문사낭청은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목숨도 복선군과 같이 친친 동여매었다.


이럴 수는 없다. 얘기가 다르다. 천하의 지략가인 김석주의 계획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허점이 생겼다. 그것도 정원로 자신의 목숨을 함께 관통하는 커다란 허점이 뚫렸다. 저 송곳 같은 손길 한방에. 그 커다란 허점이 자신을 집어삼켰다. 정원로는 눈앞에서 서간이 점점 멀어지며, 순식간에 눈앞이 온통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장들이 정원로의 양쪽 옆구리를 꿰어차고 남간으로 질질 끌고 갔다. 벗어나려 버둥거려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벌써 정원로의 발길은 남간에 닿아버렸다. 죄罪가 이미 씌인 자들만 가둔다는 남간, 결코 살아서는 나갈 수가 없다는 그 남간, 무사히 벗어나도 저승사자가 쫓아와서 기어코 도로 끌고간다는 그 남간이었다.



"왜 이리 늦었는가? 복선군이 자복한 지가 언제인데?"


두광에게 추안궤를 들리고선 밤이 이슥해서야 희정당에 이정영과 최석정이 당도했다. 숙종은 미어지는 하품을 참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결국 왼손으로 가리면서 한껏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러면서 미간을 찡그리다 보니 이정영과 최석정을 쏘아보는 눈에 더 힘이 들어갔다.


이정영이 움찔하여 등뒤의 석정을 곁눈질로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그것이..."

"추안을 정례定例대로 정자正字로 정서正書하다 보니...그리 되었습니다."


일부러 정定, 정正, 또 정正자를 반복해서 대답하는 최석정이었다. 숙종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품을 쳤다. 그래도 뻔뻔하게 눈썹만 꿈틀하는 최석정을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노려보았다. 하기 싫은 것을 할 때면 다소 늘어지는 경향이 있는 최석정임을 익히 알았다. 정서를 핑계대고, 일부러 늑장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두광도 그런 눈치를 읽었는지 숙종의 서안 위로 추안궤를 올려두기 무섭게 어깨를 움츠렸다.


"추안을 정서하다 그리했다?"

"예, 전하."


숙종이 곱씹듯이 대꾸하자 최석정도 냉큼 대답했다. 숙종은 최석정을 가시돋친 눈길로 쏘아보곤 추안궤로 손을 뻗었다. 추안궤의 문짝을 봉인한 붉은 별지엔 '신臣 이정영李正英 근봉謹封' 이라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별지도 아닌데, 별지에 적힌 바를정正자가 괜히 눈에 거슬렸다. 숙종은 사납게 별지를 뜯어내고 추안궤를 열었다.


추안을 집어들어 펼쳐보니 한점 흐트러짐 없는 해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괘씸하게도 전날보다 더 반듯하게 써놓은 글씨였다. 추안을 천천히 또 천천히, 쓰고 또 쓰고, 보고 또 보고 하여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똑바로 쓰겠다는 심사가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끌겠다는 심사로.


- 둔장 스무대를 맞고도 이태서가 불복했다. 강만철은 이태서가 허견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집을 들른 적이 있으며, 이태서가 자신의 얼굴을 몰라도 자신은 이태서의 얼굴을 잘 아는데, 허견과 모의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태서는 끝내 불복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 둔장 스무대 후에 복선군이 공초하길, 지난 가을, 나와 정원로, 허견 삼인三人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허견이 말하기를, '서인들이 임창군 형제를 앞세워서 역모를 모의하니, 남인들은 성상이 후사없이 불행을 당하실 일을 대비하여 복선군이라도 지켜야 한다.' 하여, 실없는 소리라 여기고 그냥 흘려넘겼을 뿐, 그 뒷일은 모른다.

- 하여 정원로를 문초하니, 그날 복선군이 먼저 돌아간 뒤에, 자신과 허견이 이일에 대하여 말이 화근이 될 것을 염려하여 맹서의 글을 써서 반반씩 나눠가졌다고 자술했다.

- 그 맹서의 글은 앞서 복선군과의 면질에서 정원로가 제출한 소찰에 적힌 글귀로,

出於三人之口

入於三人之耳

若或漏泄

天必殛之...

세사람의 입에서 나와서

세사람의 귀로 들어가니

혹여 누설하면

하늘이 기필코 죽이리.

- 소찰에 공모의 혐의가 있어 정원로를 서간에서 남간으로 옮겼다.


숙종은 추안을 한자도 빠짐없이 천천히 정독하고 나서 손을 뻗어 동봉된 공초로 손을 뻗었다. 이정영이 긴장된 눈빛으로 최석정을 쳐다보았다. 왕은 공초부터 읽지 않고 추안부터 읽었다. 최석정이 적어놓은 추안의 첫인상이 모든 것을 좌우할 터였다. 이미 최석정이 정원로를 서간에서 남간으로 옮겨버렸으니, 정원로까지 공모자로 몰아서 함께 추국할 의지를 피력한 셈이었다. 분명 추안에도 그런 최석정의 의지가 은연중에 표출되었을 터였다. 추안이란 본디 죄인들의 진술 및 문랑의 시선에 따라 사건을 비추는 것인 만큼.


"..."


숙종은 입맛을 쓰게 다시고 공초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최석정의 추안은 그저 담담하고 담백하게 사실만을 담아냈다. 오로지 사실만을. 복선군을 추국하고, 다시 정원로를 면질하고, 복선군의 공초를 받아내고, 다시 정원로를 남간으로 이감했다, 그것 뿐이었다. 숙종은 숨이 턱 막혀서 자신의 목울대를 오른손 바닥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사견을 보탠 것도 없다. 헌데 자신의 목울대를 꽉 누르는 것만 같다. 미친 듯이 날뛰려는 울분과 분노를 억누른다. 그럴 수는 없다. 이미 심장에서 불꽃이 일어서 활활 타오른다. 목구멍으로 매운 연기가 들어찬다. 참을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숙종은 또 다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말았다. 어스름 달밤을 뚫고, 으스름 새벽이 들었다. 한치 앞도 분간 못하던 어둠이 흩어지고 흐려지며, 서안의 희미한 모서리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고, 문틈으로 스며드는 흐릿한 서광도 눈에 비쳤다. 그 빛에 숙종은 가만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그림자를 비추었다. 어둠에 묻혀 마냥 흐리터분한 그림자가 점차 뚜렷해졌다. 환한 아침햇살에 꼬리를 밟힌 손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끝이 추안 위 정원로란 이름에 맞닿아, 그림자가 져버렸다. 그 손가락끝을 도저히 뗄 수 없었다.


- 이남李楠이 이미 승복하였는데 정원로는 아직도 한패를 고하지 아니하니 필시 평문平問(형신 없이 문초)으론 토설하지 아니할 터. 다시 가추枷杻(나무칼과 차꼬)를 채우고 엄문하되, 끝내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역률로 다스릴 것이다 전하라.


꼭두새벽 부터 희정당에 불려와서 꿇어엎드린 도승지 유상운의 목덜미로 왕의 옥음이 흘렀다. 왕이 부르는대로 교지를 받아쓰던 유상운은 잠시 붓을 멈칫했다. 그동안 왕이 부응교 최석정를 지나치게 신임하여, 자신도 도승지로서 체면이 살지 않았는데, 이리 자신을 불러 하교를 내리니 다행스런 일이긴 했다. 헌데 하필이면 하교의 내용이, 고변한 정원로를 엄히 문초하라는 뜻이었다.


"정원로를...말입니까?"

"추안을 보니 정원로 역시 본시 역당의 무리였던 바...그가 무슨 일로 마음을 바꾸어 허견과 복선군을 고변하였는지 몰라도, 필시 그 공모한 무리가 더 있을 터이니 발본색원해야지 않겠는가?"

"..."

"계속 받아적으라."


- 또한 문사낭청에서 추안을 써서 들일 때마다 정서正書(해서로 바르게 씀)로 들이다 보니 매양 더디기만 하니, 추후로는 반초서半草書(반쯤 흘려서 씀)로 들이도록 하라.


도승지 유상운은 마지막 한줄을 받아적다 말고 또 한번 멈칫했다. 붓끝에서 털 하나가 살짝 삐져나와 신경에 거슬리기도 하였지만, 추안을 정서로 들이지 말고 반초서로 들이라는 말이 어쩐지 생뚱맞게 들렸다. 해서로 쓰든 반초서로 쓰든, 뭐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린다고 이리 성화이신지.


"다 적었는가?"

"전하...추안은 오래도록 보관해야 하는 공문이오니 마땅히 정서로 쓰는 것이..."


유상운은 붓끝에서 삐져나온 붓털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잡아당기다가 머리카락 한올처럼 길게 묻어나는 것을 보고 식겁했다. 졸지에 다시 교지를 쓰게 생겼다.


"다 적었는가 물었다."

"전하, 서체 정도로 걸리는 시간이 큰 차이는 없사오니..."

"이만 나가보라."

"..."


왕의 서슬퍼런 축객령에 도승지 유상운은 그만 잔기침이 목에 걸렸다. 도대체 왕이 무슨 일로 심기가 뒤틀렸는지는 몰라도, 추안을 들이는 것이 더딘 것에도 역정이 난 모양이었다. 왕이 최석정이 아닌 자신을 불러 교지를 받아쓰게 한 것만 봐도, 무슨 이유에선지 최석정에게 아주 조금 빈정이 상하신 모양이었다. 일부러 정서를 핑계삼아, 최석정이 추안을 늦게 들이기라도 하였던가? 최석정이 할 법한 일이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이게 다 최석정 탓일 터였다.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나는 역모를 고변한 몸이오! 역모를 고변한 몸인데 어찌 나를 문초한단 말이오?"


정원로는 형틀에 묶인 채로 몸부림을 쳤다. 얘기가 달랐다. 천정에 가막쇠로 박아놓은 것처럼 병조판서 자리에서 떨어지질 않는 김석주가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헌데 자신은 졸지에 서간에서 남간으로 이감됐다. 게다가 형틀에 묶이기까지 했다. 자신을 이꼴로 만든 놈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눈앞에 잘난 면상을 바짝 들이대는 참이었다.


"그러니 형문이 아니라 평문을 하지 않는가. 복선군조차도 형문을 면치 못한 판국에."


길에서 스쳐지나가며 곁눈으로 훔쳐볼 때만 해도 눈꼬리가 마냥 부드럽더니, 지금 자신의 눈앞에 들이민 얼굴은 눈초리가 사뭇 날카로웠다.


"..."

"허나 끝내 공범을 고하지 않을 시엔 형문 또한 불사할 것이다."

"아니...무슨 공범이 더 있단 말입니까? 이태서가 그랬지 않습니까? 그자들이 절 잘 알지도 못한다고. 전 그저 우연히 합석한 자리에서 허견이 복선군을 여차하면 보위에 올리겠다 말한 것을 듣고 고변했을 뿐인데..."


정원로는 항변하다 말고 말문이 막혔다. 어쩌다 한두번 본 자들도, 또 건너건너 귀동냥으로 듣기만 한 이름도 무자비하게 끌어들인 자신이었다. 그들이 자신과의 친분을 극구 부인할 적에도 있는 말 없는 말 갖다붙여서라도. 그런데 역으로 자신이 역도로 몰리게 생겼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니 문랑은 대체 누구 편이시오?"

"편? 적어도 역도의 편은 아니지."

"아니 그럼 나도 같은편이라니깐...!"


정원로가 발끈하여 소리지는 순간 최석정의 두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실언을 깨달은 정원로의 오장육부를 단숨에 썰어낼 듯한 눈초리였다.


"같은편?"


석정은 냉랭히 대꾸했다. 정원로는 씨알도 안 먹히는 최석정의 차가운 눈동자에 움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 염병할 문랑인지 무말랭이인지를 누가 좀 자신의 눈앞에서 치워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 네 같은편이 누군지, 그것만 고하거라."

"..."


정원로는 자신이 최석정에게 자꾸 말려드는 것을 느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마침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국청 한구석에 숨은 신범화의 손짓이 아니면 그대로 이성을 잃고 토설할 뻔하였다.


"아니...제 말은...소생도 역도의 반대편이라 이거지요."

"..."


석정은 눈꺼풀을 내리뜨고 정원로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여생麗生이니 희려希麗니, 했던 말이 어쩐지 께름칙했다. 왕의 최측근으로 병권을 거머쥔 김석주를 허견의 무리가 진심으로 한편으로 삼을 리가 없었다. 이태서는 여생이니 희려니 알지도 못한다 하였다. 이태서 역시 자기 유리한 입장에서만 진술을 하려고 드니 그 진술의 진위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서찰의 내용 자체가 어딘지 어색하여 믿음이 가지도 않았다.


"여생麗生, 희려希麗..."


석정이 뜬금없이 꺼낸 단어에 정원로는 움찔했다. 자신이 또 다른 증거로 내놓았던 소찰에 적힌 글귀였다. 자신은 그때 고을려麗자가 김석주를 가리키는 것이라 말하였다. 헌데 왜 그 두 글귀를 걸고넘어지는 건지. 정원로는 열심히 항변했다.


"그 소찰은 진짭니다. 진짜로 허견이 저와 강만철에게 준 겁니다. "

"뭐...김문랑이 필적검증을 한다고 가져갔었지. 나도 한번 봐야겠으이."


석정이 위관석 옆에 시립해 있는 또 다른 문랑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정원로는 최석정의 손짓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그 소찰을 제출했던 문랑이었다. 김준상이라던가. 같은 문랑인데도 어쩐지 최석정을 어려워하는 건지, 서탁 위에 놓인 추안궤에서 소찰을 꺼내어 공손히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석정은 두손으로 소찰을 펼쳐들고 여생麗生이니 희려希麗니 적힌 글귀들을 가만히 살폈다. 자신도 허견의 서체는 익히 알았다. 이미 김준상이 맡은 일이라 나서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소찰에는 허견이 굳을견堅자를 흘려써서 착명着名(자기 이름을 적어놓음)까지 해놓았다.


석정이 받아들어 소찰을 살피기 무섭게 정원로는 석정더러 들으라는 듯이 김준상에게 물었다.


"필적검증을 해봤으니 알 거 아닙니까? 착명까지 똑같지요?"

"그러니 말일세...여생이니 희려니, 온통 은어를 쓰면서, 허견이 자기 이름은 왜 보란듯이 적어넣었을까?"


석정이 무심히 대꾸했다. 정원로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 그야 모르지요...허견이야 워낙 허세가 있어놔서..."

"..."


석정은 정원로의 변명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등을 돌리고서 도로 추안궤 앞으로 다가들어 정원로가 제출한 또 다른 소찰을 대조하는 참이었다. 필적도 서로 똑같았다.


出於三

入於三

若或

天必


"출어삼出於三...이 소찰을 자네랑 허견이 반쪽씩 나눠가졌다지?"

"예예, 그것도 허견이 썼습니다. 직접 썼습니다. "

"..."


정원로가 다시금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최석정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소찰 위로 찬란히 꽂혀들던 정오의 햇살이 점점 스러졌다. 눈앞이 흐리마리해졌는데도 저 최석정은 소찰을 접을 생각도 않고 뚫어져라 보고 또 보고, 그렇게 한글자한글자 뜯어보는 참이었다. 고변자라서 형장을 내려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시간을 질질 끌어서 괴롭힐 심산인가 싶을 만큼, 마냥 느긋하게, 또 지긋하게 소찰들을 살피니 정원로는 답답하고 고달팠다. 왜 판의금과 다른 문랑들은 이 작자를 내버려 두는 건지.


"허견을 데려왔습니다."


해가 저물어서야 허견이 당도했다. 그때까지도 정원로는 국청 뜨락을 벗어나질 못했다. 이미 정원로 좌우에 시립해 있던 나장들도 기가 질린 상태였다. 피가 손에 좀 묻었다고, 입에 좀 묻었다고, 새파랗게 질리더니, 심지어는 우물가로 달려가서 토악질까지 해대더니, 정작 형문을 할 수 없이 엄문嚴問이란 두글자로만 윤허가 내린 정원로에겐 마냥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그 선비다운 모습이 오히려 무서웠다.


"정원로를 우선 들여보내고, 당장 허견을 앉혀라."


판의금 이정영이 내린 명이었다. 허견을 데려온 금부도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 어린 눈빛으로 허견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도성 안에 흉명이 자자한 허견이라지만, 며칠간 여독이 쌓인 채로 형틀 장판에 주저앉히다니. 점잖은 양반들이 왜들 지독한지.


"최문랑, 자네가 계속하겠는가?"


판의금 이정영이 묻는 말에 석정은 의금부 중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부도사의 포승줄에 질질 끌려들어오는 허견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 맑은 눈동자는 땅거미에 물들어 어둡게 반짝였지만, 두눈에는 조금도 잔인하거나 냉혹한 빛이 없었다.


"오늘은 제가 끝을 보지요."

"..."


그저 담담한 음성인데, 정원로는 괜히 자신의 가슴속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얼음조각을 잘못 삼킨 듯이, 속이 온통 차갑게 식었다. 곤棍이든 장杖이든 한대도 맞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오장육부가 모두 얼음장이 되어버렸으니 그저 무서웠다. 어이구, 부처님, 보살님...속으로 부르짖는 가운데, 어느새 금부도사가 허견을 형틀 앞으로 끌고 왔다.


"너 이 자식..."


허견이 정원로를 보자마자 두눈에서 불꽃 같은 살의를 터뜨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정원로 바로 옆에 서 있는 시퍼런 청단령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관옥같은 살결, 우뚝 솟은 콧날,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용의 눈매로 품은 별빛 눈동자, 음침하지 않은 연홍빛 입술까지 하필이면 너무도 낯익었다. 끔찍하게도 하필이면 최석정이었다.


"너..."

"..."

"어허! 예를 갖추어라! 네놈을 문초할 문랑 나으리시다!"


최석정이 담담히 허견을 응시하는데, 금부도사 하나가 허견에게 호통을 쳤다. 허견은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 정원로를 보니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가, 최석정을 마주하고 보니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시간이 그대로 멈추고, 자신은 억겁億劫의 시간에 갇혀버린 듯한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최석정의 두눈에는 연민도 조롱도 없이 그저 고요한 빛만 감돌았다.


"..."


허견이 옴짝달싹 못하고서 최석정을 쳐다보는 사이, 나장들이 정원로를 형틀에서 끌어내고 허견을 다짜고짜로 형틀 장판 위로 엎어놓았다. 허견이 퍼뜩 정신이 들어 두팔로 형틀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지만, 이미 나장들은 두팔과 두발을 형틀에 친친 동여맸다. 허견은 두손을 꽉 움켜쥐고 상체를 요리조리 비틀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나장들이 자신의 바지를 허벅지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놈들이!"

"가만 있어! 쳐 맞고 싶지 않으면!"

"이놈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곧 죽을 놈이란 것만 알면 되지!"

"..."


석정은 나장들과 실랑이를 하는 허견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 죽을 놈...그 말이 맞았다. 이미 허견은 남간에 들어갈 몸이었다. 그것도, 남해로 끌려가다 말고 무자비하게 국청 형틀에 묶인 신세였다. 당장 추안을 정서가 아니라 반초서로 흘려써서라도 한시 바삐 들이라는 어명까지 내린 마당에, 며칠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닌 허견을 배려할 인내심을 가진 이는 최소한 여기 의금부엔 없었다.


"허견."


석정은 가만히 그 이름을 불렀다. 미친 듯이 날뛰던 허견의 등줄기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부르르 떨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석정은 조금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 귀한 밀화갓끈도 떨어지고 없었다. 남해로 가는 길에 금부서리한테 뺏겼는지, 금부로 끌려오는 길에 금부도사한테 뺏겼는지 알 길이 없었다.


"너는 복선군을 옹립하려고 한 역모죄로 고변을 당했다. 고변자는 정원로, 강만철. "

"모함이다. 모함이야!"

"..."

"나는 복선군을 옹립하려 한 적이 없다. 모함이야! 정원로 개자식이...!"

"정원로부터 대질토록 하지."


석정이 차분히 대꾸하곤 나장들에게 눈짓했다. 나장들이 공손히 최석정에게 고개를 조아리곤 남간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벼락같이 정원로를 남간에서 끌어내어 허견 앞으로 끌고 왔다. 들어가자마자 도로 끌려나온 정원로는 서간에 있을 때와 남간에 있는 때가 대우가 천지차이라는 것을 절감하며 석정과 허견 앞에 섰다.



허견이 사지가 묶여 있는데도 정원로는 그 옆에 바짝 붙어서는 것은 어쩐지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최석정 옆에 살짝 붙어서는 것도 겁이 났다. 부드러운 웃음 속에 날카로운 송곳을 감춘 자인 탓에.


"너...너...네가 사람이냐?"

"개가 할 소린 아니지."


정원로가 이죽거렸다. 허견은 숨통이 온통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떡인 줄 알고 삼켰더니 독이었다. 그냥 기분 내키는대로 닥치는대로 어울리고 사람을 끌어모은 대가였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참하고 비참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넌 무엇이냐?"


석정은 차가운 음성으로 정원로의 뒷덜미를 잡았다. 정원로는 순식간에 자라목이 되어 석정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도로 피하고 말았다.


"무슨..."

"개와 더불어 밀약의 글을 나눈 너는 무엇이냐? 또 이 글은 무엇이냐?"


석정이 기어코 출어삼出於三으로 시작하는 글귀가 적힌 소찰을 정원로와 허견의 눈앞에 내밀었다. 정원로의 두눈이 움찔했다. 이 양반이 또 시작이다.


"허견한테 물어보시지요. 저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그래? 허면 허견에게 묻지."


석정은 선뜻 대꾸하곤 허견의 눈앞에 소찰을 내밀었다. 허견은 여독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눈꺼풀이 처진 탓인지, 소찰의 글귀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심드렁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게 뭐..."


허견은 말을 잇지 못하고서 두눈을 크게 치떴다. 이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반년전쯤 자신과 정원로가 절반씩 나눠가진 밀약의 글귀였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유정의 흉서사건을 거짓으로 터뜨리고 나서 한참 후에야 비로소 흑막을 알았다. 실체가 없어야 할 이유정의 흉서는 실체가 있었다. 그저 이유정에게 덮어씌운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유정이 쓴 것이었다. 서인들이 정말로 임창군 형제를 옹립하려 했고, 김석주는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을 뿐이었다. 그 일로 남인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주상이 잘못될까 전전긍긍 논의하기도 했다. 또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중궁을 지우고, 또 치우고 그 자리에 오정창의 여식을 앉힐까를 궁리하며, 그 와중에 주상이 후사 없이 잘못되면 그땐 복선군을 앉히면 된다고, 그저 농담반 진담반 대책을 세워놓았을 뿐이었다. 그저 대책이...역모였던가.


"이제 기억나나?"


정원로가 빈정거렸다. 허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렸다. 그는 사지가 형틀에 묶인 채로 몸부림을 쳤다. 심장이 한순간에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숨이 헐떡거리는 것을 참으려니 자신도 모르게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납게 꿈틀대는 그 등줄기를 최석정의 손바닥이 꾹 찍어눌렀다.


"묻지. 그 소찰은 누구의 필체인가?"

"..."


허견은 두눈을 질끈 감았다. 경위부터 묻지 않고 확인부터 한다. 끝났다. 다 끝났다. 하긴, 꺽정이한테 뭘 기대했던가. 자신에게 맺힌 것도 많았을 놈인데. 오히려 있는 죄 없는 죄 다 옭아매어 자신을 결딴내야만 직성이 풀릴 터였다.


"내 필체요, 됐소?"


자포자기한 듯이 대꾸하는 순간 허견의 두눈이 번뜩였다. 머릿속에 뿌옇게 들어찼던 안개가 한순간에 걷혔는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맑은 정신으로 형틀에 엎드릴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미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뭣에 홀렸는지, 절망에 물렸는지, 그저 혼탁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맑아졌다.


"허면, 그 문체는 누구의 문체인가?"


허견은 귀를 의심했다. 문체라니? 머리맡에 있던 정원로가 헛숨을 들이키는 것이 들려왔다. 허견 자신과 정원로, 단둘이서 쓰고 나눈 글귀였다. 필체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충분할 것을, 굳이 한발짝 더 다가들어 파고들 줄은 몰랐다. 나를 잡겠다는 게 아니었나?


"문체...라니?"

"답하라. 누가 지은 건가?"

"..."


정원로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정말로 최석정은 자신까지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자신도 역당으로 싸잡히게 생겼다. 그는 순식간에 떼꾼해진 눈으로 허견을 내려다 보았다. 어떻게든 저 입을 막아야...


"정원로가 부르고, 내가 썼지."

"..."


늦었다. 정원로의 손가락끝이 차갑게 식었다. 발끝도 시려왔다. 아니, 저려왔다. 여차 하면, 정말로 허견과 함께 역모를 꾸민 역당으로 몰리게 생겼다.


"허면, 맹세의 글을 쓰자, 그 제안은 누가 먼저 했는가?"

"정원로."

"정원로가 어이하여?"

"정 자신을 못 믿겠거든 맹서의 글을 나누자 하더군."

"그래서, 정원로가 부르고, 네가 썼다?"

"그렇대도. 왜 자꾸 물어?"


허견의 뚫린 입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최석정의 뚫린 귀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원로는 뭔가 온몸의 핏줄기가 이리저리 뒤엉키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다.


"그 경위를 소상히 공초로 적어내라."

"..."


이어지는 최석정의 음성을 들으면서, 정원로는 속으로 애타게 부르짖었다. 병판대감! 이 빌어먹을 작자 좀 어떻게 해주시옵소서!


작가의말

실제로 복선군 허견 사건 때 숙종이 추안이 너무 더디게 올라오니 정서에서 반초서로 써서 들이라는 교지를 내린 일이 실록에 있습니다. 숙종 성격이 나오지요. 물론 최석정이 저때 문랑이긴 했습니다만...최석정 때문에 늦어진 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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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3.21 11:33
    No. 1

    천지인 읽으며 느꼈지만 작가님 참 대단하십니다.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그간 최석정이 거의 당하기만 하고 숙종이나 중전한테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이제는 좀 나아지려나요???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3.21 12:36
    No. 2

    굴비 엮이듯 줄줄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3.21 16:44
    No. 3

    석정이는 살짝 살아났으나.. 조만간 더 크게 구르겠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3.21 21:20
    No. 4

    제대로 걸려들었구만
    그나저나 꺽정이는 제 일을 하면서도 뒤끝이 있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4.03.21 22:16
    No. 5

    오랜만에 댓글을 남기네요 흥미진진해서 밀렸던 것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오락가락하는데 감기조심하시고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눈겨산환
    작성일
    14.03.22 11:29
    No. 6

    퓨전 사극의 난립에 목말라하던 시청자들이 정통 사극 정도전에 매료된 것처럼, 판타지, 퓨전 소설에 질린 이들이라면, 이런 소설을 마다할리가 없죠. 거기에 필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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