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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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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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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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2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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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83

DUMMY

사람의 몸속을 헤집고 목숨을 끊어내는 사약이 든 약사발과 사약단자를 소반에 받쳐들고도 금부도사는 성큼성큼 남간으로 다가들었다. 석정은 서슴서슴 그 뒤를 따라 걷다가 무르춤히 걸음을 멈추었다. 더는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우두커니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이 처음 국청에 문랑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앙상했던 춘사월春四月의 달은 어느덧 토실토실 차올랐다. 곧 하오월夏五月로 기울 터였다.


오월이 된다...


석정은 한숨이 나왔다. 해는 점점 중천에 똑바로 서는데, 그럴 수록 그 뜨거운 햇볕으로 만물을 찌고 또 찌고, 그러다 따가운 햇살은 찌르고 또 찌르고...그나마 이 미친 사월도 끝나간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더 뜨거운 오월이 온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다.


금부도사는 뒤에서 어기적거리는 석정의 기척이 거슬려서 고개를 틀어 흘끔대다가는 마침내 걸음을 딱 멈추었다. 자신보다 뒤에 오는 석정이 못내 못마땅한 지 제법 뾰족한 눈초리로 손짓했다.


"빨리 좀 오시지요. 빨리 좀."

"..."


석정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보기만 해도 창자가 뒤집히고 끊어질 것 같은 저 사약에서 한걸음이라도 더 떨어지고 싶었다. 자신이 벌써 근 한달을 여기 금부에서 밤낮으로 지새우곤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의 죽음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형벌도 다양하여, 왕은 허견에겐 사지를 찢어죽이는 환형을, 복선군에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형을, 그리고 복창군에겐 사약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 금부도사와 함께 남간으로 복창군을 찾아가는 참인데도 걸음이 도저히 내키질 않았다.


"나는 좀 이따가 가겠네."

"나리? 복창군의 최후공술을 다시 받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소인보다 먼저 하셔야 할 분이 왜 이리 늑장을 부리십니까?"

"내가 늑장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네가 재촉을 하는 것일세."

"그게 그거지...빨리 좀 하십시다. 이제 집에 좀 가자구요. 집에 가서 한숨 자야지요. 복창군만 죽으면 다 끝나는데."


금부도사가 짜증스레 궁시렁거렸다. 복창군만 끝나면 국청을 파하는 마당에, 여태 석정이 미적거리니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상대가 문랑이라 해도 상관이 없었다. 기껏해야 자신이 맞먹을 만한 정5품...이 아니구나. 금부도사는 석정의 품계를 짚어보다 흠칫 놀라 어깻죽지를 들썩였다.


생각해 보니 눈앞의 문랑은 열흘 전에 벌써 종4품 응교가 되었다. 처음 국청을 열 때만 해도 금부도사나 문사낭청이나 품계들이 고만고만하였는데, 최석정만 홀로 껑충껑충 품계와 관직이 뛰었다. 자고 나면 벼슬이 바뀌는 게 꺽정이라던가.


"한숨? 하! 사람 목숨 끊어놓고 집에 가면 잠이 오겠나."


석정은 집에 가서 한숨 자겠다는 금부도사의 말에 불꽃같은 한숨을 터뜨렸다. 그런데 금부도사가 석정의 망건 양쪽 흑관자를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정사품 응교가 되시죠?"


금부도사는 석정의 핀잔에도 오히려 그의 품계와 관직을 확인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아예 엄지와 검지, 그 두 손가락을 접어보기까지 했다. 관직이 날마다 치솟는 최석정이니 만큼 여기서 관직이 또 오르면...


종삼從三, 준準...


속이 꼬여 꿍얼거리는 건지 그저 중얼거리는 건지 순전히 입모양을 실룩거리면서 금부도사는 또 세어보았다. 하지만 두품계를 더하다 보니 이내 손가락이 그대로 꼬부라져버렸다. 차마 더는 셀 수가 없었다.


"그렇네만...?"


석정이 떠름한 표정으로 답하면서 눈을 흘겼다. 금부도사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응교에서 두 걸음만 나가면, 직제학直提學이거나, 다른 궐내각사의 정正인데, 그 자리는 정삼품 당하관, 즉 준직準職이었다.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올라서기 위해 반드시 딛고 건너가야 하는 디딜 자리...


더는 보채지 못하고서 금부도사는 걸음을 멈추고 최석정을 따라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한가롭게 하늘이나 보는 석정이 마뜩치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응교까지 오른 비범함을 내심 동경하다 보니 자신도 따라서 올려다 보게 되었다. 헌데 별다른 것도 없었다. 그저 검은 것은 하늘이고, 흰 것은 별일 뿐이었다. 그는 석정을 돌아보며 다시 채근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

"가시지요."

"..."

"나리...!"


금부도사는 자꾸 석정에게 자근거렸다. 먼길도 아니고 코앞의 남간을 두고 이러고 미루적대고 있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최석정은 희한한 족속이었다. 검술로 치면 발검拔劍은 번데기 허물 벗듯 한달이고 두달이고 걸리면서, 휘검揮劍은 번개 내려치듯 하는 위인이라고 해야 하나...형문을 할 때도 옷자락이나 손가락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으려고 기를 쓰다가도, 죄수들의 공초에서 어폐가 있으면 솔개가 허공을 돌다 먹이를 낚아채듯 말꼬리를 가로채어 숨통을 조여버리니...특히나 정원로를 추궁하는 모습은 겨울밤 칼바람처럼 매서웠다. 이미 죽은 허견이나, 이태서 같은 위인들을 놔두고 왜 정원로만 검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지못해 석정은 걸음을 떼어 남간으로 옮겼다. 발목을 한뼘가량 감싼 목화가 오늘따라 무겁기 그지 없었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땅바닥과 마찰하여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나무밑창이 오늘따라 요란스런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검은 융으로 감싼 신울의 붉은 솔기가 핏빛으로 번뜩이는 것만 같았다.


"대감..."


석정은 복창군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그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한순간 시간이 축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복창군에게 한마디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그저 호칭만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


복창군은 석정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대로 시선이 석정을 비껴서 금부도사가 가져온 소반 위로 들러붙었다. 손바닥 만한 사발 하나, 그 속에 든 시꺼먼 사약이 시야를 가득 채워서 지금 당장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들어오질 않았다. 금부도사의 얼굴도, 석정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느리게, 혹은 빠르게 미친 듯이 날뛰면서 심장박동이 고막을 사납게 두드려대어 아무 것도 들리질 않았다.


"대감..."

"..."

"대감."

"..."

"대감!"

"..."

"죄인 이정李楨은 어서 사약을 받으라."

"..."


금부도사가 마침내 차가운 음성으로 호칭을 바꾸어 호명했다. 복창군이 비로소 시선을 사약에서 비로소 금부도사의 얼굴로 옮겼다. 이내 금부도사와 함께 동행한 최석정을 보았다.


"자네는...?"

"최후공술을 받으라...하셨습니다."

"또? 더 할 얘기가 어디 있다고."

"..."

"전하께서 내 최후를 지켜보라시던가?"

"..."

"혹여 내 아우들의 최후도 지켜보았는가?"

"전하께서 복평군 만큼은 살려두신다 하셨습니다."

"막내는...살려주시겠다?"

"예."

"그걸 어떻게 믿나?"


복창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목숨을 붙여두긴 할까. 서인들이 복평군 이연李㮒마저 죄주기를 청하면 왕도 못 이기는 척 져주면 그만이었다. 아니 차라리 다같이 똑같이 죽이는 게 자비로운 것일까나. 한날한시에 죽으면 아우가 죽는 고통을 맛봐도 되지 않을 것을.


하지만 살고 싶었다. 먼저 끌려나간 복평군 연㮒이도 살리고 싶었다. 이미 죽은 둘째 복선군 남楠이도 도로 살려내고 싶었다. 임창군은 그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고선 왜 자신들은 이처럼 지독하게 사지로 내모는 것인지 마냥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임창군은 살리고, 우리는 죽이는 이유가 무언가?"

"..."


석정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복창군은 공초를 더 쓸 생각이 없었다. 하긴 이미 복창군은 모든 공초를 제출했다. 복선군이 술사術士 정원로, 요인妖人 허견과 어울린 것을 알고 복창군 자신이 처음엔 만류했다, 그러다 허견과도 교류하게 되었다...그리 적어냈다. 하지만 역적 허견과 은밀한 모의를 한 혐의를 결국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복창군은 왜 석정 자신을 붙들고 계속 꼬치꼬치 캐어묻고 따져묻는 것인지 이상했다. 이렇게라도 목숨을 한숨이라도 더 붙여두고 싶은 건지.


"나리, 이만 나가시지요. 공초를 더 받아내실 것이 아니면."


보다 못해 금부도사가 끼여들어 석정을 채근했다. 복창군이 당장 죽기가 싫어서 석정을 붙들고 괜히 이말 저말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왕족 신분으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진 못하겠고 이렇게라도 좀더 살아있고 싶어서 좀스럽게 잔꾀를 부리는 건가 싶었다. 그러니 또 최석정이 걸리적거렸다. 당장 남간에서 내보내야 복창군도 다 포기하고 사약을 들이킬 터였다.


"..."


복창군은 그런 금부도사의 시선을 읽고 실소를 하였다.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곧 죽을 몸이라 이젠 금부도사에게도 우습게 보이는 참이었다.


더는 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서 하루만에 공초를 내고 죽음을 기다린 아우 복선군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복선군의 심기를 헤아린 왕은 사약 대신 교형을 내려서 더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그나마 참형에서 등급을 감하여 교형으로 선처를 베푼다며, 선심을 쓰는 척 그렇게, 아우의 목을 당고개에서 매달아 그 굴욕적인 죽음을 백성들이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더 알고 싶었다. 임창군은 살고 자신들은 죽는 이유를. 어쩌면 금부도사의 시선대로 한숨이라도 더 들이쉬고 내쉬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서도.


그런 복창군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요량인지 석정이 금부도사를 돌아보았다.


"내가 사약을 드릴테니 자네가 두고 나가게."

"네? 나리가요?"


금부도사의 두눈에 언뜻 비웃음이 비껴갔다. 홍유하에게 압슬과 낙형을 실시하다 도중에 죽자 충격으로 벌벌 떨던 위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사약을 드릴테니 오히려 나가 있으라니. 최석정은 못할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석정이 자신이 사약을 먹이겠다고 나서니 더 우스웠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다가 반복되는 학습으로 깨단하는 법. 제 주량을 알기까지 취하고 또 취해야 하고, 제 깜냥을 알기까지 실패하고 또 실패야 했다. 그러니 최석정도 이번 기회에 고생 좀 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왜, 못할 것 같은가?"

"아니 이건 제 일이라..."

"두고 나가면 되지 않는가. 어찌 됐든 자네는 사약을 전한 것일세."

"허면, 저는 어명대로 복창군께 사약을 전한 것입니다. 다 드시고...끝나면 절 부르시지요."


금부도사는 못 이기는 척 사약을 복창군의 무릎맡으로 밀어넣고 얼른 남간 밖으로 내뺐다. 하지만 남간을 아예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입으로 밝힌대로, 복창군에게 사약을 전하여 목숨을 끊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남간 앞을 지키고 서서, 복창군이 죽었다 하면 그때 다시 들어와서 숨이 끊어졌는지 그 여부를 확인할 심산이었다.


금부도사가 남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석정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복창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전하께선 중궁전하의 네번째 불행은 없기를 바라십니다."

"뭐? 그건 또 무슨..."

"한번, 두번, 세번...계속되는 중궁전하의 불행에 대한 의혹이 가슴 속에 꼬이고, 또 꼬이고, 그 진노가 이젠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매듭..."


복창군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고 석정을 쳐다보았다. 왕의 진노가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었다는 석정의 표현이 식도에 얹혀서 내려가질 않았다. 억울했다. 중궁이 세번 불행을 겪은 것이 이렇게 궐안에 피바람이 불 일인가 싶었다. 물증이 없으니 심증 만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화풀이를 하겠다는 왕의 심사에 가슴 속이 들끓었다.


"하여 끊어내려는 것이지요. 중궁의 안위를 위협하는 끈이란 끈은 모조리."


석정의 말은 그의 불난 가슴에 기름을 끼얹었다. 억울했다. 답답했다.


"아니 우리가 언제, 언제..."

"멀쩡하신 중궁전하의 자리에 당신들의 이종사촌인 오씨를 올릴 생각이었다지요."


석정은 복창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죽은 홍유하는 택군은 역모가 아니라고 믿고 자신의 죽음을 억울해 하다가 숨이 넘어갔고, 이태서도 끝내 불복하고 압슬과 낙형을 받다가 숨이 끊겼으며, 복창군 역시 중궁의 미심쩍은 불행은 죄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마지막 숨을 내쉴 터였다.


"중궁을 폐위하려 한 것도 역모라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심지어 무려 세번이나 중궁의 복중에 용종이 있었는데도 세번 모두 농간을 부렸다면, 그 또한 역모인 것을."

"아니...우린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했는데, 식중독으로 조산하고, 상극의 약재로 열증을 앓다 찬물을 마시고 소산하고, 비소 중독으로 난산 끝에 태아가 죽습니까?"


석정의 신랄한 비난에 복창군은 움찔했다. 자신도 진작 서후행과 손을 잡고 궐안 사정을 탐지해온 터였다. 중궁의 세번의 불행에 최소한 한번은 관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왜 다 우리 탓이야? 왜 다..."

"역시 한번은 관련이..."

"아니, 우리, 아니 난 모르는 일이야...억울해...억울..."

"이미 4년전 친잠례 때 오정창의 여식을 전하께 선보이려 하셨지요. 전하께서도 잘 아십니다. 아예 꾹꾹 눌러 담아두고 계시지요."


복창군은 할 말을 잃었다. 일찍이 외숙 오정창의 여식을 후궁으로 들여 결국 중궁에 앉히려고 모의를 하긴 했다. 그 어린 이종사촌이 워낙 자색이 빼어나서 얼마든지 왕의 마음을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친잠례 때 선을 보였지만, 왕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중궁이 그때 채상단에서 뽕잎을 따는 의식을 거행하다 실수로 뽕잎이 든 광주리를 쏟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처음부터 중궁만 쳐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때 왕이 중궁을 겉으로는 외면하는 척 속으로는 보호하는 듯한 느낌이 있긴 했다. 설마설마 하고 넘어갔더니 그날 이후 한번, 두번, 세번...그렇게 세번의 회임까지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차라리 중궁이 없어지지 않고서야 왕이 눈길을 돌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왕도 자신들이 없어져야 중궁이 무사할 거라 믿었던가. 그때 친잠례 때부터 이미 왕의 가슴 속에 살심이 차곡차곡 쌓여져 왔었던가.


"흥, 중궁을 지키려고 우리들을 모조리 베어내시겠다?"

"그러게, 중궁전하를 건드리진 마셨어야지요."


석정이 낮은 한숨을 흘려내며 하는 말에, 복창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신웃음에 가까웠다. 피식피식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와 묘한 냄새를 풍겼다.


"그런다고 우릴 다 죽여? 그런다고 중궁을 살릴 수나 있을 것 같은가? 어림 없지, 어림 없어..."

"그게 무슨..."

"어림 반푼어치도 없고 말고..."


복창군은 실성한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애초에 선대왕은 서인들에게 죽었다. 그게 자신들 남인들과 종친들 사이에서 나도는 말이었다. 그러니 왕이 서인들에게 적개심을 갖는 것도 지당했다. 결코 서인들과 손을 잡을 수 없는 왕이 중궁을 지키려고 서인들과 손을 잡는다?


복창군은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 지 눈길을 돌려 무릎맡의 사약 사발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위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숨결을 가닥가닥 흩어놓을 사약이 느낌 탓인지 아까보다 색이 더욱 진해보였다.


석정과 대화를 하는 사이에 잠시 사약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다. 사약의 존재에 생각이 다시 미친 순간, 심장이 무섭게 쏠리는 기분이었다. 복창군은 얼굴에서 핏기가 하얗게 가신 채로 두 손을 뻗어 사약 사발을 부여잡았다.


"대감...!"

"이미 전하가 죽든, 중궁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것을..."


복창군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약을 입가로 가져갔다. 먼저 목이 졸려 죽은 아우 복선군의 목이 눈앞을 가렸다. 목을 매는 고통 속에서 그 눈알은 튀어나오고, 혓뿌리까지 뽑히다시피 했던 그 끔찍한 시신이 눈속을 파고들었다.


남아, 나도 간다...

연아, 먼저 가마...너는 천천히 오거라...


복창군은 비장하게 두눈 질끈 감고 사약을 한모금 두모금 꿀꺽꿀꺽 사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석정은 흠칫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람이 목을 매어 죽고, 독을 먹어 죽고, 그럴 때 증상이 다양한 것을 석정도 잘 알았다. 사약을 먹고 죽는 시체라고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저 목이 붙어있다 뿐이지, 몸은 끔찍하게 뒤틀리는 터였다. 마찬가지로 눈이 튀어나오고, 혀가 길게 뻗고, 피가 가닥가닥 흘러나올 터였다. 석정은 더는 자리를 지킬 엄두가 나질 않아 황망히 남간을 나섰다.


남간 밖에선 아까 자신이 하던 양을 흉내내듯 금부도사가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참이었다.


"유도사."

"어? 끝났습니까?"


금부도사가 뒤를 돌아보고 묻는 말이 석정의 귀에 삭막하게 들렸다. 끝...이라...그렇게 건조한 말로 해야 하나. 석정은 대답하기 싫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헌데 허연 것이 반짝이며 하늘 한가운데에서 튀어나와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뚝 떨어져 내렸다.


"저기 별똥별이..."


금부도사는 하늘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남서쪽으로 그어보였다. 문랑 최석정이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자신도 함께 시선을 붙였을 뿐인데, 별똥별이 눈에 들어왔으니 마냥 신기했다. 그는 석정도 흥이 날 줄 알고 쳐다보았지만, 뜻밖에도 이 하회탈 같은 문랑은 웬일로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신 얼굴이었다.


별의 흰 꼬리가 남서쪽으로 닿았다. 석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펴질 못했다. 유성이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떨어졌다. 곤방에서 탁기를 쌓아서 비스듬히 간방에 올려두어 귀신이 드나든다 하여, 이들 곤방과 간방은 흉하디 흉한 귀문鬼門이라 일컬었다. 하필이면 복창군에게 사약을 내리는 이 순간에 유성이 귀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으니, 어쩐지 더욱 을씨년스런 밤이었다.


"저게 무슨 징조래요?"

"동북 간방에서 떠서 서남 곤방으로 지니, 그저 북두칠성의 행로와 일치할 뿐이라네."


석정은 애써 덤덤히 대꾸했다.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별, 북두北斗의 길로 귀문에 들었으니 오늘도 귀하디 귀한 왕족의 피를 거두어 갈 모양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이 북녘으로 날아간다 하니, 저 유성은 복창군의 넋을 싣고 날아가는 것이려나.


"나으리들! 나으리들! 복창군이...죽었습니다!"


남간에서 간수가 굳은 얼굴로 달려나왔다. 금부도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을 삭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드디어...끝났군."

"..."

"같이 가서 시신을 보시겠습니까?"

"..."


석정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돌아섰다. 등뒤에서 금부도사가 재차 그를 불렀지만 그저 낭관청사로 직행할 뿐이었다. 어쩐지 두 다리가 무거운 납덩이가 되었는지 다리를 질질 끌어야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복창군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유언인지, 폭언인지, 조언인지, 저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 이미 전하가 죽든, 중궁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것을...

-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살 걸세.


복창군의 목소리가 뇌리에 떠오르는가 싶더니, 또 다른 목소리가 어느틈에 끼여들어 함께 떠돌았다. 석정의 기억은 유독 강바람이 몰아치던 당현堂峴 자락을 더듬었다. 일각만 더 걸어가면 용산강이 나오다 보니 바람이 사나웠다. 온갖 묘지들이 즐비한데다, 당집까지 있어 분위기도 을씨년스러웠다. 숱한 역도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곳이라 원귀들이 검은 연기처럼 도사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석하라면 얼씬도 못할 거라 생각하며 한걸음한걸음 내딛어, 복선군 앞에 이르렀더니, 하얗게 웃는 참이었다.


- 살려줘.


그렇게 의연하던 복선군도 죽음에의 공포를 이겨내진 못하였다. 차라리 복창군처럼 스스로 사약을 마셨더라면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을. 왕은 하필 유독 자존심이 센 복선군에게 만큼은 왕족다운 죽음이 아닌 교수형을 선사했다. 사형수나 태우는 소달구지에 탄 채로 당현에 끌려온 복선군은 차마 두눈 뜨고 지켜보기 힘들 만큼 심신이 망가져 있었다. 이 치욕을 끝내달라며 달관한 듯 공초를 바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 두눈을 형형하게 번뜩이며 한다는 말이 흉칙하고 끔찍했다. 둘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니...복창군과 복평군 둘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싶었다. 둘중 하나는 살려야 한다는 말 같기도 했다. 한사람이라도 살려달라는 애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복창군의 마지막 전언이 심상치가 않았다.


둘 중 하나...


이제 보니 왕과 중궁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던가. 그냥 악담일 터였다. 서인들이 중궁과 왕을 동시에 저울에 올려놓을 리가 없었다. 석정은 티끌 같은 불안을 애써 머릿속에서 털어내었다. 왕이 중궁을 지키고자 이번 혈사를 일으킨 것을 저들도 알았다. 아니까 저들도 악담을 퍼붓는 터였다. 왕은 결코 중궁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석정은 가만히 시선을 들어 밤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한 생명을 집어삼킨 하늘은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조용했다.


"집에 간다..."


기어이 금부도사가 싱글벙글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이 석정의 귓전을 스쳤다. 집이라...집이란 한글자를 떠올리면 언제나 아내가 쌀독 앞에 웅크리고 앉아 되로 바닥을 박박 긁는 장면부터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딸 이소와 아들 창대도, 또 막내도 그 뒤로 쪼르르 쭈그리고 앉아, 오늘 밥은 먹을 수 있게 될런지 어미의 눈치를 보고, 손을 빨다가 또 손을 빠는 버릇 때문에 어미한테 혼쭐이 나곤 했다. 그렇게 집이라는 한 글자가 가끔은 숨통을 조여서 탈이었다. 자식새끼 삼시세끼 거둬먹일 걱정에 집이라는 단어가 좋아졌다가도, 싫어졌다가도 했다. 복선군의 죽음을 두고 끝냈냐고 묻던 금부도사의 말을 혐오하면서도, 그래도 막상 집에 간다니 가슴 한켠 기분이 좋은 것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싶었다.


"아...끝났다, 끝났어..."

"..."


금부도사가 기분 좋게 혼잣말하는 것을 석정은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무려 한달 가까이 끌었던 옥사였다. 그 한달을 자신들은 지옥地獄 속에 있었다. 피와 살이 튀는 장형을 집행하고, 또 피와 살이 타는 낙형을 집행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죄인 아닌 죄인들의 반응을 즐겨야 하는 이곳에서 자신은 이제 해방이었다. 항상 금부에 몸이 매여 있는 금부도사마저 이렇게 좋아하는데, 사실은 국청이 폐쇄되면 훌훌 털고 떠나게 되는 자신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복창군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좋아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달간 가슴 속에 꾹 얹힌 것이 쑥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아이고 다 끝났다! 다 끝났어! 이제 니들 다 죽었다! 다 나한테 죽었어!"


석정의 발길이 낭관청사의 기단에 닿은 순간, 갑자기 방정맞게 깝죽대는 정원로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남간에서 정원로가 수의가 아닌 행의를 말끔하게 입고 나왔다. 최석정이 기단에 올라서다 말고 예민해진 눈초리로 돌아보니, 정원로가 요란스런 팔자걸음으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다가오는 참이었다. 정원로는 최석정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턱을 치키고 으르렁거렸다.


"흉서사건 기억하지?"

"..."

"이유정이 죽고 나서 고변자인 이인징, 이휴징이 당상에 오른 거, 알려나 몰라?"

"..."

"알지?"

"..."

"그 말은 가선이든 절충이든, 이몸이 떼어놓은 당상堂上이다, 이 말씀이야."


강화흉서 사건이 종결되자마자 이유정을 고변한 공으로 이인징과 이휴정이 가자加資되어 당상품계에 오른 일을 정원로가 기세 좋게 정원로가 들먹였다. 하지만 석정은 코앞에서 깐족대는 정원로를 보며 고개는 커녕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당상이 되면 네놈부터 족쳐놓겠다 이거들랑."


정원로는 금세라도 석정을 입안에 집어삼키고 씹어먹을 기세였다. 한번 들어가면 무조건 송장이 되어 나온다는 남간, 그 남간에서 죽다 살아났으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인징, 이휴징이 당상관 품계를 얻었으니, 자신도 높은 품계가 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고만장해진 참이었다. 최석정 덕분에 죽다 살아났으니 이 빚은 꼭 되갚아주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그자들이 당상 품계를 얻은 게 네놈과 무슨 상관이라고."


석정은 차갑게 응수했다. 이미 왕도 정원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가 않았다. 그나마 정원로의 혀끝에서 간당간당한 신범화란 이름을 무기삼아 김석주의 양손에서 홍문관 대제학이란 떡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탓에 두고 보는 터였다. 그런데 정원로에게 곱게 당상품계를 내려줄 리 만무했다.


"뭐? 아니 아까부터 알 만한 양반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몸이 당상관 품계를 얻게 생겼다니깐. 이몸이 영감소리 듣게 생겼다니깐."

"영감? 영감? 괜히 야무지게 헛꿈꾸지 말고 집에 가서 땡감이나 다부지게 씹게나. 곧 내가 다시 너를 잡아들일 테니."


석정은 집게손가락을 뻗어 정원로의 이마 한복판을 콕콕 찍어누르며 씨익 웃었다. 이 집게손가락이 이미 정원로의 이마에 역모의 역逆자를 새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자신이 추안을 올렸다. 그렇게 석정의 두눈엔 정원로의 이마에 새겨놓은 검은 자자刺字가 보이는 듯 했다. 그런 정원로를 왕이 곱게 놓아줄 리도 없었고, 당상품계를 내려줄 턱도 없었다.


"내 말을 안 믿는군?"


정원로의 눈동자가 부서지고 으깨진 사금파리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자신이 아무 벼슬도 없다고, 허울 뿐인 품계만 얻는다고 이 꺽정이가 자신을 무섭게 보지 않고 우습게 보는 느낌이었다. 이 작자가 자신을 보는 두눈이 두려움으로 떠는 꼴을 보고 싶어졌다.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슈, 최문랑 나리?"

"이젠 응교일세."

"아, 그러셔요? 하긴 국청도 파했으니...뭐, 부응교 나리..."

"응교라니까."

"응교?"

"그렇게 되었네."


석정이 담담히 말했다. 그 눈꼴 신 모습을 보니 정원로는 속이 뒤틀렸다. 신물이 넘어와 참기도 힘들었다. 자신이 감방에 있는 사이에 그새 최석정은 또 관직이 뛰어 부응교에서 응교가 되었으니, 이런 추세라면 당상관이 되는 날도 머지 않았다. 왕의 신임과 총애가 각별하니 이토록 거만을 떠는 모양이었다. 최석정을 보는 정원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사금파리처럼 뾰족한 날이 섰다. 정원로는 석정의 눈앞으로 한발 더 더 가까이 다가서서 자신의 살쾡이 같은 눈동자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뭐 그렇다 치고...이보슈 최응교 나리. 당신 나 잘못 건드렸어."

"뭐?"

"한번만 더 날 건드렸단 봐라. 당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테니."

"흥, 내 주변에 겨우 네놈 때문에 다칠 사람이 있을 리가? 겨우 협잡이나 하는 네놈한테 당할 만큼 행실 허투루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거늘."


석정은 자신 만만했다. 자신은 허견과 달랐다. 허견과 어울리다 이번 옥사에 휘말린 자들은 하나같이 동정의 여지가 없을 만큼, 평소에도 허견을 거들어 여인을 납치하고 욕보인다는 소문이 떠돌던 놈들이었다. 심지어 이번에 귀양간 민종도 조차도 허견과 함께 차옥을 윤간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허견이 계집을 납치해서 며칠 데리고 놀다가, 절친한 압객들이나 머슴들한테 던져준다고도 하니. 자신 주변에 처신이 허술한 자는 딱 한명 오도일 정도였고, 그나마도 술을 좋아해서 곧잘 술김에 남의 집에 대문에 방뇨를 하는 정도였다.


정원로는 자신의 협박이 최석정에게 통하지 않자 더욱 분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켕기는 구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최명길의 후손이라 하여 남인이고 서인이고 하나같이 털어내고 끌어내려 들다 보니, 사방이 적이라서 더욱 행실을 삼간 탓일까. 그렇다곤 해도 분명히 어딘가에 최석정에게 뼈아픈 일격을 가할 빈틈이 있을 터였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 없는 법이었다. 저 두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먹고 말리라고, 정원로는 이를 갈며 돌아섰다. 활짝 열린 의금부 중문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이곳을 나가고 나서 생각할 일이었다. 지금은 정말로 여기를 나가고 싶었다.


이틀이 지났다. 정원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져 누운 채로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곧 당상관의 품계를 포상으로 받을 거라 소문이 난 덕인지, 꼭두새벽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해송이며 두부며, 귀한 먹거리를 짊어지고 그의 집으로 모여들고, 또 몰려들고 했다. 그중에는 그간의 노고와 고초를 위로하겠다고 찾아든 신범화도 있었다.


"왜 왔나? 자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내가 누구 땜에 고 개고생을 했는데? 누구 땜에 요 생병이 났는데?"


정원로는 병석에 누운 채로 신범화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살짝 길쭉한 얼굴에 매부리코를 한 신범화는 눈가에 주름이 잡힐 만큼 진한 눈웃음으로 정원로의 머리맡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하늘에 별 따기요, 당상 따긴데, 그 만한 고생은 치러야..."

"뭐?"

"그 구리관자를 금관자, 아니 옥관자로 바꿀 준비나 하시게."

"흥, 그저 입은 살아서..."


정원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내 눈동자가 영활하게 반짝였다. 일단 감투라도 쓰고 볼 일이었다. 그래도 최석정이 또 자신을 물고 늘어질 지 모르니 거기에 따른 대비는 든든히 해 두어야 했다.


"이번에 말이야. 내가 남간에서 그 고생을 하면서 말이야. 자네와 병판대감이 날 헌신짝처럼 버리려 들어서 그 배신감에 아주 배운 바가 크다네."

"아니...우리가 언제 버렸다고..."

"그게 버린 게 아니면? 버린 게 아니면?"

"아니...우리도 자네가 잘못될까 참으로 애가 탔으이...헌데 자네도 알다시피 그 꺽정이가 웬수지 뭔가..."

"꺽정이 그놈...내 당상만 따놓으면...아주 아작아작 씹어먹고 말 테다..."


정원로가 벼르고 또 벼르는데, 장지문 밖에서 웬 낭랑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정원로는 어서 나와 성지聖旨를 받들라!"

"..."

"정원로는 어서 성지를 받들라!"


정원로는 흠칫 놀라 신범화를 쳐다보았다. 신범화 역시 어리둥절히 장지문 쪽을 쳐다보곤 이내 두눈을 번뜩이며 정원로를 돌아보았다. 정원로의 기대와는 달리 왕이 당상품계를 내릴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역모를 고변한 공도 있고 하니 구색을 맞춰주진 할 터였다. 그래야만 아까부터 골이 잔뜩 나 있는 정원로를 달래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헌데 계속해서 들려오는 음성이 어쩐지 귀에 익었다.


"정원로는 어서 성지를 받들라!"

"나가 보세!"


신범화가 얼른 문고리를 잡아 장지문을 열어젖히는데, 몸을 일으키던 정원로가 별안간 신음을 흘리며 도로 드러누웠다. 온몸이 시근거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신범화는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열린 장지문 틈새로 시선을 던져 목소리의 임자를 확인하려 하는데, 정원로가 앓는 소리로 득달같이 닦달했다.


"뭐하나? 어서 일으켜주질 않고?"

"어?"

"내가 누구 땜에 이꼴인데!"

"알았으이..."


신범화가 입맛을 쓰게 다시며 일단 문고리를 놓았다. 그토록 오래 그 축축하고 눅눅한 남간에서 갇혀 있었으니 병이 날 만도 하다고 애써 이해하며, 그는 정원로를 먼저 부축하고서야 이미 살짝 열려 있던 장지문을 다리를 뻗어 툭 밀어젖혔다. 미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이미 음성의 주인은 감을 잡은 터였다.


그렇게 문을 열고 보니 마흔 중반의 홍단령이 소반에 성지를 받쳐 든 승전색과 함께 문앞에 서 있다가 화들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서는 참이었다.


"어구구!"

"어르신?"


신범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보다 열살은 더 많은 먼 친척뻘의 좌부승지 신후재였다. 같은 평산신씨라는 것 외엔 그다지 족보로 꼬여 있지도 않아서 그다지 달갑지도 않았다. 더 고까운 것은, 그 사내가 서 있던 자리로 시선을 내리고 보니, 하필이면 자신의 귀한 태사혜에 흙자국이, 그것도 목화 밑창자국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내 태사혜를..."

"아, 미안, 미안하이..."

"겨우 보름 전에 석주형님이 사주신 것인데...보름 밖에 안 됐는데..."

"미안하이..."


위풍당당한 홍단령을 입고 신후재는 은근슬쩍 켕기는 표정이 되어 거듭 사과했다. 하지만 입꼬리엔 슬그머니 웃음꽃이 핀 것이 신범화의 눈엔 어쩐지 수상쩍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자신의 신을 밟은 느낌이었다. 낌새를 살피려고 승전색을 쳐다보니, 승전색은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문을 열어준 행랑아범은 알겠거니 싶어서 승전색의 어깨너머로 문간을 노려보니 행랑아범은 노둔한 눈꺼풀을 껌뻑거릴 뿐이었다. 역시나 미심쩍어서 신범화는 신후재의 얼굴을 슬쩍 흘겨보았다. 하지만 신후재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낯빛을 바꾸어 그들을 채근했다.


"정원로는 어서 성지를 받들라!"

"예? 예에..."


할 수 없이 신범화는 정원로를 부축하여 사랑채 밖으로 걸어나왔다. 열린 장지문쪽 툇마루로 내려서면 더 가까운 것을, 정원로가 몸이 무거운 탓에 구태여 대청쪽 장지문을 새로 열고 빙 돌아서 내려서야 했다. 느낌 탓인지 그 틈에 자신의 태사혜가 또 흙이 묻어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상대는 홍단령까지 갖춰입고 교지를 전하러 온 지체높은 좌부승지에다 연배도 더 높은 문중어른이기도 했다. 그저 끙끙 앓으면서, 돌아가서 석주형님한테 이르겠다고 속으로 벼르면서 정원로와 함께 꿇어엎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정원로는 허견과 이남의 흉모를 고변하여 역당을 토벌하게 한 공로가 실로 크다. 하여 특별히 종9품從九品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한다."


종9품? 참봉? 등줄기를 찌르는 신후재의 음성에 정원로와 신범화는 귀를 의심하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참봉? 이게 무슨 춘삼월에 참외 익어가는 소리인지. 자신들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아니 신후재의 입이 비뚤어졌나 싶어서 빤히 신후재를 쳐다보았지만, 신후재는 눈썹을 까딱하여 비웃음만 슬쩍 흘릴 뿐이었다. 정말로 역모를 고변한 포상이랍시고, 종9품 남부참봉에 봉해진 모양이었다.


"참말로 참봉이..."


참다 못해 정원로가 기어이 물었다. 신후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교지를 흘끗 내려다보곤 쐐기를 박았다.


"종9품 남부참봉일세."

"..."


정원로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해도 너무했다. 역모를 고변했는데 고작 종9품 남부참봉이라니. 이게 참봉이야, 참외야? 마구 퍼붓고 싶었지만, 어쩐지 쌀쌀한 냉소를 머금은 신후재 때문에 오히려 위축되고 말았다.


"종從...종從 "


궁둥이가 뒤로 빠져버린 가엾은 정원로를 흘끗 내려다보고 이내 시선을 돌려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신범화를 보며 신후재는 말을 이었다.


"자네의 그 석주형님께서 내려놓은 대제학 자리엔 약천공若天公이 임명되었으이."

"약천...공이면...?"


신범화가 자못 놀란 눈으로 되묻는데도 신후재는 혹시나 모를까봐 노파심을 발휘해서 사뭇 친절하게 덧붙였다.


"약천 남구만. 그 꺽정이의 스승 말일세."

"..."

"그리고 이번에 옥사를 처리한 공로로 문랑들의 품계를 일체 정3품 통정通政에 가자하라는 비망기가 내렸으이. 꺽정이는 특별히 종2품 가선嘉善에 봉하라 하셨으이."

"뭐?"


신범화와 정원로는 완전히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문랑들을 정3품 통정대부에 봉하고, 최석정을 종2품 가선대부에 봉하라는 비망기가 내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최석정이 한 일이 뭐가 있다고? 허견과 복선군을 처치한 건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최석정이 콩고물을 주워 먹었다.


"말도 안돼...가선, 가선이라니?"

"그러니 말일세. 자궁資窮(준직과 같은 말. 당하관의 상한선)을 거치지도 않은 꺽정이가 가선이라니. 이조와 사헌부에서 모조리 들고 일어날 걸세. 하다 못해 가선에서 통정으로 깎을 거라나. 또 통정에서 통훈通訓으로 깎아서 준직으로 주저앉힐 거라는데. 그래도 준직일세. 정3품 준직, 준직."

"..."


정원로는 물론 신범화까지 망연자실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장지문을 열어젖힐 때만 해도 얼핏 하늘이 푸르고 날씨도 화창한가 싶었더니, 그새 날씨가 궂었다. 하늘이 왜 이리 변덕스러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흉서의 범인이 이유정이란 사실을 고변한 이인징, 이휴징은 가선과 통정에 봉작되었는데 허견과 복선군을 상변한 정원로는 기껏 참봉이라니...그리고 최석정은 이대로 당상관이 될 기세라니...이럴 수는 없었다.


작가의말

1. 실제로 삼복의 변에서 복평군 이연만 목숨을 건지고 귀양을 갔는데, 인터넷의 백과사전에는 대부분 복평군도 함께 사약을 받았다거나, 귀양을 가는 길에 사사되었다고 등재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록을 보면 이후로도 수년동안 이연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친 데 이어, 1690년 3월 29일에도 전前 복평군 이연이 이남을 위해 격쟁하여 청원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2. 복창군이 죽고 국청이 파한 후에 최석정이 가자되었는데 준직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조에서 몇일동안 줄곧 개정을 요청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품계가 적혀있지 않아서 정3품 통정인지 종2품 가선인지 애매한데, 준직을 거치지 않았으니 개정해달라는 내용을 미루어 봐선 종2품 가선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서 상상으로 보완했습니다. 결국 이때 통정대부로 봉해졌습니다.


3. 당고개는 신당, 즉 당집이 있는 고개를 가리키는 말로, 서울 용산의 당고개, 서울 당고개의 당고개 등 몇군데가 있었습니다. 실록을 찾아보니 용산쪽 당고개임을 알 수 있는 정황이 있어서 용산쪽 당고개로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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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99 히로와노다
    작성일
    14.04.28 10:00
    No. 1

    월요일 아침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운 업~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8 03:50
    No. 2

    히로와노다님, 제 글에서 기운을 얻으셨다니 글쓰는 보람이 있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4.28 11:46
    No. 3

    마지막까지 저주하고 떠나는건....영 씁쓸하네요.

    최석정 품계 롤러코스터는 같이 타면 참 스릴 넘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8 03:52
    No. 4

    그러게요. 그런데 정말로 심한 씬을 아직도 못 그려서...실록에도 있는 사건인데, 원래는 제가 상상으로 구상했다가, 혹시나 싶어서 실록을 찾아보고 기함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라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4.28 12:34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4.28 13:05
    No. 6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4.28 13:00
    No. 7

    정해진 길을 바꿀 수는 없겠지요? 숙종이나 중궁이 더 애처롭게 느껴지네요.
    월요일 부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8 03:53
    No. 8

    진홍의 엔딩만 바꾸라는 압력도 슬쩍 들어옵니다. ㅎㅎ; 제가 워낙 해피엔딩주의자라, 저 자신도 쓰면서 부담감을 꽤 많이 받구요. 다들 미워하시는 허견의 엔딩을 쓰면서도 사실 눈물 좀 쏟았는데...진홍의 엔딩은 쓸 자신이 없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4.29 08:13
    No. 9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8 03:53
    No. 10

    넵, 뚱뚱한멸치님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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