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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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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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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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9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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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77

DUMMY

석정은 그 자리에서 혼비백산魂飛魄散 해버렸다. 대궐도 아닌데, 궐외각사들이 위치한 이곳 견평방堅平坊에 중궁이 왔다. 그것도 평범한 궁인의 복장으로 둔갑하여. 너무도 놀라서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방금 내뱉아선 안될 네글자를 내뱉았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여기 당상청사 및 낭관청사 뒤편 연못엔 다른 이들이 없는 탓에 누가 엿들을까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갑시다."


진홍이 너울자락을 내리고서 돌아섰다. 석정은 난처한 얼굴로 발만 제자리에서 굴렀다.


"중궁전하..."


난감한 심정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도 나 몰라라 하고 진홍은 그대로 돌아서서 걸음을 떼었다. 낭관청사와 서간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나더니, 국청 마당으로 들어서서 서간 앞으로 바짝 붙어 지나갔다.


이미 정원로가 공초를 다 바쳤는지, 벌써 허견이 끌려와 장판에 엎드렸다. 전날은 볼기를 벗겨 가짜로 위협만 하였지만, 이제는 진짜로 형장을 가할 참이었다. 담당 문랑 또한 최석정이었다. 하지만 석정은 더는 입도 벙긋 못한 채로 진홍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최문랑, 어서 하게."


호두각 그늘 아래에서 팔자좋게 위관석에 앉아 쉬면서도, 판의금 이정영이 못내 불만어린 음성으로 독촉했다. 이정영의 뒤편에서 좌우로 시립해 있던 김준상을 비롯해서 다른 문랑들도 저마다 눈짓과 손짓으로 그를 보채었다. 하지만 석정은 더는 국청 뜨락에서 지체할 수가 없었다.


관료가 처음 출사出仕를 하면 관료들은 대부분 왕에게 사은을 하여 또 중궁에게도 따로 사은을 하는 법이었다. 관료들이 품계와 관직이 오를 때마다 내명부의 여인들에게 매번 사은을 행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인 만큼 처음 한번에 그쳤다. 그러니 지금 여기 국청 뜨락에 있는 이들은 모두 한번쯤은 중궁의 얼굴을 봤을 터였다. 저들이 중궁을 알아봐선 곤란했다. 최석정은 더는 군말 않고 진홍의 뒤를 따랐다.


"자네, 지금 어디 가는가?"


이정영이 당황하여 소리쳐 부르자, 최석정은 난처한 얼굴로 이정영을 돌아보면서도 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중궁전하께서 궁을 납시었다, 금부로 듭시었다, 둘중 한가지도 세상이 알면 안되었다. 석정은 그저 마음이 급하였다.


장판에 엎드린 허견은 석정을 데리고 국청을 빠져나가는 너울 쓴 여인을 의아히 쳐다보았다. 누구기에 이렇게 최석정을 금부에서 빼돌린단 말인가. 저자거리에서 흔히 보는 맵시는 아니었다. 바람결에 배래며 도련이 나풀거리는 것이, 온몸에서 붉디 붉은 연꽃잎이 너울거리는 느낌이었다.


허견은 자신이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당장 자신의 명운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라섰는데, 그 높디 높은 장대 위에서 여체女體가 눈에 들어오다니.


하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직 형장을 맞기 전이라서, 당장 문랑인 최석정이 추국도 집어치우고 부랴부랴 국청을 떠나는 모습에 한숨 돌리고서, 그래서 더 여인이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여인을 쳐다보는 허견의 두눈에, 한줄기 바람이 너울자락을 살짝 들추었다. 검은 너울 아래 흰 턱선, 붉은 입술 사이 흰 이, 흰 눈망울 속의 검은 눈동자가 얼핏 허견의 시야로 들어왔다. 보일락 말락 감질나게 시야에 펄럭인 그 얼굴은 묘하게도 처음 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허견?


여인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너울자락이 들뜨면서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허견의 두눈에 똑똑히 보였다. 여인이 허견 자신을 알아봤다. 허견은 너울 쓴 여인을 좇아서 고개를 돌려서 그 옆얼굴을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누굴까, 누구기에 자신을 보자마자 알아본 건가. 대체 누구기에.


"..."


석정은 누가 볼세라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앞서가던 진홍을 앞지를 정도로 그 보폭도 큼직했다. 진홍은 그런 석정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마냥 느긋하게 걸었다. 남간 사이의 솟을대문을 휘적휘적 지나와서 망문望門으로 나온 뒤에야 비로소 석정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바람이나 쐬라면서요."

"..."

"재산루로 갑시다. 난, 거기 있는 그림을 확인해야겠어요."

"..."


석정은 할 말을 잃었다. 재산루에 걸려있는 그 그림에 필시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구중심처에 틀어박힌 중궁이 제발로 궐밖으로 나왔다. 여느 평범한 궁인 또는 여염의 여인인 척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서. 재산루의 그림이, 여생과 희려가 도대체 무슨 의미기에 그녀를 궐담 밖으로 불러낸 것인지.


난 죽었다.


최석정은 쓰디쓴 한숨을 삭였다. 이미 왕은 자신에게 경고했다. 중궁이 있는 곳이 곧 자신이 있는 곳이니, 섣불리 중궁을 만나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그 검은 동공에서 솟구칠 것 같은 세모송곳 끝이 보이는 듯 하였다. 헌데 중궁은 재산루로 가야겠다니. 석정은 한숨섞인 미소로 답하였다.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광통교 어귀에 약방이 한곳 있습니다. 오는 길에 한번 들러주시겠습니까?"

"..."


굳이 시시한 조건을 달고서, 이 벌건 한낮에 석정은 중궁과 함께 재산루 앞에 섰다. 밤이 아닌 낮에 와서인지 바람소리가 요란스레 고막을 긁어대진 않았다. 그 대신에 층암절벽 틈새로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들이 서로 다른 향기로 코끝을 간질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조잘조잘 지저귀는 새소리도 마냥 평온했다. 낮이라선지, 재산루의 사병들도 활과 칼로 그들의 심장을 겨누는 대신, 붓과 책으로 반기는 참이었다.


이렇게 낮과 밤이 다른 공간이라니.


최석정은 문득 이 재산루를 세운 김육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호위편비지청扈衛偏裨之廳이라 써진 현판을 올려다보는데, 난간으로 훌쩍 다가서는 까무잡잡한 얼굴이 보였다.


"또 오셨습니까?"


석하가 반갑게 웃었다. 석정은 등뒤의 진홍의 존재를 의식하고 구김살이 채 펴지지 못한 웃음을 어색하게 흘렸다. 석하는 석정의 어깨너머로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묘령의 여인이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석정의 뒤에 서 있었다.


누구?


석하는 눈시울을 일그러뜨리며 의아히 석정을 쳐다보았다. 웬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일까. 그 부인 경주이씨인 것인지, 아니면 그 딸 이소인 것인지. 하지만 사모관대 차림을 보아하니 궐에서 오는 길인 듯 하였다. 그러니 처자식을 데리고 재산루를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를 대동했을 리도 없었다. 석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분은 뉘신지...?"


석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면서, 나직한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우선 앞장서서 재산루로 계단을 올라서며 그는 뒤따르는 진홍을 흘끗 곁눈질로 살폈다. 항시 남들보다 높은 곳에 거하는 여인이, 오늘따라 재산루를 오르는 데에 지친 기색을 드러내었다. 남산자락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도 힘들었을까.


석하는 계단쪽으로 다가서며, 맞은편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너울 쓴 여인을 유심히 내려다 보았다.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틀어쥐고 계단을 오르는 걸음걸이가 유독 부자연스러워보였다. 다리가 불편한 것인지, 평소에 워낙 귀하게 살아와서 계단이 불편한 것인지. 결국 여인은 오른손으로 너울자락을 걷어올렸다.


맑은 살갗에 밝은 혈색이 감도는 얼굴이 햇살 아래 환히 드러났다. 석하는 이상하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여인을 계속해서 내려다 보았다. 여인의 얼굴을 오래도록 쳐다보는 실례를 범하지 않는 성품인데도 묘하게도 시선이 붙어버렸다.


"따님이신지?"

"뭐?"

"이소...맞나요?"

"우리 이소?"


먼저 축대를 올라 위층에 다다른 석정은 어이가 없어서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소가 나이가 몇인데. 이제 열다섯인데. 물론 열다섯이면 스물의 여인과 체형 만으로는 분별이 안될 수도 있었다. 특히나 너울로 얼굴을 가린 상태라면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단을 오르느라 너울을 벗었다. 헌데도 이소로 착각하다니.


"자네 우리 이소 얼굴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아...제가 좀..."

"내 마누라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더니."

"제가요? 언제요?"


석하는 실수를 깨닫고 눈가를 실룩거렸다. 평소 여인네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다. 아마 길에서 마주쳐도 몰라볼 터였다. 여인들이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다 해도 이목구비는 고스란히 드러내는 셈인데도, 장옷으로 머리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려버리면 석하는 그냥 헷갈렸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 처럼 마냥 흐리터분하여 구분을 못했다. 하물며 한달 전도 아니고 3년 전에 보았던 이소의 얼굴은 더욱 안개속이었다.


"자네가 아직 장가를 못가는 이유를 알겠으이."


석정은 석하를 보고 혀를 찼다. 3년 전에도 석하는 미혼이었는데, 3년 후에도 미혼이었다. 이놈은 여인에 대해 특별히 신경이 무딘 게 틀림 없었다. 이소처럼 어여쁜 아이를 기억조차 못하다니. 한번 지나가면 모두가 뒤를 돌아보는 그 아이를, 기억조차 못하다니. 무슨 저주라도 받았는지 여인의 얼굴 자체를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게 한심했다. 그나마 이름이나마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용하였다.


"허면...뉘신지..."

"..."

"가만, 궁녀 같기도 하고..."

"여생이라 하오."


석정이 뜸들이는 사이 겨우 계단을 마저 올라온 중궁이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답하였다. 석정의 어깨가 굳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석하가 흠칫 놀라 중궁을 돌아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홍은 이내 너울자락을 도로 내리면서 흐릿하게 비치는 너울너머 석하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차분히 응시했다. 검게 그을린 살갗만 빼면 이목구비가 지아비를 닮았다. 지아비에게도 청풍김문의 피가 흐르는 탓일까. 아니면 이자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여생? 허면 저 그림들을 그린..."


석하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너울 너머로 비치는 진홍의 두눈을 응시했다. 얼핏 보기에도 스물즈음...혹은 더 어릴 지도 몰랐다. 이리 어린 나이에 그리 빼어난 그림들을 그리다니. 승윤이가 감탄하여 수집하는 것만 봐도 하늘이 내린 솜씨였다. 게다가 은근히 사내의 눈길을 끄는 맵시까지. 헌데 보면 볼 수록 옷차림새가 궁녀 같았다.


"화압 때문에 왔습니다."

"화압?"

"제가 화압을 만든 건 최근의 일인데 여기 그림들에 화압이 있다 하니...제 그림들이 맞는지, 잠시 확인해도 되옵니까?"

"제 친한 아우가 사온 것입니다. 당연히 위작일 리는 없지만...그러시지요."


석하가 선뜻 승낙하자, 석정은 어깻죽지가 온통 굳어버린 느낌으로 진홍을 돌아보았다. 지금 중궁이 무얼 하려고 드는 건지, 느낌이 이상했다. 다짜고짜로 자신을 앞세워서 재산루를 찾아오더니 그냥 그림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위작僞作을 의심하여 확인하겠다고 나섰으니.


하지만 중궁은 더는 걸을 기력도 없는지, 대뜸 아래층 난간에 기대어 서서 빈주먹으로 양쪽 다리를 차례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곤 이내 계단 앞에 걸린 붉은 비단족자에 시선을 못박았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동공이 활짝 열린 채로 얼어붙었다.


김석주...


진홍은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시꺼먼 손이 뛰쳐나와 목을 조르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검은 손이 그녀의 어깻죽지를 꽉 잡고서 수십발의 화살이 날아드는 과녁 한가운데에 묶어놓은 기분이었다. 문인석처럼 굳어버린 진홍의 귓전에 석하가 은근히 묻는 음성이 들렸다.


"본인 그림이 맞는지요?"

"..."

"여생?"

"어떻게...내가 그린 그림은 맞지만, 내가 넣은 화압은 아닌데...어떻게 된 건지?"


진홍은 정신을 차리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진홍의 모습에 석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일단 희초도를 내려서 진홍에게 건네주었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시니, 여기서 쉬고 계시지요. 제가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진홍은 여릿한 미소로 답하면서 그림을 받아들었다. 석정은 가만히 두눈을 깜빡였다. 뭔가 중궁에게 속셈이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사칭 운운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헌데, 아무 것도 모르고 석하는 천진무구하게도 또 다른 그림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버렸다. 그 틈을 타서 진홍이 무슨 수작을 부리나 싶어서 석정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보지 마시오."


진홍은 희초도를 발치로 내려놓곤 얼른 치맛자락을 사르륵 정강이까지 걷어올렸다. 석정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돌아섰다. 중궁의 버선발도 함부로 봐선 안되었다.


돌아서서 두눈을 질끈 감았더니, 등뒤에서 진홍이 치맛자락을 더 높이 걷어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석정의 머릿속에 한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진홍은 순식간에 속곳치마마저 허벅지까지 걷어올렸다. 희디 흰 속살 대신 허벅지에 친친 감긴 붉은 비단족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쉽사리 풀리지 않도록 연꽃문양 떨잠으로 단단히 고정을 시켜두었던 탓에, 금떨잠 끝에 속곳치마가 한치 정도 긁혀 올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진홍은 속곳치마가 찢기거나 말거나, 거침 없이 치마 속 그림을 떼어내어 발치의 그림으로 바꿔치기를 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의 희초도는 진홍의 허벅지에 친친 감겨 감쪽같이 사라졌다. 석하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고막에 닿는 순간, 진홍이 석정은 등뒤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돌아봐도 되오."

"..."


석정의 두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그는 긴장한 눈길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얼핏 보면 그림은 그대로였다. 상사화며, 멧새며, 말이며, 금빛 물결이며, 어린 스님이며까지 풀 한포기 털 한오라기 그대로 엊그제 석하와 함께 보았던 희초도가 분명했다. 헌데, 화제는 희초希草가 아니라 희혁希革이라 적혀 있었다. 그림도, 화압도, 서체도 다 똑같은데, 오직 풀초草자가 가죽혁革자로 둔갑해 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은 뭐가 바뀐 지도 모를 테지만, 최소한 자신은 이미 화제를 주의깊게 들여다본 터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희혁...어찌..."

"..."


진홍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석정은 눈가를 실룩이며 머릿속으로 분주히 생각을 굴리고 또 불렸다. 분명히 중궁전하께서 희초도를 바꾸셨다. 희혁希革을 희초希草로 잘못 쓴 실수를 몰래 바로잡은 건지, 아니면 희초希草라고 쓴 그림 자체가 내밀한 사연이 있는 건지. 걸음걸이가 불편했던 것도, 치맛자락 속에 그림을 숨겨왔던 까닭이려니 생각하니 왠지 속은 느낌에 등줄기가 굳어졌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마침내 석하가 아래층 연화도도 가져왔다. 이번에도 붉은 비단족자였다. 진홍빛이 강렬했다. 석하가 비단족자를 진홍의 두눈 앞에서 펼쳐보였다.


"화공의 그림이 맞소이까?"

"..."


진홍은 짐짓 연화도의 필법은 물론 화압까지 꼼꼼하게 살피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금 희초도를 펼쳐놓고 요모조모 야무지게 살피는 시늉을 하였다. 석정은 그런 진홍의 짙은 속눈썹을 곁눈으로 살피면서 하품을 쳤다. 기가 차서 입을 벌렸는데 정말로 하품이 나왔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잔 탓일까나.


"궁금해서 그러는데...희초도가 맞습니까, 희혁도가 맞습니까?"


석하가 의미심장한 물음을 건네왔다. 애초에 석하 역시 단순히 여생이란 화공이 고작 진위여부를 따지고자 재산루를 찾아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의 제목을 희혁이 아닌 희초로 잘못 쓴 것이 창피하여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왔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에, 여생이 그림을 바꿔치기할 것도 이미 예상했다. 그래서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었고, 또 이리로 돌아오자마자 시침을 뚝 떼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희혁도...겠지요."


진홍은 천천히 답하였다. 당황해서 두볼을 봉숭아 꽃잎처럼 발갛게 물들이곤, 체온이 낮은 손등으로 꾹꾹 눌러댔다. 그러다 보니 검은 너울 뒤로 숨은 얼굴이 언뜻언뜻 석하의 두눈에 스치듯 비꼈다.


"여생..."


가만히 중얼거려보았을 뿐인데 그녀의 어깻죽지가 움찔했다. 석하는 그 모습에 더욱 짓궂게 놀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울 아래로 보일락 말락 감질나게 비치는 감칠나는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기도 하였다. 진홍을 보는 석하의 눈빛이 따스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 와 계셨소?"


하필이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인두처럼 뜨겁게 석정의 등줄기를 지졌다. 석정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한낮에 왕이 정무를 처리하다 말고 재산루까지 쫓아올 리도 없건만 괜히 지레 겁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석정 자신이 중궁에게 무슨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것도 아닌데도.


"최부응교!"

"최부응교께서 여긴 어인 일이신지요...?"

"안 그래도 같이 오자고 청하려 하였더니..."


다행히 자신을 부른 일행 중엔 왕이 없었다. 부제학, 전한, 응교, 교리, 수찬, 박사며 저작까지...그저 홍문관에서 한솥밥을 먹는 이들이었다. 석정은 일단 안도하였다가 다시 경직되어 진홍을 돌아보았다. 저들 중에 진홍을 알아볼 얼굴이 한명쯤은 있을 터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미 진홍은 냉큼 너울자락을 내려서 얼굴을 가렸다. 의외로 기민한 대응에 석정은 내심 감탄하였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저 동료들한테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등골에서 진땀이 흘렀다.


"다들 여긴 어인 일로..."


하필이면 중궁과 함께 재산루에서 말 많은 옥당관들을 마주쳤으니 오금이 저릴 노릇이었다. 저들이 중궁의 정체를 알아보는 순간, 자신과 중궁은 그대로 끝장이 날 터였다. 헌데 남의 속도 모르고 옥당관들은 그저 반갑게 지껄여대었다.


"우리야 여기서 대제학 대감과 차를 마시기로 하여...마침 잘 되었소이다."

"같이 기다리세. 좀 있으면 대감께서 당도하실 걸세."

"참 때를 잘 맞춘단 말이야."


석정은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으로 진홍을 돌아보았다. 진홍 역시 자신도 모르게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이는 참이었다. 석정은 진홍에게 눈짓하며 살금살금 뒤로 내빼었다. 하지만 이내 응교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었다.


"어딜 가는가?"

"응교 나으리..."

"안 그래도 대감께서 자넬 찾으셨으이."

"..."


석정은 이제는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자신은 둘째치고 중궁의 명운도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셈이었다. 아무리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 해도 얼굴을 온전히 가릴 수도 없을 뿐더러, 이대로 중궁을 계속 재산루에 방치할 수도 없었다.


난간 너머로 보이는 먼산에 희뿌연 바람꽃이 피는 것이 석정의 시야에 들어찼다. 지금도 맞바람으로도 모자라서 사방팔방 보라바람이 집요하게 관모며 관복의 틈새를 들쑤시는 참이었다. 석정은 응교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로 팔을 뻗어 석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석정은 안간힘을 쓰듯 상체를 기울여선 턱짓으로 진홍을 가리키며, 데려다 주라고 입모양으로 나직하게 속닥였다.


석하가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리고는 옥당관들의 시야를 차단하듯 진홍에게로 돌아섰다. 진홍은 불안한 시선으로 석하를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본 사내였다. 지아비와 닮은 듯이 다른 사내였다. 무엇보다 이곳, 재산루의 인물이었다.


"갑시다."

"..."


진홍은 너울 아래로 의혹어린 눈빛을 감춘 채로 석하와 석정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참으로 요상한 사이였다. 재산루에 있는 사내가 최석정과 절친할 리가 없었다. 김석주 자체가 이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고, 황천이었다. 헌데도 이들은 눈빛이 통하고 믿음이 통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진홍은 불안해졌다. 이들은 그리 견고한 사이일 리 없었다. 하여 거리낌 없이 최석정을 앞세워서 그림을 바꿔치기하였다. 자신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자는 최석정에게도 속았다고 또 이용당했다고 여기면서 그 신뢰가 깨질 지도 모르는데.


진홍은 순식간에 두 다리가 뻣뻣해지는 기분으로 힘겹게 걸음을 내딛었다. 너울을 더욱 깊이 눌러쓰고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부용처럼 아리따운 체용에 옥당관들이 의혹어린 시선을 보냈다. 최석정이 방금 저 여인과 함께 있었다. 대체 무슨 일로.


하지만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여인은 검은 너울자락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사라져버렸다.


큰 광통교 작은 광통교 양쪽 어귀는 혼잡했다. 쌀 포대를 끌고 소리질러대며 돌아다니는 거지아이, 점点자가 써진 깃발을 걸어놓고 짚자리에 앉아 산통을 흔드는 맹인, 서화전 밖으로 그림을 늘어놓고 파는 화공들 탓에 온통 귀가 먹먹했다. 쑥떡 냄새, 꽃전 냄새, 탕약 냄새가 사방팔방 뒤섞여서 다리 위를 지나는 것만도 코도 맹맹했다.


특히 진홍은 이미 검은 너울자락으로 시야를 가린 탓에 눈도 갑갑했다. 엊그제가 사월초파일인 탓에, 장대에 꽃등을 꿰어 만든 등대를 세로로 걸어놓고, 또 가로로 늘어놓고 했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남아있는 꽃등에, 지나가다 너울이 스치고 하여 혼이 쏙 빠졌다.


큰광통교에 발을 딛는 순간 진홍은 귀틀석과 청판석 틈새로 세로로 꽂힌 등대의 꽃등 모서리에 그만 너울자락이 들려 옴짝달싹 못하였다. 진홍은 빼꼼히 드러난 얼굴로 두눈을 멀뚱거렸다.


"와...항아님이다."


쌀포대를 질질 끌고 돌아다니던 거지 아이가 진홍의 얼굴을 보고 입을 함박 벌리고 웃었다. 진홍은 두눈이 뎅그렇게 되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몸에 쏠려 있었다. 진홍보다 한발 앞서 걸어가다 광통교 건너편에 서 있는 체건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기던 석하마저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힐끗 돌아볼 만치. 석하는 손을 뻗어 꽃등에 걸린 너울자락을 내려주었다. 석하의 손가락끝이 무심결에 진홍의 날렵한 쇄골에 닿았다. 그 순간 진홍의 짙은 속눈썹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


석하는 숨을 죽이고 손가락을 움츠렸다. 시간이 달아나는지 멈추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석하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서 너울자락을 마저 펴서 내려주었다. 그러자 석하에게로 사방의 날카로운 시선이 화살처럼 빽빽하게 꽂혀들었다.


"어후 왜 내려!"

"치사하게 혼자 보려구!"


검은 너울자락에 얼굴을 가린 채로 진홍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직접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희초도를 되찾는 일은 이제 더는 믿을 수 없는 상아에게도, 또 워낙 덤벙대는 봉이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석정이 무심한 듯 던진 한마디가 또 가슴을 뒤흔들어놓은 탓도 있었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온통 담장에 가로막힌, 담장을 겨우 넘는 바람이 아니라, 허공을 춤추는 바람을 쐬고 싶었다. 꽃바람이든 바람꽃이든 그녀의 배래며, 도련이며, 나풀거리는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잠시만요."


석하의 음성이 진홍의 귓전에 아득하게 들렸다. 그녀가 발을 내딛는 청판석 마디마디 손가락 만하게 벌어진 틈새로 정오의 햇살을 머금은 물비늘이 마냥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진홍은 아쉬운 눈빛으로 다리 위를 둘러보았다. 지아비와 함께 왔더라면 보여주고 싶었다. 다리의 청판석 틈새로 물비늘이 빛을 반짝반짝 뿜어내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밤에 오면 광통교 사방에 걸린 꽃등들이 불을 환히 밝혀 더 아름다울테지만.


진홍은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판석의 반짝이는 틈새로 가만히 새끼손가락을 찔러넣어보았다. 점차로 나머지 손가락들도 차례로 넣었다 뺐다 하였다. 곤전坤殿의 자리에 오르고서 모처럼 만끽하는 자유였다. 선대왕의 탈상을 마치고 줄곧 반복되는 회임과 복상으로 손가락에 변변한 가락지 한번 제대로 껴보지 못하였다. 그래선지 청판석 틈새를 오히려 가락지 삼아서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 좋았다. 어쩌면 자신이 없는 궁은 발칵 뒤집혔을 지도 모르는 일을, 지금 당장은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헌데 진홍의 맞은편에 또 다른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낯익은 손가락이 청판석 틈새로 마주 꽂혀들었다. 진홍은 숨이 멎을 듯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손가락이 굳어졌다.


"이게 재미있소?"


귀익은 음성이 고드름 끝처럼 시리고도 예리하게 진홍의 심장을 후벼팠다. 움찔하는 진홍의 손가락마디마디를 찔러들었다.


"누가 내 허락 없이 궁을 나오라 그랬소?"

"..."


숙종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보는 진홍의 머리로 손을 뻗어 너울을 떼어내어 발치로 떨구었다. 너울자락이 팔랑거리면서 진홍의 발치로 내려앉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눈시울을 사납게 들쑤셨다. 진홍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서 눈앞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연홍빛 행의를 입고 평범한 갓을 쓴 차림새로, 갓의 양테 아래로 유독 짙은 눈동자가 분노로 더욱 짙어져 있었다. 그 눈꼬리는 분노로 고요히 물결쳤다.


"머리도 내리고, 가락지도 없고, 누가 보면 아무도 발길이 닿지 않은 흰 눈밭인 줄 알겠소?"

"..."

"끌고 가라."


숙종은 차가운 눈빛으로 등뒤의 사내들에게 명하였다. 귀하디 귀한 중궁의 옥체에 삿된 손길이 닿는 것도 용납않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홍은 휘둥그레진 두눈으로 숙종을 쳐다보았다. 지아비의 어깨너머로 저자의 왈짜들처럼 차려입고 허리춤에 칼을 찬 금군들이 진홍의 두눈에 들어왔다.


전하?


차마 번잡한 광통교에서 소리쳐 부를 수가 없어서 입모양으로 불렀을 뿐이었다. 달싹이는 붉은 입술을 물론 숙종도 보았다. 하지만 이미 피가 거꾸로 솟아서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틈만 나면 통명전 밖을 나서는 진홍이 미웠다. 김석하의 손길이 그 검은 너울을 내려주는 것을 보니 두눈에서 실핏줄이 모조리 터질 지경이었다. 그녀의 팔을 잡은 것도, 허리를 잡은 것도 아닌데도, 기분이 덴덕지근했다.


"가시지요."


미친 듯이 날뛰는 왕의 진노에 금군들이 머뭇거리면서 진홍의 두팔을 잡아챘다. 진홍은 망연자실 숙종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무서운 창칼 같은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니, 심장이 송두리째 꿰뚫린 것 같았다. 그저 활짝 열린 동공으로 숙종을 쳐다볼 수 있는 것 빼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쉬는 것도 마냥 가슴이 뻐근했다.


금군들이 우악스럽게 진홍을 잡아끌고 가면서, 그중 한명의 길다란 검집 끝에 진홍의 치맛자락이 걸렸다. 진홍은 치맛자락 속에 친친 감은 자신의 붉은 비단족자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워낙 단단하게 고정하느라 금떨잠을 꽂아 족자의 실끈에 감았더니, 하필이면 떨잠 끝이 그녀의 허벅지를 긁었다. 진홍은 치미는 비명을 삼키며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어명을 받드는 금군들이 그녀의 사정을 알아줄 리가 없었다.


"무슨 짓이냐?"


석하는 잠깐 체건에게 한눈이 팔린 사이에 웬 장정 여섯이 여생麗生을 납치하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광통교 건너편에서 체건이 손짓해서 그리로 걸어가는 참이었다. 하지만 체건에게로 다가서는 순간 느낌이 이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들 예닐곱이 그녀를 에워싸더니, 순식간에 옆구리를 꿰어차고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최석정이 맡긴 여인이었다. 봉변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석하는 단숨에 날아들어 장정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미처 사내들 등뒤의 숙종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로.


"여생? 괜찮소?"


석하가 진홍에게 다급히 묻는 말에, 숙종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숙종은 차갑게 등을 홱 돌리고 장정들에게 서슬 퍼런 음성으로 명하였다.


"죽여도 좋다."


장정들 틈새로 들려온 음성이 석하의 귀에 익었다. 하지만 석하는 당장 그 음성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여생의 두눈이 휘둥그레진 찰나, 순식간에 장정 여섯이 칼을 빼들어, 정오의 햇살을 내리그었다. 사정없이 칼날이 석하의 온몸을 난도질할 기세로 밀려들었다.


그 와중에도 장정 한놈이 여생의 팔을 잡아끌어, 그 가냘픈 체구가 휘청거렸다. 팔을 휘젓다가 치맛자락이 뒤집히며 피에 젖은 흰 속곳치마가 비치는 순간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그녀의 발치로 연꽃처럼 생긴 금떨잠 하나가 떨어졌다.


석하는 금떨잠을 제대로 눈여겨 볼 경황도 없는 탓에 일단 장정 한놈의 손에서 환도를 나꿔채고 칼날을 지팡이처럼 짚어 온몸을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장정들의 뒤로 돌아 등대 끝을 밟고 올라섰다. 광통교 어귀 여기저기에 꽂힌 또 다른 등대를 아예 잡아 뽑아 그는 장정들에게 매섭게 휘두르다 멈칫했다.


광통교 주변의 사람들이 겁에 질려 아무도 얼씬대지 않는 가운데, 힘겹게 주저앉아 후들거리는 손가락으로 금떨잠을 줍는 여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녀를 마주한 채로 차갑게 내려다보는 이는 하필이면 조선의 지존이었다.


"전하?"


석하가 멍청히 숙종을 내려다보는 순간, 장정 한명이 칼을 휘둘러 석하가 딛고 선 등대를 두동강 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가 밤송이 같은 놈이 뛰어들어 칼로 맞받아쳤다. 체건을 보고 한숨 돌린 석하는 다시금 발밑을 내려다 보았다.


여생이 맞나? 조선팔도에 금떨잠을 몸에 지닐 여인은 채 다섯손가락도 꼽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미 이성을 잃은 왕은 그녀의 흰 속곳이 피로 물든 것도 아랑곳 않았다. 그녀의 왼쪽 다리에 친친 감겨 있다가 반쯤 풀린 붉은 비단족자를 사납게 잡아당겨 차르르 펼치고선 진홍을 매섭게 쏘아볼 뿐이었다.


"희초? 여생?"


진홍을 보는 숙종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미 중궁전에서 사람이 와서 최석정을 데리고 나갔다는 소식을 이정영에게 들어 알았다. 아직 공초를 바치진 않았지만, 판의금 이정영이 벌써 구두로 김만기란 이름을 언급했다. 복선군을 김만기가 죽이려 한다, 또는 김만기를 복선군이 죽이려 했다...이번 옥사는 고변한 정원로를 캐면 캘수록 중궁과 관련된 증좌들이 갯벌 속 조개처럼 묻어나왔다. 특히나 이 희초希草란 그림은...중궁이 궐을 나온 동기일 터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석정은 겨우 재산루를 빠져나와 석하와 중궁을 뒤쫓아왔다가 눈앞에 벌어진 살풍경에 질겁했다. 높다란 등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탄 석하, 그를 에워싸고 칼을 겨누는 장정 여섯, 그들의 칼날을 막아선 체건, 무엇보다 속곳치마가 찢어진 채로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중궁, 그 중궁을 두눈이 벌개진 채로 지켜보는 왕이라니.


"나야말로 묻고 싶소."


석정을 쏘아보는 왕의 눈초리가 밤바람처럼 스산했다.


석하는 등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자신은 귀문龜門의 사람, 결코 용龍에겐 칼을 맞댈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못한 채로 그저 두눈 질끈 감고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혼잡했다. 금떨잠을 숨기고 있었던 여인 여생麗生. 여생은 곧 금생여수金生麗水, 금생여수는 곧 김씨. 금떨잠을 지닌 김씨라면...


"신첩이 이자들을 속이고 재산루에서 그 그림을 빼돌렸습니다."


진홍의 대답이 한발 더 빨랐다. 석하는 해연히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이 여인이, 이 금떨잠을 지닌 김씨가 왕에게 자신을 신첩이라 칭하였다. 석하는 멍청히 진홍을 보았다. 조선팔도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진홍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창백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그림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


숙종은 진홍의 어이없는 고집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림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다니. 이미 머릿속이 차갑게 식은 터였다. 이 그림이 재산루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화압과 화제가 하필이면 여생과 희초라는 사실, 하지만 그림의 내용은 짐승들의 털갈이를 가리키는 사실, 그 세가지 만으로 그림을 읽어내야 했다.


"사부, 이 그림 좀 설명을 해보시오."

"..."

"내 보기엔 희혁希革인데, 왜 화제가 희초希草인 것이오?"

"글자를 혼동하신 것이 아닐런지..."

"흥, 혼동? 여인이 아니었으면 유현儒賢(유교에 정통하고 행적이 바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 광성부원군께서 자부하시는 그 중궁이거늘."

"..."


석정은 차마 대답을 못하고 곁눈으로 진홍을 쳐다보았다. 중궁의 남색치마가 피로 물들어 점점 얼룩이 자흑색으로 번지는 참이었다.


"누구든 빨리 답해야 중궁이 의원에게 치료를 받을 것이다."


숙종의 매몰찬 음성에 석정은 흘끗 중궁의 눈치를 보았다. 여인이 아니었으면 유현이 되었을 거라 김만기가 자부할 정도라면, 중궁의 학식이 깊다는 뜻이었다.


석정은 숙종이 펼쳐놓은 그림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살폈다. 이 그림이 단순한 화공이 아니라 유현이 그렸다고 전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감상해야 했다. 중궁이 정말로 서경 우서의 요전 堯典을 알고 그렸다면...


"서경 우서 요전堯典 5장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신명희숙申命羲叔하사 택남교宅南交하시니 평질남와平秩南訛하여 경치敬致니 일영日永이요 성화星火라 이정중하以正仲夏면 궐민厥民은 인因이요 조수鳥獸는 희혁希革이니라...여기서 석자가 빠졌다고들 하지요."


석정의 말에, 숙종도 뭔가가 짚이는 눈빛이 되었다.


"왈명도曰明都..."

"예, 그 부분을 빗대었다면 이 그림도 뭔가 세 글자를 숨겼을 지도 모릅니다."


숙종이 두눈을 나른히 깜빡였다.


"숨겨진 세 글자가 있다?"

"예, 첫번째로 이 그림은 서경의 일중日中, 즉 정오가 아니라 우중禺中, 즉 정오가 되기 직전의 사시巳時(09~11시)를 뜻합니다. 어린 승려가 불기를 들고 예불을 드리러 가는 시간..."

"..."

"또한 두번째는 일부러 틀리게 적어놓은 화제 희초希草..."

"..."

"세번째로 괴이하게 금빛으로 채색해놓은 개울과 애초에 없었다던 화압을 보면 여생麗生...그렇게 세 단어가 단초가 되겠지요."

"단초라...우중禺中, 희초希草, 여생麗生...희초希草, 우중禺中, 여생麗生...여생麗生, 우중禺中, 희초希草..."


숙종은 석정의 설명을 듣고 세 단어를 뇌까리며 중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짙은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서 투명하게 번뜩였다.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숙종의 시야를 환히 비추었다.


"누구에게 주려던 것인지 대충 알겠군."

"..."


진홍은 속눈썹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애써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들뜨는 바람에 목울대는 물론 쇄골과 흉골 사이 움푹한 천돌까지 들썩였다.


"이 그림이 재산루에 있었다? 어이하여?"

"..."


숙종은 차근차근 되묻다 말고 진홍을 쳐다보았다. 파리해진 얼굴을 보니 더는 무심한 척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미 석정과 묻고 답하고를 이어가는 사이,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이 있었다. 진홍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뜨겁고 칼칼한 매운탕을 잘못 삼킨 것처럼 혀끝이 얼얼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진홍이 아프면 자신도 아팠다. 진홍이 추우면 자신도 추웠다. 춘사월의 정오가 지난 지금, 왜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인지. 그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진홍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시오."

"..."


석하와 체건은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중궁도 죽이고 석하도 죽일 기세로 펄펄 뛰던 왕이었다. 장정들에게 진홍을 끌고 가란 명도 서슴지 않던 왕이, 갑자기 변덕을 부려서 진홍을 업을 기세로 나왔다. 진홍은 두눈을 뎅그렇게 뜨고서 지아비의 등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그토록 차갑더니 지금은 따스한 등이었다. 등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따스한 불씨를 지피는 느낌이 들었다. 노려보려 해도 눈초리가 힘이 들어가지 않고 스르르 풀렸다.


"전하께서 어찌..."

"천신들이 업겠나이다."


장정들이 너도 나도 진홍에게 등을 보이는 모습에 숙종은 눈엣가시가 틀어박힌 시선으로 그들의 등줄기를 훑었다.


"그리하겠는가?"

"예 전하. 신들이..."

"죽고 싶으면 그리 하든지."


숙종의 음성에 서늘한 냉기가 뚝뚝 흘렀다. 중궁을 업겠다고 나선 장정들이 움찔해서 재빨리 돌아앉았다. 오금이 저렸다. 방금 전엔 중궁을 폐출시킬 기세로 거침 없이 끌고 가게 해놓고선. 그런 숙종과 장정들을 곁눈으로 보고 석정은 도리머리를 지었다.


진홍은 숙종의 목을 끌어안고 가만히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지아비의 귓볼에 자신의 차갑게 식은 볼을 맞대니 마냥 시리던 심장도 따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가슴 한복판에 오한이 일었다가, 지금은 온기가 감돌았다.


"많이 아프오, 조금 아프오?"

"..."


진홍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지아비가 묻는 의도를 이미 감지한 탓이었다. 진홍은 지아비의 귓볼에서 자신의 볼을 떼고 곱게 눈을 흘겼다.


"조금 아프옵니다."

"허면 참으시오. 환궁해서 의녀들한테 보일테니."

"..."


그럴 줄 알았다. 역시나 매정하고 독한 말이었다. 자신의 지아비를 누가 말릴까 싶었다. 팔뚝이나 정강이도 아니고 허벅지 은밀한 속살이니 더욱 외간사내의 손길에 맡겨두고 싶지 않을 터였다.


진홍은 왼쪽 허벅지가 아릿했다가 저릿했다가, 점점 참기 힘들어지는 터였다. 피를 제법 흘려서 춘사월에도 오한이 일었다. 진홍은 숙종의 뒷덜미에 더욱 얼굴을 파묻었다.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숙종 역시 그 오한이 옮았는지 몸서리를 치더니 떨리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다 못해서 석정이 열대여섯보 정도 떨어진 거리의 약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뢰었다.


"저 앞 약방엔 여의도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치료를 맡기면 되지요."

"그걸 왜 이제 말하오?"


숙종은 발끈해서 말하고선 득달같이 약방으로 내달렸다. 그 뒷모습에 석정은 눈밑을 실룩이며 다시한번 도리질을 하고 총총히 뒤따랐다. 장정들은, 아니 금군들은 좀전에 자신들이 중궁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던 것을 떠올리고, 자신들의 두손을 내려다보며 움츠렸다. 설마 자신들의 얼굴을 왕이 기억할까, 왠지 뒤끝이 두려웠다. 그들의 걸음이 더뎌졌다.


광통교의 약방은 단촐하게나마 의원을 겸하는 곳이었다. 마당엔 커다란 쇠솥과 약두구리가, 대청엔 약장이, 작은 분합문이 들어올려져서 내부가 훤히 비치는 동간 외부엔 온갖 약재들이 천정에 즐비하게 내걸려 있었고, 내부 선반엔 약재를 짜는 약틀, 가루로 빻는 약연과 약절구, 자르는 약작두, 달이는 약탕관과 약탕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힌 채로 진홍이 치료를 받는 서간에는 죽고비竹高飛, 문갑, 약궤과 서안이 놓여 있고, 각종 화제和劑, 부항단지, 약저울집과 침통 등의 약구藥具가 놓여 있었다.


진홍이 서칸에서 침상에 누운 채로 내의녀 출신이라는 정씨에게 허벅지의 상처를 치료받을 동안, 숙종은 방문 앞을 지키고 앉아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았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치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석정과 석하, 체건 사이에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당에서 경계하듯 지키고 선 금군들을 석하가 말없이 지켜보는데, 석정이 그 와중에도 품속에서 붓과 행연, 종이를 꺼내어 무언가를 끄적였다.


禺中

希草

麗生


석하가 의아히 석정의 손끝을 내려다 보는데, 석정은 다시 우중禺中을 가운데에 쓰고, 여생麗生을 위에, 희초希草를 아래에 썼다.


麗生

禺中

希草


석정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붓을 놀렸다.




希艹


풀초草를 초두머리艹로 바꾸고 나니 이름 석자만 남았다. 이름 석자를 내려다 보면서, 석정은 팔다리의 자개미에 온통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김만희? 누구입니까?"

"..."


옆에서 석하가 묻는 순간 석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은 물론 턱까지 온통 굳었다. 어렴풋이 우희에게 주려던 건가 의심은 했었다. 하지만 최우희가 김만희로 둔갑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이때 장지문이 열리며, 숙종의 그림자가 종이 위로 드리워졌다. 서늘한 눈길로 종이 위를 훑어보며, 숙종은 시큰둥히 석정을 보았다.


"정원로, 그 뒤를 더는 캐지 마시오."

"전하?"

"사부가 캐면 캘 수록 외종숙이 중궁의 숨통을 움켜쥐고 놓질 않으니...제발, 중궁을 살려주시오."


김석주에 대한 호칭이 외숙外叔에서 외종숙外從叔으로 바뀌었다. 그 옥음엔 깊은 좌절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석정은 아침에 집어먹은 인절미가 새삼스레 얹히는 것을 느꼈다. 답답했다. 미치도록 갑갑했다. 왕이 선대왕의 의문사에 대한 의심마저 접어두고 서인정권을 도로 불러들인 것은,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중궁의 존재 탓이었다. 중궁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만큼은 막겠다는, 중궁 만큼은 붙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석주는 그런 중궁을 화살받이 삼아서 남인을 찍어내는 데에 온힘을 다하니...석정은 한숨조차도 내쉴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1. 원래는 석하가 숙종의 손에 직접 허벅지를 찔리고 쓰러지는 장면으로 구상했었는데, 쓰다 보니 석하 대신 진홍이...제 손이 저절로...


2. 우희에게 출생의 비밀을 심어두면서 부담을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가계도를 보면서 오라비 최후, 자부 서진과의 터울을 따져보고 줄곧 출생의 비밀을 의심했던 터라...처음엔 인현왕후와 한핏줄로 상상도 해보고, 그렇게 천지인 집필을 시작하다가 갈아엎고 고민 끝에 광산김문의 혈손으로 설정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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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4.01 17:37
    No. 1

    안타깝네요. 가여운 중전이 어찌될지. ㅠㅠ
    꺽정이가 김석주 반만 닮아도 좋을 것을...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4.02 00:28
    No. 2

    최석정이 좀더 강력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4.02 17:31
    No. 3

    꺽정이가 너무 치밀해서 걱정
    정치판에서 두리뭉실 하지를 못해서 걱정
    자기한테 흘러들어오는 온갖 잡스런걸 외면하지 못해서 걱정
    이놈의 걱정들을 달고 사니 이름이 꺽정...^^
    저 성격으로 나중에 어떻게 정승까지 해먹는지 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4.15 23:22
    No. 4

    조금씩 변하겠지요? 그런데 자기 아들과 친구들이 면신례를 안하기로 결의를 하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일일이 뜯어말리고 아들 친구들한테까지 달래는 편지를 썼었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4.06 17:34
    No. 5

    중궁전하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4.15 23:22
    No. 6

    왜 이리 안쓰러운지...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5.10.14 21:31
    No. 7

    만희면 김만중 김만기와 항렬이네요. 중궁에게는 고모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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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7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0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181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8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6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4 31 42쪽
»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5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1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2 38 36쪽
175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8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8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8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5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3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1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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