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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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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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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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0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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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89

DUMMY

"두광아! 이 비망기를 승정원에 갖다주거라."


조반도 거르고, 한참을 비망기를 써낸 끝에 왕이 문간으로 툭 던진 말이었다. 대원반과 소원반, 곁반을 문앞에 놓아두고 수라간 상궁 및 나인과 함께 기다리던 두광은 한숨을 삭이며 조용히 받아들었다.


헌데 막상 비망기를 든 채로 문지방을 넘으려는 순간 뱃속에서 욱신욱신하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왕이 굶으면 자신도 굶었다. 여태 끼니도 못 먹고 동온돌 앞에서 기다리다 보니 헛배가 부르고 허리까지 아팠다.


"어디 아프냐?"

"전하께오서 수라만 제때제때 드시면 낫는 병이옵니다."


두광이 원망을 담아서 대꾸하고선 쪼르르 물러갔다. 숙종은 피식 웃으면서 허리를 펴다가 갑자기 속이 쓰려서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하지만 허리를 접을 수도, 굽힐 수도 없었다. 뱃속이 매웠다. 등허리까지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숙종은 낑낑거리면서 그대로 금침에 누웠다.


하도 뱃속부터 등허리까지 부대끼는 통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던 숙종은 머리맡의 환도가 하필이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숙종은 자신이 속병이 난 사실도 잊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은 송시열을 위리안치에서 중도부처로 형벌을 감등했다. 그러고 나니 뱃속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았다. 자기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숙종은 그 자리에서 환도를 빼들어서 서안 위를 내리쳤다. 날선 칼날이 그대로 서안 위의 붓대 한가운데를 후려치고 말았다. 붓대가 동강나는 것은 물론, 서안에까지 칼날이 틀어박혔다. 보나마나 칼을 뽑으면 깊이 파인 홈이 보일 터였다. 숙종은 힘겹게 환도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벼루 위로 힘껏 휘둘렀다.


자신의 손으로 송시열을 양이 시켜주는 비망기를 쓰고 말았다. 두고두고 용납이 되지 않을 터였다. 두고두고 자신의 손끝이 닿은 문방사우를 볼 때마다, 도화서 화사들이 그리는 그림보다도 더 정확히 떠올리고 말 테니, 차라리 지금 다 때려부수는 게 나았다.


"전하! 이게 무슨..."


두광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붓대와 붓걸이, 벼루며 연적까지 모조리 부서지고 서안까지 온갖 칼집이 깊숙하게 파인 채로, 땀에 흠뻑 젖은 왕이 환도 끝으로 방바닥을 짚고 앉아 있었다. 이마에 맞닿는 익선관의 테두리까지 젖어서는 왕의 이마에 착 달라붙었다. 왕은 땀이 눈시울로 흘러들었는지, 두눈을 깜빡이며 손등으로 닦아내곤 쓰게 웃었다.


"다녀왔느냐?"

"아니 전하? 이게 뭡니까요? 아무리 성질이 더러우셔도 이 정도는 아니셨사온데..."

"성질이 더럽다?"

"아니 딴건 몰라도 시명보까진..."


두광은 서안이며, 붓이며, 벼루, 연적, 시명보 등의 잔해에 치를 떨었다. 어쩐지 섬돌을 밟는 순간부터 공기가 다르다 생각했다. 어쩐 일로 중궁이 대청에 나와서 아랫입술이 하얗게 튼 채로 서성이는 참이었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할 중궁이 차마 동온돌로 들어서지도, 그렇다고 서온돌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중궁은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두광 자신에게 손짓을 보냈다. 의아히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안 위의 물건들이 모조리 이렇게 처참한 지경이었다. 그런데 깨진 물건들 말고, 사람 목소리도 이렇게 깨질 수 있는 건가? 왕의 옥음도 사금파리 같았다. 닿으면 베이고, 밟으면 부서질 것만 같은.


"내 손으로 송시열을 중도부처 시켰다. 이 더러운 붓도, 벼루도, 연적도, 옥보도 다 필요없어."

"하오나 전하, 중도부처만 하셨으니, 아직 송시열을 풀어준 것도 아니온데..."

"이미 내가 한 발 물러섰지 않느냐. 한 발은 곧 두 발이고, 두 발이 곧 스무 발이다."

"하오나..."


두광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고작 중도부처를 시키란 비망기를 내주고서, 왕은 모든 것이 끔찍한 저주인 양 붓이며, 벼루며, 연적이며, 시명보까지 모조리 박살을 내버렸다. 물건 하나하나가 다 자신들은 함부로 다룰 수도 없을 만큼 귀한 신품이건만, 특히나 시명보는 재질부터가 귀하디 귀한 옥이라서 더욱 아까웠다. 간혹 시명보를 금으로 만들던 시절도 있었다는데, 당저처럼 성질에 못이겨 깨부수는 왕들이 있었던 탓일지도 몰랐다. 이렇게까지 왕이 화풀이를 하는 것이 이해되질 않았다. 한 발이 곧 스무발이라니.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엔 호위청과 내병조, 상서원이 즐비하게 늘어선 채로, 인정전仁政殿을 마주했다.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뜻이지만, 오늘도 윤휴가 두손을 묶인 채로 인정전 현판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리는 참이었다.


어질인仁, 그 한글자를 보니 뜨거운 것이 목울대로 치받았다. 눈앞에는 새로 선임된 판의금 이상진, 지의금 김우형, 그 뒤로 문사낭청 이언강, 권시경, 권두기, 오도일이 늘어서 있었다. 정오의 뙤약볕이 온몸을 찌는 통에 목안이 부쩍 타들어가는데도, 윤휴는 물 한모금도 얻어마실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곧 죽을 목숨이니 애초에 자비를 바랄 수도 없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윤휴는 예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왕이 의금부가 아닌 내병조에 국청을 마련하게 한 것은 친국을 할 생각도 있다는 뜻이라 했다. 그렇다면 왕을 대면할 기회가 한번은 주어질 터였다. 윤휴는 진심으로 자신의 결백을, 무죄를 고하고 싶었다. 헌데 발걸음의 주인공은 왕이 아니었다. 영의정 김수항, 우의정 민정중, 그리고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오셨소이까?"


내일모레면 칠순인 판의금 이상진이 자신보다 열댓살은 어린 김수항을 보고 위관석에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김수항은 멈칫하여 이상진을 쳐다보곤, 이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의금 김우형은 이름이 언뜻 고故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돌림자처럼 보이긴 해도, 사실은 같은 청풍김씨가 아니라, 다른 광산김씨였다. 즉, 대비전이 아닌 중궁전의 문중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외가는 의령남씨로 남구만의 먼친척뻘이기도 했다. 상피제에 저촉되지 않을 만큼만 가깝고도 먼 혈연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어제 무녀가 굿을 하듯 취기에 난동을 부린 오도일은 최석정과 몹시 절친한 사이였다. 문랑들이 최석정의 입김을 받을 수도 있는 자들로 선임하다니...


그래봤자, 여긴 김석주의 관할이지.


김수항은 흘끗 윤휴를 돌아보았다. 윤휴의 두눈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이 보였다. 윤휴도 느꼈을 터였다. 왕은 입을 쩌억 벌린 흑저黑猪의 아가리로 윤휴를 날로 물려주었다. 이제 김석주가 윤휴를 아작아작 씹어먹을 차례였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장소가 문제였다. 여기는 김석주가 관할하는 내병조인 만큼 이들 모두 김석주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니. 제 아무리 제멋대로인 오도일이라고 해도, 대쪽같은 김우형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못할 터였다.


"참, 소식 들었소? 대로大老께서 중도부처 되셨다오. 곧 구동狗洞(개구멍을 뜻하는 말)에 숨은 개들을 모두 잡아서 구소주狗燒酒(개소주)를 담그러 오실 거요."


윤휴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이미 입술을 온통 부르트고 갈라져서 피가 맺힌 터였다. 그런데 찢어진 입술보다도 폐부가 더 아팠다. 하필이면 자신이 잡혀오는 날에 송시열이 중도부처 되었다. 윤휴 자신이 사는 포동을 구동이라 부르면서 욕지거리를 일삼던 그 추잡한 목소리를 다시 듣게 생겼다.


"구동이니 구소주니, 그 고상한 입으로 그리 저열한 말을 할 줄도 아시오? 송가놈한테 옮았나보오?"


윤휴는 김수항을 가만히 비웃었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송시열 조차 함부로 못하는 김수항이었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선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져서인지, 김수항은 자신더러 개 운운을 해대었다. 송시열이 곧잘 입에 담던 말들을. 역겨웠다. 그래서 욕했다. 하지만 김수항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서 가만히 위관석에 앉았다.


"개를 개라 부르지, 무어라 부를꼬?"

"..."

"시작하라."


차갑게 비웃고서 김수항이 문랑 이언강에게 명하였다. 이언강은 오도일을 힐끗 돌아보곤 윤휴 앞으로 한발한발 다가섰다. 아직 형문을 윤허받진 못한 탓에 평문을 실시해야 했다. 어쩐지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최석정은 문사낭청으로 허견과 복선군의 국청에 참여한 공로로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 준직이지만 품계가 당상이니, 당상관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면 자신들은? 윤휴의 옥사를 다스린 후에 가자가 될까? 하지만 팥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지금 자신들은 뒤처리만 할 뿐이었다. 최석정만 팥고물을 두둑하게 묻혔다.


최석정은 머지않아 부제학에 직위에 오를 터였다. 아니다. 부제학은 무리였다. 다 같은 정3품이라 해도, 격이 다른 법이었다. 홍문관 부제학이나 직제학은 앞으로 문형이 될 자들이나 오르는 영예의 자리였고, 당금 조정에 문재文才와 학식이 빼어난 자들이 차고 넘쳤다. 김만중, 남이성, 이익, 이익상까지...최석정의 차례가 오려면 한참 멀었다. 심지어 이언강 자신보다 문재文才도 미흡하니 직제학도 무리였다. 기껏해야 6조의 참의? 최명길의 후손이 그런 실세에 오를 리가 없었다. 그나마 왕이 총애하니 승지 자리에나 앉으려나. 거기까지가 최석정의 한계일 터였다.


"뭐하는가? 어서 시작하지 않고?"

"예, 대감."


김수항의 독촉에 이언강은 조금은 맥빠진 기분을 애써 추스리고 윤휴를 보았다. 최석정이 언제까지 승승장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비록 남인천하에서도 삼십육계三十六計니, 삼십육계三十六啓니 하는 말이 나올 만큼 견고한 성총을 입은 최석정이라 해도, 높은 언덕을 빨리 오를수록 다리가 더 아픈 법이었고, 추락하면 더 아픈 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질시로 최석정의 전망을 조금씩 내리깎는 이언강의 어깨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이언강이 흠칫 놀라 쳐다보니, 오도일이 안쓰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위로의 눈길을 보냈다.


"..."


질투란 것은 독한 고초高醋(산이 강한 식초)와 같아서 제 속이나 갉아먹는 놈이었다. 홀로 저만치 올라가는 최석정의 뒤축을 보면서 시샘을 해보았자, 몸만 축날 일이었다. 그 마음 다 안다는 식으로 오도일은 측은한 눈빛으로 이언강의 어깨를 슬쩍 쓰다듬듯 툭툭, 그러다 힘껏 후려치듯 탁탁 치고서 물러났다.


그 손길이 언짢았다. 이언강 자신은 오도일의 연민을 살 정도로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최석정보다 두살 어릴 뿐, 문필도 빼어났고, 평판도 뛰어났다. 결코 오도일처럼 술에 쩔어 뇌리가 흐리멍덩하지도, 일처리가 흐지부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도일을 슬쩍 흘겨보고 바로 윤휴에게 날카롭게 구문하기 시작했다.


"죄인 윤휴는 역적 이정, 이남과 교류가 빈번했다, 맞느냐?"

"..."

"그들과 만나서 무슨 논의를 했느냐?"


이언강의 물음에 윤휴는 두눈을 깜빡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젠 자신마저 동당으로 엮을 태세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귀양을 떠날 일을, 자신은 이대로 목숨을 잃게 생겼다.


"논의? 무슨 논의? 나는 그들과 교류한 일이 없네. 그저 오다가다 마주치면 묵례하는 것이 전부였으이. 누가 이정이고, 누가 이남인지 분간도 못하여 말도 섞지 못하였네."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된다?"


이언강은 말문이 막혔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집이 가까워서 그들은 서로 교류가 잦았다. 판중추로 물러나 있는 권대운이나 허목이 아직 남았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윤휴가 삼복三福과 교분이 깊었는지 어땠는지 증언해줄 터였다.


"판부사 권대운, 허목 대감과 대질을 해보겠느냐? 네가 그 역도들과 친분이 있었다는 건 그들이 더 잘 알 터인데?"

"그러든지."


윤휴는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내 서슴지 않고 동의했다. 흔들림 없는 윤휴의 태도를 보고 이언강은 내심 불안해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권대운과 허목이 윤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특히나 같은 청남淸南의 무리인 허목은 의리를 지켜서 입을 굳게 닫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탁남濁南인 권대운은? 권대운은 굳이 의리를 지킬 리가 없었다. 그나마 시도해 볼 만 하였다.


"글쎄...나도 윤휴하곤 친하지가 않아서...그가 누구와 친한 지 안 친한 지 알 수가 있나..."


불려온 판부사 권대운은 아예 질색을 하고 윤휴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딱히 윤휴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 자신을 위해서 윤휴와는 엮일 꼬투리도, 건더기도 남기지 않을 심산인 듯 했다. 말투로 보나, 시선으로 보나, 마치 윤휴의 불운이 자신에게 묻을까봐 미리 손을 터는 느낌이었다. 이언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권대운을 물렸다.


"대감도, 윤휴와 친하지 않았다고 하실 겁니까?"


허목이 국청으로 불려오자, 이언강은 대뜸 비아냥거렸다. 허목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 이언강을 노려보았다. 명색이 판중추부사인 자신에게 이토록 불손한 언사를 내비치다니, 괘씸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허목은 깨달았다. 자신의 명운 또한 바람 앞의 등불일 수 있다는 것을. 윤휴 다음 차례는 권대운과 자신이었다. 실세에서 한발 물러난 자신들을, 조정의 녹을 먹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저들은 용납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허목은 갈등어린 눈길로 윤휴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보는 윤휴의 두눈 역시 온갖 감정이 충돌했다. 제발 살려달라는 애원, 하지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혼자서라도 잘 살아남으라는 축원이 서로 부딪히고 또 부딪혀서 마모되는 참이었다. 결국 두눈을 질끈 감는 윤휴를 보면서, 허목은 환청처럼 윤휴의 목소리를 들었다.


- 신선님!


사석에선 윤휴는 허목 자신을 신선이라 불렀다. 허목이 직접 돌을 구해 섬돌을 반질반질하게 다듬고 나면, 해와 달이 비친다며 신기해 했고, 좋은 술이 있으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들고 왔다. 허목 자신이 쓴 글과 그림을 서첩書帖으로 엮어서 언제나 소중히 사랑채에 모셔두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였다. 그런 윤휴를 등질 수는 없었다.


"친했지..."

"호오...인정하십니까?"

"친했으니 하는 말이네만, 나는 희중希仲(윤휴의 자) 저 친구의 집에서 이정과 이남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이. 되었는가?"


허목의 음성에 윤휴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가 이내 감았다. 이제 미수 허목이 어찌 될 지 한치 앞도 알 수가 없었다. 저들이 허목의 죄를 엮으려고 들면 얼마든지 엮을 수가 있었다. 애초 허적 부자가 오정창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왕을 미혹시킬 궁리를 할 당시, 허목도 한번쯤은 배석했었다. 애초에 중궁을 탐탁지 않아 했던 허목이 어느 틈엔가 한발 빼는 바람에, 허적 부자도 오정창의 딸을 궁중에 밀어넣을 힘을 잃었다. 하지만 저들이 허목이 관여했다고 갖다붙이면 그만이었다. 언제적 친잠롄데, 아직도 저쪽에서 벼르는 것을 보면, 여차 하면 허목도 연루될 수 있었다. 자신이 삼복三福과 친했던 것이 죄가 되면, 허목 역시 자신과 친했던 것이 죄가 될 터였다.


"이러시깁니까?"


이언강이 두눈을 가늘게 뜨고 허목을 노려보았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윤휴와 삼복이 만나는 것을 한두번쯤 목도했을 위인이, 심지어는 동석도 했을 위인이, 딱 잡아떼다니.


"이러다, 모처럼 복직하신 것도 도로 삭직되실텐데요? 아니, 역도를 편들다간 목숨마저 보존하기 힘드실텐데요?"

"내 나이 이미 팔순을 넘어 내일모레 구순일세. 동리凍梨(언배란 뜻으로 검버섯이 핀 피부를 비유하는 말)의 나이에 뭐가 아깝겠나?"

"원래 춘추가 깊을수록 집착도 깊어진다는데...정말 목숨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검버섯은 내 거죽에만 피면 족하이. 혼백에도 피면 아니되지."

"..."


말이 검버섯이 핀 얼굴이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허목의 살갗은 은은한 서광을 내뿜는 듯하였다. 이언강은 허목을 노려보다 속에서 열불이 나서 고개를 돌리고 불길을 내뿜었다. 권대운은 윤휴와 한 터럭도 엮이고 싶어하지 않는데다, 허목은 한 타래가 되어 똑같이 삼복三福과의 교분을 부인했다.


그나마 허목이 윤휴와의 친분을 시인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위관석에 앉은 김수항도 고개를 끄덕이는 참이었다. 이쯤 해두기로 하고, 이언강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때 어느 틈에 열려 있는 내병조 문사이로 안석에 앉아 이쪽을 보는 김석주의 비틀린 비웃음이 이언강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언강이 두눈에 힘을 주는 순간 문이 닫히고, 착각처럼 김석주의 모습도 함께 닫혔다.



다음날 아침 편전의 어탑에 사간원의 계문이 쌓였다. 숙종은 대사간大司諫 유상운, 집의執義 최후상, 사간司諫 안후, 지평持平 이수언, 정언正言 안후태, 신완이란 이름이 줄줄이 나열된 상소를 심드렁히 내려다 보았다.


"허견이 양가의 여인을 간통한 죄상을 뒤덮고 심지어는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옮긴 끝에 죄안을 뒤엎었으니 판부사判府事 권대운과 지부사知府事 민희를 파직하라?"

"..."

"또 이정과 이연의 홍수지변紅袖之變(나인 상업, 무수리 귀례와의 간통사건) 때 윤휴와 더불어 이정과 이연을 변호하여 진상을 왜곡한 판부사 허목을 파출하라?"


숙종은 헛웃음이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저들은 남인들과는 같은 하늘을 보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케케묵은 옛일까지 모조리 들춰내어 흑백을 뒤바꿔놓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윤휴와 친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 권대운이며, 집까지 드나들 정도로 친하긴 했지만 윤휴의 집에서 삼복을 본 적은 없다고 말한 허목이며, 남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서인의 단호한 결의가 엿보였다. 물론 어차피 숙종 자신도 남인은 당분간 조정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생각이긴 했다. 모처럼 다시 조정에 불러들인 허목을 도로 내보내야 하는 사실이 아쉽긴 했지만.


"그리 하라."

"영명하신 판부判付이시옵니다."


김수항이 보일락 말락한 미소로 답하였다. 왕이 또 한발 양보했다. 한발이라도 뒷걸음질을 치게 되면 도로 내딛는 것보다는 뒤로 물러서는 게 더 쉬웠다. 일단 관직에서 허목 등을 내쫓고 나면, 언제든지 목숨을 거둘 수가 있었다.


"하옵고, 송시열의 새 배소단자이옵니다."


도승지가 숙종의 서안 위로 배소단자를 올렸다. 숙종은 시큰둥한 눈길을 던졌다. 자신도 모르게 더러운 오물을 집어들 듯 엄지와 검지 만으로 도배단자를 집어들고 보니 제천현堤川縣이란 석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천현?"

"여기, 노정도이옵니다."


형조판서 김덕원이 소매춤의 지도책을 내어놓았다. 숙종은 여지노정도를 가만히 뒤척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만히 짚어보았다.


도성에서 3백리 남짓한 거리였다. 거제에서 제천까지 손가락으로 짚고 보니, 1천리도 넘던 송시열의 유배거리가 졸지에 350리로 줄었다. 송시열이 발치에서 턱밑으로 올라왔다. 숙종은 입안이 껄끄러웠다. 밤에 한숨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온몸이 뜨거운 모래밭에 파묻힌 것처럼 뜨겁고, 따갑고, 또 무거웠다.


"그리 하라. 이만 물러들 가라."

"예 전하."


김수항은 중신들과 함께 다소곳이 물러가려다가 문득 시선을 최석정에게 두었다. 최석정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뭉그적거리면서 왕과 모종의 신호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그동안 최석정이 왕과 독대를 하는 일도 눈감아주었다. 어디까지나 최석정이 당하관인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자네도 이제는 당상일세. 전하와 독대를 해선 안되는."

"그렇습니까?"


석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품계만 당상일 뿐 아직 준직인 자신을 갑자기 대신이라며 견제하다니. 하지만 반박은 어탑에서 들려왔다.


"그래? 허면 최응교에게 당상의 관직을 제수해도 되는가?"

"..."


김수항은 멈칫했다. 아직 석정의 관직은 준직일 뿐이었다. 그다지 세력도 없는 반쪽 대신이었다. 게다가 지제교와 사관의 역할을 겸하니 독대도 가능했다. 자신이 괜한 억지를 부렸을 뿐이었다. 여차 하면 왕은 정말로 석정에게 품계만이 아닌 관직까지 당상으로 내릴 터였다. 김수항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물러났다.


"선대는 은원을 풀었는데, 왜 후대가 못 푸는지."

"천신은 풀었습니다."


숙종이 김수항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자, 석정은 씁쓸히 웃었다. 선대인 청음 김상헌과 지천 최명길의 은원은 당사자들끼리 풀었다. 하지만 후대인 김수항과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 혼자 풀었을 뿐 김수항은 홀로 배배 꼬였다. 서로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고결한 조부의 이름에 흠집이라도 날 것처럼 언제나 거리를 두었다. 그나마 근자엔 많이 누그러진 태도라서 혹시나 했더니, 이따금씩 따끔한 가시가 여지 없이 손톱 밑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내 비답을 전하면서 내병조에도 한번 들러보고, 또 둘러보시오."

"내병조 말입니까?"

"사부를 문랑으로 넣지 못하는 대신 국청을 내병조로 옮긴 거요."

"..."

"병판 입에 윤휴를 물려주었으니 씹어먹으려고 들겠지. 잘 지켜보시오."

"알겠습니다."


석정은 입맛이 썼다. 국청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궐밖에 있든, 궐안에 있든 국청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두번 다시 발도 들여놓고 싶지도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이 하기 싫은 일을 자신에게 떠넘기는 것도 아니고, 왕이 못내 하고 싶은 일을 석정 자신에게 맡기는 셈이니.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이내 왕이 국청에 내리는 비답을 들고 내병조를 찾아가니, 처절한 비명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만! 그만! 그만 좀!"


두명의 나장이 형틀 장판에 엎드린 죄수의 볼기에 번갈아서 둔장을 휘두르는 참이었다. 윤휴의 이종조카 이환이었다. 엉덩이가 핏물로 질퍽질퍽해진 채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너무도 참혹했다. 하지만 김수항은 건조한 표정으로 장판 위의 이환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환, 이제 고하겠느냐?"

"..."

"고하겠느냐?"


김수항의 조용한 독촉에 이환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눈이 너무 따가웠다. 눈꺼풀이 찐득찐득하니 눈이 떠지지도 않았다.


"그 익명서는...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놈이...."

"사실, 사실입니다. 제가 아니라 이태서 삼부자가 썼습니다."

"이태서...? 죽은 사람 이름은 왜 갖다붙이느냐?"


김수항의 두눈이 묘하게 번뜩였다. 이태서는 허견, 복선군과 함께 역모를 주도한 죄로 혹독한 형문을 받다가 끝내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그것도 형틀 장판 위에서. 그런 이태서가 쓴 글이라 우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그 글...이태서가 짓고, 이태서의 작은 아들 이경명이 쓰고, 큰 아들 이경의가 같이 지켜보았습니다. 저도 마침 이태서를 만나러 갔다가...그 글을 쓰는 것을 봤습니다. 이태서 말로는 사직동의 한 대신이 시킨 일이라 했습니다."

"사직동이면 허적인데...곧 죽어도 윤휴는 아니다?"

"정말입니다. 아저씨는 아무 관련이..."

"네놈이 산 사람 살리겠다고 죽은 사람한테 찍어붙이는구나?"


김수항이 비웃었다. 이환은 어떻게든 윤휴한테까진 불똥이 튀지 않게 안간힘이었다. 딱할 지경이었다. 서인들을 무고하는 익명서를 쓴 것도 자신이 아니라 이태서 삼부자의 소행이니, 쓴 곳도 포동이 아니라 사직동이니, 사주를 한 것도 윤휴가 아니라 허적이니...죽은 사람들 이름만 골라서 말하는 꼬락서니가 눈물겨웠다.


"정말 아무 상관이..."

"너무 애쓰지 말게나. 다 끝났으니."

"끝...이라뇨?"

"벌써 윤휴를 형문하라는 어명이 떨어졌으이."

"..."


이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대부에겐 섣불리 형문을 가하지 않는다. 특히나 상공육경의 정승 판서에겐 장杖은 물론 태笞 조차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죽을죄가 아니고서야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않는 법이었다. 형문을 가할 때는 죄가 확실해진 다음이었다. 그런데 윤휴에게 형문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끝났다. 정말로 끝났다.


"끌어내라."


김수항의 턱짓에 나장들이 이환을 끌어냈다. 이환이 금세라도 넘어질 듯 휘청휘청하자 나장들이 황급히 부축했다. 시야가 핑글핑글 도는 순간, 이환은 또 다른 나장들에게 거칠게 끌려오는 윤휴를 보았다.


"아저씨!"

"..."


윤휴의 동공이 흐릿했다. 이종조카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보호하기 필사적인 이환을 더는 탓할 수도 없었다. 윤휴는 어쩐지 다시는 못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괜히 가슴 한켠 아릿했다. 그래도 먼친척이라고 거두어 아끼던 아이인데, 하필이면 허견의 눈에 드는 바람에 그릇된 길로 갔다.


"아저씨이!"


바둥거리는 이환을 보면서 윤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억울했다. 자신은 조선의 힘을 꿈꾸었다. 병거를 만들고, 조총과 화포를 증대하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군비軍備를 증강하고 싶었다. 언제든 청을 치고 왜를 눌러 사방에 동방의 힘을 과시하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흔들리는 청을 보면서, 다시 없을 기회라 여겼다. 지금이 아니면 청을 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서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인들은 뜬구름 잡는 소리라며 비웃었고, 같은 당파인 남인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허무맹랑한 계책이라면서, 하나둘씩 외면했다. 마침내 자신은 공염불空念佛만 외는 땡중보다 못한 인물로 낙인 찍혀, 이렇게 왕에게도 버림 받았다. 이렇게 천한 나장들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이끌려 형틀 장판에 엎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윤휴는 턱끝이 장판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윤휴 자신이 가고 송시열이 오려나 싶었다. 자신이 주자의 감춘부感春賦를 차운하여 시를 짓는 것조차도 그 밴댕이 소갈머리는 주자에 대한 불경죄라면서 펄쩍 뛸 정도이니,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송시열은 주자를 끔찍하게 떠받들고, 그런 송시열을 서인들은 또 끔찍하게 떠받들며, 송시열이 꿈꾸는 조선을 만들기 위해 온힘을 다할 것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내어놓는 계책이 더 허술하고 허황됐다. 송시열은 화포를 늘려야 한다면서도, 북방의 여인들에게 화포 쏘는 법을 훈련시켜 오랑캐胡를 대적하게 하자고 하였다. 그리 하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면서. 그렇게 여인에게도 군역을 짊어지게 하면 국방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었다. 송시열다운 발상이었다. 규방의 훈육책으로 송시열이 쓴 계녀서에도 남편 대신 아내가 돈을 꾸어오는 법, 벌어오는 법이 적혀 있었으니. 결코 부인婦人은 바깥나들이를 해선 안된다는 송시열이, 오랑캐 군대를 맞이하여 평안과 함경 등지의 여인이 화초를 가꾸는 대신 화포를 쏘고, 또 돈을 벌거나 꾸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으니. 그 모순에 부딪혀서 또 애꿎은 시간만 축낼 것이 분명했다.


"자네는? 언제 와 있었나?"


위관석에 앉은 김수항이 상서원 쪽에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윤휴는 움찔하여 고개를 돌렸다. 어느틈엔지 최석정이 기둥에 기대어 국청을 지켜보는 참이었다. 문사낭청이 되어 허견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다더니, 젊은 나이에 붉은 단령을 입게 되어 더욱 신수가 훤했다. 석정은 왕의 밀지를 숨기고 암행어사처럼 몰래 기찰이나 한 것처럼 소매춤에서 붉은 두루마리를 꺼내었다.


"여기...전하께서 이환을 다시 형문하라 명하셨습니다. 윤휴도 동참했는지를 기필코 문목問目에 넣어서."

"이미 그리 했네. 이따 추안을 꾸려 고할 걸세."


교서를 전하고 김수항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최석정을 윤휴는 두눈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정작 송시열보다도 용납할 수 없었던 존재가 저 최석정이었다. 어쩌면 윤휴 자신보다도 더 사문난적의 기질이 강한 놈이었다. 송시열의 세상은 윤휴 자신을 두고 사문난적이라 손가락질을 하지만, 윤휴는 조금은 억울했다. 자신이 차감춘부次感春賦를 짓는 것조차도 사문난적이 되어야 한다면, 주자는 안중에도 없는 최석정은?


최석정이 떠받드는 것은 주자朱子가 아니라 숫자數字일 터였다. 물론 숫자를 신봉한다 하여 사문난적은 아니었다. 그저 주자학 외에 잡학에 눈돌리는 시간이 더 많은 것만 봐도 사문난적 기질이 있다는 것이지만. 김수항과 송시열을 옹호한 죄로 쫓겨나갈 적에 최석정 그놈이 적어놓은 그 마방진만 봐도, 최석정은 세력을 얻으면 조선을 들쑤실 터였다.


"헌데, 저 나장들이 손에 든 것이 둔장이 아닌가 봅니다?"


석정이 힐끗 나장들이 손에 든 형장을 쳐다보며 꺼낸 말에 김수항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 젊어선지 좋은 게 좋은 거란 이치를 모르는 건가.


"전하께서 엄히 형신하여 배소로 돌려보내라고만 분부하셨지, 곤棍인지 장杖인지는 지정하지 않으셨네."


김수항의 변명은 군색했다. 석정은 입가가 꿈틀하는 것을 느끼며 애써 비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혀끝까지 가만 두지는 않았다.


"죄수들이 형신을 받고 배소로 돌아가다 죽는 일이 허다하다지요. 전하께선 사형장 밖에서의 죽음은 원치 않으십니다."

"유념하지."


김수항은 최석정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석연찮은 죽음 대신 사형을 집행할 수 있게 시비를 똑바로 밝히라는 간섭을 해대니 그저 괘씸했다. 헌데 최석정의 눈길은 김수항의 어깨너머로 손가락 하나 만큼의 틈이 벌어진 내병조 장지문을 비집고 들어가는 듯 했다. 저 안에 김석주가 있을 것만 같았다. 시꺼먼 낯빛으로 어둠 속에서 지켜볼 것만 같았다. 미심쩍은 석정의 눈길에 김수항은 마른침을 삼켰다.


"안 가보는가?"

"전하께선 추안을 기다릴 여유가 없으십니다. 수시로 기찰하고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자네는 주상의 사인私人이 아니라 우리 서인西人임을 잊지 말게."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석정은 한숨으로 일축하고 김수항의 뒤편으로 물러서서 함께 추국을 지켜보았다. 이환은 윤휴의 개입을 끝내 부인했다. 윤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김수항이나, 이상진이나, 윤휴가 배후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삼고 윤휴의 자백만을 강요했다. 흉서를 사주하여 서인쪽 대신들을 없애려고 했다는 죄목이었다.


"어서 자백해라. 네놈이 이종조카 이환을 사주했음을."

"무슨 소리요?"

"그래도 거짓말? 어서 이실직고 하렸다?"

"난 모르오. 난 몰랐소."

"문랑은 윤휴를 계속해서 형문하라."

"예 대감."


그나마 압슬과 낙형만 아니었을 뿐, 볼기의 피와 살이 튀는 형신을 윤휴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이를 악물면 악물수록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은 고통 앞에 약한 존재였다. 나이가 들 수록 더러 무뎌지고, 더러 더뎌지긴 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자는 없었다. 희읍하는 윤휴의 모습은 너무도 처참했다. 석정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몸서리를 쳤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벌써, 해가 중천에 떴거든요."

"그래? 가는 김에 전하께 계문이나 전해드리게나."

"계문이라니요?"

"모든 죄상이 명명백백 밝혀졌으니, 이환은 부대시참에 처하고, 윤휴는 사사에 처하시라...그리 계문을 적어주겠네."

"송구하나, 곧 전하께서 낮것을 드실 때라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


정을 붙일래야 붙일 수도 없는 놈이라고, 김수항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석정의 말마따나 곧 왕이 점심을 드실 때였다. 하지만 왕이 워낙 일벌레라, 식사를 미룰 수도 있고, 식사를 들며 계문을 검토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 베듯 싹둑 잘라버리는 단호함이 괘씸했다. 왕의 신임을 믿고 천지분간도 못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럼 이만..."


석정은 김수항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서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벌써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머릿속이 정돈되질 않았다.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미 흉서의 배후가 허적이 아니라 윤휴라고 단정한 분위기였다. 이환은 윤휴가 아닌 허적을 지목했는데도, 국청에선 아무도 허적을 염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후가 허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꼭 윤휴여야 한다는 듯이, 기정사실로 삼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허적에게 흉서의 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석정은 윤휴의 목숨이 며칠 남지 않은 사실을 직감했다. 윤휴 역시 허적 만큼이나 석정 자신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자였다. 그러니 무조건 윤휴가 배후여야 한다는 서인들의 묵계默契가 달갑기도 했다. 하지만 쌉쌀하기도 했다.


"죄는 무슨 죄? 내가 아닌데! 이미 찍어놓은 인본印本처럼 왜들 틀에 맞춰 나를 모함하는 것이냐?"

"뭐가 그리 억울하냐? 대로께선, 평소 윤휴 네놈이 전하를 속여 살인을 범하게 한다고 한스러워 하셨으이. 그 죄값을 돌려받는 것 뿐이다."

"..."


유배지에서도 서로 서한을 주고 받은 모양이었다. 석정은 더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살인殺人? 왕이 살인을 범한다는 말 자체도 어찌 보면 불경하기 짝이 없었다. 헌데 방금 김수항은 대로라는 두글자를 입에 담았다. 아직 풀려나지도 않은 송시열의 입김이 벌써 국청에 닿았고, 조정에 닿았다.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 풀려나면? 새삼 윤휴의 목숨이 아까워졌다. 아무래도 석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구리 뒷다리를 수도 없이 구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 윤휴가 전하를 속여서 사람을 죽인다고 욕할 때는 언제고, 왜 자기들도 똑같이 하냐고."


석정이 푸념하며 통명전 동협문에 당도했을 때는 역시 낮것상이 동온돌로 들어간 뒤였다. 동협문, 서협문을 지키는 금군들이 석정을 보자마자 쭈뼛쭈뼛 일러주었다.


"방금 전에, 수라상이 들어갔사온데..."

"뭐? 벌써?"

"예에, 간발의 차로..."

"할 수 없지. 예서 기다리겠네."


석정은 가만히 동협문 옆으로 비켜나서 담벼락에 등허리를 기대었다. 관직생활을 하다 보면 점심을 챙겨 먹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저 콩고물도 묻히지 않은 인절미로 허기를 겨우 면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아침과 저녁, 이렇게 두끼만 먹거나, 밤참까지 겨우 세끼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아침에 늦어서 허둥지둥 등청하고 나면 한나절 두나절 세나절 쫄쫄 굶어서 속병이 도지는 터였다. 기운도 달렸다. 홍문관에 돌아가기도 힘에 부쳐선지, 석정은 담벼락에 등허리를 딱 붙이고 지키고 섰다가, 그마저도 힘에 부쳐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눈꺼풀이며 속눈썹이 어쩐 일로 끈적끈적하여, 도저히 떨어지질 않았다. 석정은 잠을 떨칠 셈인지 발치의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어 땅바닥을 해작거리더니 거북 등껍질 같은 것을 그려냈다. 그리고 일一부터 십오十五까지 채워넣다가는 생각이 막혔는지 가운뎃손가락을 쪽쪽 빨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영감님, 수라상 내여갔는뎁쇼."


손가락을 물고 고개를 떨군 채로 단잠에 빠져드는 석정의 목덜미로 웬 칼날 그림자가 닿았다. 그림자야 워낙 닿는 감촉도 없는 법이지만, 목덜미를 베는 듯한 그림자 때문인지, 걸걸한 목소리 탓인지, 석정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석정은 손가락을 입에서 빼지도 않은 채로 멍하니 되물었다.


"벌써?"

"벌써라뇨? 한참을 푸지게 주무시더만."

"그...랬나?"

"그랬지요."


이미 대원반, 곁반, 책상반까지 세개의 상을 차례로 내가는 수라간 나인들의 뒷모습이 석정의 눈곱 낀 시야에 희미하게 잡혔다.


"험, 전하께 고하여주게나."

"그런데요...지금 판의금 대감께서 먼저 들어가시어..."

"뭐?

"아까 계속 계문이 왔다 갔다 하더니만, 수라상 나갈 때 바로...바로 말이지요."


금군이 쭈뼛쭈뼛하면서도 석정을 보며 혀를 빼물고 웃었다. 석정은 어쩐지 낭패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기운이 넘치기는 커녕 오히려 잠이 넘치니 문제였다. 석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두손으로 털었다.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번갯불에 콩볶는 냄새가 나는 줄도 몰랐다. 어쩌면 벌써 윤휴의 사사가 결정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때 서협문이 삐걱 열리더니 문틈으로 이언강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미처 동협문으로 판의금 이상진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보고 걸음을 늦추었다. 그러자 동협문이 열리더니 이상진이 문간을 나섰다.


"최응교? 아까 토끼더니...어찌 이리 늦었는가?"

"..."

"설마 담벼락에 기대고 잘도 자던 게 자네는 아니겠지?"

"..."

"왜 그랬나? 윤휴를 한차례 더 형신하고 위리안치하란 교서가 내렸으이."

"위리...안치요?"


석정은 뜻밖이라 두눈을 깜빡였다. 서인 모두가 윤휴의 목숨을 끊어놓으려고 작당을 하였는데, 당장이라도 사약을 받아낼 기세인데, 위리안치에 그치다니?


"윤휴가 형신을 당해내지 못하고 죽어버릴까 걱정일세. 자네 말대로 전하께선 형장 밖에서 죽는 것을 싫어하시는데 말일세. 그동안 죽을죄를 지은 게 수두룩한데, 죽어 마땅한 인간이 형신 도중에 죽어버리면 곤란하지."

"..."

"그러니 전하께 자네가 잘 말씀드려 사사를 시키도록 하게나."

"..."

"왜 대답이 없나?"

"..."

"이보게. 홍단령을 입고 보니 모든 당상관이 우스운가?"


이상진이 마침내 심기 불편한 음성으로 따지고 들었다. 어느덧 서협문으로 빠져나온 이언강의 청단령이 석정의 두눈에 비쳤다. 석정은 이상진이 입은 홍단령과, 자신이 입은 홍단령을 힘없이 내려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은 홍단령은 타는 듯이 붉었다. 석정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처연히 대꾸했다.


"아무래도 홍단령은...피를 너무 많이 묻혀서 홍단령인가 봅니다."

"뭐?"


이상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석정을 흘겨보고, 이내 이언강을 쳐다보았다. 이언강도 할 말을 잃었는지 최석정의 얼굴을 그저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감성도 메마른 듯한 문장만 대차게 구사하는 위인이, 웬일로 약한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그 입술도, 혀도 붉어보였다.


"한가지만 기억해두게나. 윤휴는 대로와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면서, 자네와 자네 스승과도 철천지수徹天之讎라는 사실을. 윤휴를 지금 당장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네가, 아니면 자네 스승이 죽을 걸세."

"..."


석정의 두눈이 흔들렸다. 이상진에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얼른 시선을 돌리다가, 그는 문간의 두광을 발견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몰라도, 두광의 두눈도 흔들렸다. 문간에 비친 홍단령 한자락이 이렇게 살벌한 것인 줄은 두광도 몰랐을 터였다.


"전하께서...들어오라 하셨사옵니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면서, 문간으로 뻗은 통명전 뜨락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발걸음이 불안해 보였는지, 등뒤로 이상진이 다짐받듯 강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심하게. 윤휴는 수차례나 전하를 움직여서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범한 잘세."

"..."


석정은 대꾸할 정신도 없이 그저 뚜벅뚜벅 걸어갔다. 평소엔 통명전과 양화당 사이에 담벼락이라도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마냥 걷다보니 마당이 짧은 건지, 보폭이 긴 건지, 벌써 기단에 발길이 닿았다. 두광의 안내를 따라 석정이 양화당 안으로 들어서니, 왕이 서안 위에 놓인 글을 읽으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맞았다. 석정이 담벼락에 기대어 곤히 잠든 것을 왕이 이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두광이 숙종의 서안 옆으로 다가들어 먹을 갈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신료들이 최응교에게 윤휴 문제로 압력을 넣는 참이었사옵니다."

"그래? 고민할 계제도 아닌데. 이거나 보시오."


숙종이 서안 위의 글을 툭 내밀었다. 두광이 받아들어 석정에게 전하였다. 석정이 받아들고 보니 비답이었다. 그것도 흉서 당시 윤휴에게 내린 비답이었다. 석정은 믿기지가 않아 두눈을 크게 뜨고 비답을 쳐다보았다. 익명서 이튿날로 윤휴가 왕에게 은밀하게 차자를 올려서 익명서에 거명된 서인 신료들을 국문하라 청하는 비밀차자에 대한 비답이었다.


"이건..."

"윤휴가 익명서 다음날로 서후행을 통해 내게 전한 비밀차자, 그 비답이오."


숙종이 싸늘하게 웃었다. 윤휴는 억울할 것도 없었다. 배후가 허적일 지언정, 허적의 농간이었을 지언정, 서인들을 모함하는 익명서를 내거는 음모에 동참한 것은 윤휴였다. 한발을 담가놓고 이제 와서 자기는 아니라고 발뺌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두발을 담갔던 자들은 이미 송장이 되었으니, 남은 한발을 물어뜯겠다고 필사적인 서인들의 송곳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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