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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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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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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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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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72

DUMMY

"병판은 이만 서찰을 놔두고 물러가 보시오."

"예? 하오시면..."

"사람을 시켜 인달방의 동태를 살펴보시도록 하고."

"예 전하."


김석주가 진중히 읍하고서 물러갔다. 김석주가 워낙 비대한 몸집이라 일어설 때 뒤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긴 하였지만, 숙종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김석주가 물러가는 순간 장지문이 열리면서, 맞은편 서온돌의 문이 습관처럼 열리는 것이 숙종의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아침인사를 하느라고 여릿한 눈웃음을 지으려다 김석주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돌아앉는 진홍의 얼굴이 보였다. 돌아앉은 채로 금떨잠을 꽂으며 머리매무새를 매만지는 모습이 우스웠다. 피식 웃던 숙종은 헛숨을 들이키며 속눈썹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닫지 마라."


동온돌의 장지문이 닫히는데, 한치 만한 틈새를 남겨두고 왕이 제지했다. 장지문을 지키는 지밀나인들은 멈칫하여 두눈을 굴리고선 도로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춘삼월이긴 해도, 새벽바람은 아직 찼다. 찬바람이 동온돌로 밀려들어오는데도, 숙종은 그 찬바람에 오히려 잠이 순식간에 싹 가신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왕의 하명을 들었는지, 서온돌의 장지문도 도로 열렸다.


동온돌과 서온돌의 장지문이 서로 열린 상태로, 김석주가 어기적어기적 대청마루를 나가 섬돌로 내려섰다. 일부러 늑장을 부린 건지, 무거운 몸 탓인지, 김석주는 섬돌에 내려서면서도 뒤뚱대며 슬쩍 고개를 틀어 서온돌을 쳐다보았다.


흥.


김석주는 섬돌 아래로 놓인 자신의 퍼진 목화의 오른발에 발끝을 넣으려고 몸을 기우뚱하면서 서온돌을 힐끗 곁눈질로 살폈다. 왼발도 넣는 척 몸을 반대로 틀면서 또 몸을 기우뚱하면서 동온돌도 살피니, 왕이 두눈을 크게 뜨고 맞은편의 중궁을 바라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처럼.


김석주는 입안의 웃음을 슬그머니 빼어물고 통명전 협문을 나섰다. 새벽녘 협문을 지키는 허후의 서슬퍼런 눈초리 속에서도 느긋하게 걸음을 떼면서.


"전하..."


두광은 왕과 병판대감 사이의 대화를 온전히 알아듣진 못하였다. 여수신녀 때문에 도모할 수 없다? 서인인지, 여인인지를 가리키는 암탉이라? 얼핏 들은 그 해괴한 문구는 워낙 은어를 써서 무슨 얘기인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빈손에 뭔가를 움켜쥐듯 쥐었다 폈다 하며, 내려다 보더니, 활짝 열린 동공으로 서온돌을 바라보았다.


"중궁이다. 중궁이야."

"중전마마요?"


숙종은 허공에 시선을 못박고서 두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마치 눈에 넣기도 아까운 누군가를 바라보듯 그 눈동자를 멈추고서. 하지만 그 음성은 어쩐지 힘이 빠져 있었다.


"천자문에 이런 글귀가 하나 있다. 金生麗水금생여수 玉出崑岡옥출곤강...금은 려수麗水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나니...어마마마께서 중궁에게 주신 저 금떨잠 역시 려수산..."


숙종은 천자문의 한구절을 읊조리다 흠칫했다. 오래전에 중궁에게 금생여수에 관한 언질을 준 적이 있었다. 설마...아니다. 그때도 중궁은 그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도 모를 터였다. 지금도 몰라야만 했다.


"려수는 금이니...김씨니라..."


숙종의 음성이 느릿해졌다. 덕분에 두광은 좀더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오면 대비마마도 김씨, 중전마마도 김씨인데..."

"신녀辛女는 신축년辛丑年 생..."

"신축년이면 두분께서 태어나신..."


두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왕이 중궁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차린 것도 당연했다. 중궁이 만지던 금떨잠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다. 중궁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 전에 이미 대비전은 그녀를 세자빈으로 내정하고 려수산 금떨잠을 보냈으니.


"중궁을 죽이겠다?"


숙종은 미간을 좁히고, 날선 눈빛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이 서찰에 적힌 글귀는 그 심각성을 바늘로도, 몽둥이로도 볼 수가 없었다. 중궁을 죽여야 도모할 수 있는 일이라...중궁을 없애고 남인 출신의 계비를 들여서 저사儲嗣(왕세자)를 도모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중궁을 먼저 죽이고 총융사인 김만기를 도성으로 불러들인 후에 궁밖에서부터 거사擧事를 도모하겠다는 건지.


어쩐지 허적이 감히 역모를 꾀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궁을 제거하려는 것도 역모라는 사실을 그들이 모를까. 누군가 허견의 필체로 조작한 것은 아닐까. 아니 이 서찰의 진위를 떠나서, 이쯤 되면 저 남인들은 중궁을 죽이든 왕을 죽이든 사생결단을 내야만 하였다. 허적이 고유제 때 암탉을 잡아죽인 것처럼.


왕이 자꾸만 깊은 생각에 잠기자, 두광은 눈치껏 장지문을 닫게 하였다. 그래도 왕은 문이 닫히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눈빛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골똘히도 생각했다. 어느덧 시퍼런 새벽 어스름이 걷히고 동이 터왔다. 하얗게 짓쳐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숙종의 뇌리를 환히 비추었다.


뿌리를 뽑을까.


눈이 부시도록 환한 아침햇살에 더욱 또렷해지는 그림자처럼, 숙종은 자신의 핏빛 심장에 움튼 살기를 똑똑히 인지했다. 너무도 훤히 들여다 보였다. 숙종은 눈을 내리뜨고 자신의 심장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최대한 집중했다. 그의 짙은 속눈썹이 더욱 짙어졌다. 붉은 눈시울도 더욱 붉어졌다. 두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는 허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상참도, 경연도 파하고서 숙종은 윤대를 실시했다. 도승지도 없다보니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최석정은 특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아침에 눈뜨고 소세梳洗만 겨우 하고 홍문관에 들었다가 으레 내관들에게 양 옆구리를 꿰이다시피 하여 양화당으로 불려왔다. 양화당 안엔 덩그러니 왕과 자신만 있는 것을 보니 윤대를 할 신료들보다도 먼저 불려온 모양이었다.


"앞으로 사부는 당분간 양화당으로 사진仕進(벼슬아치가 정해진 시간, 장소에 출근함)하시오."


양화당에 꿇어엎드린 석정에게 대뜸 숙종이 하는 말이었다. 석정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홍문관 부응교로서 할 일도 산더미 같은데, 양화당으로 사진을 하라니.


"어찌 도승지는 아니 뽑으시고..."

"아, 도승지...뽑아야지."

"물론입니다. 신이 도승지의 업무까지 다 할 수는 없사오니..."

"알겠소."


숙종은 문간의 두광에게 흘끗 눈짓을 하였다. 두광이 떡하니 석정의 무릎맡에 지필묵이 구비된 서안을 갖다놓고선 총총히 문간으로 비켜섰다. 숙종은 입꼬리에 얄궂은 웃음을 띠고 짐짓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부응교 최석정은 교지를 받아쓰라."

"예 전하."


석정은 얼른 서안 위의 붓을 집어들고 초주지 오른쪽 상단에 붓끝을 갖다대었다. 도승지를 임명한다니 얼른 받아쓸 요량이었다. 헌데 석정의 귓전에 뜻밖의 이름이 들렸다.


"남구만을 도승지에 제수한다."

"..."


붓을 쥔 석정의 손이 움찔했다. 석정은 순식간에 콧속이 건조해진 기분으로 콧잔등을 찡긋했다. 하필이면 새 도승지 자리에 자신의 스승을 왕이 앉히겠다 하였다. 이미 왕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득달같이 훈련대장을 바꾸고, 이조판서를 바꾸고, 대사헌을 바꾸고, 대사간을 바꾸고 도승지를 바꾸었다. 밀물과 썰물이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문제는 자신의 스승은 자신 만큼이나 궁둥이가 굼뜬 위인이었다. 왕이 도승지에 제수하였다고 결성結城에서 도성으로 하루이틀 만에 달려올 위인도 아니었다. 달려올 수도 없었다.


"전하, 제 스승 남구만은 의망이 되어 있지 않았사온데..."

"하여 가망加望(후보에 오르지 않은 이름을 올림)하는 것이오."

"제 스승은 결성에 계시니 다른 분으로 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선 몹시 바쁘시어 단 사흘도 기다리실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속히 부르기나 하시오. 지제교를 겸하는 최부응교가 왕의 뜻에 부응하여 교지를 쓰느라 팔이 남아나지 않을테니."


숙종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석정은 이를 악물고 씨익 웃었다.


"저를 보고도 그러십니까? 정말로, 제 스승은 다른 서인들처럼 하루이틀 만에 사은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결성에서 도성까진 말을 타고 달려도 이틀은 더 걸릴 것이온데..."


그런 석정을 보는 숙종의 두눈에 갈등이 어렸다. 믿고 맡겨야 하는 도승지 자리를 최석정의 친인으로 하려고 해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남구만이 도성에 오려면 이틀도 넘게 걸릴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지금은 사흘은 커녕 이틀도 길었다. 허견과 허적을, 남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면.


"이틀만 주겠소."

"..."

"전하."

"이거나 보시오."


숙종은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서안 위로 올려놓고 문간의 두광에게 눈짓했다. 두광은 재바른 걸음으로 다가들어 서찰을 최석의 서안으로 옮겨놓았다. 석정은 의아한 얼굴로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하게 접힌 모양새에, 접힌 단면만 봐도 우글쭈글하고 너덜너덜까지 했다.


"이게 무엇인지요?"

"나도 모르겠소."


석정이 조심스레 묻자, 숙종은 한숨 섞인 웃음을 토했다. 재채기 같은 웃음이었다. 몸이 아닌 영혼이 재채기를 하는 건지, 이성과 감성이 균열을 일으킨 듯한 발작적인 웃음이었다.


"모르시다니요. 허면 어찌 전하의 어수御手에 들어간 것입니까?"

"..."


왕은 대답조차 조심스러웠다.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나중에 말해줄테니 우선 이 서찰이 누구의 필적인지 알아보시오. 은밀히."


숙종의 옥음이 또렷하게 떨어지자, 두광이 문간에서 다가들어 받아들고 석정에게 전하였다. 석정은 서찰을 빠르게 훑어내려갔다. 처음엔 그저 의아히 읽다가 그의 두눈에 점점 초점이 흔들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서체인데, 행간의 내용은 은밀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由麗水辛女不可圖謀矣.


석정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양화당을 나섰다. 시야를 덮은 푸르른 바늘 같은 솔잎들이 두눈을 콕콕 찌르는 듯 하였다. 여수신녀 때문에 도모할 수가 없다. 여수신녀를 없애야만 도모할 수 있다. 뭘 도모한다는 건지, 여수신녀는 또 누구를 뜻하는 건지.


여수신녀麗水辛女라...김씨 신녀라...


전하와 중궁전이 똑같이 신축년생이니 중궁을 말하는 건가? 중궁이 없어져야 도모할 수 있다는 얘기는, 중궁을 없애고 계비를 앉히겠다는 건가? 그저 중궁이라고 하거나, 다른 은어를 놔두고...그냥 여수녀麗水女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신辛을 넣은 이유는? 전하께서 신축년생이니, 동갑이신 중궁도 신축년...대비와의 혼동을 피하려고 신辛자를 넣은 건가?


이건 좀 이상하다.


그냥 자기들끼리 은어를 만들려면 여수신녀라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축녀丑女라고 자기들끼리 넣으면 되었다. 하지만 일부러 알 듯 모를 듯하게 여수신녀麗水辛女라고 넣은 것은...대체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아니, 누가, 누구더러 읽으라는 글귀인가?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역모의 증거였다. 누구의 필적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으니...필적을 알아보려면 승정원으로 가야했다. 승정원은 온갖 관료들이 왕에게 서계를 올리는 곳이었다. 승정원에 알아보려면...승지 중에 은밀히 인맥이 닿아야지만...아니면 몰래 밤중에 숨어들어 읽어봐야지만...아니, 그럴 것 없이 다시 문맥을 살펴봐야 하나. 석정은 머릿속의 글귀들을 요모조모 곱씹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여수신녀라...편지를 받는 사람이 읽으라는 글귀인가, 편지를 보는 사람이 읽으라는 글귀인가...전자이면 진짜이고, 후자이면 가짜인데...


생각에 잠긴 사이, 벌써 그의 두발은 습관처럼 육조거리 병조 앞에 이르렀다. 그는 병조 솟을삼문을 지나서 낭관청사 앞으로 걸어가다 문득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마침 병조 당상청사에서 김석주가 걸어나오는 참이었다. 낭관청사보다 기단이 한자一尺 정도 더 높은 당상청사의 기단 위에서, 김석주가 별 생각 없이 석정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제가 잠시 착각해서."

"착각?"


석주는 석정의 입에서 나온 착각이란 단어가 우습게 들렸다. 뭘 착각했다는 건지. 머리 좋은 석정의 입에서 나온 착각이란 단어 자체가 어색하게 들렸다.


"병조와 홍문관을?"


석주는 석정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자신이 병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긴 하지만 어련히 홍문관에서 기다리면 될 일을, 왜 굳이 병조까지 찾아온 것인지.


하지만 당장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자신의 수하들이 이쪽을 기웃거리면서 최석정의 눈치를 보는 참이었다.


"그럼 가보게나."

"예."


석정은 뻘쭘히 돌아서면서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김석주를 흘겨보곤, 당상청사 앞 한켠에 얼씬거리는 무사들의 면면을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병조의 무사들이 아니니 이자들은 재산루의 사병들일 터였다. 이자들이 병조도 출입하나.


석하를 만나보면 무슨 얘기라도 해줄까나. 하지만 석하만 난처하게 만들 일이었다. 족형인 김석주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기밀을 알려줄 놈이었으면, 진즉에 진천에 자신의 발을 묶어두지도 않았다. 석주도 배신하지 않고, 석정도 보호하려던 게 그놈 욕심이었으니.


석정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자신의 두 발을 내려다 보았다. 앞코가 살짝 해어진 검은 목화가 보였지만, 그가 본 건 신의 앞코가 아니었다. 자신의 두 발이 이리로 왔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김석주를 의심한 탓이었다.


여수신녀가 죽어야 도모할 수 있다...이건 허견보다는 김석주가 지어낼 법한 글귀였다. 하지만 김석주의 서체는 아니다. 자신이 김석주 밑에서 허구한 날 수본을 올리고 수결을 받다보니 김석주의 필체 쯤은 알았다. 어차피 김석주의 머리로 위조를 해낸 것이라면, 혹은 위조가 아니라면, 어느 쪽이든 허견의 필체일 터였다. 허견의 필체를 확인할 만한 곳을 그는 한 군데 알았다.



"최부응교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


솟을대문 밖으로 만종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기자, 석정은 뻘쭘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아니면, 허견과 엮일 일이 없었던 홍만종이니, 제 발로 찾아와 놓고도 면목이 없었다. 더군다나 허견의 필적을 보겠다고 이리로 왔으니. 그런 석정을 보며 만종은 은근히 반가운 눈웃음으로 물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석정은 홍만종의 반가운 두눈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한눈에도 위용이 대단한 솟을대문이 머리 위를 찍어누르는 듯 하였지만, 석정은 솟을대문을 눈여겨 볼 정신도 없었다. 그는 만종의 팔꿈치를 잡은 채로 시선을 만종의 어깨죽지로 조용히 묻었다.


안채에서 중문 쪽으로 나오던 윤이가 석정을 보고 언뜻 반갑지 않은 느낌이 두눈에 스쳤다. 그 굳은 눈동자를 보고 석정의 입가가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었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는 척 눈길을 돌렸다.


경황이 없었던 탓에 외관도 미처 살피질 못했는데, 잠두봉 자드락에 있는 집 치고는 제법 큰 갑제였다. 귀하디 귀한 소나무 만으로 지은데다, 회회청을 쓴 청기와를 얹었다. 처마 끝엔 목숨수壽자가 새겨진 수막새와, 복복福자가 새겨진 암막새까지 곱게 놓아서, 한눈에도 명장의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이 좋군요."

"아, 그게..."


홍만종이 겸연쩍게 손바닥으로 턱을 문질렀다. 사양하려 하였더니, 말을 듣지 않으면 막새의 문양을 양천허씨를 상징하는 허락할허許자를 새겨놓겠다고 허견이 으름장까지 놓았다. 덕분에 사양할 수도 없었다. 답답해 하는 만종의 얼굴을 보며 석정은 넌지시 물었다.


"참, 이번에 부사정副司正에 의망되었던데...하시렵니까?"

"시끄럽지요? 영상댁 뒷배니, 병판대감 뒷배니...귀 따가워 죽겠습니다."

"술이나 한잔 합시다. 이강고요. "


석정은 만종의 소매를 잡아끌어 사랑채로 들어갔다. 이미 술을 한병 챙겨왔겠다, 만종은 석정과 함께 사랑채로 들어가며 윤이에게 안주 좀 구해달라는 눈짓을 잊지 않았다. 윤이는 애써 빙그레 웃었다. 귀한 손님이 왔다. 오라비 허견과 아비 허적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가도, 어쩌다 한번씩 자기 사람으로 삼지 못해서 또 안달인 귀인이었다. 부마 간택을 빙자하여 왕이 문외출송까지 풀어주었으니, 왕의 신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니 홀대를 할 수도 없었다.


석정은 윤이가 안주상을 차려올 때까지 만종과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나 나누었다. 요즘도 황극경세서에 빠져 있는 일이며, 아들 창대가 명안공주의 배필이 될 뻔한 일이며, 금혼이 풀리고 허혼이 되자마자 아들 창대를 서둘러 명안공주의 시누이가 되는 오두인의 여식과 혼인시킨 일이며, 슬슬 딸 이소의 짝도 찾아봐야겠다는 얘기까지...한담을 나누다 보니 윤이가 몸종과 함께 안주상을 차려 안으로 들였다.


"친정에서 보내온 죽력고도 있으니, 말씀 나누다 가세요."


윤이가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를 하고 몸종과 함께 물러갔다. 석정은 입가를 비죽이며 피식 웃었다. 만종은 그런 석정을 보며 힐끔 눈치를 보았다.


"미리 연통을 주셨으면 기녀라도 불렀을 터인데..."

"되었소."


석정은 두눈을 찔끔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요즘 조선팔도 곳곳에선 무슨 경쟁이라도 났는지 사대부들이 열다섯 안팎의 어린 기녀들을 불러다가 억지로 합방을 치르고 머리를 얹어주는 일이 횡행하였다. 서로 나는 열두살짜리를 품었네, 열한살짜리를 품었네, 하고 무용담처럼 떠벌렸다. 자신들이 얼마나 징그러운 자벌레 같은지 깨닫지도 못하고서.


열다섯도 안된 계집아이들을 건드리는 일 자체가 끔찍하게 야만스러워 보인 탓에, 그는 아직 딸 이소도 시집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들 창대야...하필이면 부마가 될 뻔하였으니,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서둘러 도둑장가를 보냈다. 하지만 이소는 국혼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좀더 끼고 있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소 역시 올해로 열다섯이 되니, 곧 배필을 찾아주긴 해야 했다.


"허면, 저를 찾아오신 용무라도..."


만종이 조심스레 석정을 쳐다보았다. 요즘 최석정이 얼마나 바쁜지는 익히 알았다. 예전부터 바쁘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운 최석정이었다. 당상관 밑으로는 당하관들은 대다수가 일에 치여 골병이 드는 처지인데다, 최석정은 왕도 수시로 은밀한 일을 맡겨서 눈코 뜰 새도 없이, 또 끼니를 제때 챙길 짬도 없이 바빠서 결국 산증까지 앓았던 적도 있으니. 존경각에 갇힌 채로 산증을 일으킨 그를 자신과 서종태가 구해냈을 정도이니. 그런 최석정이 대궐 근처도 아니고 서호로까지 이강고를 한병 챙겨들고 자신을 찾아온 일이 심상치가 않았다.


"왜, 나는 귀형을 찾아오면 안되오?"

"워낙 바쁘신 분이니 그렇지요."

"귀형 말이 맞소. 바빠서 찾아왔소이다."


석정은 피식 웃으면서 시인했다. 만종은 두눈을 크게 뜨고 석정을 쳐다보았다. 바빠서 찾아왔다는 말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려나.


"무슨..."

"영상대감의 사위가 되셨으니, 남인들이 여기저기서 귀형께 잘 보이려고 서찰을 보냈을 거요. 영상대감이 현묵자를 사위로 얻었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을 거고..."

"에..."

"그 서찰들이 좀 필요하오."

"서찰?"


석정은 콕 집어서 허견이라 말하진 않았다. 그는 거짓말을 안하지만 못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지금은 더더욱 허견의 이름을 끄집어내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만종을 속여서 허견의 서찰을 받아낼 생각도 없는 만큼 그저 에둘러 용건을 꺼낼 따름이었다.


"서찰은 왜..."

"내 이 자리에서 보고 돌려주겠소."

"..."


만종은 다시금 두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긴 있다. 뭔가 남인들의 동정을 살피려는 건가. 아니면 필적을 대조하려는 건가. 어쨌거나 이 자리에서 보고 돌려주겠다니,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름 아닌 최석정이 하는 일이었다. 그 청명한 기질로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리는 없었다.


"명곡明谷(최석정의 별호)이 하는 일에 명분名分 없는 일이 없지."


만종은 피식 웃으면서, 흔쾌히 서안을 살펴 그 아래에 놓인 목함을 꺼내어, 석정 앞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친절히도 목함의 뚜껑까지 열어젖혔다. 석정은 만종의 손으로 자신의 무릎맡에 펼쳐지는 서찰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워낙 중차대한 일인 만큼 허투루 할 수도 없었다. 석정은 자신이 기억하는 서찰 속 서체를 찾아서, 또한 허적이나 허견의 이름에 유념하여 서찰들을 한장한장 펴보았다.


만종은 그런 석정의 손가락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지켜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일단 석정이 차근차근 서찰들을 훑어보는 것을 보고, 만종은 석정의 손끝에서 시선을 떼어 이강고를 한모금 마셨다.


석정은 또 찬찬히 서찰들을 살피고 또 살피다, 허견이 만종에게 보낸 서찰을 펼쳐들었다. 머릿속의 서찰과 똑같은 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허견의 필체였다. 석정은 방금 마른침을 넘기고도 또 입안이 바싹 마른 것을 느끼고 다시 침을 삼켰다. 이강고를 한모금 삼키고서, 그는 다시금 허견의 문체 및 서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일전에 만종이 집필하던 순오지 원고 중에서 야서혼野鼠婚을 허견이 보는 앞에서 윤이에게 떼어주어 자신들 허씨 부자를 조롱했던 일은 괘씸하지만, 한식구가 되었으니 윗사람 된 도리로 품어주겠다는, 제법 아량을 베푸는 듯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홍만종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호기를 부리는 모습이, 오히려 치기를 드러낸 셈이었다. 또 홍만종이 두달전에 선원록璿源錄(선원계보기략)의 이정釐正(검수하여 바로잡음)을 맡게 된 일을 거론하며 질시를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 두장의 서찰을 살펴 보니 성정이 어찌나 급한지, 격식 없이 날짜를 빼먹고 쓰는데다, 서체 역시 해서도 아니고 행서로 쓰면서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흘려쓰는 글자도 더러 있었다. 그 와중에 해일日자는 또 작게 쓰고, 귀이耳자는 또 유독 길게 쓰면서, 삐침획 만큼은 또렷했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중지를 입으로 쪽쪽 빨면서 허견의 서찰을 살피는 데에 몰두했다. 품속의 서찰을 꺼내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눈앞엔 홍만종이 있었다. 괜찮으려나. 믿어도 될까나.


괜한 의심이 도지는 것을 느끼며, 석정은 이게 다 전하께 옮은 거라며 속으로 스스로를 변명했다. 홍만종이 누군가. 의심할 사람을 의심해야 했다. 믿을 사람을 의심해선 안되었다. 석정은 품속을 더듬어 서찰을 무릎맡에 내려놓고 서찰을 비교했다.


서체가 똑같다.


보고 또 보고, 아무리 살펴도 똑같은 서체였다. 이건 허견의 간찰이 맞았다. 간혹 정말로 솜씨 좋은 자가 있어 허견의 서체와 버릇까지 교묘하게 재현해낼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흡사할 리는 없었다. 물을 흘린 흔적이 있어서 살짝 얼룩이 지고, 또 그렇게 젖었다가 마른 걸 떼어내는 과정에서 서너글자가 뜯겨나가긴 하였어도, 허견의 서찰임은 분명했다. 오히려 일부러 종이를 적셔서 실수인 양 결정적인 몇글자를 없앤 것이면 몰라도.


차라리 매울신辛자를 쓰지 말고, 여수녀가 죽어야 도모할 수 있다는 말만 적어놓았더라면, 표적이 대비전인지 중궁전인지 모호했을텐데.


중궁이 신축년辛丑年생이라 여수신녀麗水辛女라면, 대비전은 임오년壬午年생이니 여수임녀麗水壬女인데, 평소에 이런 여수신녀니, 여수임녀니...어색하고 번거롭게 은어를 지어붙였다는 건지. 굳이 중간에 매울신辛자를 넣어 의미를 분명히 할 바엔, 중궁을 뜻하는 짧은 은어를 썼을 터였다. 사계沙溪 김장생의 핏줄이란 뜻으로, 또 짐승의 암컷이란 뜻으로 모래사沙자만 써서 사녀沙女라고 하든지 했을 것을. 아니면 더 간단히 소축丑자를 써서 축녀丑女라고 하였든지. 그렇게 되면 대비전은 말을 뜻하는 낮오午자를 써서 오녀午女라고 하였겠지만.


아무리 봐도 조작인데, 너무 필체가 흡사해서 조작이라 주장할 수도 없다니.


"최정...아니 최부응교 나으리?"


만종이 부르는 말에, 석정은 흠칫 놀라 몸서리를 치며 만종을 쳐다보았다. 만종은 석정이 심각하게 서찰을 확인하는 것을 보았지만, 굳이 내용은 살피질 않았다. 다만 석정이 유독 불안하게 중지를 물고 빨고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뭔가 일이 있다. 가슴 속에 왠지 모를 불안이 또아리를 틀었다.


"부사정副司正이면..."

"종칠품 무관직이지요."


알면서 괜한 것을 짚어보는 석정을 만종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고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부사정을 내리려는 사람은 허적이 아니라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그러다 보니 세간에는 벌써 자신이 병판대감과 친하다느니, 병판대감에게 아부한다느니 말이 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안면 정도일 뿐, 자신은 병판대감의 족제 김석하와 부응교 최석정과 더 절친했다.


"그래도 벼슬을 받지 않고 도성을 나가 있는 게 좋겠소."


석정은 근심어린 얼굴로 만종을 보며 말했다. 석정의 충고에 만종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벼슬을 사양하고 도성을 나가 있으라고? 자신의 학문으로 문관도 아니고 고작 종칠품 무관 한귀퉁이를 얻을 판이다. 허적의 사위이자, 허견의 매부이면서도, 최석정이나 김석주가 차라리 더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윤이에게 알게 모르게 원망을 살 때도 있었다. 헌데 지금 허적 부자와 얽히지 말고 몸을 피하라는 의미의 충고를 최석정에게서 들었다. 방금 최석정이 읽은 서찰이 문제인가. 뭔가 필적을 대조하는 느낌인데.


"저를 믿으십니까?"


만종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물었다. 자신이 세살이나 더 많지만, 품계와 관직은 최석정이 훨씬 높았다. 왕의 신임도 확실하니 아마 생전에 자신이 최석정보다 높은 사람이 될 리는 없을 터였다. 그런 최석정이 어려워서 존대를 하며 물었다. 그래도 자신은 허적의 사위이자, 허견의 매부가 되었는데, 자신 앞에서 뭔가 그들과 연관된 서찰을 살피다니. 게다가 친절하게도 자리를 피하라는 충고까지 해주다니.


"믿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열손가락 중 하난데."


석정은 만종 앞에서 열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보였다. 이왕이면 다섯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고 싶었지만, 장난기가 동하였다. 만종은 그런 석정을 보며 입을 비죽이며 눈도 흘겼다. 하지만 어느새 배시시 웃어버렸다.


"열손가락...제게 나으리는 아홉손가락 안에 들지요."


만종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일부러 접어보이고 익살을 부렸다. 하지만 석정은 그런 만종의 너스레에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마음이 급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겨진 옷자락을 펼 만큼 마음이 한가하지도 못했다.


"관직은, 지금은 받지 마시오. 받으면 안되오."


사랑채를 나서기 전에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 서찰은 이미 왕이 살펴보고 자신에게 필적감정을 명한 증좌였다. 서체 자체는 허견의 필적이라 고해야만 했다. 그리 되면 왕은 허적과 허견을 역적으로 간주하고 구족을 멸하려 들 터였다. 뿐만 아니라 허적의 사람들을 모조리 솎아내고 뽑아낼 터였다.


그저 군데군데 찢어진 글귀가 미심쩍을 뿐이었다. 얼핏 짚이는 구석이라곤 일전에 친잠례를 열다가 중지했던 그날, 오정창의 여식이 친잠례에 참석했던 일이었다. 당시 복선군과 허견 등의 남인들이 오정창의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어쩌면 이 서한은 최근에 쓴 서찰이 아니라, 그 당시 허견이 오정창이나 복선군에게 보내려던 것일 지도 몰랐다. 아니면 최근도 중궁을 없애고 오정창의 딸을 중궁으로 들일 모의를 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서인들도 인조반정 당시 물실국혼勿失國婚을 결의했다시피, 남인들도 중궁을 자기네 사람으로 바꾸려고 모의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서도.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석정이 홀로 중문을 나설 무렵, 등뒤로 만종의 음성이 들렸다. 석정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만종이 웬 검은 보따리를 손에 들고, 석정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참이었다.


"여긴 서호고, 내가 사는 곳은 동촌이고...좀 먼데?"

"신변을 보호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홍만종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석정은 그런 홍만종을 돌아보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만종은 석하와 친밀하고, 석하는 병판대감과 친밀하니, 병판대감이 허견의 서체나 서찰을 구하려면 홍만종을 통해 빼돌리면 되었다. 하지만 홍만종이 소실인 윤이를 배신하고 병판대감을 도울 리가 없었다. 그것도 편지를 위조하는 일을. 도대체 어떻게 허견의 서찰을 입수한 걸까. 당장은 그 경로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만종과 함께 양화진에서 동촌까지 이슥한 밤길을 함께 걸어갈 따름이었다.


웬일인지 홍만종은 평소답지 않게 입을 꾹 닫고 조용히 걷기만 하였다. 최석정을 보호하겠다고 따라나선 것은 진심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신변을 정리하고 도성을 떠난다면 장인 허적과 처남 허견이 미심쩍어 할 터였다. 어쩌면 이미 최석정에게 미행을 붙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불안했다. 그래선지, 밤길을 걸으면서 지나가는 순라꾼들의 횃불 그림자에도, 또 등뒤로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물론 둘다 어쩌다 순라꾼들에게 찍힌 신세인지, 누구 하나 경수소로 잡아가는 놈들이 없었다. 이제 보니 둘다 밤늦게 싸돌아다니는 올빼미나 부엉이족이라며, 석정과 만종은 그저 서로를 보며 눈밑을 실룩거렸다.


그렇게 동촌 최석정의 집에 당도해서야, 만종은 자신이 들고 온 봇짐을 최석정의 손에 건네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까 살펴보신 서찰들입니다. 혹시 몰라서 가져왔습니다."


석정은 흠칫 놀라서 만종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서둘러 훑어본 서찰을 만종이 내밀다니.


"이건 왜..."

"나으리를 믿기 때문이지요."

"난..."

"들어가 보시죠."


만종은 피식 웃으면서 억지로 봇짐을 최석정의 두손에 들려 주고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태 잠도 자지 않았는지, 석정의 딸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만종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쉰다고,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여전히 뭔가 무거운 납덩이가 가슴에 콱 얹힌 것만 같았다. 그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석정의 사랑채 앞을 담너머로 바라보며, 홍만종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최부응교한테 뭘 준 건가?"


갑자기 등골을 기어오르는 듯한 음성에 만종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밤공기를 그대로 빨아들인 듯한 얼굴이 자신을 가만히 노려보는 참이었다. 웬일로 초헌이나 남여에 올라타지도 않은 채로 길가의 너부죽한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만종은 어깻죽지가 그대로 굳어졌다.


"병판대감..."

"뭘 준 건가?"

"..."

"이보게 우해宇海..."


만종이 가만히 침묵하자, 석주는 짐짓 친근한 음성으로 만종의 자를 불렀다. 만종은 움찔해서 빈손을 움켜쥐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빨아들일 듯한 김석주의 눈빛에 압도되어 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김석주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최석정을 미행한 것인가, 자신을 미행한 것인가. 허적이든, 김석주든, 누군가 최석정을 해할 지도 모른다고 여겨 함께 동행했다. 여차하면 자신이 지켜줄 심산으로. 그런데 김석주가 와 있다니. 어쩌면 최석정이 양화진에 왔을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김석주의 눈과 귀들이 전했을 지도 몰랐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었나?"

"..."

"내가 자네를 부사정에 천거까지 하였는데 말이야."

"..."

"석하나 자네나...최석정만 만나면 비밀이 많아져서 탈이야."


석주는 입가를 실룩거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만종을 보는 그 눈빛도 차가웠다. 석하와 만종이 입을 열지 않는다고, 석주 자신의 귀가 닫히는 것도 아니었다. 최석정이 양화진으로 가서 뭔가 서찰을 살펴보고 나왔고, 홍만종은 그 서찰을 갖고 나와 건네주기까지 하였으니...차근차근 유추하며 뇌리를 더듬던 김석주의 두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그렇군. 그거군."

"무슨..."

"그렇지..."


석주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홍만종은 자신이 최석정을 죽여 입을 막을 지도 모른다고 여긴 탓에 여기까지 따라왔을 터였다. 하지만 최석정의 입을 막는 방법은 길가의 돌처럼 널리고 널렸다. 석주는 발치의 돌부리를 발끝으로 툭툭 걷어찼다. 아무렴 이렇게 발로 차버려도 되고, 발끝으로 살살 굴려도 되고, 꾹꾹 눌러밟아도 되었다. 그는 한줄기 싸늘한 바람결에 혈향 짙은 웃음을 흘려보내고서 그대로 돌아섰다. 느긋하던 걸음이 지독하게 빨라졌다.



"허견의 필체가 맞다..."


파루가 울리자마자 석정이 양화당으로 찾아와서 허견의 간찰을 도로 내어놓고 고한 첫마디를, 숙종은 석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곱씹었다. 사실 진위는 상관 없었다. 이미 자신은 남인들을 숙청하기로 결심하였고, 무엇이든 빌미를 잡아서 결행할 심산이었다. 게다가 허적의 저승길 노잣돈도 이미 두둑히 쥐어주었다. 거머리처럼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피를 빨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을.


"확실히 맞소?"

"예. 해일日자를 작게 쓰고, 귀이耳자를 유독 길게 쓰는 등 서체가 똑같습니다."

"허면 허견이 쓴 것이다?"

"하오나 문체가 다릅니다."

"뭐요?"

"허견은 단정적인 말투를 곧잘 사용하여 다만지只자를 자주 쓰면서도, 거꾸로 된 모양인 부를소召의 속자俗子로 착각하여 쓰는 일도 간혹 있습니다. 헌데, 전하께서 주신 서찰은 그런 실수가 없었습니다."

"실수야 그만큼 중요한 상대에게 쓰는 글이라면 조심했겠지."


석정은 숙종에게 한마디한마디 고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반론에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집에 빗물이 새어 천정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보는 느낌, 그 천정에서 물이 한방울 두방울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맞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에 대한 왕의 신뢰가 금이 간 것도 아니었다.


"전하, 허견이 중전마마를 여수신녀라고 불렀으면 대비마마를 여수임녀라고 불렀겠습니까? 수 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허견의 성미로, 서찰 한장에도 이렇게 번거로운 은어를 지어서 썼다는 것이, 천신은 납득이 안됩니다."

"..."

"이 서찰을 누구한테 입수하셨습니까?"


석정이 조심스레 묻자, 숙종은 서찰을 쥔 손을 꿈틀하더니, 동공을 차갑게 닫고 입을 열었다.


"병판."


역시. 석정은 두눈에 가시가 틀어박힌 기분으로 실눈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의 설명을 듣기 위해 두눈을 다시 치떴다. 허공을 보는 눈동자에 초점이 또렷하게 잡힌 채로, 그 시선은 왕의 두눈 아래, 턱 아래로 떨어져서, 왕이 말할 때마다 꿈틀거리는 목울대로 미끄러졌다.


"병판이 어제 가져오더군. 이번에 병풍을 보수하려고 병풍장을 불렀더니, 병풍장이 가져온 속지에 섞여 있었다고. 그 병풍장은 허견의 집에서 맡긴 것들을 같이 섞어놓은 거고."

"그 말을, 믿으십니까?"


최석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연히 병풍장이 가져온 속지에, 허견의 서찰이 섞여 있었다? 그것도 감히 중궁을 죽이고 역모를 꾀하는 서찰이? 열살 먹은 아이도 안 믿을 소리였다. 차라리 김석주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허견의 집을 뒤졌으면 모를까. 우연히 병풍 속지에 섞여 있었다니. 그렇게 속이 시꺼먼 변명을 왕이 믿을 리가 없었다. 이제 스물이 된 왕이지만 그리 허술한 거짓말을 곧이 믿을 만큼 순진한 왕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은 왕을 그토록 허투루 가르치지 않았다.


"믿었으면 사부한테 필적감정을 맡겼겠소?"


숙종이 차갑게 되물었다. 석정은 목울대로 안도의 한숨이 치밀어 올랐는데도 그 한숨을 내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로 다시금 왕의 목울대를 내려다 보았다. 왕의 설명을 기다리며.


"하오시면..."

"사부의 말을 들으니, 역시나 이 서한은 물증으로 삼을 수는 없겠소."


숙종의 말에 석정은 가슴 한켠이 홀가분해진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웃음은 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어쩐지 이 서찰이 조작이라 아쉬운 기분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붉은 심장에 검은 티끌 한점도 묻히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개운한 기분으로 홍문관 청사에서 쪽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정은 홍문관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필사하던 천학초함을 대충 정리해서 서안 한켠으로 치워놓고 나른히 눈을 감았다. 아침햇살이 스며들어 홍문관 안 시퍼런 어둠을 걷어낼 그때까지만, 잠시만 눈을 붙여두기로 하고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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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99 눈겨산환
    작성일
    14.03.09 13:15
    No. 1

    요즘 정도전에서 이인임 역의 박영규의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주목을 받고 있죠.

    작가님 글이 마치 그런 듯 합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한번 맛을(?) 들인 독자들을 중독시키는, 묘한 매력의 필력이니 말입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17 00:59
    No. 2

    오랜만입니다. 눈겨산환님...^^; 정도전은 아직 안봐서 모르겠는데, 칭찬과 격려 고맙습니다. 자극적인 글은 저도 써보고 싶습니다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3.09 18:42
    No. 3

    그렇다면 무엇으로 물증을 삼을까?
    아니, 어쩌면 물증같은거 필요 없을지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17 01:00
    No. 4

    이 소설 속 숙종 성격을 잘 아시는군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3.10 11:24
    No. 5

    숙종의 머리속엔 이미 증거는 중요치 않아보이는데....
    도화선이 필요한거겠죠...뭐가 됐든간에..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17 01:01
    No. 6

    에...희로폭발만 남았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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