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70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4.03.17 01:19
조회
2,107
추천
24
글자
39쪽

해의 그림자 174

DUMMY

호두각 그늘 아래에서 문건들을 뒤척이던 손을 멈추고, 석정은 굳은 얼굴로 복선군 이남이 형틀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왕가의 혈통답게 등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서 형틀에 앉는 모습도 오연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이미 죽음을 예감한 듯 처연했다.


방금 복선군이 앉은 형틀은 불과 일각 전에 그 친우 이태서가 형신을 받아 참혹하게 피와 살이 튀어, 무심코 앉다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찐득한 핏물이 묻을 지경이었다. 복선군은 피묻은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어 석정을 쳐다보았다.


"방금..."

"대감의 친우인 이태서를 형문刑問...하더이다."


석정은 쓴웃음마저 가신 얼굴로 답하였다. 이태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문랑이 심문했다. 자신은 그저 버드나무 그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심문 첫날이라 그나마 아직은 이태서가 온전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장杖 스무대를 넘어서자, 이태서는 온몸을 뒤틀면서 고통에 몸부림을 쳤고, 벌거벗은 볼기에서 피와 살이 튀기까지 했다.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로 내일 다시 형신을 받으면 이태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될 터였다.


"..."

"왕족이니 일단 대감께는 평문平問(형장을 쓰지 않고 심문하는 것)을 하지요. 허나 언제까지 예를 갖출 수는 없으니, 추호라도 숨기거나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


최석정의 서늘한 경고에 복선군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간 남인이 서인에게 가했던 그대로 돌려받을 터였다. 남인들이 임창군을 제물로 삼아 서인들에게 역모죄를 씌우려 하였듯, 서인들도 자신을 제물로 삼아 남인들에게 역모죄를 씌워 쓸어버릴 요량이니. 덫에 걸린 자신은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저 왕친을 아끼는 주상의 인정에 기대어볼 수 밖에 없었다.


"문랑은 정원로의 초사를 읽으라."

"예, 대감."


판의금 이정영의 지시에, 석정은 추안궤 위에 놓인 한장의 변서變書(고변서)를 챙겨들고 서너발 앞으로 걸어나가 복선군 앞에 멈춰섰다. 복선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석정은 그 절박한 눈빛에 흠칫 놀라 숨을 가만히 죽였다.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꿈틀거릴 만큼 힘겹게 침을 삼키게 되었다.


품계가 높아지고 직임이 귀해질 수록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두눈이 짙어진다. 기대와 계산으로 그 눈이 소리 없이 아우성을 쳐댄다. 그래서 때로는 차라리 눈감고 귀막고 싶을 정도로.


석정은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 일부러 목젖이 꿈틀거리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어 정원로의 변서를 읽기 시작했다.


"신臣 정원로는 허견과는 병진년부터 서로 교분을 나누어, 그 정의가 두터웠습니다. 작년 정월에 허견과 이태서가 강만철의 집에서 모여서 복선군을 접견할 일을 논의하였습니다. 나중에 이태서가 갑자기 신 정원로를 불러서 가보았더니 어느 위엄있는 귀인이 보였습니다. 함께 얘기를 나누어보니 복선군이었습니다. 그저 한설閑說(한담)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이태서가 신臣의 됨됨이를 심히 칭찬했습니다. 나중에 복선군이 신臣의 집을 찾았고, 또 허견이 왔으며, 지난 여름엔 허견이 편지를 보내어 저를 복선군과 만나게 하며 또 청직廳直(청지기, 겸인) 점동點同을 시켜 그 장소를 알려주고, 그 문을 가리켜보이게 하였고, 신의 종을 시켜 답신을 보내게 하였는데, 신의 집에서 모이기를 기약한 것입니다. 복선군의 답서를 허견에게 보내고 신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석정은 거침없이 낭독하다 멈칫했다.


이거다.


복선군과 허견이 역모로 고발된 것은, 허견이 참람한 발언을 하였고, 복선군이 잠자코 있었던 대목 때문이었다. 석정은 어느덧 말라버린 입안의 침을 힘겹게 삼키고 마저 읽었다.


"허견이 말하기를 주상의 춘추 젊으시고 옥체 미령하시며, 또 세자가 없으십니다. 만약 불행이 닥치면 대감은 용상을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복선군이 대답하지 않고 듣기만 했습니다. 허견이 말하길, 이제 나라가 망하니 똑바로 해서, 적당을 타파해야 합니다."


그새 목안에 모래알이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석정은 입안이 너무도 껄끄러워서 침을 두번, 세번, 계속해서 삼켰다. 옥천玉泉이라 하여 침만 제대로 삼켜도 건강을 챙길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침을 삼키고 또 삼켜도 눈이 침침하고 귀가 먹먹할 뿐, 목안의 티끌은 씻겨내려가질 않았다.


"붓을...주시게. 전하께 원정原情(사정을 하소연함)을 하겠네."


복선군의 애처로운 음성에 석정은 흠칫 놀라서 판의금 이정영을 돌아보았다. 이정영이 씁쓰레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선군이 딱하였다. 물론 그가 허적이나 윤휴 등과 어울려서 남인들과 정치공작을 함께하긴 하였지만, 역모라는 올가미에 씌여 온가족이 결딴날 만큼 큰죄를 짓진 않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니, 그동안 당한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도 지당했다. 하지만 받지 않은 것까지 두배, 세배로 돌려주려 하는 것이 문제였다. 임창군 형제는 그저 음모의 주변으로 지목되었을 뿐이지만, 복선군은 아예 그 중심으로 지목되었다. 왕이 임창군 형제에게 베풀었던 인정을 복선군 형제에게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석정은 씁쓸한 눈빛으로 복선군에게 먹물이 든 벼루와 붓을, 그리고 종이를 갖춘 소반을 가져다 주었다.


"고맙네."


복선군은 최석정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소반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벼루 안의 먹물을 듬뿍 찍더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일필휘지로 내리 썼다.


- 신 복선군 이남李楠, 전하의 골육지친 이전에 신하의 한사람으로서 천지간에 해와 달을 감히 바꿀 역심도 역심은 추호도 품지 않았나이다. 보령이 어리신 전하를 보필하여 왕실과 조정의 평안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을 따름입니다. 허견과 함께 붕당의 폐해를 근심하고, 전하의 옥체를 걱정하였을 뿐 역심은 품은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역모를 꾀했겠습니까? 하나 뿐인 해를 무엇으로 바꿀 것이며, 하나 뿐인 달을 무엇으로 바꿀 것인지, 천지간의 섭리와 도리를 모를 만큼 몽매하지 않습니다. 한쪽의 미움을 받아 매양 신의 명줄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고, 신의 심장이 바람 앞의 깃발이 되어버릴 지언정, 뜨거운 단심丹心만은 변함이 없사오니, 의심치 말아주옵소서.


그날밤 숙종의 손에 들어온 복선군의 원정문은 복선군 자신이 역심을 품지 않았다는 하소연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한쪽의 미움이라 언급한 부분 역시도 자신이 서인과 척을 진 탓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것을 넌시지 암시했다. 하지만 복선군이 강조한 뜨거운 단심과는 달리, 숙종은 차갑게 식은 빙심氷心 뿐이었다.


"복선군을 정원로, 강만철과 면질시켜 한점 의혹도 없이 그 혐의를 밝히도록 하라."


숙종은 석정이 올린 추안推案(의금부 심문기록)과 복선군의 원정서原情書를 훑어보고 서릿발 어린 음성으로 명하였다.


"예...전...하..."


석정은 대답을 하려다 아랫입술이 씹혀서 미간을 찡그렸다. 추국 내내 아랫입술을 하도 깨물었더니 이제는 퉁퉁 부어서 그냥 말을 하는데도 입술이 윗니에 씹힐 지경이었다. 붉은 봉인을 뜯은 추안궤推案櫃 안에 추안과 원정서를 담던 숙종은 석정이 엎드린 채로 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 그러시오?"

"아닙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석정은 창백해진 얼굴로 양화당을 물러나왔다. 두광이 추안궤를 안아들고 조용히 뒤따르는 동안 그는 너럭바위를 지나면서도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통명전 협문을 나서는 그의 시야로, 앞 모퉁이를 지나는 시뻘건 불길 같은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고단한 탓에 착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석정은 두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전방을 주시했다.


석정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여차하면 김석주와 함께 궐문을 나서게 생겼다. 석정은 더욱 보조를 늦춰서 느릿느릿 걸었다. 앞서 가는 김석주와의 격차를 늘려놓을 심산이었다. 한걸음, 또 한걸음 굼벵이처럼 걸으려니 새삼스레 옆구리가 결리고 허리가 뻐근했다. 그런 석정을 따라 두광도 보조를 늦추려니 고역이었다. 아무래도 직속상관이라 더 싫은 모양이었다. 홍문관으로 가든, 병조로 가든, 어딜 가나 징글징글하게 김석주가 있었으니.


헌데 어쩐 일인지 김석주의 걸음이 홍문관이나 홍화문, 심지어는 선인문도 아닌 춘당지 쪽으로 향하였다.


저긴...?


석정은 두눈을 치뜨고 김석주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홍문관이 아니라면, 김석주가 반드시 거치는 곳이 말이나 가마를 두는 선인문 쪽이었다. 남여가 없이는 궐밖을 제 발로 걸어다니는 법이 없는 위인이었으니. 혹여 홍화문 쪽에 거마를 두었을 경우에나 홍화문으로 갈 법했다. 하지만 선인문이나 홍화문의 반대편이라니. 춘당지 쪽에서 만날 사람이 또 있던가. 중궁? 아니면...


"자넨 이만 가보게."


석정은 두광의 품에서 추안궤를 빼앗아들고 가만히 석주의 뒤를 조심조심 밟았다.


"나으리?"


두광의 나직한 목소리에 석정은 흠칫 놀라 아랫입술을 깨물고선 어서 돌아가라 손짓하며 석주의 모습을 바삐 눈으로 좇았다. 석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 참이었다. 신경이 무디어 미행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밤중이라 워낙 시야가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건지, 석주의 걸음은 마냥 거침이 없었다.


요즘 들어 참 많이도 걷는다 싶었다. 저러다 살이 빠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석정으로선 석주의 외양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개 평민도 아닌 관료가 저렇게 비곗덩어리가 덕지덕지 붙기까지가 문제였다. 기아에 허덕이던 어린 시절에 한이 맺혀 식탐에 빠지게 되었다는 그 성품이 싫었다. 절제를 모르고 끝 없이 식탐과 탐욕에 빠지는 김석주가 마냥 위험해 보였다.


석정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석주를 미행하다 보니 두눈이 금세 뻑뻑해지고 침침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끈기 있게 뒤를 밟다보니 집춘문이 나왔다.


여긴... 석정은 집춘문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집춘문 저편에 성균관이 있다. 집춘문을 지키는 금군들이 석주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빗장을 풀어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석정은 두눈을 의심하고 집춘문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김석주의 거구가 집춘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석정의 눈앞에서 집춘문이 끼이이 닫혔다.


"..."


석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기침을 토했다. 금군들이 흠칫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석정은 얼른 담벼락 옆에 바짝 붙어섰다. 컴컴한 그늘이 자신의 몸을 가려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자신이야말로 캄캄한 그늘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집춘문 너머에서 김석주가 누구를 만날까.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성균관 전적 이사명...이들의 만남이 음으로 양으로 잦다니. 도대체 김석주가 이사명을 만날 이유가 무얼까.



"장杖 십육十六!"

"장杖 십칠十七!"

"장杖 십팔十八!"


사시巳時였다. 벌거벗은 볼기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린 이태서의 좌우로 시립한 나장들이 둔장을 교대로 거침없이 내리쳤다. 다듬잇돌 위에 물먹인 빨랫감을 올려두고 홍두깨를 두드리듯, 시뻘건 피가 흥건한 엉덩이를 둔장의 첫머리가 내려치다보니 피와 살이 무참하게 튀었다. 처참하게 곤죽이 되어버린 볼기에서 피범벅인 살점이 오른쪽 나장의 손등에 튀는데도, 그들은 살점을 떼어내거나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이태서가 곧 자신의 몸부림에 지쳐 떨어질 때까지, 사정없이 둔장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형틀의 이 고깃덩이는 생각보다 심줄이 질긴 놈이었다. 자신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버티면서 극구 죄를 부인했다.


"나는 모르오! 이건 다 날조요! 조작이요! 난 정원로와 친하지도 않소! 한두번 보고선 상종도 안했소!"


그런 이태서를 형틀 앞머리에서 지켜보는 문사낭청 김준상은 이태서를 심문한 지 반시진 만에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하필이면 위관을 맡은 판의금 이정영이 성정이 너무 점잖았다. 고변자의 고변서를 낭독하는 것도, 죄인을 직접 문초하는 것도 자신이 해야 했다. 또한 죄인의 진술을 이정영에게 전하는 것도 도맡았다. 윗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더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얼른 정오가 되어 최석정과 교대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목구멍이 말라붙은 기분으로 힘없이 위관석을 돌아보며 이정영에게 고하였다.


"이태서는 계속 이 사건이 조작이라 주장합니다."

"고변한 정원로를 죄인 이태서와 면질시켜라."


위관석에 앉은 판의금이 팔자 좋게 지켜보다가 한마디 툭 던진 말이었다. 좌의정이든 우의정이든 누가 와서 위관석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김준상은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팔뚝에 묻은 이태서의 피를 손바닥으로 툭툭 쓰다듬듯 닦아내고 대기중인 나장들에게 일렀다.


"정원로를 데려와라."

"예!"


영이 떨어지자, 나장들이 서간西間에서 정원로를 데려왔다. 이태서는 형틀에 턱을 붙인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서쪽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소리에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닥만 보이는 좁은 시야로도 웬 사내의 흑혜가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이 들은 이름이 정원로였던가. 이태서는 거뭇한 눈밑을 부르르 떨면서 애써 두눈을 부릅떴다. 보였다. 자신을 이꼴로 만들어놓은 배신자가.


"이태서, 아니 안동객安洞客, 나를 알아보겠소?"

"네놈..."

"방금 안동객이 진술하기로, 우린 인달방에서 딱 한번 봤을 뿐이라 하였다지? 헌데 참으로 기억력이 좋구려. 한번 본 사이에 내 얼굴을 척 알아보고 말이오."

"그래, 내 첫눈에 네놈이 독버섯 같은 종자인 걸 알아봤지."

"..."

"내 네놈을 조심해라, 사람들한테 말했더니...네놈이 독을 품고 나를 얽어 무고誣告를 하느냐?"

"..."


정원로는 맹렬한 독을 품은 눈동자로 이태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앙심이랄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은 참나무 밑동에 기생한 독버섯이었다. 서자로 태어나 일찌감치 윗동이 잘려 밑동만 남은 허견의 그루에 김석주가 심어놓은 독버섯 홀씨였다. 그 홀씨가 허견의 가슴 속 뿌리내린 절망, 분노, 저주를 갉아먹고, 그가 배설하는 찌꺼기를 먹고 무럭무럭 자랐을 뿐. 독버섯을 독버섯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밉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독을 알아본 것이 미치도록 미웠을 뿐.


"이거 왜 이러시나? 나를 네놈 집에 불러 복선군과 만나게끔 주선까지 해놓고서? 복선군 앞에서 나를 칭찬까지 해놓고서? 이제 와서 발뺌하시겠다? 나랏일이 너의 동촌東村에 돌아가면 고신孤臣이며 얼자孼子도 능히 쓰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더냐?"

"..."


너무도 술술 흘러나오는 정원로의 언변에 이태서는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랬던가? 정원로의 말대로 자신이 그랬던가? 첫인상은 더러웠어도 두번세번 보니 괜찮았던가? 그래서 자신이 복선군한테 소개를 시켜주었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허견이 권해서 복선군과의 자리를 마련했다. 저놈 머리가 쓸만하다고 칭찬한 것도 허견이고, 고신이며 얼자도 가리지 않고 쓰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도 허견이다.


"거짓말, 그건 내가 아니라 허견이다. 네놈이 나를, 나까지 옭아매려 드는 게냐?"

"내 네놈이 한 말을 또 기억하는데? 오정창이 허견과 신회지교神會之交를 맺은 사이라, 허견이 영웅임은 오정창이 잘 안다고까지 하였었지?"

"..."


정원로가 이제는 오정창까지 물고 늘어진다. 얼기설기 이사람저사람 다 엮어버릴 태세다. 이태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저 두눈에 실핏줄이 도드라지도록 매섭게 정원로를 쏘아보아보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란 사실이 분통했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정원로는 더는 못들은 척하고 문랑 김준상에게 돌아서서 소매춤에서 소찰을 꺼내어 두손으로 공손하게 건네었다.


"여기, 허견의 소찰小札이 있습니다. 저와 강만철에게 준 것이지요. 거기서 여생麗生은 병판의 성 김씨를 말하는 것이고, 부이副貳(제2인자)는 희려希麗에게 맡긴다 적었는데, 윤휴의 자字와 김석주의 성姓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객洞客은 안동방安洞坊(안국방이나 숭교방으로 추정)에 사는 이태서 이놈이지요."


아무리 정중하게 말하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건들거렸다. 헌데 가볍게 흔들리는 시야로, 버드나무 옆으로 비치는 푸른 옷자락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허견과 함께 이태서의 집앞을 오가다가 몇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오동나무집앞에서도 만난 적이 있던가. 오면서 가면서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였다. 허견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얼굴. 그자가 입술로 뭔가를 뇌까리는 참이었다.


"여생麗生? 희려希麗?"


정원로는 헛기침을 해대며 부쩍 피로의 기색을 드러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이만 서간으로 물러가 쉬고 싶었다. 어차피 이태서와의 면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젠 강만철의 차례였다.


"미쳤어? 여생? 희려? 그게 뭔데? 그런 편지는 있지도 않았어! 다 날조야! 날조오!"


이태서가 마침내 격분해서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이젠 하다하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서찰을 갖고 와서 물증으로 내세우다니. 이것만은 분명히 날조였다. 정말로 억울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칠 지경이었다.


"일단 소찰의 진위를 검증할 것이니, 정원로를 데려가고, 강만철을 데려오라."


판의금 이정영의 명이 떨어졌다. 정원로는 겨우 살 것 같았다. 그는 나장들에게 이끌려 서간으로 돌아가며 곁눈질로 버드나무쪽을 훔쳐보았다.


최석정, 그 이름을 병판대감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생선등뼈 같은 면상이랬던가. 그자가 문랑으로 차출되었으니 조심하라던가.


정원로는 그런 최석정의 평온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서간으로 향하였다. 나장들이 자신을 서간으로 데려오고, 강만철을 서간에서 끌어내는 순간, 강만철은 마지 못해 철창을 손으로 잡고 자신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 헝클어진 상투에서 한가닥 머리카락이 콧마루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두눈이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 너..."

"흥...."


정원로는 입꼬리를 비틀면서 강만철을 향해 가시돋친 눈웃음을 보냈다. 똑바로 하라고. 강만철은 사납게 들끓는 눈빛으로 정원로를 노려보며 나장들에게 끌려나갔다. 정오의 햇살이 서간의 통로를 환히 비추었다. 그저 햇살이 비쳤을 뿐인데 정원로는 미치도록 허기가 졌다. 국밥이 든 소반을 가져오는 나장 하나의 모습이 창살 사이로 눈에 들어왔다. 구수한 닭육수의 냄새가 콧속이며 뱃속까지 인두처럼 뜨겁게 지졌다.


정원로는 나장이 넣어주는 소반을 냉큼 받아들었다. 커다란 주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젓국과 흰 쌀밥이었다. 주발을 들어올리니 한장의 소찰이 숨어 있었다. 슬쩍 소찰을 소매춤에 넣고 그는 허겁지겁 국물을 마시며 헤벌쭉 웃었다. 등이 뜨습지는 않았지만 배는 뜨스우니 이 짓도 할 만 했다.


입가에 묻은 국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창살 밖을 두리번거리는 정원로의 시야로, 시퍼런 옷자락인지 그림자인지가 남간 통로 모퉁이에 언뜻 비쳤지만, 정원로는 김석주가 보낸 나장이겠거니 속 편하게 생각하며 국물을 마저 후루룩 마셨다.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는 의금부 국청에선 정원로와 강만철이 복선군과 이태서 앞으로 불려와서 차례로 면질을 하였다. 형틀에 앉은 복선군은 정원로의 면상을 마주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너..."

"..."


정원로는 복선군은 본체만체 석정의 앞으로 걸어와서 소찰 하나를 공손히 바쳤다. 석정은 흠칫 놀란 눈으로 정원로를 쳐다보았다. 이미 정원로가 복선군과 허견을 고발하며 증거로 서찰들을 제출했다. 헌데 또 소찰을 내어놓다니.


"이건 뭔가?"

"보시지요."

"..."


석정은 가만히 소찰을 받아들고 굳은 얼굴로 판의금 이정영을 돌아보았다. 이정영은 석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가져오라는 손짓이었다. 석정은 소찰을 들고 이정영에게 건네고 그 뒤로 바짝 다가섰다. 이정영이 소찰을 펼쳐드는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헌데 이정영이 소찰을 펼치자마자 고작 열자의 해괴한 문구가 나타났다.


出於三

入於三

若或

天必


셋에서 나와서

셋으로 들어가니

어쩌면

하늘이 이루리라


"이것이 무엇이냐?"


이정영이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정원로를 쳐다보았다. 석정은 가만히 이정영의 손밑을 주시했다. 종이의 아랫쪽 단면이 찢어진 것이, 뭔가 글을 반으로 위아래로 찢어서 나눈 흔적 같았다. 석정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원로를 쳐다보았다. 왜 이 소찰을 감춰놓았다가 이제야 내놓는단 말인가.


"복선군과 허견, 그리고 저, 이렇게 셋만 나눠가진 비밀이었지요."

"비밀?"

"예, 아주아주 은밀하고 위험한 비밀..."

"..."


복선군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부처님 손바닥도 아니고, 불한당의 혓바닥에 놀아났다. 결코 아둔하지도, 노둔하지도 않은 머리였기에, 복선군은 지금 이 순간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 지독하게 치밀하게 짜인 그물이라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눈이 빠지도록 정원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원로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독뱀의 혓바닥을 놀렸다.


"본래는 삼어삼인지구出於三人之口, 입어삼인지이入於三人之耳。약혹누설若或漏泄, 천심극지天必殛之라는 문구인데, 허견과 둘이서 반으로 갈라 나눈 것이지요."

"삼어삼인지구, 입어삼인지이, 약혹누설, 천심극지..."


석정은 즉시 서탁 위의 붓을 집어들고 그 자리에서 정원로의 말을 받아적었다. 정원로가 가져온 소찰 윗부분과 허견이 지녔을 소찰 아랫부분의 문구를 머릿속으로 합쳐보면서.


出於三人之口,

入於三人之耳,

若或漏泄,

天必殛之...

세사람의 입에서 나와서

세사람의 귀로 들어가니

혹여 누설하면

하늘이 기필코 죽이리.


정원로는 거침 없이 붓을 휘두르는 석정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의 공술을 한번 듣기만 했는데 즉석에서 받아적는 두뇌라니. 하늘은 뭐 이런 괴물을 내렸단 말인지. 얄궂은 웃음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입꼬리가 비틀렸다.


석정은 붓을 쥔 채로, 붓끝에서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정원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로구나.

저퀴猪鬼가 시키는대로

허견 옆에 딱 붙어서

차근차근, 차곡차곡 증거를 만들어놓은 놈이.


뭐야, 알아차리셨수? 정원로가 씨익 웃으며 눈빛으로 속삭이는 듯 하였다. 석정은 뱀의 비늘처럼 싸늘한 오한이 온몸을 친친 감는 것을 느꼈다. 등골을 휘감더니 순식간에 목을 졸랐다. 역겨웠다.


하지만 어떻게...?


정원로가 직접 김석주와 내통을 했더라면, 연결고리가 짧았더라면, 허견이나 허적의 촉수觸手에 진즉 걸려들었다. 정원로와 김석주를 연결하는 고리가 더 있었을 터였다. 꼬리를 자르고 또 잘라서, 남인 측에서 추호도 눈치채지 못할 연결고리가 더 있었을 터였다.


석정은 독 안에 든 쥐를 보듯 연민어린 눈빛으로 복선군을 돌아보았다. 삼복三福(복선군 3형제를 지칭하는 말) 중에서도 가장 총명한 복선군 역시 이미 막후의 사정을 짐작한 듯이 두눈을 질끈 감았다.


"죄인 복선군 이남은 공초를 써내라."


이정영이 냉랭하게 복선군에게 명하였다. 존엄한 왕가의 혈통이지만, 이미 존대도 예우도 거두었다. 눈앞의 복선군은 이제는 자단령도 벗은 죄인일 뿐이었다.


"나는 억울하다. 역모는 꾸민 일도 없다."


복선군이 불복했다. 없는 데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남인들이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한두마디 말을 흘려들은 것이 무에 대수란 말인가? 역모는 실체도 물증도 없었다. 출어삼인지구 운운하는 소찰이 자신에게 더없이 불리한 증물이 되긴 하겠지만 역모의 증거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함정일 뿐이었다.


"이거 참..."


이정영은 난감한 얼굴로 매운 한숨을 내뱉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말없이 인중을 쓰다듬었다. 남해현으로 귀양을 떠난 허견이 도로 말머리를 돌려 도성으로, 금부로 들어오기 전에, 저들이 말을 맞출 기회를 주지 말고 밀어부치라는 우상대감의 언질이 떠올랐다. 허견이 중도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불려오기까지 사나흘이 걸릴 거라 하였으니, 이제는 길어봤자 사흘이 남았다.



이정영은 추안의 정서가 완료되는대로 추안궤에 넣고, 붉은 종이에 신臣 이정영 李正英 근봉謹封이라 써서 뚜껑을 봉하였다. 고작 이틀 추국을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피로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밤이 이슥해져서야, 이정영은 금부서리를 시켜 두광을 불러와선 추안궤를 들게 하여 앞장세웠다. 그리고 석정을 데리고 양화당을 찾았다.


"전하, 죄인 이남이 불복하오니 형추를 윤허하시옵소서."


석정은 손가락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에 청단령자락에 손가락끝을 비볐다. 왕족인 복선군에게 형신을 가한다? 바지를 벗기고 볼기를 친다? 백학처럼 고고한 복선군의 성미로 감당할 수나 있을까.


"전하, 형장을 가할 때 바지를 벗기는 것 만큼은 면하게 해주시지요."


석정이 눈밑을 움찔거리면서 꺼낸 말에 숙종도 인상을 썼다. 왕족의 하체를 벌거벗겨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 복선군을 위해서가 아니라 숙종 자신을 위해서라도. 왕가의 존엄을 훼손할 수는 없다.


"윤허한다. 이만들 물러가라."


왕의 윤허가 떨어졌다. 석정은 입맛을 가만히 다셨다. 두광이 추안궤를 들고 석정의 옆으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석정은 양화당을 물러나려 방바닥을 두손으로 짚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용안은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탓에 고개만 쳐들고 여전히 시선은 자신의 두손에 고정한 채로.


"..."

"할 말이 있는가?"

"전하, 이제 옥체가 평안해지셨는지요?"


이정영은 자신의 홍단령 자락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일어서다 말고 은근히 놀란 눈빛으로 석정을 돌아보았다. 최석정에 대한 왕의 총애가 워낙 지극하여, 같은 서인 내에서도 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입안의 혀처럼 굴어서 어심을 얻었다거나, 혀에 꿀을 발라 듣기 좋은 말만 한다거나, 그리 험담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선지 다른 신료들도 으레 인사치레로 왕에게 건넬 만한 소리도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리는 터였다.


"염려해준 덕분에 평안하오."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숙종도 어느새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답하였다. 비로소 용안에 봄날처럼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음성에도 온기가 깃들었다. 왕과 신하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친밀한 정情이 두터웠다. 친근한 사이에 입에 발린 말 한두마디 정도는 할 수도 있겠지. 이정영은 이해를 하고 싶은 건지, 오해를 하고 싶은 건지 창자가 새끼줄마냥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오면 내일부턴 양화당이 아니라 희정당에서 신료들을 인견하심이 어떠신지요? 내전과 너무 인접하여 신료들이 드나들며 감히 중궁전을 접견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지요."


석정의 주청에 숙종의 얼굴이 도로 굳어졌다. 이정영도 흠칫 놀라서 고개를 틀어 석정을 쳐다보았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입 바른 소리를 하다니. 그것도 단순히 희정당으로 옮기라고만 사뢰는 것이 아니라, 감히 중궁까지 거론했다. 신료들과 중궁이 접촉하지 않게 하라는 쓴소리까지 거침 없이.


"중궁이 누굴 만나던가?"

"시국이 불안하니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지요."

"알았소. 내일부터 희정당에서 신료들을 접견하지."


숙종은 입맛을 쓰게 다시며 답하였다. 이정영은 석정을 돌아보며 자신도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속히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았다. 일어서다 말고 어정쩡히 구부정한 자세를 취한 탓에 무릎도 시큰거렸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이정영은 양쪽 무릎을 문지르며 황망히 양화당을 빠져나갔다. 석정 역시 추안궤를 안아드는 두광을 제지하고 자신이 직접 들고 뒤따르는데 숙종의 서늘한 음성이 뒷덜미를 잡았다.


"최부응교, 추안을 잠시 다시 보여주겠소?"

"..."


석정은 멈칫하여 숙종을 돌아보았다. 왕의 어수가 서안 위에 놓여서는 애먼 서안을 톡톡 두드리는 참이었다.


"예, 전하."


두광은 이정영이 양화당 대청을 나서는 것을 살피고서 얼른 장지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석정에게 추안궤를 건네받아 숙종의 서안 위로 추안궤를 올려두었다. 하지만 숙종의 눈길은 추안궤가 아닌 석정의 얼굴을 향했다.


"그래, 중궁이 누굴 만났소?"

"궁금하십니까?"

"사부..."

"신도 궁금해서 말입니다. 신료들이 드나들어도 누굴 만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러다 역모가 만에 하나 무고로 밝혀지면 중전마마께서 그 배후로 지목될 수도 있으니."

"..."


숙종의 얼굴이 굳어버린 밀랍처럼 딱딱해졌다. 듣기 싫은 소리였다. 울컥 짜증이 일어, 서안의 나뭇결을 따라 손톱으로 긁었다. 중궁의 잘못을 최석정한테 듣고 싶진 않았다. 숙종 자신은 남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성정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도 아닌 중궁이나 대비전의 잘못을 간하는 말은 더더욱.


하지만 중궁을 생각하면 수렴해야 했다. 필시 최석정이 염두하는 것은 김석주가 중궁을 만나는 일이었다. 광성부원군을 거치지 않고 보란 듯이 중궁을 만난 모양이었다. 나중에 이번 옥사가 잘못되면 중궁을 전방에 내세우기 위해. 온몸으로 집중포화를 받도록 만들기 위해.


썩 유쾌한 지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석정이니 참아야 했다. 진심으로 간하는 것이니 꾹 참아야 했다.


"또한 간밤에 집춘문이 열렸습니다."


석정이 재차 보고하는 말에 서안의 나뭇결을 손톱으로 긁던 손가락이 굳어졌다. 숙종은 멍청히 석정을 쳐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하였다. 집춘문이 열리다니. 중궁이 신료들을 만나는 것도 모자라서 밤에 성균관엘 드나든단 말인가.


"집춘문? 중궁이?"

"..."

"중궁이 집춘문을 드나든 거요? 대체 누굴 만난 거요?"


숙종의 검은 동공에서 불씨가 번뜩였다. 의심인지, 질투인지 모를 불꽃이 피었다. 그런 숙종의 반응에 석정은 대답을 뜸들이며 괜히 자신의 구겨진 청단령을 손가락끝으로 잡아당겨 구김을 펴는 시늉을 했다.


"사부! 누구요 대체?"

"..."

"어서 말하지 못할까!"


숙종은 안달이 났다. 한밤중에 집춘문이 열리다니, 이럴 수는 없다. 정치적인 연유로든 치정적인 연유로든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조바심을 내며 다그치는 숙종의 성화에, 석정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인적 없는 연못에 홀로 핀 연꽃이...어찌 발이 있어 도망가겠습니까?"

"뭐? 그럼 중궁이 아니란 말이오?"

"중전마마가 아니라 병판대감입니다. 집춘문을 드나든 자는."

"뭐요?"


숙종은 한순간에 긴장이 탁 풀렸다. 괜한 의심을 했다. 행동거지가 바른 중궁이 집춘문을 드나들 리가 없었다. 자신이 지레 중궁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것을 보고, 최석정이 장난을 친 것이 분명했다. 괘씸했다. 숙종은 잡아먹을 듯이 석정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날 놀린 거요?"

"놀리다니요?"

"놀렸지 않소? 꼭 중궁이 집춘문으로 몰래 드나드는 것처럼."

"구석에 홀로 핀 연꽃도 누가 볼까 전전긍긍하시니 전하께서 잘못 들으셨겠지요."

"..."

"헌데 전하께서도 병판대감일 줄은 생각도 못하신 모양입니다."

"..."

"내가 윤허했소. 집춘문 출입은."


숙종은 모래알을 한입 가득 삼킨 기분이 되어 빠른 어조로 대꾸했다. 그 껄끄러운 음성에 석정은 눈꺼풀을 치뜨면서 무릎맡을 주시했다.


거짓말.


자신의 주군은 거짓말이 서툴렀다. 굳이 용안을 살피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이냐고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들킨 것은 왕도 얼마든지 알아차릴 터였다.


"겸 대제학 김석주가 부응교의 상관인 것만 잊지 마시오."


숙종이 느릿하게 못박았다. 이러라고 최석정을 김석주 밑에 박아놓은 참이었다. 최석정은 그저 김석주의 허와 실을 파악하여 자신에게 주달만 하면 되었다. 외부에 알려 문제를 일으켜선 안 되었다.


"..."


석정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나왔다. 대답하기가 싫었다. 이제 서른다섯에 무릎에 바람이라도 들었는지, 양화당을 나서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석정은 너럭바위 옆을 지나다가 무릎에 힘이 빠져 머뭇거렸다. 이대로는 도저히 퇴궐을 할 수도 없었다. 궐을 나서는 것도, 집에 돌아갈 기력도 없었다. 요즘 들어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다. 지긋지긋한 남인들을 처단하는 아침이 마냥 상쾌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답답하고 막막했다.



병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김석주는 사시巳時(09~11시)가 되어서야 홍문관에 들렀다. 외부를 담장으로 막아놓은 것은 물론 내부마저 구석구석 담장으로 막아놓아 온통 폐쇄적인 곳이 이곳 홍문관이었다. 답답한 행각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안색은 어쩐지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중문 좌우로 늘어서서 대제학의 등청을 기다리던 홍문관 관료들이 의아히 김석주의 눈치를 보았다. 아침일찍 상참에 참석하거나 윤대하여 왕을 알현하고, 병조로 등청하여 온갖 수본과 서계를 살피고 병조의 현안을 처리하고, 다시 여기 옥당玉堂에 왔을 터였다. 헌데 여기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 시꺼먼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되어 있었다.


"들어가지."


김석주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고선 하관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거침 없이 홍문관 뜨락을 가로질렀다. 뜨락 한가운데에 나란히 솟은 두 그루의 높다란 소나무 사이를 순식간에 통과하여 본청 앞에 이르렀다. 목화도 사납게 벗어던지다시피 하여 대청에 오르는 모습에, 중문 좌우로 서 있던 홍문관 언관들이 바짝 긴장했다.


"뭔 일 있으셨나 본데?"


중문 동쪽에 서 있던 석정은 의아히 석주의 뒷모습을 보았다. 짚이는 곳이라곤 흑저黑猪 한마리가 집춘문을 드나든 일을 당저當宁(왕)께 고한 일 뿐이었다. 용봉차일을 제멋대로 가져다 쓴 죄를 물어 허적과 남인들을 조정에서 끌어내린 주상의 성정으로, 허락 없이 집춘문을 드나든 것을 좌시할 리가 없었다. 석정은 김석주의 분위기를 보고 확신했다. 간밤에 김석주가 집춘문을 드나든 것은 절대로 왕의 묵인 하에 이뤄진 일이 아니란 것을.


김석주가 볼썽사납게 목화를 벗어던지고 본청 대청에 올라서자, 서리들이 황망히 분합문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려 들어걸개에 걸어놓다가 화들짝 놀라 숨을 죽였다. 공사公事(회의)를 하려면 옥당 사방팔방의 분합문을 들어올려 실내를 탁 트이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놔야 했던 것을. 이제 죽었다 싶었다.


무릇 사대부들이 자벌레라 부르며 하찮게 여기는 것이 그들 아전들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이리 꿈틀, 저리 꿈틀 하다 보니, 과장 조금 보태어 높으신 나으리들 발소리만 들어도 심기가 불편한 지, 편한 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거꾸로 뒤집힌 김석주의 목화를 내려다보곤 허겁지겁 들어걸개에 분합문을 마저 걸어놓았다.


"원래는 미리 드놓았었는데, 갑자기 가막쇠가 빠져부러서...떨어지는 바람에...다시 가막쇠를 박고 들어걸개를 손보다 보니..."


부랴부랴 마지막 분합문을 걸어놓은 서리 한명이 쭈뼛거리면서 석주의 눈치를 보았다. 석주는 서리의 변명은 더는 들을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홱 돌렸다.


"시작하지."


분위기가 너무도 살벌했다. 서리들은 겁에 질린 눈초리로 석주의 기색을 살폈다. 벌써 대제학이 교의交椅도 안석案席도 없이 북쪽 주벽主壁(가장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등줄기에 날벼락이 떨어질세라 서둘러 사다리를 치웠다. 또 안석을 주벽에 놓아두고 동벽과 서벽에도 방석을 깔았다.


석주는 재좌하는 옥당관들의 면면을 심드렁히 훑어보았다. 눈초리에 날이 서 있었다. 직제학, 전한, 응교, 부응교가 동벽東壁에,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이 서벽西壁에, 박사, 저작, 정자가 남상南床에 앉자, 마뜩찮은 심기가 두눈에 번뜩였다. 벌겋게 불에 달군 쇠꼬챙이처럼 석주의 눈길이 동벽의 맨끝에 앉은 부응교 석정의 얼굴에 꽂혔다.


"자네가 왜 거기 앉나?"


석주가 서슬이 퍼렇게 동벽을 쏘아보며 면박을 주었다. 옥당관들은 의아히 눈길을 좇다가 멈칫했다. 동벽의 말석에 최석정이 앉아 있었다. 최석정이야 김석주가 자신에게 심사가 사나운 것을 아는 탓에 으레 자신이겠거니 알아들었지만,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최석정인가 싶어서 눈치를 살펴보니, 김석주의 눈길이 최석정의 번지르르한 면상을 찌르는 것이 확실했다. 석정을 보는 석주의 눈동자도 모난 돌처럼 날카로웠다.


저 쳐 죽일 놈! 네놈이 고한 것이 분명하렷다. 간밤에 두광이랑 같이 있었던 네놈 밖에 없으렷다? 네놈이렷다?


하지만 석주의 날선 눈길에 석정은 속도 편하게도 무딘 시선으로 맞섰다.


"저 말입니까?"

"그래, 자네!"

"..."

"거긴 자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지."


옥당관들이 어리둥절하여 김석주와 최석정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벌써 한달 전에 최석정이 부응교에 임명되었고, 부응교는 응당 동벽의 말석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 헌데 대제학이 왜 트집을 잡는 건지.


"서벽으로 가게."


옥당관들은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멀쩡히 동벽에 앉은 최석정을 서벽에 앉히려 들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제학이, 아니 병판대감이 최석정에게 강짜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아니...부응교 자리는 동벽인데요?"

"누가 부응굔가, 누가!"

"자주 못 오셔서 잊으셨나 본데, 부응교 맞습니다."

"부응교가 된지 벌써 한달인데."


최석정을 두둔하려고 두둔하는 것이 아니고, 상리常理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석주 역시 완강했다.


"정식으로 사은례도 안 치렀는데, 부응교는 무슨 부응교."

"..."

"오늘도 벌써 새 도승지, 판의금, 동의금이며, 개나 소나 죄다 하루이틀만에 번갯불에 콩 볶듯이 사은례를 치르고 갔구만. 최부응교는 뭘 믿고 한달씩이나 뻗대는가 이 말일세."


그제야 옥당관들은 김석주의 입장을 수긍해 버렸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최석정이 차은례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밴질밴질 버티는 것이 고질병이었다. 보나마나 최석정이 사은례를 튕기는 일로 당저께 김석주가 한소리 잔뜩 들은 모양이었다. 김석주가 병조판서로 있는데도 최석정이 병조정랑으로 들어와서 사은례를 한달이나 미루더니, 또 대제학으로 있는데도 부응교가 되어 사은례를 한달이나 미루니...이 무슨 악연인가 싶었다.


"서벽에 앉게나."

"그러게 왜 사은례를 안하고 버텨서..."

"진작 좀 하지 진작 좀."

"뭐 하는가? 어여 사은하고 오지 않고?"

"제가 빌려다드릴까요?"


옥당관들이 하나같이 독촉했다. 석정은 춘사월 오전인데도 등골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콧잔등도 괜히 간지러워서 손가락으로 긁으려다 손가락끝을 움츠렸다. 옥당 안의 관료들이 하나같이 일심동체로 자신에게 사은례를 하라고 들들 볶는 모습을 보니, 마치 자신이 왕의 아침 수라상에 오른 검은콩자반 신세 같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3.17 18:04
    No. 1

    왕의 스승이면서도 참 많이 구르는것 같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꺽정이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3.19 07:34
    No. 2

    사람을 교묘하게 굴려서 말장난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언제봐도 힘드네요.
    석하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4 해의 그림자 193 +4 14.06.28 1,861 36 40쪽
193 해의 그림자 192 +4 14.06.21 2,016 31 41쪽
192 해의 그림자 191 +5 14.06.15 1,837 26 42쪽
191 해의 그림자 190 +5 14.06.09 3,270 38 41쪽
190 해의 그림자 189 +4 14.06.01 2,195 47 41쪽
189 해의 그림자 188 +12 14.05.26 3,055 43 40쪽
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7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0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181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8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6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4 31 42쪽
178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4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1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2 38 36쪽
»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8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8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8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5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3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1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