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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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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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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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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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66

DUMMY

한낮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더니, 태어난지 하루만에 공주 아기씨가 죽었다. 궐안 분위기는 너무도 흉흉했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궁녀들이며 내관들이 꽉 닫힌 통명전 협문 앞을 얼씬대며 소리죽여 수군거렸다.


"흰 무지개가 해를 찔렀다니깐."

"신하가 역심을 품거나, 왕의 신변에 위험이 닥치는 징조래."

"그러고 공주아기씨가 죽은 거면..."

"아...정말 왜 이런 일만 생기는 지 모르겠다. 저주받았나봐."


통명전 문이 끼이이 열리더니, 두광이 신경이 온통 곤두선 얼굴로 걸어나왔다. 두광은 문간에 딱 버티고 서서 마치 입에 서슬 퍼렇게 날선 눈빛으로 통명전 앞을 훑어보았다.


"물럿거라."

"에?"

"전하께서, 통명전 앞으로 서른보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모조리 치도곤으로 다스리라 하셨다. 숨소리도, 침소리도 들리는 자들도 모두.."

"..."


가슴이 섬뜩해지는 말이었다. 왕의 측근내관의 신경이 곤두선 것을 보니, 지금쯤 저 안의 왕이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모두 잔뜩 주눅이 들어 뿔뿔이 흩어졌다.


협문을 지키던 허후는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벌써 아침이 새하얗게 밝아오고, 무지개가 걷힌 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환히 비추었다. 허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철릭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이미 아기의 체온은 싸늘하게 식었다. 어차피 난산으로 태어난 아기라 오래 살지 못할 목숨이었다. 그저 손을 그 코끝에 갖다대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멎을 만큼, 그리 숨이 가늘게 붙어있던 아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심장이 뻐근하니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허후는 두광이 도로 협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힘겹게 자신의 등을 문짝에 기대었다.


아버지...


허후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중궁이 무사히 목숨을 건질 수나 있을까. 아비도, 형도, 자신도, 어쩌면 천벌을 받을 지도 몰랐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곧 묘시卯時, 교대시각이 된다. 파루가 울린지 한참 지났으니, 묘시가 코앞이었다. 헌데도 왜 이리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건지. 마침 오른쪽에서 주시동들이 주시패를 들고 이쪽으로 오는데도, 또 왼쪽에서 교대할 동료가 걸어오는데도 마냥 굼뜨게 보였다.



적삼에 속곳 차림으로 진홍은 멍하니 오후의 허공만 응시했다. 아기를 낳았는데, 몸에는 온몸 구석구석 고통이 남았는데, 정작 아기가 없다. 눈시울이 매워서 두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심장이 송두리째 뽑힌 것만 같아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아니, 너덜너덜 찢겨 흔들리는 건지. 숨결이 거칠어진 것을 보니 심장이 뜯겨나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통을 기억하는데, 어떻게 몇번 안아보지도 못한 아기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졌을까.


"마마, 옷을...차려입으시옵소서. 만수전과 자경전에서 오실 것이오니..."


문간에서 상아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간하였다. 아무리 고열이 펄펄 끓다가 오한이 으슬으슬 음습하고, 또 아무리 등허리나 치골이 뻐근하니 아파와도, 언제나 웃전 앞에서는 의관을 정제하고 자세를 꼿꼿이 하던 상전인 만큼, 하늘이 두쪽 나도, 심장이 세쪽 나도, 흔들림 없는 상전이니 만큼 웃전의 방문에 의관을 정제할 터였다.


"천담복을...가져와라."


진홍은 입을 열었다가 목이 콱 메여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중궁전은 사시사철 포의胞衣(태아를 감싼 태반) 아니면 상의喪衣만 입는다는 말이 이제는 저주처럼 떠올랐다.


"..."


상아가 차마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다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힘껏 자신의 두손을 모아쥐니 손등으로 눈물이 뚝뚤 떨어졌다. 상아는 울음을 애써 참느라 가슴을 헐떡이며 장지문 바깥으로 물러나갔다.


이윽고 상아가 진홍의 연옥빛 천담복을 한팔에 걸치고 통명전 대청마루를 오르는데, 양화당 너럭바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무섭게 쫓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상아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너럭바위 앞에 숙종이 창백해진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상아의 팔에 걸린 천담복이 어쩐지 신경을 거스르는 듯이, 입을 꾹 닫고 내려다 보면서.


"..."


상아는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선 잰걸음으로 통명전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그리고 서온돌 안으로 들어가서 덜덜 떨리는 두 팔로 진홍의 앞으로 다가섰다.


"사시사철...포의가 아니면 상의..."


연옥빛 천담복을 걸치고서, 옷고름을 채 여미지도 못한 채로 진홍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번이나 회임을 하고도, 손이 없다. 말을 떼지도, 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그렇게 잠깐 들렀다가 하릴 없이 가버린다. 아기가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볼록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착각처럼 지금도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것만 같은데.


진홍은 갑자기 목울대가 알싸하고 매캐한 연기로 꽉 차오르는 느낌에 입을 벌렸다. 매운 한숨을 허공에 토해도 또 매운 울음이 목을 졸랐다.


"중전마마..."


진홍은 목안의 매운 울음을 애써 삼켰다. 꾸역꾸역 삼키고 또 삼켰다. 그런데 숨이 가빠와선 제대로 숨을 들이마실 수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코끝의 이 짧은 한숨이 모자라서 아기가 어이 없이 죽었다. 자고 일어나니 죽었다. 아이의 숨결은 그렇게 어이없이 끊어졌다. 지켜주지 못해서, 살려주지 못해서.


"그 옷 벗으시오."


느닷없이 문이 열리더니, 지아비의 납탄煙丸같은 눈동자가 그녀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시꺼멓게 두 눈시울에 재어놓았다가 언제든지 쏘아보낼 듯한, 그렇게 진홍의 가슴에 틀어박혀 터져버릴 듯한 고통을 알알이 아로새기는 눈빛으로, 그렇게 무시무시한 분노의 납탄을 두눈으로 쏘아댔다.


"전하?"

"그 옷, 꼴도 보기 싫으니 벗으란 말이오!"


언제나 자신에게만큼은 온유했던 지아비의 음성도 난폭했다. 진홍은 천담복을 여전히 걸친 채로 멍하니 숙종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지아비가 했던 가시돋친 말이 뭐더라. 귀찮다고 했었나. 그때 그 말보다도 더욱 사나웠다. 항상 자신을 보면 웃음이 꽉 차던 지아비의 두눈에서 거친 풍파가 일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두눈을 찔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의 빛이 일렁였다. 왜?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 건지, 진홍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벗으래도! 어서 벗으래도!"

"..."


숙종은 꼼짝도 않고 오도카니 서 있는 진홍을 보니 더욱 분노가 불같이 치밀었다. 아무래도 반쯤 미쳐서 전장에 나온 군병이나 장수라도 되는 건지, 연환과 시석을 미친 듯이 진홍에게 발포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벗어! 당장 벗어!"

"전하, 왜 이러셔요?"


그는 진홍의 양쪽 어깨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천담복을 두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자신의 손아귀가 이렇게도 힘이 세었는지,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는 건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진홍의 천담복을 보지만 않으면 살 것 같았다.


"입지 말라고! 사시사철 상의 아니면 포의! 지겹지도 않소?"

"자식이 죽었는데 지겹다고 상복을 입지 않는 것은 부모의 도리가 아닙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요! 태어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진데, 뭐하러 상복을 입는단 말이오? 권초도 치르지 못했는데, 태를 씻지도 않고 그리 급하게 죽어버린 녀석인데 왜?"

"태를 씻진 못했지만...태를 잘랐습니다. 세상에...채 마르지도 않은 탯줄 하나...남겼습니다."


진홍은 빈손을 움켜쥐며 답하였다. 그러고 보니 탯줄이라도 남겼다. 탯줄이라도 잘랐으니, 태어난 것이 맞았다.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하루만에 단명하였으나, 그래도 태어난 것이 맞았다.


"아니, 사흘, 내지는 이레가 지나야만 치르는 세태洗胎도 못 치렀소. 태어나지 않은 거요."


숙종은 허공을 씹으며 못박았다. 산자리를 붉은 끈으로 돌돌 말아 문앞에 내거는 현초만 겨우 치르고 권초는 치르지도 못하였다. 탯줄을 정결한 물에 일백번 씻는 세태도, 그 탯줄을 길한 명당에 묻는 안태도 치르지도 못하였다. 법도에 따라서도 장례도 못 치르고 묻어야만 하는 아기였다.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묻어둬야 하는 인연이었다. 너무 짧아서 어이 없고, 부질 없는...그래서 가슴에 온통 터질 듯한 납탄만 가득 들어찬 이 기분을 중궁이 알까. 아니, 어쩌면 지금 누구보다도 더 지옥일텐데. 열달 뱃속에 품은 아기가 하루아침에 한줌 탯줄만 남기고 사라졌는데.


미안하오.


입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서, 숙종은 그대로 홱 돌아섰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져서 속살이 새하얗게 비치는 진홍의 모습을 외면하고, 그는 그대로 홱 돌아서서 서온돌을 나섰다. 발목이 뭔가에 매인 것처럼 걸음이 묶였지만, 그는 이내 걸음을 성큼성큼 떼어 대청마루를 걸어내려왔다.


"두광아!"


한동안 빠릿빠릿하게 목화를 대령하던 두광이 웬 일로 굼뜨게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섰다. 숙종이 짜증스레 부르자, 두광은 입을 비죽이며 엉거주춤 목화를 대령했다.


"그 지랄맞은 성미 좀 죽이시지..."

"..."


숙종은 입밖으로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살벌한 눈빛으로 두광을 홱 돌아보았다. 금세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에 두광은 숨이 턱 막혀서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숨을 죽이고서 눈길을 피하자, 왕도 스산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왕의 거미줄 같은 시선에서 겨우 벗어나자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주책맞은 딸꾹질에 손끝으로 콧구멍도 꽉 막아보고, 목젖이 출렁거리도록 마른침도 삼켜보고, 빈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려도 보았다. 그래도 딸꾹질은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두광이 딸꾹대는데도 숙종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목화를 신고 통명전 섬돌에서 내려섰다. 양화당으로 향하는 그 뒷모습을 보고 두광은 딸꾹질을 겨우 멈추었다. 붉은 곤룡포 자락이 스친 섬돌엔 희미한 해의 잔영만 묻어났다.



"상아야, 조보를 가져와."


천담복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진홍은 허공을 응시하며 착 가라앉은 음성을 꾹꾹 눌러 내뱉았다. 상아는 흠칫 놀라 진홍을 돌아보았다.


"하오나 마마, 출산 후에 글을 읽으면 눈이 나빠지시는데...그러다 눈 멀면 어쩌시려고..."

"진실에 눈먼 것보다는 낫겠지."

"..."

"가져와. 읽어야겠어. 한장한장, 한자한자 남김 없이."


진홍의 동공이 얼음꽃처럼 차디차게 반짝였다. 세번이나 회임을 하였는데, 세번이나 아기를 잃었다. 첫번째는 상한 민어찜을 잘못 먹고 조산한 탓에 아기가 한해 동안 잔병치레를 하다가 급서했고, 두번째는 해수를 앓으면서 온갖 약재를 잘못 복용한 상태로 열천을 잘못 음용하고 소산했고, 세번째는 난산 끝에 아기를 낳았더니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다. 조산, 소산, 그리고 난산...이게 다 우연이라고? 자신이 저주받은 자궁이라도 지녀서, 혹은 지아비가 소현세자와 강빈의 저주로 썩어버린 용종을 뿌려서, 세번이나 회임을 하고도 손을 보지 못했다고?


상아는 상전이 차갑게 굳어버린 모습에 가슴 속이 온통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한문 일만자 정도는 익혀서, 조보 쯤이야 자전만 있으면 더듬더듬 읽을 수도 있다. 상전인 중전 만큼은 술술 읽어내리진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읽어드리면 되었다. 읽는다고 상전이 그 안에 숨은 진실을 읽을 수나 있을까. 자신은 봐도 모르겠는데, 상전은 보면 알까.


그렇게 상아가 반신반의하며 조보를 가져왔다. 우물가에서 물단지를 안아들고 오던 우희가 조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열살...천자문은 떼었지만, 소학도 떼었지만, 자신보다 한문을 절반도 모르는 꼬맹이가 조보를 보고 놀라서 물단지의 물이 출렁출렁 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달려왔다.


"뭐예요? 그 조보들?"

"뭐긴. 중전마마께서 찾으셔."

"그걸요? 안되는데."

"어쩌겠니. 꼭 보셔야겠다는데. 내가 읽어드리면 되니 뭐..."

"아니...그거 읽어드리면 안되는데."

"뭐?"

"안되는데..."

"쪼그만 게 뭘 안다고..."


상아는 우희에게 눈을 흘기고서 그대로 조보를 한뭉치 안아들고 서온돌로 들어갔다. 그리고 진홍의 서안 위로 쌓아올렸다. 이미 여벌의 천담복을 봉이가 대령을 한 덕에, 또 다른 천담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진홍은 채 붓기가 빠지지 않은 손가락 끝으로 조보의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은 지아비의 당부로 애써 참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소녀가 읽어드리겠나이다."


상아가 조보 뭉치를 덥썩 마주잡았다. 그 와중에도 출산 후에 무리해서 글을 읽을까 저어된 모양이었다. 출산 후엔 눈물을 흘려도, 글을 읽어도 안된다는데, 상전은 이미 눈물을 쏟을 만큼 쏟은데다, 수백장, 수천장의 조보까지 읽으려고 드니 낭독이라도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


진홍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 마는 듯, 잠자코 앉아 있었다. 상아가 더듬더듬 조보를 읽어내렸다. 해가 저물며 붉은 땅거미가 문틈으로 드리워지고, 찬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봉이가 초록색 누비이불을 사방의 장지문마다 걸어놓아 외풍을 차단하였는데도, 진홍은 오한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힘드시오면 내일 마저..."

"아니...계속해."


진홍은 솜이불을 어깨에 걸쳤다. 출산 직후라서 유독 오한이 들었다. 그녀는 봉이에게 납촉을 밝히게 하고 상아에게 계속해서 조보를 읽게 했다. 때로는 상아가 모르는 글자들을 직접 읽어가며 꿋꿋이 조보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납촉의 촛불마저 사그라들어 어둠이 서온돌을 잠식하고, 그녀의 해맑은 눈동자마저 묻힐 무렵, 차갑게 얼어붙은 동공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허견, 허적..."

"마마?"


상아가 의아히 되물었지만 상전은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코끝이며 눈시울이 빨개져선 허공을 쏘아볼 뿐이었다. 맨손으로 서안 위를 긁으면서 바들바들 떠는 탓에 손톱끝은 새하얗고, 손톱뿌리는 새빨갰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져서 힘줄로 골이 패일 지경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이자들이 살아 있다니."

"중전마마...?"

"혼자 있고 싶구나."

"마마...?"

"혼자 있을 것이다."

"예에..."


상아는 조용히 입술을 빨면서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서온돌 안을 훔쳐보며 장지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 홀로 서안 앞에 앉은 상전의 분위기가 시리도록 서슬이 퍼랬다. 영문은 몰라도, 상전이 입밖에 내뱉은 자들이 큰 죄를 지은 모양이었다. 여자를 납치하고, 욕보였다는 소문이 흉흉한 그들, 정적들의 모함이라 덮어씌우고 자신들은 빠져나간 그들...그들이 상전에게도 죄를 지은 건가. 왕이 그토록 덮고자 했던 조보 이면의 비밀이 있다면...그 비밀을 상전이 깨달은 것이라면...


또 이틀이 지났다. 숙종은 곤룡포 차림으로 석강도 폐하고, 내관 둘과 금군 여섯만을 거느리고 후원을 서성였다. 서온돌로 돌아가서 중궁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신이 눈동자를 찢어놓은 것처럼, 자신을 보는 그 눈동자가 하얗게 틈새가 생긴 느낌이었다. 진홍의 찢어지고 부서진 눈동자가 심장에 콱 틀어박혀서 아팠다.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이 들어, 숙종은 흉골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뱉았다.


자신이 중궁에게 납탄을 쏘고 시석을 날릴 것이 아니라, 중궁이 자신에게 납탄을 쏘고 시석을 날린 건가 싶었다. 그 상처깊은 눈이 심장에 틀어박혀 빼낼 수도 없었다. 태어난지 하루만에 목숨이 다한 아기를, 자신이라고 부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벌써 세번째인 불운은...부정하고 싶었다.


"전하, 가져왔나이다..."


등뒤에서 두광이 조그마한 소반에 흰 옥함을 받쳐들고 아뢰었다. 숙종은 순식간에 목울대가 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광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소반 위 옥함에 닿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왕이 그 자리에서 굳어 있자, 두광은 떨리는 손으로 옥함의 뚜껑을 열었다.


"공주 아기씨의...태胎이옵니다."

"..."


숙종은 순식간에 치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원없이 안아보지도 못한 딸이었다. 생후 사흘간은 함부로 만질 수도 없는데다, 워낙 난산으로 태어난 아기라서 더욱 조심스러웠던 탓에 안아보지도 못하였다. 숙종은 떨리는 손으로 옥함 속 비단으로 손을 뻗었다. 자그마한 붉은 비단보를 젖히니, 감싼 아기의 탯줄이 채 마르지도 않은 채로 고이고이 남아 있었다.


어느새 목울대로 치밀어오른 비명을 숙종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어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목이 찢어져라 토해냈다. 자신이 백성의 하늘인데, 하늘이 내린 왕재였고, 하늘이 키운 왕인데도, 어이하여 하늘이 자신을 이다지도 외면하는지, 그 분노가 밑도 끝도 없이 터져나왔다.


"왜! 왜!"

"..."


두광은 눈물로 젖은 얼굴로 상전을 쳐다보곤 자신의 목울대를 한손으로 꾹 눌렀다. 붉은 비단보를 두손에 부여잡고 무릎이 꺾인 듯이 주저앉는 왕을 보니 자신도 비명이 터져나오려 하였다. 하늘이 미웠다. 아니, 하늘이 아닌 누군가가 미웠다. 지금 왕가의 불행을 누구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인지, 아무래도 남인들이 의심스러웠다. 중궁의 조산도, 소산도, 난산도 모두 의심스러웠다. 궐안에 뿌리내린 남인들의 씨를 말리고 싶었다.


"중궁은...어찌 하더냐?"

"..."

"중궁은?"


숙종이 갈라진 음성으로 묻자, 두광은 질문을 못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아무런 대답도 못하였다. 예민해진 음성으로 숙종이 언성을 높여 되묻자, 그제야 우물쭈물했다.


"그게...여전히 천담복을 입으시고..."

"조보를 읽더냐?"

"..."


두광이 대답도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바보가 아니니..."


숙종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보가 아니니, 중궁이 당장 조보를 갖다 읽는 것도 당연했다. 이젠 자신이 중궁을 막을 수도 없었다.


"..."


숙종은 말 없이 돌아서서 통명전 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거닐던 후원이 훨씬 높은 지대인데다, 용마루도 없는 청회색 지붕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슥한 밤이라선지, 불빛이 꺼지고 없었다. 지쳐 잠들었나 싶었지만, 이내 통명전에서 다시 훤히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꺼져 있던 불빛이 다시 밝아지니 괜히 불안하고 궁금했다. 언제나 자신의 눈도, 코도, 귀도, 손도 중궁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려서 지남석에 끌리듯 끌려가는 신세인 탓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통명전 협문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양화당으로 든다거나, 동온돌로 든다거나 할 생각도 없었고, 서온돌을 찾아 중궁에게 사과한다거나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발길이 향할 뿐이었다.


헌데 숙종의 걸음이 협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먹물냄새가 폴폴 풍기는 책더미를 안고 들어서는 봉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봉이는 그리 많지도 않은 책 세권을 두팔로 한아름 안아들고, 먹물 냄새가 싫은지 코를 실룩이며 걷다가 옆으로 성큼 다가서는 왕의 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저, 전하!"

"무엇이냐?"


숙종이 흘끗 두눈을 내리뜨고 세권의 서책을 내려다보며 묻는 말에, 봉이는 헛숨을 들이마신 채로 제대로 내뱉지도 못한 채로 머뭇머뭇 답하였다.


"산실청일기産室廳日記...이옵니다."


숙종의 두눈이 번뜩였다. 이미 중궁이 조보는 물론 산실청일기까지 손을 뻗었다. 의심이 극에 달했다. 하긴 여인의 몸으로 세번이나 아기를 잃었으니, 체질 탓이려니 자책이나 자학만 하면서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자신이라고 무방비로 중궁을 방치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미 백광현을 통해 틈틈이 산실청일기를 훑어보게 하였다. 아무리 백광현이 부인의 몸은 모른다 해도, 최소한 처방의 문제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백광현의 은밀한 검열에도, 처방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중궁이 아무리 매의 눈으로 훑어본들, 털어서 티끌이라도 나올 리가 없었다.


"..."


숙종은 눈밑이 실룩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불켜진 서온돌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성큼성큼 떼어 통명전 뜨락을 가로질렀다. 혹여 왕이 서온돌로 들어가나 싶어서 봉이가 어깨가 잔뜩 굳어진 채로 그 등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왕은 섬돌을 딛고 대청을 오르더니 두광이 채 신을 벗겨내기 무섭게 동온돌로 들어가버렸다.


"전하도 참..."


봉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두광을 쳐다보았다. 왕의 목화를 섬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던 두광이 멈칫했다. 두광은 고개를 들어 봉이를 쳐다보진 않고 그저 섬돌만 내려다 보았다. 섬돌에 비친 은은한 달이 두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낮에는 해가 비치고, 밤에는 달이 비치고...사람의 조화가 맞는지. 낙향한 재상 허목이 직접 돌을 깎아 만든 섬돌이었다. 노인네 기력도 좋다고 혀를 내두르고 말았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마냥 신기했다. 석장石匠이 대신 깎아도 이렇게 표면이 매끄럽게 다듬어낼 수는 없다던데.


"뭘 보세요?"

"달..."

"예?"

"이 섬돌에 낮이면 해가 비치고, 밤이면 달이 비치는 게 신기해서."

"무지개도 비쳤지...요."


봉이는 심드렁히 대꾸하다 멈칫했다. 무지개도 비쳤었다. 우희와 함께 섬돌 앞에 웅크리고 앉아 섬돌을 내려다 볼 때만 해도, 그저 아름답고 신기하게만 여겼는데, 나중에 궐안에 떠도는 소문을 들으니 그 무지개가 흉조라 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백홍관일. 어쩌면 상전도 보았던 모양이었다. 섬돌에 비친 백홍관일을.


"산실청 의관은 수의 이동형 외에 최성임, 권..."


서온돌 안에서 상아는 봉이가 가져온 산실청일기를 더듬더듬 읽어내렸다. 한자를 다 아는 것도 아니어서, 중간중간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이제는 자연히 중궁에게 내밀게 되었다. 어떻게 자신의 상전은 막힘 없이 한자를 읽어내리는지 그저 신기해 하면서.


"유자구나. 권유."


진홍은 상아가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글자를 바로 읽으면서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이동형, 최성임, 권유...그자들을 믿을 수나 있을까.


"봉이야, 내의원으로 가서 백어의에게 처음 처방인 교애사물탕에 쓰인 약재들을 적어달라 해라."

"예? 예..."


봉이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괜한 일을 벌이는 게 아닌가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웃전이 명하는 일이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백어의가 부인의 몸을 잘 모른다 하나, 그래도 중궁이 믿고 물어볼 만한 자인 탓에, 은밀히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荊芥형개

地楡지유

艾葉炒黑애엽초흑

當歸당귀

熟地黃숙지황

白芍藥백작약


진홍은 봉이가 받아온 교애사물탕 처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신이 이른 새벽부터 심한 복통과 하혈을 일으킨 탓에 불수산이나 달생산 같은 처방이 아니라 교애사물탕을 처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던 것이 어쩐지 걸렸다.


"중전마마, 어의 백광현이 입시를 청하나이다."


갑자기 들려오는 지밀나인의 연통에 진홍은 흠칫 놀랐다. 처방을 적어달라 하였을 뿐인데, 이미 백광현이 제발로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혹여 하문할 게 있으시면 성심을 다하여 답해드리겠나이다."


장지문 너머로 대청마루 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진홍은 가만히 두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이미 지아비가 동온돌에 들었다. 봉이가 귀띔했다. 헌데 백광현이 이미 와서 입시를 청했으니, 옆에 딸린 양화당에 거처하는 지아비의 귀에 들어갈 일이었다. 이미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백광현은 사실 자신의 사람이기보단 주상의 사람인 만큼.


"장지문 앞에 대기하라."


진홍은 광현을 장지문 앞에 대기하게 했다. 안으로 불러들여 주렴을 내리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방안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내키질 않았다. 온몸의 붓기가 빠지지 않은 데다 아기의 죽음으로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문을 열었다간, 장지문 너머로 건너편에 열려 있는 동온돌을 마주보게 될 것만 같았다. 그 열린 장지문 너머로 지아비의 미운 얼굴이 보일 것 같았다.


"..."


광현은 중궁의 옥음이 다소 날선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신경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동온돌의 장지문이 열려 있었다. 왕이 창백해진 얼굴로 유심히 서온돌을 응시하는 참이었다.


"23일 이른 새벽엔 복통과 출혈로 교애사물탕, 아침과 오후엔 궁귀탕, 저녁엔 증손사물탕, 다시 또 오늘은 궁귀탕..."


장지문 안쪽에서 중궁의 옥음이 들려왔다. 처방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책망하기 위함인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출산당일 교애사물탕이오."

"그건 중전마마께서 태루복통胎漏腹痛이 심하시어 교애사물탕 처방이 내린 걸로 아옵니다."

"태루복통..."


진홍은 가만히 되뇌이곤 서안 위의 처방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교애사물탕에 포함된 지유地楡가 지혈 외에도 해독을 하는 게 맞소?"

"그러하옵니다."

"추가로 더한 상기에도 해독 효능이 있소?"

"그러하...온데..."


장지문에 비친 광현의 그림자가 고개를 조아리다 멈칫했다. 진홍은 차갑게 장지문을 응시했다. 자신이 무엇을 물으려는지 어의 백광현도 이미 감을 잡았을 터였다. 어의가 아닌 지금 곁에 있는 봉이와 상아도 눈치챌 만 하였다. 자신이 방금 해독解毒 두 글자를 두번이나 입에 담았으니.


"설마 지금...비소砒素 중독을 염두하신..."

"비소 역시 심한 복통을 유발한다지..."

"하오나 중전마마께오선 무사하신데...고작 지유와 상기 만으론 비소가 해독이 되었을 리가..."

"내가 아닌 내 아기가 무사하지 않았소."


얼음이 맺힌 듯한 중궁의 옥음에 광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무서운 발언을 중궁이 입에 담았다. 평소 신중하던 중궁의 성품으로 중독을 입에 담았다. 중궁의 성정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확신이 담긴 것인가. 하긴 세번의 임신, 세번의 불행은 도저히 중궁을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게 만들었을 터였다. 사실 자신도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아오. 물증 따위 없는 심증을 함부로 발설해선 아니되는 것을."

"..."

"그만 물러가시오. 이제 혼자 있고 싶소."

"..."


진홍은 장지문에 비친 광현의 그림자에서 눈길을 떼었다. 허공을 쳐다보았을 뿐인데 코끝이 매웠다. 목울대도 매웠다. 불과 사흘전 이른 새벽에 자신의 배를 찢던 고통이 생생했다. 힘겹게 나은 아기를 하루만에 잃고, 또 이틀이 덧없이 지난 지금은 허공을 떠도는 공기마저 매웠다.


광현은 엉거주춤 동온돌을 돌아보았다. 차마 입밖에 내진 못했지만 그는 눈으로 감히 물었다. 이제 어찌 하실 거냐고 소리 없이 그저 여쭈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군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비소 중독...


꼭 비소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세가 비소 중독과 유사했다면, 고작 지유와 상기 만으로 해독이 되었을까. 다른 해약 성분이 들어가서 독소를 배출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독자적인, 또 독보적인 침술로 경지를 이룬 백광현이 독을 알면 또 얼마나 알까. 정말로 중독이라면, 중궁의 목숨은 살리고 태아의 목숨만 끊어놓았다면, 아니 독살이 아니어도 뭔가 수를 내었던 것이라면...잡아낼 수는 있을까. 중궁이 날 미워해도, 원망해도...당연하다.


지키지 못했으니까.



동지가 되어도 윷놀이는 도성 안에선 열리지 못했다. 겨울은 숨막힐 정도로 차가운 공기를 머금고 도성 곳곳을 얼어붙게 했다. 왕실에 저주가 내렸다는 흉흉한 소문에 민심도 얼어붙었다. 그렇게 한해가 또 갔다. 궐안 공기가 모조리 얼어붙은 채로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세답방 나인들은 빨래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홍두깨로 빨랫감을 두들기며 입을 놀렸다.


"나례는 한대?"

"하겠지. 놀자고 하는 게 아닌데."

"하긴...역귀를 쫓아내는 의식인데...지금 후사도 없는데 역귀까지 들어봐. 큰일나지. 저번 공주마마 돌아가셨을 때도, 그래서 처용굿 했잖어."

"했어? 언제?"

"애가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했어 진짜!"

"아...그랬나. 별로 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굿은 해도, 쥐부리 글려는 안했잖아. 우리는 했는데, 왜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애들은 안한대?"

"그거 안한 지가 언젠데. 중전마마가 폐지시켰는데."

"아, 맞다. 근데 왜?"

"중전마마 좌우명이 내가 하기 싫은 건 남한테 시키지 않는다, 이거잖아. 처음 세자빈으로 입궁하셨을 때 쥐부리 글려에 데이셨걸랑."

"아...아깝다. 내 밑으로 들어오는 애들 싹 굴릴 수도 없고."

"야, 마음 좀 곱게 써라. 중전마마 봐라. 그래야 복을..."

"복을...받으셨나?"


공주아기씨가 하루 만에 죽은 지도 벌써 두달 남짓 흘렀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시시덕거리면서 웃다가도 이내 죄책감을 털어냈다.다 제 복인 거다. 중궁도, 아기도.


"복을...못 받으셨지. 아 진짜 불쌍하셔..."

"그러게...가온의 저준가..."

"가온의 저주는 무슨..."


세답방 나인들의 얼굴이 복잡미묘해졌다. 자신들도 이따금씩 중궁이 웃으면 배가 아플 때가 있었다. 공주 아기씨가 죽었다니 가온의 저주라며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남의 불행에 웃는 심보가 이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가슴 한켠 치미는 연민은 그 본질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 엄동설한에 손에 물을, 그것도 얼음물을 묻히고 손이 벌개져서 홍두깨를 두들기는 신세가 오히려 회임을 세번이나 하고도 세번이나 씨를 잃어버린 중궁보다 낫다는 우월감 내지는 자기위안도 조금은 있었다.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그들은 벌겋게 얼어붙은 손가락 끝을 움츠리고 입김으로 호호 불거나, 목덜미에 문지르거나 하면서도 그나마 홍두깨를 두드릴 힘이 났다.


"어? 이게 뭐야?"


중궁전 빨랫감 속에서 하필이면 찢어진 천담복이 나오자, 세답방 나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귀한 연옥빛 명주로 만든 천담복 쪼가리였다.


"중전마마 천담복 같은데?"

"왜 이렇게 다 찢어졌대?"

"뭐야 이거?"


이때 세답방 나인 손에서 누군가 찢어진 천담복을 홱 나꿔챘다.


"내놔!"

"어?"


갑자기 나타난 손의 임자를 세답방 나인들이 쳐다보니, 중궁의 본방나인인 봉이였다. 나인 김씨였던가. 평소 덤벙거리더니 찢어진 천담복을 함께 섞어놓은 모양이었다. 봉이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내가 시, 실수로 찢어서..."

"엥?"

"말 나오지 않게 해주라."


봉이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려 보이고서 찢어진 천담복을 두손으로 얼렁뚱땅 뭉쳐들고 후다닥 달려갔다. 세답방 나인들은 그런 봉이의 뒷모습을 쳐다보곤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하여튼 꼭 저래..."

"저러고도 중전마마 곁에 붙어있는 게 용하다니깐."

"그나마 같이 있는 고 지지배가 꼼꼼하고 깐깐하잖아. 걔가 다 알아서 뒤치다꺼리 해주는 거지."

"아...쯧쯧..."


봉이는 빨래터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뒤에 숨어서 몰래 고개를 기웃거리며 세답방 나인들의 반응을 살피고는 나인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실수로 받아들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찢어진 천담복이 저들의 눈에 띈 이상, 중전한테 불리한 소문이 하나라도 나갈까 두려웠다.


"혹시 죽은 가온의 일도 쟤가 떠들고 다닌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네."

"아니야. 내가 어떤 의녀한테 들었는데, 그때 중전마마가 뭘 모를 때라, 임신인지 아닌지도 몰랐을 거래."

"뭐? 진짜? 그럼 누구래?"

"새로 입궁한 생각시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같이 지낸 대전 나인들일 수도 있고, 뭐...우리들 중 누구일 수도 있고."

"우리 중에? 설마..."

"뭐 지금쯤 상궁이 되신 분들 중에 있을 수도 있고. 그야 모르지."

"..."


봉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가온의 일을 떠들고 다닌 진범이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그게 꼭 나쁘게만 볼 일인가? 사실 외간남자와 사통한 것 자체가 큰 죄였다. 그걸 밝힌 게 이렇게 저주니 뭐니 두고 두고 구설수에 오를 일인가 싶었다. 물론 궐안의 일을 함부로 떠드는 것 자체가 워낙 금기인지라, 자질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일이긴 해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중궁은 아니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의녀 말마따나, 다른 누군가가 떠들고 다닌 일이었다. 그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찢어진 천담복을 뭉쳐 들고 머릿속이 온통 잡념으로 헝클어진 채로 봉이가 협문 사이로 걸어들어가는 순간, 협문을 지키던 금군 하나가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섰다. 봉이의 두눈이 크게 지릅떠졌다. 착각처럼, 사내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봉이가 흠칫 놀라 헛숨을 들이키며 금군을 쳐다보니, 그 금군을 말쑥한 얼굴로 앞만 쳐다볼 뿐 봉이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


봉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닿았다 분명히...분명히 닿았다. 손등에 스치는 투박한 손길이 사람 심장을 떨리게 하였다. 나만 이러나? 나만 사내에 굶주려서 이러나? 손등이 닿았다고,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나? 상아는, 상아 고 야무진 것은 아무렇지도 않으려나?



섣달 그믐날에 관상감에서 처용굿을 통명전 뜨락에 열었다. 박석이 깔린 뜨락에 그믐달이 어슴푸레 비치고, 오색의 옷을 입고 처용탈을 쓴 무희들이 두손에 흰 한삼을 길게 늘어뜨린 채로 오방五方을 점하여 춤을 추었다. 하늘에서 흰눈이 먼지처럼 흩날리나 싶더니, 점점 눈송이가 굵어지는데도, 눈처럼 흰 한삼을 더욱 힘차게 휘둘렀다. 그 너울거리는 춤사위에 늙은 상궁들이건 젊은 궁인들이건 할 것 없이 저마다 감회에 젖었다.


"아, 멋지다...진짜 이것도 안하면 어쩔 뻔 했어."

"나례는 해야지..."

"나례? 저게 무슨 나례냐. 나 어릴 때 전쟁 나기 전엔 다섯명이 아니라 수십명이 춤췄어. 오례의에 적힌 고대로."

"오례의요?"

"그래, 이렇게 잡스럽게 안하고, 성스럽게 했대도."

"음..."

"네들은 뭘 몰라."


섣달 그믐날만 되면 늙은 궁인들이며, 내관들은 전쟁 터지기 전의 나례 얘기를 하며 으스대는 것이었다. 젊은 궁인들과 내관들이 보기엔 눈꼴시긴 해도, 아주 조금은 부럽기도 하였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좋은 시절을 누렸으려니...그렇게 겪어보지 못한 시간들이 아쉬웠다.


"..."


월대에 놓인 어좌에 숙종과 함께 앉은 진홍은 얼어붙은 얼굴로 통명전 뜨락을 내려다 보았다. 숙종이 나례를 지켜보다 무심코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갰지만, 진홍은 두눈을 차갑게 내리뜨고 앞만 볼 뿐이었다.


숙종은 진홍의 보드라운 손에 흠칫 놀라서 진홍을 쳐다보았다간,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개를 돌리고 처용굿에 집중했다. 궁인들이며 내관들 말마따나 오례의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진짜 나례다운 나례의식을 거행하긴 해야겠지만, 아직도 전란의 상처를 채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다. 언제고 조선과 왕실이 힘을 되찾으면, 저 나례굿도 격식을 되찾으리라 내심 벼르다가, 그는 문득 자신의 손끝에서 한치 정도 떨어진 진홍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춥소?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고집스럽게도 기어이 천담복을 입고 나온 진홍이 밉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한테 미안하기도 하였다. 지켜주지 못하고선, 천담복도 찢어버린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진홍의 창백한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파르르...속눈썹이 떨리는 건지, 어깨죽지가 떨리는 건지, 다시 보니 온몸을 가냘프게 떠는 참이었다.


"..."


진홍은 지아비의 눈길을 느꼈다. 어좌 위로 내린 손에 닿을락 말락 한 지아비의 손길도 느꼈다. 하지만 굳은 얼굴로 앞만 쳐다보았다. 어쩐지 두눈을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풀어질 것만 같았다. 오늘은 처용굿과 함께 자신의 아기를 보내야 하는 날이었다. 상복을 벗어던지고 아기의 영혼을 함께 훌훌 떠나보내야만 하는 날이었다. 담제도 치러주지 못하고서, 해가 바뀌는 섣달 그믐날에 떠나보내줘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져서, 지아비에게 눈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봄눈 녹듯 모든 한이 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꼭 허적 부자를 치워야만, 속이 시원하겠소?"


지아비도 결국 고개를 홱 돌리고 앞만 보며 물어왔다. 진홍은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시선을 내렸다. 저 뜨락에서 벌어지는 처용굿을 지켜보는 허적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이 순간이 너무도 싫었다. 저자, 저자들의 숨이 허공에 섞이는 것도 싫었다. 네번째 회임은 생각도 하기 두려웠다. 무서웠다. 그런데, 또 네번째 회임이 기다려졌다. 죽은 첫째 공주든, 소산된 태아든, 태어나자마자 죽은 둘째 공주든...누구든 다시 자신의 품속에 깃들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으로.


"오늘, 오늘까지만...전하를 미워할 수 있게 해주시어요."


진홍은 시린 겨울밤에 하얀 입김을 내뱉았다. 숙종은 진홍의 대꾸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진홍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맺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탓에 입김도 연기처럼 떨렸다. 짙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그의 붉은 심장을 적셨다. 오늘까지만 나를, 미워하게 해달라고?


"오늘까지만요."


때로는 미움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진홍은 인생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가슴 속에 박힌 미움의 뿌리로 겨우 발밑이 허공에 뜨지 않고 묶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원한, 증오, 미움, 이런 감정들이 뒤엉켜서 무겁게 내려앉아야만, 뿌리를 내려야만, 겨우 자신이 살 것 같았다.


"그럼 내일부터는 내가 중궁을 미워할 거요."


숙종은 유치한 한마디를 내뱉고서, 하얗게 허공에 서리는 입김을 보며 진홍의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어느덧 눈발이 거세져서 눈앞을 가릴 만큼, 더는 처용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무섭게 쏟아지는 참이었다. 두광이 황급히 붉은 우산을 그들에게 씌워주었지만, 그 와중에도 눈발이 숙종의 콧잔등 위로 톡 떨어져선 사르르 녹았다. 숙종은 퍼붓듯이 쏟아지는 눈발에 온몸의 체온이 온통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히 속으로 덧붙였다.


내일부터는 네 복수를 해줄테니. 아비의 복수도 잠시 접고, 네 복수부터 해줄테니. 널 지키면서, 널 원망할테니. 그러니 내 미움을 한몸에 받아서, 꼭 내 곁에 살아남아라...김진홍.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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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2.15 10:56
    No. 1

    참 힘든 중전생활이네요
    숙종도 초기에는 너무 고생한 듯 싶어요

    힘내라 진홍~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2.19 08:23
    No. 2

    소설 쓰면서 자료 조사할 수록 숙종에 대해서 놀라게 되네요. 좀 안쓰럽기도 하고. 인경왕후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은데, 그래도 더 안쓰러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2.17 23:03
    No. 3

    숙종의 희로폭발 + 뒤끝작렬이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지겠군요.

    힘내라 숙종~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2.19 08:26
    No. 4

    이때부터 성격이 좀 더 변덕스럽고, 앞뒤를 알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무살까지 아버지, 누이 둘, 할머니, 두딸, 아내까지 잃은;;; 게다가 네번 임신에도 자식을 남기지 못했으니 더 충격이었을 듯 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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