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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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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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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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93

DUMMY

甲寅冬, 宋時烈承召來到江上,

送示疏草於臣, 所謂嫡統何歸, 卽其疏中語也。

갑인년 겨울에 송시열이 부름을 받아 강에 올랐을 당시

신에게 상소 초고를 보여주었는데,

'적통하귀嫡統何歸'라는 말은 그 상소에 있는 말이었습니다.

臣答以聖上方在諒陰中,

此等論說, 姑徐爲宜云。

성상께서 양음諒陰(여막)에 계시니

이런 논설은 천천히 하자고 신이 만류를 했사온데,

厥後有郭世健之疏, 其疏遂不得上矣。

그후 곽세건의 상소가 있어, 송시열의 상소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到今聖明因李惟泰所引宋時烈嫡統之語,

特施內移之典。

이번에 이유태가 송시열의 적통 발언을 언급하여,

전하께서 특별히 양이의 은전을 베푸셨습니다.

如使時烈此疏卽徹, 則時烈本情之不在貶降,

不辨自明, 渙釋之恩, 不待今日矣。

만일 송시열의 상소가 전하께 진달되었더라면

송시열의 뜻이 폄강에 있지 않음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을.

時烈被譴之日,

臣方在朝, 而畏嫌不言,

日月之明未燭, 媒孽之罪橫加,

以至六年之久。

송시열이 견책을 입었을 때

신은 조정에 있었지만 두려워 말하기를 꺼렸더니

일월의 밝음이 비추질 못하고 중간의 농간이 끼여들어

육년이나 걸렸습니다.

臣之罪咎, 於是乎難逭。

신의 죄는 면할 길이 없습니다.


숙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김수항의 차자를 몇번이고 읽었다. 송시열이 적통논란을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려다 김수항의 만류로 이 지경이 되었으니, 죄를 면할 길이 없다는 자책을 가장한 말로 자신을 옥죄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려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체념이었다.


이젠 정말로 올 것이 왔다. 오고야 말았다. 이제는 송시열을 풀어줘야 했다. 하지만 처음 송시열을 양이하라는 비망기를 내리고 안달복달할 때보다는 머릿속이 차분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은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미리 안절부절하고, 좌절하고, 막상 넘어지면 그저 무릎이 깨져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쓱 닦아내고 일어서곤 하니. 무슨 성격이 이리도 더러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미리 걱정하는 성격 덕분에 마음은 편했다.


"행行 응교 최석정은 사직차자를 만류하는 비답을 제찬하여 오도록 하라."

"예 전하. 분부 받들겠나이다."

"또한 내일 소결은 과인이 친림할 것이니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정지화도 필히 참여하라는 조목도 넣어서."

"예 전하."


왕의 옥음이 너무도 담담하여 최석정은 귀를 의심했다. 소결청을 세우고 대대적으로 죄수를 석방하는 것까진 아니어도, 소략하게나마 소결을 실시한다면, 송시열의 이름은 피해가지 못할 일이었다. 도성에서 고작 3백리 거리에 송시열을 양이시켰으니, 소결에도 포함시킬 수 밖에 없었다. 헌데도 왕은 태평하게 소결을 언급했다. 지금 왕의 속은 펄펄 끓는 용암일텐데도.


"저..."

"왜 그러는가?"

"아니옵니다."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던 최석정은 자신의 눈시울을 찔러드는 도승지의 예리한 눈초리에 머뭇했다. 언제부턴가 승정원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눈길이 영 곱지가 않았다. 물론 최석정 자신이 어디서 고운 눈길을 받아봤겠냐마는. 그래도 유난히 따가운 눈총을 받는 느낌이었다. 석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오른 집게손가락 끝으로 살쩍을 살짝 긁었다.


"기우제를 2차까지 지냈던가?"

"아, 예, 전하."

"허면, 다음 회차에 보낼 헌관은 규례에 구애받지 말고, 특별히 대신 중에서 뽑아서 보내도록 하라."

"예, 전하."


석정은 사초에 후차後次라고 쓰고 그 위에 작은 글씨로 삼차三次라고 적어놓았다. 한숨이 나왔다. 기우제는 순차가 있어서, 1차는 남한강, 남산, 한강에서 올리고, 2차는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올리고, 3차는 사직단에서 올리는 것이 수순이었다. 3차를 치를 차례라서, 왕이 특별히 대신을 언급한 것이었다. 하지만 삼정승이 모두 사직 내지는 병가를 자처한 지금 기우제의 헌관을 뽑기도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왕의 분부대로, 석정은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정지화에게 내릴 비답을 제찬하여 동온돌로 가져왔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승정원에서 동온돌까지 오는 데만도 관모 틈새는 물론 두팔 자개미며, 등골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손바닥에도 땀이 고여, 석정은 홍단령자락에 쓱쓱 닦아내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석정이 청단령을 처음 입을 때만 해도, 얼룩 하나라도 묻을까봐 벌벌 떨었는데, 지금 홍단령을 입고도 아무 생각 없었다. 게다가 제찬해 온 손안의 비답 자체가 뾰족뾰족한 밤송이처럼 따갑게 느껴지기만 했다. 하지만 숙종은 비답을 받아보고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잘했소. 사부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어서 참으로 마음에 드오."

"너무 군더더기가 없어서 먹을 건더기도 없다고 욕먹기도 하지요."

"건더기는 있소. 양념이 없을 뿐이지."


숙종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한글자한글자 집어먹는 시늉을 했다. 최석정은 성격이 실리적이라선지, 글도 실리적이었다. 군더더기는 없지만, 건더기는 있었다. 딱 건져먹을 만큼, 그 만큼만. 그래서 숙종 자신이 더욱 최석정을 신뢰하는 지도 몰랐다. 특히나 내키지 않는데도 부드럽게 회유하는 비답을 내려야 할 때면, 간지럽지 않은 최석정의 글솜씨가 필요했다.


"전하, 이남과 이정 형제가 경고한...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말 말입니다."

"그 말은 왜?"

"그 말 뜻을 그 아우 이연은 알지 않겠습니까?"


뜬금 없이 복선군과 복창군의 유언을 언급하는 최석정의 말에 숙종은 의아히 미간을 찌푸렸다. 삼복 형제 중에서 복창군과 복선군이 똑같이 같은 말을 하였으니, 당연히 막내인 복평군 이연도 알 터였다. 게다가 이연은 목숨만은 부지한 채로 절도에 위리안치되었으니, 이연에게 묻는다면 곡절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형을 잃고 원한이 뼈에 사무치는 이연이 쉽사리 입을 열 리가 없었다.


"어차피 알아도 말하지 않을텐데?"

"하오나 선처를 해주는 조건으로 묻는다면..."

"거제에 있는데, 어찌 다녀오려고? 천천히 알아보시오. 천천..."


숙종은 손을 휘젓다 말고 멈칫했다. 빈손이 꿈틀거렸다. 송시열이 적통 발언을 해명하려는 상소를 올리려다, 천천히 하자는 김수항의 만류로 미루었다가 곽세건의 상소로 견책을 입었다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천천히란 말을 내뱉는 것 자체가 자신이 지금 실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앞섰다.


"헌데 왜 갑자기 그 일을 알아보겠다는 거요? 뭐, 짚이는 것이라도 있소?"

"병판이 광성부원군을 굳이 보사공신 일등에 올려놓고, 전하께서도 윤허를 하신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그거야, 나중에 내가 변덕을 부려서 판부를 뒤집을까 불안해서, 김석주가 장인어른을 물고 늘어진 것이지...다른 뜻이 있겠소?"

"하오나 전하, 이렇게 되면 나중엔 아무리 광성부원군이라 해도 안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언젠가는 허견의 역모가 모함이었다고 판부를 번복할 시엔..."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숙종은 서안 위로 빈손을 늘어뜨린 채로 딱 잘라 말했다. 아무렴 자신이 김만기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일은 없었다. 김만기는 진홍의 아비였다. 자신이 목숨만큼 아끼는 진홍의 아비를 사지로 내몰 리는 없었다. 어떻게 김만기까지 자신이 버릴 거라 최석정이 생각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석정은 석정대로 서안에 걸친 왕의 손끝을 쳐다보며 두눈에서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왕의 집게손가락 옆에 웬 깊은 흠집이 눈에 띄었다. 송시열을 양이한다는 비망기를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서안이었다. 헌데, 칼자국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서안 위의 물건들도 모조리 바뀌어 있었다. 붓도, 벼루도, 연적도, 붓걸이도 새로웠다. 제 손으로 송시열을 양이시켜 놓고서도, 분에 못 이겨서 방안 구석구석에 분풀이를 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송시열에 대한 원한이 뿌리 깊으니, 서인정권을 언제까지 두고 볼 리도 없었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밴 땀을 홍단령 자락에 쓱쓱 문질렀다. 아직은 새 옷감이라선지, 그저 손의 땀을 닦는데도 스륵 소리가 났다.


"왜 그러오?"

"아니...옵니다."

"말해보시오."

"아니 옵니다."


왕은 자신이 외조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마저 사지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미인 대비김씨의 아비,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급환으로 위중할 때도 어의를 보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김석익이 직접 내의원으로 찾아와서 하소연하여 약첩을 받아간 게 고작이었다. 그런 왕이 중궁의 아비라고 지켜줄 리 만무했다. 만일 김만기가 송시열의 강압에 못 이겨서 왕의 반대편에 선다면, 왕은 거리낌 없이 불을 지를 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든 단정하지 마십시오. 만일萬一이란 것이 있으니..."

"뭐라?"

"전하께선 이미...청풍부원군을 죽음으로 내모셨습니다. 광성부원군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


석정의 쓴소리에 숙종은 순식간에 소태를 한입 가득 씹은 얼굴이 되었다. 석정의 말대로, 자신은 이미 청풍부원군을 죽였다. 서인들의 선봉에 서는 청풍부원군을 못내 미워하여 끝내는 술독에 빠뜨려 급서하게 만들었다. 그런 자신을 보며, 어미는 마치 깨진 도자기를 씹어먹기라도 하는 듯이 피맺힌 웃음을 삼키곤 했다.


"만일萬一은 후회할 때 쓰는 말이 아니라, 대비할 때 쓰는 말이지요."


혹시라도 후회로 스스로 속을 갉아먹을까 걱정되었는지 석정이 한마디 덧붙였다. 숙종은 쓴웃음으로 덧붙였다.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시오."

"예, 전하."


석정이 일어서며 서안 위로 시선을 무심코 던지다 말고 뻣뻣하게 눈빛이 굳어졌다.


"왜 그러오?"

"아니옵니다."

"말해보래도? 요즘 왜 자꾸 말을 하다 말다 하는 거요?"

"그게...붓이...바뀌셨습니다?"

"자꾸 갈라져서."

"연적도...바뀌셨습니다?"

"자꾸 물이 새서."

"붓걸이도...바뀌셨습니다?"

"자꾸 넘어져서."

"서안은...왜 안 바꾸셨습니까?"

"기억해 두려고."


기억해 두겠다...왕은 손가락 끝으로 서안의 틈새를 문지르며 다짐하듯 대꾸했다. 석정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서 스륵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석정의 버선발이 동온돌 문턱을 넘는 동안 숙종은 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석정에겐 참 많은 것을 읽히고 들키고...그런 것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어미를 두려워하는 것은 외조부를 죽게 만들었다는 부채負債, 아니 부담 때문일 지도 몰랐다. 숙종 자신은 그 일을 후회할 생각이 없었다.


아비가 죽었다. 약방을 사방팔방 장인인 청풍부원군 김우명, 외숙인 장선징, 처남인 김석주로 물샐 틈 없이 에워싸고 신변을 지킨 아비가 죽었다. 한질이 아니라 학질이라서 죽었다. 무려 보름인가를 약방에서 모조리 진단도 처방도 잘못하여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그 의혹이 가슴 한켠에 커다란 물혹 같은 것이 되어 숙종 자신을 괴롭혔다. 외조부가, 외종숙이, 어쩌면 어미마저도 관여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끔찍한 의심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허적은 김만기를 의심하고 약방에서 제외시켰는데, 오히려 김만기가 약방을 떠나고 반년만에 아비가 죽었다. 그러니 김만기는 믿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있...을까? 허적이 제일 먼저 경계해야 했을 만큼 가장 충실했던 송시열의 제자인 것을.



소결은 형조의 관할이었다. 하지만 왕이 친림을 선언한 만큼, 형조판서와 형조참판은 물론, 비국備局(비변사)의 당상들까지 관련문건을 갖고 편전으로 입시해야 했다. 그런데 형조판서 김덕원이 편전에 들고 보니, 덩그러니 왕만 홀로 어탑에 앉은 채로 어탑 아래가 비어 있었다. 도승지 윤계와 대사간 이민서만 두눈을 멀뚱거릴 뿐 삼공三公 중 아무도 참석한 이가 없었다. 형조판서는 난감한 기색으로 참판과 시선을 주고 받았다.


너무들 하는군?


좌의정 정지화야 벌써 두어차례 사직소를 내었으니 그렇다 쳐도, 여태 착실하게 입조入朝(조회에 참석함)했던 영의정 김수항이 대뜸 사직차자를 내고 불참했다. 게다가 민정중 역시 온 데 간 데 없이 사흘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 왕의 체모가 말이 아니었다.


힐난어린 형조판서의 눈길에, 도승지는 입맛을 쓰게 다시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차마 등뒤에 있는 왕의 용안을 살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안절부절 문쪽을 살피는 수 밖에 없었다. 무더위 탓인지, 기다림 탓인지, 왕은 편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소결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관들이 방석을 치우는 것을 보니 더는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문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피로에 찌든 얼굴로 민정중이 고개를 조아렸다. 어탑 위의 숙종은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고개를 돌려 가렸다. 송시열을 양이한다는 전교를 내리고, 송시열이 느긋하게 청풍에 당도할 무렵에 민정중이 무려 나흘간을 칭병 및 칩거를 하였으니, 청풍부에서 조우하고 왔을 지도 몰랐다. 나흘이면 사실 비가 오는 날씨에 비루먹은 노마로는 도성에서 청풍부까지 가는 것만도 빠듯하였지만, 비도 오지 않는 날씨에 준마로는 무리해서 다녀올 수는 있는 거리였으니. 숙종은 애써 코웃음을 참았다가, 민정중이 형조판서의 앞켠에 꿇어엎드리고 나서야 고개를 비끼고 물었다.


"몸은 좀 어떻소?"

"소결에 참석할 만은...하옵니다."


항상 등허리를 꼿꼿이 하고 고개도 꿋꿋이 하는 왕인데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묻는 것이 어쩐지 민정중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용안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어 황망히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나흘간을 무리해서 말을 달렸더니 엉덩뼈와 두덩뼈가 온통 뻐근하여 꿇어엎드리는 것도 힘들었다. 하필이면 방석도 치웠는지, 딱딱한 전돌바닥에 유난히도 엉덩이가 배기는 느낌이 괴로웠다.


"방석 좀 내놓게."


자꾸만 민정중이 눈밑을 실룩거리는 것을 보고서, 도승지는 석정에게로 다가들어 궁둥이 밑의 방석을 빼내려 하였다.


하지만 괘씸하게도 최석정은 오히려 엉덩이에 힘을 꽉 주고 방석을 양보하질 않았다. 아예 방석 앞쪽을 한손으로 비틀어쥐고 놓질 않았다. 도승지가 두눈을 부릅뜨고 쏘아봐도 능글맞은 웃음으로 변명할 뿐이었다.


"그건 좀...오랜만에 말을 좀 탔더니 불두덩에 불이 나서 말입니다."

"말?"


민정중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불두덩에 불이 날 정도로 말을 탈 일이라면, 한벽루에 다녀오는 일 말고 뭐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분명히 한벽루에 최석정은 오지 않았다. 어디 사냥터에서 엉덩이에 뿔이 날 정도로 말을 타고 쏘다녔으면 모를까, 한벽루엔 오지 않았다. 하지만 따져 묻기도 켕기는 터라, 민정중은 도승지를 제지했다.


"되었네."

"아니..."

"되었대도."

"아니...이 친구가 어른 공경할 줄을 모르고..."


도승지는 난감한 기색으로 민정중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눈에도 엉덩이가 불편해 보이는 모습을 손 놓고 지켜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앉아 있던 최석정을 흘겨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참으로 얄미운 놈이었다. 민정중이 더는 따지지 못할 것을 알고 일부러 방석을 내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민정중이 말을 타고 청풍부를 다녀온 일을 알고 저리 배짱을 부리는 것일 지도 몰랐다.


어탑에서 관망하던 숙종은 소리없는 코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민정중은 청풍부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저 지긋한 나이로 한 열흘간 느긋하게 다녀왔으면 모를까, 나흘로는 어림도 없었다. 두덩에 불이 나든, 엉덩에 뿔이 나든 할 터였다. 숙종은 냉담한 음성으로 도승지를 불렀다.


"도승지!"

"예? 예 전하."

"혹여 집에 팔순노모가 계신가?"

"그건 아니온데...어찌 물으시는..."

"내 경을 함경감사로 보내려고."

"하, 함경감사요...?"


도승지 윤계의 아랫입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중앙의 관리들 중에선, 번화한 도성을 놔두고 굳이 추운 북도로 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평양에 빼어난 기생들이 많다 하여, 평안감사로 가겠다는 이들도 더러는 있다지만, 열이면 열, 칠순노모니 팔순노모니 핑계를 대고 마다했다. 그런데 방금 왕은 자신을 함경감사로 보내겠다고 예고했다. 머릿속이 백짓장이 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도승지를 보며 숙종은 입가에 서늘한 웃음을 띠었다.


"이리 조촐하니 소결도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겠군."

"속전속결이라 하심은..."

"역옥의 관련인과 어사서계御史書啓 피죄인被罪人(암행어사가 고발하여 죄를 입은 자)들은 거론하지 말고, 3년 이하의 죄인들, 형조의 죄인들을 거명토록 하라."

"하오시면..."

"어서들 시작하라."


왕의 낭랑한 옥음에, 도승지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왕의 서안 위로 도徒 3년에 해당하는 죄인들의 명부를 기록한 수안囚案(수도단자, 즉 죄인들의 명부를 기록한 종이)가 잔뜩 쌓인 소반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수안을 펼쳐 읽어내려갔다.


"이름 금이, 생년 을미년, 죄명 처첩고부妻妾告夫..."


우의정 민정중은 미간을 슬쩍 찡그리며 도승지 윤계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도승지는 수안을 읽다 말고 그저 입을 달싹일 뿐이었다.


"계속 읽지 않고 뭐하는가?"

"그것이..."


윤계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서 우의정 민정중을 곁눈질로 가리켰다. 민정중은 두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선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 입을 열었다.


"신臣 우의정 민정중, 감히 전하께 먼저 사뢸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보라."


숙종이 고개를 끄덕여 윤허하자, 민정중은 미리 글로 써서 준비해 오기라도 한 듯이 청산유수로 말하기 시작했다.


"송시열은 당초 폄강군부貶降君父(왕을 폄하함), 괴란종통壞亂宗統(종통을 어지럽힘)의 죄명을 입었사온데, 이는 너무도 원통한 누명이옵고, 지난번에 전하께서 특별히 송시열의 본심을 헤아리시어 양이를 명하셨으니,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나이까?"


먼저 흠앙이니 하는 말로 추켜세우는 것을 보니 숙종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민정중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키는 짧은 순간마저 두꺼비가 한껏 뛰어오르겠다고 잔뜩 움츠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 무고함을 전하께서도 아셨사오나 송시열은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고, 빈사賓師 지위에 있었으니 사체事體(사리와 체면)를 보아 이번 소결에 다른 죄인들과는 차별을 두어야 마땅하옵니다."

"그래서?"


도발적으로 재촉하는 왕의 말투에도, 민정중은 한치의 꿇림도 없었다. 오히려 점입가경이었다.


"하오니 성상께오선 신들이 문서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기만 기다리지 마시옵고, 먼저 처결을 베풀어주심이 지당한 줄 아옵니다."


빈사賓師? 숙종은 가만히 입술을 달싹이며 민정중의 발언을 곱씹었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빈정 상하는 말이 저 빈사라는 말이었다. 신하가 아니라, 왕이 각별히 초빙한 손님이란 의미였다. 물론 이미 송시열의 소결을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빈사라는 말까지 듣고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게다가 송시열의 이름을 거명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처결해야한다고 자신을 가르치려드는 태도도.


"가만, 아까 뭐라 했소? 빈사瀕死(반죽음)? 송시열이 다 죽어간다면 마땅히 먼저 소결을 시켜줘야겠지."

"그 빈사가 아니오라..."


다시금 왕을 가르치려 들던 민정중은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들었다가, 목줄기를 긋는 듯한 왕의 시선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왕의 눈동자는 너무도 냉담했다. 오래도록 얼어붙은 얼음조각처럼 손끝이 닿아도 녹지 않고, 자신의 손끝만 아릴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밝혔지만, 조정에서 죄를 용서하는 것은 개과천선의 길을 열어주고자 함이다."

"..."

"이유태의 상소가 그 여지를 입증했기 때문에 송시열을 양이한 것이며, 아울러 김수항의 차자가 갑인년에 송시열의 의소擬疏(왕에게 차마 올리지 못한 상소)가 있었던 것을 보증하였으니, 이를 참작하여, 특별히 송시열을 방면한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송시열이 방면된다. 민정중도, 서인들도, 꿈에 그린 일이었다. 하지만 민정중은 그저 얼떨떨하였다. 단감을 한입 가득 씹어 삼켰는데, 이상하게도 뒷맛이 떠름했다.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자신들은 사직소로 텃세를 부리면서 왕에게 스승의 무고함을 다짐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왕은 너무도 단호히, 처음부터 끝까지 개과천선 운운하며, 방면을 명하였다. 사면령을 내리는 이 순간마저도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로 스승을 초지일관 죄인취급하였다. 개과천선이라니, 어쩐지 똥을 누고도 밑을 안 닦은 기분이었다. 그런 민정중을 비웃듯이 숙종이 차갑게 물었다.


"이제 소결을 계속해도 되겠는가?"

"..."

"형조판서는 마저 진행하라."

"예, 전하."


우의정 민정중은 아무 말도 못한 채로 아랫입술 안쪽을 가만히 씹었다. 이번 기회에 송시열이 무죄이고 정적의 모함임을 확답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왕은 개과천선이란 취지임을 못박을 뿐, 한치도 물러서질 않으니 답답했다. 불을 껐는데 불씨는 남아있으니, 추후 누군가가 기름을 끼얹으면 다시 재점화될 일이었다. 생각보다, 송시열에 대한 왕의 증오가 너무도 질겼다.


"이름, 금이..."

"죄목이 처첩고부 맞나? 소결토록 하라."

"예? 하오나 아내가 지아비를 고변하는 죄를 범했사온데..."

"소결하라. 다음!"

"예. 전하...이름 피기문, 생년 정축년, 죄목 잠상潛商(밀수)..."

"잠상이라니? 물목이 무엇인가?"

"백금 3천냥으로 용초도에서 왜인과 석유황과 조총을 밀수한 죄입니다."

"석유황과 조총을?"

"예."

"보류하라."

"하오나, 동래부의 상인들이 왜인과 잠상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오니, 은전을 베푸심이..."

"보류하라, 다음!"


석정은 왕의 옥음을 들으면서, 사초에 따로 피기문의 이름을 적어두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었다.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팔뚝에 와닿는 파리의 날갯짓처럼 뭔가가 뇌리에서 간질거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간지럽다고 시원하게 긁어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피기문이란 이름에 마냥 골몰할 수도 없었다.


왕은 지금 송시열을 방면했다. 어제의 수상인 허적을 내쫓고, 또 일부러 죄를 주지 않고 백성 신분으로 풀려나게 한 후에, 그 큰아들을 능지처사에 처하고, 그것도 종전대로 죽어서 사지를 찢는 것도 아니고, 살아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고서, 작은아들을 인질로 삼아서 두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아들을 극변에 안치시킨 후에 허적에게 사약을 내려 목숨을 거두었다. 그러니 왕이 이제는 서인들을 용서하고 서용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아니, 송시열에 대한 오해를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은 송시열에 대해서 끝내 '개과천선'이란 말로 못을 박았다. 마지 못해 송시열을 사면했다는 의미였다. 죽어도 놓아주기 싫은 송시열을 놓아주었으니, 그 속이 만신창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왕의 반응은 자분자분하다 못해서 차분차분했다. 송시열을 양이하라는 비망기를 내린 뒤로, 동온돌의 연적이며, 붓이며, 벼루까지 모조리 바뀐데다, 서안까지 칼자국이 남은 터라 왕이 얼마나 폭주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토록 잠잠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파좌! 이만들 물러가라."

"예, 전하."


어느덧 편전 안에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서야 축객령이 내리고, 석정이 주섬주섬 지필묵을 챙기는데, 도승지의 눈총을 받은 승지가 갑자기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아직 아뢸 것이 남았사온데..."

"무엇인가?"

"사사전지賜死傳旨(죄인을 사사하는 어명을 받아적은 교서)를 금부의 문사낭청이 받아적어 집행하는 것은 격이 맞지가 않습니다. 청컨대 추고전지推考傳旨(엄중히 문책하라는 어명을 받아적은 교서)처럼 승지가 받아적어 승정원에서 인장을 누른 후에 보내도록 하심이..."


숙종의 눈길이 힐끔 석정에게 닿았다. 보나마나 그간 문사낭청이었던 석정이 사사전지를 받든 것을 문제삼은 느낌이었다. 말이 금부낭청이지, 옥당관원으로서 자신의 전교를 받아적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사사전지는 승정원의 일이라며 격식을 따지는 참이었다. 석정이 입맛을 쓰게 다시는 것을 보고,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물러들 가라."


마침내 편전 안에 숙종 홀로 남았다. 두광이 함께이니 엄연히 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광은 그림자 같은 존재이니, 왕은 홀로 남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림자가 말을 걸어선 안된다고, 두광은 잠자코 왕의 뒤에 서서 파초선을 고쳐쥐었다. 부채소리를 내는 것도, 숨소리를 흘리는 것도 조심스러운 순간이었다. 송시열을 양이하라는 비망기를 내리고도 왕이 미쳐 날뛰었는데, 지금은 사면하라는 어명을 내렸으니 더할 터였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부한테 가서 한시진 후에 동온돌로 들라 이르라."

"네?"


뜻밖의 명에 두광은 불안한 눈빛으로 왕을 돌아보았다. 자신마저 자리를 뜨면 왕은 혼자 남는 셈이었다. 홀로 남겨두기 불안해서 두광은 머무적거렸다.


"어서."

"예..."


두광은 편전 안엔 왕의 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편전 안에도 환도를 차고 호위를 서는 금군들이 몇 있었다. 그래도 설마 하니 왕이 동온돌에서처럼 편전 안에서까지 집기들을 부수진 않을 터였다. 칼자국 하나라도 나면 신료들이 쑥덕거리며 왕을 폄훼할 테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두광은 뒷걸음질로 편전문을 나서면서 옥안을 보고 또 보고 하였다. 왕은 여전히 잔잔한 호수처럼 파문 하나 그리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미동도 없었다.


그저 어스름이 내려앉다 얼어붙을 것만 같이 차가운 어깨로, 숙종은 그저 어탑 아래를 묵묵히 응시하기만 했다. 꼬박 한시진 후에 석정이 돌아와서 말벗이나 해주길 바라면서.



"피기문을요?"

"보름이면 되겠소?"


석정이 수라상 앞에 엎드려 되묻는 음성에, 숙종은 젓가락으로 콩자반 접시를 해작거리며 대꾸했다. 수라상 위엔 반찬들의 가짓수가 부쩍 줄어서, 검은콩자반, 승검초고기적, 흑임자구름떡, 오골계탕이 고작이었다. 가뭄 탓이었다. 오랜 가뭄이 아니어도, 갓 가뭄이 들어도, 왕의 밥상은 가짓수가 줄게 마련이었다. 쓸 데 없는 반찬들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평소 즐겨 먹는 음식들만 남았다. 하나같이 시꺼맸다. 검은 음식들이 해독에 효험이 있다 하니, 평소 독에 대비하느라고 죄다 검은 음식만 먹게 되었다. 그래선지 조금은 입에 물렸다.


"그자는 어이하여..."

"오랫동안 왜인과 유황을 거래한 자들이오. 15년 전에는 조정에서 아예 거래를 용인받고 유황과 조총을 사들이기까지 하였다지."

"아..."


그제야 석정도 어렴풋이 피기문에 관한 기록이 떠올랐다. 15년전이면 자신은 고작 약관의 나이였다. 스승이 지나가는 말로 얼핏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 조정에서 그 둘에게 특별히 유황 거래를 허락한다더군. 물론 잠시만.

- 잠시요?

- 저들을 시켜 왜에서 조총을 밀수하려는 것이니, 잠깐 허락해주는 것이지.


석정은 문득 왕의 경이로운 기억력이 부러워졌다. 자신도 딴에는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데도, 왕처럼 모든 것을 마치 한눈에 각인하는 것 같은 경지까지는 아니었다. 한번 보면 절대로 잊지 않는 기억력이라면, 책을 굳이 필사하거나, 구매할 필요도 없었다. 한두번씩 열람하고, 암기하면 그만이었다. 참으로 편리한 기억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번 보고 외운다거나, 절대로 잊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편리해 보이는 것은 석정 입장에서일 뿐, 왕의 입장에서도 편리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왕은 왕대로, 때로는 망각이 소망일 때도 있었다. 잊지 않는다는 것과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차라리 잊고 싶은 기억도, 기분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지독한 저주였다.


"헌데, 그자에 대해 알아보라 하심은..."

"왜 자꾸 되묻소?"

"그야..."


석정은 왕이 자신을 동온돌로 불러내어 대뜸 피기문에 대한 조사를 맡기자, 더욱 당혹스러웠다. 왜 병판대감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피기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다, 피기문에 대해 알아볼 만큼 인맥이 두터운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얼핏 석하나 지남의 존재가 떠올랐다. 잠상이라 하였으면 재산루를 관리하는 석하나, 역관인 지남이 더 손쉽게 알아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오나 천신이 무슨 재주로...설마 천신을 용초도로 보내시려는 건..."

"넘겨짚지 마시오. 아무렴 내가 사부를 도성 밖으로 보낼 것 같소?"

"..."

"날 못 믿는군. 그러다 정말로 용초도로 보내는 수 있소."

"..."

"있는 인맥, 없는 인맥 총동원하여 알아보시오."

"분부 받들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보시오."


석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걸음질로 장지문에 다가들다, 왕의 서안 위 뻣뻣한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발꿈치에 문턱이 닿았지만, 반발짝만 더 옮기면 건널 수 있는 것을...그는 더는 뒷걸음질을 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여쭈었다.


"저...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이오?"

"송시열의 소결...말입니다."

"빨리도 묻는군."


서슴서슴 묻는 석정의 말에, 왕은 기다리다 지치기나나 한 것처럼 심드렁히 대꾸했다. 석정은 피식 웃었다. 왕은 확실히 흥분상태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화가 끓어오르지 않을 때는 나중에라도 확 끓어오르는 저 성미로, 여태 자분자분한 것이 신기했다. 장지문 앞에서 내려다보는 서안 표면은 새 흠집이 없었다. 생각보다 왕은 덤덤하니 이성을 잃지 않았다. 안심하긴 아직 이르지만, 정말 대견했다.


"양이하라는 비망기를 내리시고, 서안까지 부술 뻔 하신 그분이 맞는 지, 좀 고민이 되어서 말입니다."


놀림섞인 석정의 응수에 숙종은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왜 흥분을 하겠소?"

"하오나..."

"송시열이 의소가 있었다지 않소."

"예?"

"상소를 올리려다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아서 말았다니. 노인네가 겁을 지어먹었던 게 분명해. 그러니 기분이 조금 풀리지 뭐요."

"..."

"안 그렇소? 송시열이 소심하게 의소라니? 해볼 만하다는 얘기지."


숙종의 두눈은 어스름을 밝히는 납촉 불빛을 보며 반짝였다. 정말이지 위로가 되었다. 상소를 써놓고도 차마 올리지 못하고 접어둔 의소라니. 의소라는 두글자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마치 고기를 씹는 듯한 육즙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고작 열네살이던 자신에게 칠순을 바라보던 송시열이 위축되었다니.


"허면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석정은 씨익 웃으며 뒤로 한발 더 물러났다. 어느새 장지문이 열렸는지, 순식간에 버선바닥에 대청마루의 감촉이 닿았다. 석정이 마저 뒤로 한발짝 빼자, 금세 장지문이 닫혔다. 더위를 유독 타는 왕을 생각해서라도 장지문은 열어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동온돌을 나서니, 처마 아래로 짙푸른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요놈이 그저 별빛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먼지인지 빗금인지도 폴폴 흩뿌렸다.


"비가 오려나..."


석정은 한낮의 햇살처럼 환해진 얼굴로, 어두운 처마 밑으로 손을 뻗었다. 찹찹하게 손끝에 가루비가 닿는 듯한 느낌이 너무도 좋았다. 헌데, 안개인가 싶었더니 는개였다. 는개인가 싶었더니, 가루비였다. 가루비인가 싶었더니 가랑비였다. 섬돌에 내려서서 목화를 신는데, 목화 앞코에 비꽃이 피었다. 석정은 고개를 들어 빗금투성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대청에서 섬돌까지, 그 두어걸음 사이, 빗방울이 굵어지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석정은 허겁지겁 목화를 신고 걸음을 보챘다. 봇짐 속에 갈모를 넣어두었던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서 홍문관에 돌아가야 했다. 석정은 가만히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살레살레 젓고서 월대로 내려섰다. 순식간에 월대가 젖은데다, 자신의 신코도 비꽃이 여러송이 피었다. 이러다 버선코까지 젖을 것만 같았다. 석정은 급한 마음으로 홍문관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홍문관 앞에 이르렀더니, 관모 위에 갈모를 쓰고 퇴궐을 위해 쪽문을 나서는 옥당관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대로가 풀려나니, 하늘도 기뻐하나 봅니다."

"그러게요. 하늘이 반겨주는군요."

"이 가뭄에 단비라니. 역시 하늘이 내리신 큰사람인 게야."


누구는 이 비가 하늘의 하례라며 기뻐하지만, 또 누구는 하늘의 장난이라 슬퍼할 터였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송시열을 제손으로 풀어주고 심장을 쥐어뜯고 싶을텐데, 오히려 하늘은 송시열을 편드는 지 가뭄에 단비로 축복해주니, 왕은 가슴이 미어터질 지도 몰랐다. 물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백성들에겐 송시열이 풀려나든 갇히든 아무 생각이 없을 터였다. 백성들에겐 가뭄이 해갈된 사실만 중요했다. 백성들이라도 기뻐하니 다행일 거라고,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석정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수한 빗살만 허공을 수놓을 뿐이었다.


밤새 내린 비는 이튿날 아침까지도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정전 만큼은 아니어도, 물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여 웬만해선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절묘하게 설계된 편전 뜨락이었다. 하지만 손가락 한두마디 만큼 물이 고여선 빗줄기가 내리꽂힐 때마다 손바닥만한 파문을 그리며 퐁퐁 튀었다. 그래도 좋다고, 편전 앞에 늘어선 신료들은 행각 아래로 저마다 손을 뻗어, 손에 와닿는 빗방울의 감촉을 즐겼다. 이게 얼마 만의 비인지. 이렇게 손바닥이 촉촉해지는 느낌이 너무도 좋았다. 정말로 송시열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다. 밤새 하늘이 무너지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내리는 비라 해도, 그들에겐 애도哀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니미..."


축복이라기엔, 마치 곡을 하듯 퍼부어대는 것을. 김석주는 손을 높이 들기도 귀찮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냥 단비가 아니라 장대비였다. 그것도 심한 바람으로 휘몰아치는 바람비, 아니 비보라였다.


왜 행각 지붕 아래에 있는 자신의 목화가 젖고, 홍단령이 젖는 건지. 뭔가 불공평했다. 석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똑같이 행각 신도에 서 있는데, 자신은 배쪽이 흠뻑 젖은 반면 다른 관료들은 모두 멀쩡했다. 자신과는 달리 몸집이 호리호리하다 보니, 저들은 작달비든, 장대비든 털끝 하나 젖지 않았다. 석주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만 좀 내려라, 청승맞게 청상과부 눈물보다 많이 오면 쓰나."


마치 투덜거리는 듯이 살가운 혼잣말에, 사방에서 따가운 눈총이 석주에게로 쏟아졌다.


"아니 청승맞다니? 하늘이 기뻐하여 복을 내려주는 복비인 것을."

"말을 해도 꼭..."


하지만 석주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신 혼자만 원훈이 된 것이 아니라, 중궁의 아비인 광성부원군 김만기까지 함께 나란히 원훈에 올려놓았다. 훗날 왕이 판부를 뒤집어, 모함이라 밝히려고 해도 밝힐 수가 없을 터였다. 중궁까지 다칠 것이 뻔하니. 뛰어봤자 김석주 손바닥이었다. 송시열도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이쿠야, 억장이 무너지게 억수로 퍼붓는구만. 복비는 무슨."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랬다. 사돈이 집을 사도 마찬가지였다. 송시열이 풀려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김석주는 같이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왕과 송시열 사이에서 싸움을 붙이고서,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어느 한쪽도 줄을 놓지 않게끔, 팽팽하게 줄을 당기게 하고서, 안전한 평지를 걷듯이 그렇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지만, 자신은 이미 새우가 아니었다. 이리 두툼하니, 등딱지가 터질 리도 없었다.


어느덧 왕의 행차를 알리는 북소리가 한번, 두번, 세번 울려퍼지더니, 가운데의 어문이 열리고 왕의 녹피화가 행각 아래 어도에 한발을 디뎠다. 신료들이 황망히 신도에 꿇어엎드렸다. 조금전까지 복비라 칭송했던 빗발이 하필이면 좌우의 신도까지 마구잡이로 침범한 탓에, 금세 무릎이며 정강이며, 팔꿈치며 궁둥이까지 순식간에 젖어버렸다. 이럴 때는 부복하는 예를 좀 생략해주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왕은 그것도 너희들의 복이라는 듯이 오히려 천천히 걸음을 늦추어 어도를 거닐었다. 행각 한복판의 어도이니 목화가 젖을 이유가 없는데도, 비바람이 어찌나 고약한 지, 녹피화의 앞코에도 비꽃이 피었다.


"두광아."

"예, 전하."


왕의 등뒤에서 산선을 들고 뒤따르던 두광이 얼른 품속의 손수건을 꺼내어 왕의 녹피화 앞코에 맺힌 비꽃을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흡수했다. 신도에 엎드린 신료들로선 그 순간에도 궁둥이가 사정없이 척척하게 젖어드니 죽을 맛이었다. 고개를 슬쩍 쳐들고, 왕이 어서 편전으로 들어가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왕의 행렬 뒷줄에서 뒤따르는 붉은 단령자락이 눈에 띄었다. 오늘 같은 날에, 최석정은 용케도 행각 아래 신도가 아니라, 왕의 행렬 뒷줄에서 팔자좋게 뒤따르는 참이었다.


물론 이 새파랗게 어리고 시퍼렇게 날선 왕은 고약하게도 간밤의 희우喜雨(가뭄 끝에 오는 비)보다, 지금의 폭우暴雨를 더 즐길 뿐이었다. 진심으로, 숙종은 이 장대비가 마음에 들었다. 하늘이 통곡을 하듯 빗발이 행각 지붕을 마구 두들기는 소리가 마냥 듣기 좋았다.


"비가 이렇게 심하게 내리니, 내일 기우제는 중지시켜야 하나..."


큰비가 도리어 기우제를 중지시킬 구실이 되었다. 기우제는 역대 왕들도 해마다 여름이면 피해가지 못한 제례였다. 조금만 가물어도 기우제를 열어야 하고, 심할 때는 왕이 몸소 제를 올려야만 했다. 심지어는 실덕失德 논란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큰비 덕분에 기우제를 열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밤 궐문이 닫히기 전에, 승정원에 또 한통의 상소가 봉입되었다. 어느 승지가 붉은 보자기로 감싼 소함들과 함께 승정원 서탁 위에 내려놓을 때만 해도, 그저 승정원까지 장악한 서인들의 검열을 거친 여느 소함들과 똑같아 보였다. 그날밤 김석주와 이사명이 서호에서 그물을 던져놓고 뱃놀이를 하다가, 그물을 걷는 순간 찢어진 그물코 틈새로 유유히 빠져나간 물뱀처럼, 상소는 남인쪽 승지의 손을 거쳐 어탑에 올랐다. 그리고 그 상소를 펼쳐든 순간, 숙종은 헛웃음부터 나왔다. 그것도 한참이나.


"무슨...상소이기에...?"


신료들이 도승지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하필이면 도승지는 이미 엊그제 함경도 관찰사로 제수된 뒤였다. 인수인계고 뭐고, 왕의 등쌀에 떠밀려 집에서 짐을 꾸리는 참이었다. 승지들끼리 서로 눈길을 주고 받으면서 곡절을 탐지해보려 하였지만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중 유일하게 시선이 섞이지 않은 승지가 그저 시큰둥한 눈빛으로 앞만 똑바로 쳐다보며 아무와도 눈길을 주고 받지 않았다.


"무슨 상소냐니까...간밤에 자네가 당직을 섰지 않는가."

"..."


승지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다른 승지들마저 답답해 미치려는데, 마침 왕이 웃음을 뚝 그치고, 상소를 펼쳐보였다.


"정원로가 역모고변의 과정을 밝힌 상소다. 자신이 강압에 못이겨 고변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김익훈, 신범화, 홍만종, 이 세사람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허견을 감시하던 도중, 역모를 직접 목격한 바는 없고, 단지 심증만으로 허견의 처남 강만철을 협박하여 발고하였는데 이남과 허견이 자복했다는 내용. 어찌들 생각하는가?"


김석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씨를 안은 보사공신 영예였다. 언제고 꼬리를 자를 심산이라,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은 터럭 한올도 엮이지 않게 했는데, 이 물귀신 같은 놈이 김익훈, 신범화, 홍만종이란 이름을 버젓이 상소로 들먹였다. 세사람 모두, 김석주 자신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특히 자신이 업어 키웠다고 자부해온 이종아우 신범화 만큼은 정원로의 시꺼먼 독니에 물리도록 놔둘 수 없었다. 김석주는 사관석에 배석한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이미 창백해진 얼굴로 붓을 고쳐쥐는 최석정을 향해, 김석주는 입속으로 소리없이 속삭였다.


네놈 열손가락 하나도 물렸구나.


작가의말

1. 실록을 읽다 보면 숙종과 서인들, 숙종과 송시열 간의 치열한 신경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인들은 송시열이 숙종의 신하 이전에 효종의 신하였음을 강조하고, 선대왕들을 모신 신하이니 예우하라면서 숙종을 압박하고, 또한 ‘빈사’이니 하는 말로 압박했습니다. 멀쩡히 숙종이 살아있고, 송시열이 숙종의 신하인데도, 더 높은 반열에 올려두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요. 효종과 현종이 일찍 죽은 덕분에,  ‘선대왕의 신하’라는 명분으로 신하들이 숙종에게 배짱을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네요.


민정중과 숙종의 대화는 실록에 적힌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숙종은 실제로도 송시열을 양이할 때도, ‘개과천선’이란 말을 못박아두더니, 송시열을 사면할 때도 ‘개과천선’이란 말을 못박아두었습니다. 지독히도 미웠나 봅니다. 나중에 송시열이 숙종을 압박하는 내용이 실록에 덤덤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읽어보고 기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인쪽 기록인데도, 이 정도니...어마어마할 듯.


2. 숙종이 복창군과 허적을 사사한다는 교지, 즉 사사전지를 내리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머리로는 원래대로라면 승정원의 승지에게 내리는 게 맞겠지 싶은데도, 제 손가락이 끝내 최석정을 고집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실록에는 당시 숙종이 사사전지를 금부낭청에게 받아적게 한 일을 승정원에서 지적하며, 승정원을 통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사사전지를 승지가 아닌 금부낭청, 즉 문사낭청이 받아적고, 집행한 일이 실제로도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3. 정원로가 뜬금 없이 상소로, 김익훈, 신범화, 홍만종을 끌어들인 일은 실록을 참고했습니다. 셋다 병조판서 김석주와 절친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홍만종은 실제로도 최석정과 몹시 절친했던 인물입니다. 실제 인물관계까지 참고해서 쓰느라 머리에서 쥐가 납니다. 덕분에 일상생활이 엉망진창...어릴 땐 머리 좋기로 여기저기 소문이 파다했던 접니다만, 지금은 오락가락한다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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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6.28 21:32
    No. 1

    피기문이라...
    이 인물이 한 과거의 일이 지렛대가 되어 무슨 일이 일어날 듯 싶은 예감이^^

    매번 역사공부를 심도있게 하고 갑니다
    즐겁게 보고 갑니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6.29 22:58
    No. 2

    건강하셔야지 총기가 유지됩니다.
    정원로가 홍만종까지 끌어들였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6.30 11:50
    No. 3

    송시열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했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만 읽다 보면 실록인지 소설인지 항상 헛갈리게 됩니다. ㅎ
    건강 잘 챙기시구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왕발패밀리
    작성일
    14.07.02 18:39
    No. 4

    잘 보고갑니다. 정말 잘 짜여져 신록인것처럼 느껴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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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해의 그림자 190 +5 14.06.09 3,270 38 41쪽
190 해의 그림자 189 +4 14.06.01 2,195 47 41쪽
189 해의 그림자 188 +12 14.05.26 3,055 43 40쪽
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7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0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181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8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6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4 31 42쪽
178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4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1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2 38 36쪽
175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7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8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8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5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3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1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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