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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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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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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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8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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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86

DUMMY

석정은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우포청을 나섰다. 밥? 거문고? 학춤? 신여철이 고고하게 내뱉았던 온갖 은어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헌데 발치를 따라잡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대뜸 신여철이 등뒤로 다가들어 물어왔다.


"혹시 야금을 어긴 적 있는가?"

"네? 야금이요? 그건 왜..."


석정은 문을 나서다 말고 의아히 신여철을 돌아보았다. 언제 들어도 켕길 법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야금을 어긴 적이 어디 한두번인가.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턴 쉬운 법이었다. 하도 일에 치여 퇴청이 늦은 법이라고 속으로 일 탓을 하면서 석정은 대답을 뭉갰다.


"뭐 일하다 보면..."

"야금을 어긴 자를 찾는답시고 허적이 우포청을 뒤집어놓은 적이 있어서 말일세. 자네가 문외출송 풀리기 직전이었는데 말이야."

"그럼 저는 아닐 겁니다. 어명을 어기고 도성에 들어온 적이 없어서요."


석정은 딱 잘라서 부인하곤 몰래 입가를 실룩거렸다. 어명을 받들어 도성에 온 거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속으로 변명하면서.


"어명을 어기고? 어명을 어기고?"

"..."

"내가 덕분에 고생을 했는데...이 빚을 누구한테 받는다?"

"전 아니래도요."


신여철이 등뒤에서 곱씹는 말이 들렸지만 석정은 냉큼 문간을 나섰다. 혹여 신여철에게 덜미가 잡힐세라 걸음을 보채어 혜정교에 올랐다.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석정은 한숨 돌리고서 혜정교 일대를 둘러보았다. 북악산이며, 옛궁이며 육조거리까지 먼빛으로 한눈에 들어왔다. 혜정교는 난간을 두르지 않고 큼직한 돌을 짜맞춘 널다리였다. 발치로는 햇살이 스며드는 상판석 틈새가 반짝거리고, 옆구리로는 우물가 한켠에서 머슴들이 상반신을 드러내고 등목을 하며 북적거리고, 또 한켠에서 계집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빨래를 하며 속닥거리는 광경이 보기 좋았다.


헌데 어디선가 진한 쑥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오이가 익어가는 싱그러운 내음도 났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감도는 것을 느끼고 꿀꺽 삼켰다.


벌써 중하中夏구나...


목이 탔다. 새삼스레 심한 갈증을 느끼고서 석정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우포청에서 찬물이라도 한잔 얻어마실 것을. 마실 만한 물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왁자지껄한 사내들이며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이 때 좀 봐!"

"엄머머머!"

"야 이씨! 때는 왜 밀어...가스나들 보는데..."

"내가 미는 게 아니라 그냥 밀리는 거여. 아주 그냥 밀리네?"


우물을 사이에 두고서 왼쪽엔 서너명의 사내들이 훌러덩 웃통을 벗어버리고 등목을, 오른쪽엔 대여섯의 아낙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삼삼오오 모여 등목이며 빨래를 하는 참이었다. 석정은 오른손을 등뒤로 둘러서, 축축하고 진득하게 등짝에 땀으로 달라붙은 윗도리 등판을 잡아떼었다. 자신도 시원하게 등목을 하고 싶었지만, 관복을 아무데나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그저 목의 갈증이나마 달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석정은 성큼성큼 우물가로 다가들었다. 우물가의 사내들이며 계집들이 이 낯선 이방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석정은 겸연쩍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목 좀 축입시다."


시퍼런 청단령에 머슴들이며 아낙들이 두눈을 끔뻑였다. 청단령을 입은 관료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두눈을 뎅그렇게 뜨고 석정의 푸르른 관복이며, 희멀건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물 좀...


석정이 한번 더 입술을 달싹이며 물을 달라는 눈치를 주는 순간 '촤아'하는 소리가 나더니 석정의 청단령을 적셔버렸다. 놀란 아낙들이 소리를 질렀다.


"에그머니!"

"저 땟국물을..."


석정은 척척하게 달라붙는 단령자락 감촉에 눈썹을 꿈틀하며 왼쪽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단령자락이 왼쪽 허벅지에 바짝 들러붙은 것은 둘째치고, 가느다랗고 시꺼먼 실 같은 것까지 붙어 있었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집어들고 보니 실 오라기 같은 때 오라기였다. 보기만 해도 더러웠다. 재수 옴 붙었다는 말이 이럴 때나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누구냐!"


석정은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홱 돌아보다, 눈앞에 비친 머슴들의 초라한 얼굴을 마주했다. 망건은 커녕 상투조차 없는 더벅머리 머슴들이 저마다 웃통을 벗어젖힌 채로 등목을 하던 참이었다. 그들은 석정의 성난 눈초리와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자라목이 되었다. 그중 두손에 바가지를 든 가운데의 머슴이 움찔움찔하며 얼른 허리 뒤로 감추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석정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석정의 눈썰미가 워낙 예리하기도 했지만, 커다란 박을 반으로 갈라 만든 바가지들 역시 그의 펑덩한 엉덩이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컸으니.


"난 목을 축이겠다고 했지, 등목을 하겠다고 하진 않았는데?"


가운데 머슴이 자라목이 되어 그 자리에서 바가지를 내던지고 꿇어엎드렸다. 그러자 양옆에 있던 머슴들도 덩달아서 납작하게 꿇어엎드렸다. 상투를 틀지 않은 탓에 축 늘어진 머리카락들이 우물가 젖은 바닥에 닿아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어뜨케..."

"소, 송구합니다."

"살려주세요...제발 용서를..."

"이를 어쩐대요...관복을 그리 만들었으니..."

"모르고 그랬구먼요. 한번만 봐주세요."


석정은 미간을 찡그리고 머슴들의 면면을 살폈다. 사내들 중에 상투를 튼 자는 한명도 없었다. 우중충한 반물을 들인 삼베 잠방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차림새까지...한눈에도 요 옆 우포청에서 관노로 있는 자들 같았다. 계집들 역시 똑같이 우중충한 반물을 들인 삼베치마를 복사뼈가 훤히 드러나게 묶다시피하여 입은 꼬락서니까지...마찬가지로 우포청 다모 신세인가 싶었다. 하필이면 비단값을 받아내거나 더 따지기도 미안할 만큼 고단한 인생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벌벌 떨며 사죄를 하는 참이었다.


석정은 자신의 눈빛이 그렇게 살벌했나 흠칫하여 두눈을 깜빡였다. 웃음기만 사라지면 이내 날카로워지는 눈초리 때문에 고민이었다. 그는 한숨을 삼키면서 맨손으로 청단령에 붙은 때 오라기들을 탁탁 털어내곤, 그자리에서 쪼로록 물기를 짜내었다.


"뭐, 날도 더우니 가다가 마르겠지."

"네? 정말요?"


석정의 넉살에 계집들과 사내들이 놀라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관복을 망쳐놓았는데, 노발대발하여 자신들을 족치기는 커녕 오히려 너그럽게 넉살이나 부리다니 그저 뜻밖이었다.


"물이나 주시게. 끼얹지 말고들."


석정이 뜻밖에도 자신들을 혼낼 기미가 없자 관노들과 관비들이 두눈을 휘둥그레 뜨고 저마다 눈과 귀를 의심했다.


"네? 정말요? 쇤네들을 혼내지 않으시구요?"

"귀한 관복인데..."

"되었으니 물 좀!"

"예! 예!"


그제야 마흔이 넘은 관비 하나가 냉큼 두레박으로 물을 긷더니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대뜸 석정에게 건네었다. 버들잎을 대여섯 따서 동동 띄우는 낭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맑은 물빛이 영롱한 무지개빛을 띠고 표주박에서 찰랑였다.


"고마우이."


석정은 냉큼 받아들어 표주박을 입가로 가져갔다. 이가 시릴 정도의 시원한 우물물이었다. 한모금 머금고 나니 저절로 두모금 세모금 자꾸만 꿀꺽꿀꺽 넘어갔다. 온몸의 물기란 것은 모조리 말라붙어버린 고목나무라도 된 것 같았다. 석정은 그렇게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어흐 시원하다!"


석정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웃었다. 뼛속까지 시원했다. 겨우 목을 축이고 나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아낙에게 바가지를 내밀었다.


"잘 마셨네."

"한 바가지 더 마셔도 되는데."

"그러다 배터지겠소."

"근데 정말, 그꼴로...괜찮으시겠어라? 빨아드릴까요?"


관비가 안쓰럽게 석정의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건넨 말에, 석정은 피식 웃었다.


"괜찮으이. 이 관복을 입을 날도 며칠 안 남았으이."

"예? 왜요?"

"그렇게 되었네."

"저런...쫓겨나시남유?"

"뭐?"

"요즘 조정에서 남인들이 죄 끌려나간다는데...굴비 엮듯 엮이고 엮여서 벌써 열두두름도 넘게 쫓겨나고 한담서요?"

"열두두름..."


석정은 관비의 얘기를 가만히 되뇌였다. 굴비 한 두름에 스무마리씩이니, 열두 두름이면 이백 사십 마리였다. 2백명도 넘게 조정에서 쫓겨난다는 소문이 났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구누구가 허견과 서신을 교류한 적이 있다는 지방 수령에서 쫓겨나고, 또 허견의 집을 찾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둔군 별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심지어는 허견과 친한 누구와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또 쫓겨나고...그렇게 중앙과 지방에서 허견 및 복선군과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자들은 이를 잡고 서캐를 잡듯 샅샅이, 또 낱낱이 서인들이 솎아내는 참이었다. 정말로 2백명은 훌쩍 넘길 지도 몰랐다.


석정은 청단령이 필요 없게 된 이유가 파직이 아니라 승직昇職이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도 잊은 채로 씁쓰레 걸음을 옮겼다.


"어휴...어째...사람 좋아 뵈는데?"

"어이구. 사람 좋다고 조정에서 버티는 줄 아나? 이게, 이게 좋아야지."

"머리도 좋아 뵈는데? 청단령은 뭐 아무나 입나?"

"공부머리 말고...벼슬! 벼슬머리 말여!"

"벼슬머리도 따로 있어?"

"어휴..."

"어쨌든 안됐구먼...저게 마지막이라니..."


동정과 연민이 어린 시선들이 등짝에 다닥다닥 달라붙는 느낌에, 석정은 열보 남짓 걸어서야 아차 싶었다. 등뒤에서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석정의 등골을 간지럽혔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주춤해졌다. 당장 돌아가서 자신은 이제 홍단령을 입게 되어 청단령이 필요 없어졌다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 탓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서 말하는 것도 꼴만 우스워질 일이었다.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면서 다시금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젖은 단령자락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지만, 마침 햇살이 뜨겁게, 또 살갑게 석정의 단령자락을 내리쬐었다. 축축하던 느낌이 눅눅하게 변하면서, 걸음을 내딛을 만하였다.


석정이 궐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젖은 옷자락이 물기 한점 없이 말라 있었다. 날이 유독 더운 덕분이었다. 석정은 고개를 숙이고서 혹시라도 때 오라기가 남아있을까봐 손으로 다시 한번 옷자락을 탁탁 털어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딛어 궐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전하께오선 지금 안 계시옵니다."


대전상궁의 대답을 듣고도, 석정은 통명전 섬돌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중궁의 사슴가죽 당혜는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허면 어디에 계시는가?"

"희정당에 가보심이..."

"지금 희정당에서 오는 길일세."


석정은 대전상궁과 가볍게 실랑이를 벌인 끝에 두손을 양 허리에 얹고 상대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전상궁씩이나 되어서는 왕의 소재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한심스런 노릇이었다. 하지만 대전상궁을 붙들고 마냥 시간을 축낼 수도 없어서, 석정은 두광의 소재를 물었다.


"허면 두광은?"

"수라간에 갔사옵니다."


대전상궁이 이제야 답변을 제대로 하였다. 하나라도 대답을 하였으니, 그나마 면목이 서는지, 한결 얼굴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이 이내 굳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것저것을 캐어물었다. 그녀는 이내 계속해서 꼬치꼬치 따져 묻는 석정의 존재가 거북해졌는지 자꾸만 석정에게서 눈길을 돌려 이리저리 바삐 둘러보았다.


"수라간? 지금은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사이)인데? 혹여 전하께서 또 수라를 거르셨는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사오니 이만 나가주시지요."


석정은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팔뚝에도 좁쌀 만한 소름이 돋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왕이 낮것을 들거나 오수를 즐기거나 할 시간인데, 희정당에도, 통명전에도 아니 계시고, 두광은 수라간에 있다니. 자신의 경험상 이럴 때는 잠행이었다. 하지만 석정 자신을 대동하지 않는 잠행은 드물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중궁전하를 두고 후원으로 홀로 산책이라도 나갔을 리도 없었다. 분명히 중궁의 사슴가죽 당혜는 섬돌에 있었다.


내쫓기다시피 하여 통명전 동협문을 나서는 석정의 시야로, 두광이 직접 달항아리에 물단지를 안아들고, 그 뒤를 우희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어 매미관이 온통 젖은 채로 두광이 걸어오는 참이었다.


"어? 김상촉尙燭(등촉을 관리하는 종6품 내관직)?"


석정이 반갑게 웃으면서 다가들자 두광은 흠칫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눈만 뜨면 벼슬이 올라 있는 최석정과 달리 두광 자신은 벼슬이 굼벵이 걸음이라선지, 석정은 자신의 관직이 오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두광은 입을 비죽이며 대꾸했다.


"이젠 상촉이 아니고 상세尙洗(대전 수라 및 그릇 등을 관장하는 정5품 내관직)이옵니다."

"상세? 아? 상세...김상세..."

"..."


석정이 잊지 않으려고 한번더 뇌까리는 것을 보고 두광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자신이야말로 석정의 벼슬을 외우기가 더 힘들었다. 두어달에 보직이동을 하는 게 관례라곤 해도 석정은 품계와 관직이 금세 오르니 더 헷갈렸다. 짐승도 털갈이를 저렇게 자주 하진 않을 것을.


"헌데 전하께선 어디 가시고..."

"아...장충방 재산..."

"어우 뜨거...!"


두광이 물단지를 안은 채로 석정에게 바짝 상체를 붙여서 속닥거리는데, 석정이 어깨에 닿는 뜨끈뜨끈한 달항아리의 뜨거운 표면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뒤로 젖히며 허우적거렸다. 그 바람에 손끝이 두광의 팔을 스치자 두광이 화들짝 놀라며 기우뚱하더니 한두걸음 헛디딘 끝에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러자 뚜껑이 떨어져 땅바닥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깨져버렸다. 물단지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석정의 허벅지며 통명전 앞 땅바닥을 적셨다.


"어우 이게 뭔가!"

"백비탕...어우 아까워. 이 귀한 걸...아니 뜨겁긴 뭐가 뜨겁다고 그러시옵니까...오다가 식었는데..."

"어후...그러게 소녀가 들고 온다 했잖아요."

"네가 들었으면 더 깨졌지. 다 깨졌어."

"무슨..."

"어후...이게 다 저 나으리 때문이야..."


땅바닥에 다섯뼘도 넘게 쏟아진 물을 내려다보면서 두광과 우희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필 이 귀한 걸 쏟게 만든 원흉인 석정을 슬쩍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석정 역시 억울했다. 저 물단지는 땅바닥에만 쏟아진 게 아니었다. 자신의 청단령 허벅지도 적셨다. 하필이면 불과 반시진 전에 서린방 혜정교 우물가에서 젖었다가 오면서 마른 그 자리에 또 다시.


"아니...물이 귀하면 얼마나 귀하다고 그리 호들갑인가? 내 옷은 안 보이나? 내 옷도 젖었..."

"백비탕이라니까요. 백비탕! 뼈빠지게 골백번 끓여서 골백번 식힌 백비탕이요!"

"아..."


석정은 얼핏 중궁의 두번째 회임 때 백비탕이 동이 나서 우희와 본방나인들이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차디찬 우물물을 잘못 대령하여 중궁이 소산한 일을 떠올렸다. 백번 끓여서 백번 식히자면 시간과 노고가 많이 들테니 이만큼 쏟은 것도 피를 쏟은 것인 양 아까울 터였다. 하지만 석정은 이내 얄궂게 두광을 놀렸다.


"백비탕이 맞는가?"

"네?"

"아직 식히지도 않았잖은가."

"그야 오다가 식으니깐 들고 온 거구요."

"그렇게 많이 가져오면서 뭘 오다가 식는다는 건가? 그리고, 전하도 안 계시다면서 무슨 물을 그리 많이..."

"그야 식지 말라고 많이 떠온..."


두광이 대답하다 멈칫했다. 눈앞의 관료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석정이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손해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두광은 입을 다물고 석정의 눈치를 살폈다.


"나으리, 이러다 물이 식겠사옵니다. 중전마마께오서 목이 마르다고 하신 지가 언젠데..."

"어? 어어..."


두광이 계속 우물쭈물하는 것이 마뜩치가 않았는지 우희가 뒤에서 두광을 재촉했다. 두광이 움찔해서 우희를 돌아보며 눈을 흘기더니, 다시 석정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예 손으로 살랑살랑 손짓까지 해대었다.


"어서 재산루로 가보시옵소서. 전하를 너무 기다리게 하시면..."

"재산루?"


두광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석정에겐 뜻밖이었다. 재산루라니? 도성에서 가장 높은 누각이자, 가장 서책이 많은 장서각이라서 무릇 선비들에겐 선망의 이름이었지만, 석정에겐 차라리 경원의 이름이었다. 재산루 하면 바늘과 실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이름이 함께 딸려와서 속을 따끔따끔 찔러들었다. 김석주...그자를 왕이 은밀히 찾았다니.


"아...제가 말씀 안 드렸사옵니까?"

"정신이 있나, 없나? 자네가 대답하다 말고 그 백비탕을 내게 쏟았지 않은가."

"아...전하께오서 먼저 재산루에 가신다며, 그리로 오라 하셨사옵니다."

"재산루? 거긴 왜?"


석정의 얼굴이 또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김석주의 재산루에서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왕을 면대하게 생겼다. 가다가 마르려니 하면서도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다. 물론 자신이 청단령을 입은 지 며칠 안되어서 하필이면 석하가 배멀미를 하며 청단령 흉배에 구토를 해놓았던 일에 비하면 양호하지만.


"저 모르지요. 어서 가보시옵소서."

"알았으이. 자네도 어서 가보시게."


석정은 두광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하다가, 얼떨결에 한번 더 물단지에 손이 닿았다. 그러자 두광이 또 한번 움찔움찔 하더니 잰걸음으로 동협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우희가 총총히 뒤따랐다. 석정은 그들의 뒷모습이 동협문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물이 식으면 안된다고?


석정은 이맛살이 깊어질 만큼 두눈을 치뜨고 곰곰 생각했다. 찻물이라 식으면 안되는 건가? 혹은 중궁이 배앓이를 하시어 찬물은 곤란하다는 얘긴가? 아니, 단순히 중궁이 목이 마르다 하여 백비탕을 가져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순전히 목을 축이려는 용도치고는 물이 너무도 많았다. 분명히 아까 통명전 섬돌을 보았을 때 손님들은 없었다. 확실히 없었다.


석정은 오후의 햇살이 환히 감싸안은 통명전 뜨락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천천히 돌아섰다. 왕은 또 무슨 일로 재산루로 납시었단 말인지. 김석주가 있는 재산루로 찾아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왕이 있었다. 자신의 주군이.



"이번엔 또 나으리시우?"


정원로는 재산루 앞에 널브러진 채로 버둥거리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시꺼먼 멧돼지 같은 김석주가 경멸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참이었다. 하찮은 자벌레를 보는 듯한 그 눈길에 정원로는 자존심이 무참히 깎이고 또 꺾였다. 어제는 인달방으로, 오늘은 장충방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였다. 하지만 비관에 젖을 짬도 없이, 당장 여기서 살아나가야만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기 남산자락에 자신을 묻어버릴 수 있는 인물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금세라도 발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발로 밟아 뭉개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김석주는 정말로 한발을 들어 정원로의 머리를 밟아버렸다. 뾰족뾰족한 징이 잔뜩 박힌 갖신이 정원로의 머리를 즈려밟는 고통은 무시무시했다.


"끄흐으!"

"말해!"

"뭘...말하라는 것인지요?"


다짜고짜로 다그치는 김석주의 목소리에 정원로는 가슴속이 섬뜩했다. 어제 오늘, 왜 이리 거물들한테 짐승취급을 받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허적이야 그럴 법도 했다. 정원로 자신의 혓바닥에 놀아나서 생뗏장 같은 자식을 뜯겼으니, 자신을 그토록 험하게 다룰 만도 했다. 하지만 김석주는?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이리 함부로 대하는 건지? 자존심이 한없이 무너지고 나니, 반발심이 치솟았다. 허적이면 모를까, 김석주는 이럴 자격이 없었다.


"허적의 집에서, 무슨 얘길 했더냐?"

"대감과는...상관이 없는 얘기이온데..."

"상관이 있고 없고는 내가 듣고 판단할 일이니, 그냥 불어라. 안 그러면 여기 남산자락 어드메에 네놈을 묻어버릴 터이니."


이렇게 나오시겠다? 정원로는 갑자기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는 것을 느꼈다. 꼬박 다섯시진을 물 한모금 마시지도 못하고서 허적의 집 마당에 방치되어 있었던데다, 다시 꼬박 세시진을 밥 한술을 뜨지도 못하고서 김석주의 재산루 마당에 송장처럼 안치되어 있었으니 이젠 없던 속병도 생길 참이었다. 그런데 김석주가 자신을 겁박하니 순식간에 열불천불이 일어서 뱃속을 홀랑 태워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서 분노로 시뻘개진 두눈을 땅바닥에 맞대어 분노를 가린 채로 침착하게 대꾸했다.


"최석정의 집앞을 얼쩡거린 이유를 물어보시기에...복수하려 그런다고 하였더니...제 팔뚝에 적힌 이름들을 보시고 비웃으시면서, 이름이 하나 빠졌다고 하더이다..."

"빠진 이름?"


김석주는 상체를 숙여 정원로의 팔뚝을 걷어보려다가 갑자기 등허리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그를 호위하는 박정영이 재바르게 허리를 굽혀 정원로의 왼쪽 팔뚝을 걷어부쳤다. 당연히 오른손으로 썼을테니 왼쪽 팔뚝을 살피는 것이었다. 과연 정원로의 말대로 오도일, 홍만종, 남구만, 이민철, 백광현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석주는 정원로의 왼쪽 팔뚝에 적힌 다섯명의 이름을 잘근잘근 곱씹듯이 내려다보았다.


"오도일, 홍만종, 남구만, 이민철, 백광현...빠진 이름 하나라면..."


석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는지 그 얼굴까지 오돌토돌하게 변해버려서 정말로 무덤 앞 문인석이 된 몰골이었다. 실제로 석주의 영혼은 잠시 포천현을 맴돌았다. 한때는 물이 많다 하여 차음하여 마홀馬忽이라고도 하고 물을 끌어안는다는 의미로 포천이라고도 하고, 영평현과 합쳤다가 떼었다가 하는 통에, 영평이라고도 하였지만, 그중 석주가 기억하는 포천은 죽엽산竹葉山 아래에 큼직한 지석묘들이 숱하게 널리고 널린 곳이었다. 그 귀신들 틈새에서 한 사내아이가 홀로 별을 보며 자란 고을이었다. 그 기억을 오롯이 품고 석주는 정원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원로가 비릿한 웃음을 띠고 두눈을 번들거렸다.


"김석하...그 이름이 김석주와 최석정에게 똑같이 아픈 손가락이라 하더이다. 일전에 그 어린놈을 건드린 대가로 대감이 대내에서 허적의 목을 졸랐다지요?"

"..."

"맞나 보네. 허적이 그러더이다. 이 모든 게 김석주의 공작 탓이고 최석정이 들쑤신 탓이니, 그 둘다에게 복수를 하려거든 김석하 한놈을 물고 늘어지라고...그러면 그 둘이 더는 나를 못 건드릴 거라 알려주더이다."


물론, 허적은 그 김석하보다도 더 위력적인 이름을 가르쳐주었지만. 정원로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찍어누르는 김석주의 발밑에서 회심의 미소를 숨겼다.


"이놈들이..."


석주는 씹어먹을 듯이 정원로의 머리를 밟은 자신의 징신에 더욱 힘을 주어 눌렀다. 자신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마리의 비명이나 신음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흥분하여 앞뒤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만인지상까지 지낸 허적이 닭벼슬도 달지 않은 애송이 하나 죽이겠다고 모의할 리도 없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질 못했다. 그저 잠시 이성을 잃은 탓에 석주는 정원로의 머리가 으스러지도록 발목에 힘을 꾹 주었다.


"감히 누굴, 누굴 건드리려고..."

"그만! 발을 떼시지요!"


갑자기 끼여든 왕의 옥음에, 석주는 흠칫 놀라서 재산루를 돌아보았다. 남산자락에서 가장 높은 저 재산루 위층 난간에 선비차림의 왕이 있었다. 재산루에서 희뿌연 바람꽃을 감상하고 싶다면서 느닷없이 왕림을 하셨으니, 별 도리 없이 재산루 위층으로 안내를 해드린 탓에, 저 위쪽에서 왕은 온갖 잡소리를 다 들었을 터였다. 사방팔방에서 서로 다른 높낮이로 불어오는 바람들의 연주 틈새로 뒤섞인 정원로의 말도 들었을까.


아픈 손가락.


김석주가 어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정원로의 머리에서 발을 떼는 것을 숙종은 짙은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정원로가 허적의 집으로 끌려가 무슨 작당을 하였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고작 김석하를 걸고 넘어져서 김석주와 최석정에게 보복을 하기로 모의를 하였다니?


"정말로 허적이 언급한 이름이 김석하...맞느냐?"


정원로는 왕의 옥안을 뵌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재산루 난간에 있는 자가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조선의 병권을 두손에 거머쥔 김석주가 찍소리도 못하고 고분고분 복종하는 모습에 머릿속에 허옇게 바람꽃이 일 뿐이었다. 얼핏 최석정의 집을 출입했던 김석하란 녀석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 유독 짙은 눈동자...그 얼굴이 분명했다. 얼굴빛은 좀 희어진 듯 하지만 그 얼굴이 맞았다. 김석주가 끔찍하게 아낀다더니 정말로 그 한마디에 꼼짝도 못하는가 싶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정원로는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로 하회탈 같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네가 그 애송이로구나?"

"뭐?"


숙종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치며 정원로를 내려다 보았다. 김석주 역시 황망하여 눈에 띄게 당황했다. 감히 지엄하신 성상聖上께 이런 불경을 저지르다니. 어느 안전이라고 방관할까. 김석주는 두눈에 불을 켜고 정원로의 머리맡에 발을 탕탕 구르며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되었습니다."


숙종은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탓에 김석주에게 한결 공손한 어투로 제지했다. 그럴수록 김석주는 더욱 황송한 기분에 몸둘 바를 몰랐다. 왕이 평소 녹록하거나 공손한 성품이면, 자신이 왕에게 존대를 듣는다고 이렇게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왕은 뒤끝이 독한 성품이었다. 지금 정원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감히 왕에게 반말지거리에 욕지거리를 퍼부어 살생부에 그 이름이 올랐을 터였다.


넌 이제 죽었다.


김석주는 자신이 이제 정원로에게 손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원로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즉시 칼잡이를 보내어 그 입속을 쑤셔줄 생각도 버렸다. 왕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독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반말을 용납하지 않을 왕이, 지금은 두고 본다면, 나중엔 그 빚을 눈덩이처럼 불려놓고 받으려고 들 터였다. 그러니 구태여 자신이 정원로를 없앨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정원로가 석하를 물고 늘어지려 들더라도, 그 전에 먼저 죽을테니.


"헌데, 품계가 어떻게 되시우? 성균관 진사라도 되시우? 나이도 까마득히 어린 분이 왜 나한테 꼬박꼬박 반말이슈?"


점입가경이었다. 왕이 잠행을 나올 때면, 멋모르는 작자들이 저렇게 깝죽거리다가 황천행을 떠날 거라 생각하니 김석주는 콧수염이며 턱수염이 근질근질해졌다. 하늘도 자신의 식탐을 알아주었는지는 몰라도 음식을 집어넣는 입주변엔 유독 수염이 적었다. 그런데 수염이 더 빠지려고 그러는지, 더 나려고 그러는지, 오늘따라 갑자기 위아래 턱들이 간지러웠다. 평소 하던 대로 손가락 끝으로 긁으려다가 왕의 시선을 느끼고 아차 싶어 손가락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김석주가 손가락끝으로 콧수염을 뽑든 턱수염을 뽑든 안중에도 없었다. 정원로가 보복을 꾀할 대상은 김석주보다도 최석정이 확실했다. 김석주는 그저 정원로를 고변자로 써서 일이 잘 풀리면 녹공錄功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헌데 김석주가 정원로를 장기말 삼아서 벌려놓은 판에 최석정이 끼여들어 망쳤다. 이게 다 최석정 때문이니, 정원로가 벼르고 별러야 하는 상대도 최석정이어야 했다. 헌데 최석정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서 죄 없는 김석하를 노리겠다? 어쩐지 가소롭게 들리는 얘기였다.


"허적이 입에 담은 이름이 더는 없었는가?"


숙종은 정원로를 상대로 품계가 어떻고 벼슬이 어떻고 변명하며 한가하게 미적거릴 생각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없는데? 왜?"

"어휴 저 닭대가리!"


김석주는 빈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치며 답답해 했다. 아무리 왕과 김석하가 닮았기로서니, 정원로가 얼굴도 분간을 못하고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못 마땅했다. 여차하면 이 자리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노릇이었다. 안절부절하는 김석주를 숙종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닮았나?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여서 묻는 것이었다. 김석주는 용안을 함부로 범접할 수가 없다는 듯 시선을 더욱 내리깔고 짐짓 못본 척 했다.


"허적이 입에 담은 이름이 더는 없다?"


숙종은 가만히 그 사실을 되뇌어 보았다. 하기야 허적이 고작 정원로 같은 불한당을 붙들고 중궁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것 같진 않았다. 숙종은 자신이 허적의 손발을 모조리 잘라낸 탓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로, 정원로 따위에게 허적이 중궁을 해할 논의를 꾸밀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더는 허적에게 시간을 줄 수가 없었다. 자신은 허적이 시간을 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끌게 할 생각이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잃고 고통과 회한 속에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 시간을, 그런 시간을 끌게 할 생각이었을 뿐. 이제 더는 허적에게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만 돌려보내시지요."


숙종은 차갑게 김석주를 돌아보며 공손히 말했다. 정원로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공대를 하였을 뿐, 그 눈빛이 차가웠다. 정원로는 그 모습을 보고 두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리 공대를 하였어도 명령조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병판대감이었다. 천정에서 떨어질 일이 없다는 가막쇠대감이었다. 이미 허적을 추락시킨 그가 자신의 족제한테 꼼짝도 못하고서 굽신굽신하는 것이 이상했다. 김석하는 김석주의 약점이 될 존재가 아니라, 거꾸로 김석주의 약점을 잡은 존재인가?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았기에...정원로는 자기답게 생각했다.


"보내줘라."


석주가 박정영과 함께 시립해 있던 구지정에게 턱짓으로 명하였다. 구지정이 절도가 몸에 밴 동작으로 정원로의 뒷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인달방 허적의 집보다도 워낙 돌이 많은 산길이라, 정강이며 종아리며 여기저기 쓸리고 찧이고 아팠지만, 정원로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재산루 난간을 올려다 보며 숙종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저놈과 친해지면, 김석주의 약점을 나도 손에 넣을 수 있겠지?


그렇게 얼토 당토 않는 착각에 부풀어 재산루 앞을 내려가던 정원로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와 툭 부딪혔다. 정원로는 이젠 성낼 기력도 없었다. 그저 이번엔 또 누가 재산루를 드나드나 싶어서 두눈을 흘기는데, 뜻밖의 얼굴이 자신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는 참이었다.


"여긴..."

"너...꺽정이?"


정원로가 소스라쳐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데도, 석정은 아무런 대꾸 없이 정원로의 볼썽사나운 몰골을 주시했다. 왕이 정원로를 만났다. 그 사실이 어쩐지 찜찜했다. 정원로 같은 자를 만나러 왕이 궐을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 저 믿을 수 없는 작자가 왕에게 무슨 고얀 망발을 하였을 지 께름칙하였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오호라? 이제 보니 너도 병판과 한통속이구나?"

"뭐?"

"어쩐지...애초에 꼬리를 자르려던 거였어. 짜고 치는 투전이었어..."


혼자 억측의 나래를 펼치는 정원로를 보며 석정은 할 말을 잃었다. 정원로를 끌고 가던 구지정은 그 입이 너무도 싱싱하게 날뛰는 것을 보고 자신이 너무 사정을 봐주었나 싶어서 더욱 정원로의 뒷덜미를 틀어쥐었다. 정원로가 신음을 내뱉거나 말거나, 구지정은 거침없이 계곡을 걸어내려갔다. 첨벙첨벙 발이 빠져서 물이 사방으로 튀어도 개의칠 않았다. 하지만 석정은 달랐다.


"아니 그래도 며칠은 더 입을 건데..."


석정은 인상을 쓰며 청단령 아랫단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일진이 사나운 건지. 입안 가득 들어찬 한숨을 참다 보니 두볼이 복어 배 처럼 부풀어오른 채로, 석정은 재산루로 걸어갔다. 평소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보니, 남산자락을 스무걸음 넘게 걸었을 뿐인데 금방 산귀신이 두 발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중궁과 함께 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날이 더운 탓일까나. 아니면 근 한달간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의금부와 홍문관을 오간 탓일까나. 부쩍 피로가 늘었다.


금세 녹초가 되어 흐물흐물거리는 팔다리로 재산루 앞에 이르니, 난간에서 자신을 한심스런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왕의 옥안이 보였다.


"운동 좀 하셔야겠소, 사부?"


왕의 핀잔에 석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운동할 시간도 없나이다. 부디 신에게 여가를 주시옵소서. 며칠만 원 없이 단잠을 자고 싶나이다. 잠이 보약이라는데, 쪽잠도 못 잤나이다.


머릿속으로 미어지는 푸념들을 삭이면서, 석정은 재산루를 한계단 또 한계단 힘겹게 올랐다. 이미 곤죽이 되어 재산루 위층에 당도하니, 벌써 두개의 서안에 각각 지필묵이 갖춰져 있었다. 한눈에도 두꺼운 종이를 문진 대신 바둑알이 두개씩 누르고 있는데다, 한가운데에 붓이 놓여 있고, 벼루에도 눅진한 먹물이 담겨져 있었다. 힐끗 시선을 돌리니, 김석주의 호위 박정영이 손끝이 검게 물든 채로 등허리에 칼을 차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포도청은 잘 다녀왔소?"

"이미 우포청에서 종범 준기를 데려가서, 자신을 도피시킨 것이 허적임을 자백 받았습니다."


숙종은 석정의 보고를 들으며 자신의 손바닥을 가슴어림에 펴서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 시선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실체가 없는 시선이 지닌 무게로 손바닥은 점점 아래로 처졌다. 마침내 허리춤에 이른 손바닥을 내려다보고선 숙종은 너무도 쉽게 뒤집어버렸다. 이젠 손등이었다. 움푹한 손금 대신 불룩한 힘줄이 비치는.서안 위를 톡톡 두드리듯 검지와 중지를 꼬물거리니 힘줄이 더욱 도드라졌다. 손바닥 뒤집는 것은 언제든 이렇게 쉬웠다.


"응교 최석정은 교지를 받아쓰라."

"예 전하."

"명하노니, 차옥옥사를 전면 재심리 하라. 포도청의 조사 결과가 의금부에서 뒤엎어진 내막에 관해서도. 혹여 허적과 결탁하여 허견의 죄를 덮었다면, 관련자들을 전원 색출하여 엄벌에 처할 것이다."

"예 전하."


석정이 떨리는 손으로 붓을 쥐었다. 이젠 찍어낸 나무의 밑동마저 뽑혀나가게 생겼다. 헌데, 이 무시무시한 한기를 내뿜는 왕의 옥음은 끊이질 않았다.


"또한 오늘 허견과 복선군 역모사건의 공훈을 감정할 때 김석주를 원훈元勳(으뜸의 공을 세운 신하)으로 삼도록 하라."

"원훈元勳 말입니까, 원흉元兇 말입니까?"


석정은 붓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들어 흘끔 김석주의 눈치를 보았다. 김석주는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석정은 얄궂은 웃음을 입가에 띠고 왕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원훈이든, 원흉이든 한끝차이가 되겠지. 이렇게."


숙종은 석정이 보기 쉽도록 오른손을 뒤집어 손그림자를 비추어 보였다. 석정은 시선을 숙종의 발치에 고정한 채로, 왕의 손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뒤집혀서 엄지의 방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뀌었다가는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었다. 햇볕에 짙게 드리워진 검은 손이 석정의 눈앞에서 조용히 손짓했다. 그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석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왕은 의미심장하게 손그림자로 석정에게 넌지시 암시하고, 석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군말 없이 교서를 써내리는 모습에 석주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들썩였다. 감히 용안을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이 법도이니 저들은 이제 그림자로 대화를 하며 뜻이 통하는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 왕은 자신에게도 저 손그림자를 통해 말없는 경고를 보내왔다.


오늘의 원훈이, 내일이 원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똑바로 하여라.


석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시선을 돌렸다. 잠시라도 왕과 최석정이 자신의 시야에 들지 않았으면 했다. 왕과 신하가 서로 마주보지 않고도, 신하가 감히 용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도, 서로 소통하는 사실이 거북했다. 더구나 둘이 함께 자신을 위협하였으니...속이 불편하여 석주는 눈가를 실룩였다. 그런다고, 자신이 겁먹을 줄로 알다니. 자신은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자신이 입에 문 것이 누군지도 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시금 똑똑히 생각나게 해줄 요량이었다. 석주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 박승종의 손자 박만최, 박만리가 허견과 친밀하였으니, 변원정배邊遠定配(극변 다음으로 먼 지방으로 유배보냄) 하옵소서.

- 갑산부사甲山府使 홍진석은 본디 역적 허견의 처妻 예형의 사촌인데, 그 증인이 되어 허견의 비위를 교묘히 맞추었습니다. 옥사가 끝나고 첨정僉正 자리를 얻었으니, 세상이 일컬어 누이를 팔아 관직을 얻었다 하였으니, 청컨대 그를 사판仕版(벼슬아치 명부)에서 지우소서.

- 경주부윤慶州府尹 유명건, 부사과副司果 김몽양,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유재는 모두 역적 허견의 문객門客으로 분주히 왕래하였으니, 청컨대 사판에서 지우소서.

- 부호군副護軍 심단은 허적에게 아첨하여 섬긴데다, 허견과 결탁하여 난육卵育되어, 전랑銓郞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청컨대 사판에서 지우소서.

- 역관 장현張炫이 남楠의 집안과 친밀하게 지냈으니 변원정배邊遠定配 하옵소서.

- 장현의 조카 장천익張天翼 역시 정楨과 남楠의 사반射伴(활쏘는 패거리)로 어울렸으니 변원정배邊遠定配 하소서.

- 장현의 동생 장찬 역시 남楠과 친밀하였습니다. 그 형과 아들이 이미 죄를 입어 정배되었는데 홀로 면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변원정배邊遠定配 하소서.

 

밑도 끝도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수록 허견과 복선군과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자들은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계문과 상소가 빗발쳤다. 상소는 여느 때보다도 갑절로 숙종의 서안에 쌓여서 읽다 보면 눈이 짓무르는 것 같았고, 그 비답을 쓰다 보면 손이 짓무르는 것 같았다.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는 숙종의 성미로, 왕의 전교 역시 승정원에 곱절로 쌓여서, 늙은 승지들의 눈이며 손이며 문드러지게 했다. 그래도 서인들은 신이 났다. 자신들의 상소에 왕이 윤허한다는 뜻으로 계의윤啓依允 혹은 줄여서 윤允이나 계啓자만 적힌 비답을 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다만, 빈청에서 왕의 전교를 읽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석주의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경직되기도 했다.


- 허견이 양가의 부인을 약탈하여 음행을 일삼았으니 이는 전에 없는 변고다. 당시 판의금부사 오시수吳始壽는 옥안을 의금부로 옮기기를 청한 연후엔 온갖 계략을 꾸미어 죄인을 왕장과 법망에서 빼돌린 것도 모자라서 포도청에 허물을 돌려 죄안을 구성하였으니, 그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다. 오시수를 극변원찬極邊遠竄하고, 그를 묵인한 목내선睦來善, 이하진李夏鎭도 파직하라.


 

석주는 가만히 발치에 자신의 손바닥을 비추어 보았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은 언제든 이렇게 쉬웠다. 그날 왕과 최석정 사이에 손짓처럼 오갔던 손그림자처럼. 빈청을 벗어나서 재산루에서도 석주는 멍하니 손그림자를 내려다보고 또 내려다보며 그 의미를 곱씹었다. 


낮과 밤이 또 바뀌고, 손등과 손바닥이 또 바뀐 끝에, 편전에 꿇어엎드려서 왕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고도, 석주는 불안으로 움츠러든 오른손을 뒤집고, 또 뒤집으며 손그림자를 내려다 보았다. 손바닥 뒤집듯이 너무도 쉽게 어심을 뒤집어서 왕은 엄지와 새끼의 자리를 바꾸어버렸다. 하루아침에 허적을 역적의 아비로 만들고, 또 자식이 사지가 찢겨 죽는 꼴을 두눈 뜨고 지켜보게 하였으며, 또 다른 자식마저 멀리 보내버렸다. 그렇게 야금야금 피를 말려 죽어가게 만들었으니...언제고 자신도 허적과 똑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마냥 상념에 젖은 석주의 귓속으로 왕의 서늘한 옥음이 사무쳤다.

 

"죄인 허적을 사사賜死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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