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9,177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4.03.01 01:49
조회
2,758
추천
27
글자
35쪽

해의 그림자 170

DUMMY

허견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자신의 집 솟을대문 앞을 서성였다. 집앞 담장 모퉁이에서부터 영상대감 행차를 알리는 구종들의 고함이 들리더니, 이내 좌상대감이며, 우상대감, 호조판서 등의 행차를 알리는 구령도 맞물렸다. 허견은 허적의 초헌 앞으로 냉큼 다가섰다.


"아버지! 아버지!"


다섯의 머슴들이 힘을 들여 몰아야 할 만치 작은 초헌바퀴가 삐끄덕 멈추었다.


대신들은 물론 허적도 대꾸할 기력도 없어, 눈꺼풀을 시큰둥히 늘어뜨리고 허견을 쳐다보았다. 허견은 팔을 뻗어 허적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허적은 한순간 착각처럼 자신의 소매 끝에 피가 묻은 느낌에 가슴이 섬찟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이고 보니 피묻은 소매자락의 임자는 자신이 아닌 아들이었다.


"그 피..."

"너 이놈 또 무슨 사고를...?"

"아니아니...이것 때문에..."


아들이 소맷자락을 걷어서 불쑥 내미는 벌건 물체에 허적은 침침한 두눈을 찌푸리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냥 벌건 것이 아니라 피에 절은 날갯죽지였다. 필시 제삿상과 잔칫상을 뒤엎은 그 괘씸한 암탉의 한토막이었다.


"어흐끄!"


허적은 그대로 소스라쳐서 초헌의 팔걸이에 왼쪽 어깻죽지를 부딪혔다. 화끈한 통증이 불꽃처럼 일었지만 허적은 당장 눈앞의 피투성이 날갯죽지 때문에 한번 놀란 심장이 자꾸만 벌렁거려서 죽을 맛이었다.


"아니..."

"이...이...무슨 짓이냐?"

"이거 좀 보세요."

"치워라!"

"글자가 있어요, 글자가요! 어미모母자가요!"


허견은 제대로 설명을 갖출 정신이 없었다. 자기라고 미쳤다고 아비를 놀리겠다고 찢어진 날갯죽지를 내밀었을까. 똑바로 설명을 하려고 해도, 설명이 똑바로 나오질 않았다.


"글자?"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채로, 허적은 후들거리는 가슴을 오른손으로 꾹꾹 눌러대며 아들을 쳐다보곤, 이내 눈길을 날갯죽지에 꽂았다. 허적보다는 한발짝이라도 더 떨어져서 날갯죽지를 보았던 오정창이 애써 대담한 척 상체를 기울여 날갯죽지를 들여다보는 참이었다.


"어? 정말이네?"


오정창이 두눈을 끔뻑였다. 이 끔찍한 흉물은 제삿상과 잔칫상을 엎어버린 주범의 잔해였다. 허견이 필시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헌데 허견 말대로 정말로 어미모母자가 묵빛으로 찍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감, 대감..."

"그만 부르게. 나도 눈 달렸으이."


허적이 짜증스레 답하고선 더욱 상체를 숙여서 날갯죽지를 내려다 보았다. 나머지 대신들도 허견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어 날갯죽지를 관찰했다.


"진짜...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미모母라..."

"뭐야 이거..."

"이건 모악산母岳山의 모母자인데..."

"모악산이면 사축서..."


허적을 비롯한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호조판서 목내선에게 쏠렸다. 모악산 남쪽에 사축서가 있다. 사축서는 호조 관할이니...


"어떻게 된 거냐고! 우리 종놈들은 거기서 이 닭을 가져온 일이 없는데...당신은 알 거 아냐? 몰라도 알아야 하잖아!"


허견이 버럭버럭 고함을 쳤다. 목내선의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이들, 아니 손주뻘인 녀석이 자신에게 바락바락 대들다니. 여기 인달방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사축서는 모악산 아래에 있다. 언덕이라 돌고 돌아 걸어서 2각도 넘긴 하여도, 여차하면 사축소의 닭을 가져다 쓸 법도 하였다. 하지만 자기네는 가져다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우리도 보내지 않았는데...왜 어미모母자가..."

"허면 호판이 아랫사람 단속을 못했나 보이. 누가 일부러 가져와서 깽판을 친 것이니..."


허적은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내딛다가 우뚝 멈춰섰다. 어미모母자가 새겨진 암탉이 제삿상과 잔칫상에 뛰어들어 다 엎어놓았다? 그 어미모母자가 단순히 사축서가 있는 모악산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순전히 암탉, 그것도 어미를 뜻하는 건지.


"호판, 사축서를 샅샅이 뒤져서, 엊그제 누가 사축서를 다녀갔는지, 반드시 잡아내게."


허적은 이를 악물고 분부하곤 솟을대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어쩐 일인지 아직도 노비들이 아직도 뒷정리를 말끔히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하필이면 저 암탉이 망쳐놓은 집기들과 병풍들도.


"아직도 안 치운 게냐?"

"그게...이놈들이 빈둥빈둥 놀기만 하고 제 말은 듣지도 않아요."

"아니...작은 나으리가 그 암탉이 어찌 된 거냐고 저희들을 족치는 바람에..."


마름 황씨가 우물쭈물 변명하는 말에 허적은 더욱 복장이 터졌다.


"당장 치워!"

"이 병풍은 어찌..."

"그게 얼마나 귀한 병풍인 줄 아느냐? 구십년 전에 명나라 사신 심유정 일행이 그린 이수정도二水亭圖니라. 명나라 사신단이 그렸다 이 말이다. 당장 병풍장을 불러 복구하거라."


허적은 파르르 치를 떨며 마름 황씨를 다그쳤다. 이 암탉을 누가 이 암탉을 보내어 제사도 잔치도 망쳤는지는 몰라도 암탉이 망쳐놓은 흔적 따위는 남겨놓고 십지 않았다.


목내선은 힐끗 병풍을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명나라 사신 심유정 일행이 아니라, 심유정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신흠이란 조선 화공이 그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지만, 분위기가 워낙 살벌하여 입을 꾹 닫았다. 그저 안식 같은 밤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망할 암탉 같으니..."


허적은 이를 악물고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악산의 어미모母자든, 단순히 어미모母자든, 저 암탉을 보낸 손은 중궁이 확실했다. 오정창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어느덧 허적의 등뒤에서 허견과 오정창도 중궁을 암탉에 빗대어 욕하는 참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뻔하지요."

"아 진짜...애저녁에 목을 비틀었어야 하는데..."

"워낙 끈질겨서..."

"지금이라도 목을 따면 되죠."

"진작 치울 것을."


중궁을 치운다...야금야금 지운다는 게 너무 질질 끌었다. 이제라도 왕의 곁에서 치우면 될까. 이제라도. 허적은 벌써 희푸르게 밝아버린 아침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금세라도 희뿌옇게 흩어질 듯한 뭉게구름을 동공에 담았다.



그날밤 말쑥하게 초립을 쓴 승윤은 곱사등이 노씨를 따라서 이슥한 밤길을 걸어서 인달방 사직동 어귀로 들어섰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노씨 대신 노씨의 봇짐까지 챙겨 들고 뒤따르는 동안, 노파심에 노씨가 몇번이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귀 따갑게 들었다.


"지금 분위기가 안 좋으니 알아서 기어야 할 게야. 소문 들어 알지? 도성의 개, 돼지...흠흠...내 그분 욕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말은..."

"허견이 그냥 허견이 아니니, 조심하라, 그 말씀이시죠?"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고 싶었지만, 승윤은 꾹 참고 헤죽 웃었다. 속으로는 어르신이나 조심하라고 되받고 싶었다. 말 그대로 도성의 '개, 돼지' 중 '돼지'의 밑에서 뼈 빠지게 굴렀으니, 자신이야 어딜 가도 제 몸 건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노씨는 발만 삐끗해도 목이 달아날 처지였다. 물론, 자신의 마음이 비단결이니, 노씨의 목숨까지 책임지고 지켜줄 테지만.


"험. 조심하라고."


그렇게 노씨와 승윤은 담장이 유독 높은 허적의 갑제에 당도했다. 점동이란 겸인이 나오더니, 사랑채로 그들을 안내했다. 잔치가 파장이 된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마당 한켠에 대충 말아놓은 짚자리며, 중문 옆에 세워놓은 과녁이며, 깨진 그릇 파편들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점동은 섬돌에 허견의 태사혜가 없는 것을 보고 눈밑을 실룩거리면서 별채를 돌아보았다. 별채 앞을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만 봐도, 고관대작들이 모여 뭔가 심각한 논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자들을 별채로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건넌방에 들일 수도 없었다.


"거기 서 있으쇼. 곧 모셔올테니."


겸인 점동이 노씨와 승윤을 사랑채 앞에 세워놓고 별채로 향하자, 승윤이 힐끔 돌아보았다. 사실 이미 체건에게서 허견의 거처가 사랑채 건넌방이란 얘기 정도는 들었다. 하지만 미리 와보는 것이 촌음을 다툴 때 유리했다.


그렇게 승윤이 얌전히 사랑채 앞에 서 있는데, 웬 일로 겸인이 곧바로 돌아오질 않았다. 승윤은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어 웃었다. 아무래도 허견이 당장 이리로 올 경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더 잘되었다.


"거기, 알아서 챙겨가라 하시네. 서안 위에 따로 받아놓은 글이랑 속지도 있고 하니."


알아서 챙겨가라고? 승윤의 두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이거, 일이 너무 쉽게 되어간다. 이래도 되려나. 하기야, 이럴 줄 미리 알고 자신이 따라온 것이긴 해도. 어차피 허견의 방에 뭐가 있든 상관은 없었다. 애초부터 이러려고 김석주가 왕을 움직여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내린 것이니. 일이 착착 진행되어가는 것에 자신은 그저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면 그만이었다.


승윤과 노씨가 사랑채 건넌방으로 들어가니 의심 많은 겸인은 장지문을 열어놓고 대청마루에서 힐끔힐끔 지켜보았다. 뭐 금붙이 은붙이라도 훔쳐갈까 싶어, 두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참이었다. 하지만 노씨와 그 제자는 보화寶貨가 들어있을 법한 문갑이나 목함 쪽은 얼씬도 않고 우선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놓은 병풍 앞으로 다가들었다.


삼각산 봉우리가 푸른 하늘에 반쯤 솟아 있고, 또 한강물이 백로주 모래펄에서 갈라지며, 정자가 한채 세워져 있는 그림인데, 그림이 그려진 겉지는 누리끼리하게 색이 변색된데다, 먹과 안료도 색이 다소 탁해진 것이 한 백년쯤 지난 것 같았다. 헌데 고유제 때 암탉의 난동으로 제삿술이 엎질러진 탓에 옥빛 속지가 누리끼리하게 마치 오줌이라도 갈긴 것처럼 변색되어 종이가 쭈글쭈글 울었다.


"아이고, 뭔 짓을 해놓...으신 거야."


승윤이 푸념을 하다가 문간으로 비치는 겸인의 눈치를 보고 애써 존대를 넣었다. 노씨는 피식 웃으며 병풍을 우선 두팔로 안았다. 병판대감과 이놈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자신은 일감이나 똑바로 챙겨야만 했다. 헌데 승윤이 이놈이 한가하게 궁둥이를 쭉 뒤로 빼고 병풍에 얼굴을 박다시피 하였다.


"뭐해, 냄새 맡냐? 야 그건..."

"아, 이거 필법도 절파풍에, 이 배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부금浮金인데...이신흠이 그렸나? 딱 보니 백년은 된 것 같은데...이거 속지는 뭘로 한대요?"

"..."


노씨는 승윤의 안목에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자신이야 한평생 병풍이나 화첩 제작을 업業으로 삼고 살아온 인생이라 그림만 봐도 대충 어느 시대인지, 누가 그렸는지, 당나라풍인지, 송나라풍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놈도 눈을 장신구로 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연대와 작자까지 얼추 짐작하는 것만 봐도.


새삼 병판대감이 녹록하지 않은 위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놈을 딸려 보낸 것만 봐도, 염탐이 목적일텐데, 헌데 허투루 아무 칼잡이나 보낸 것이 아니라, 그럴 싸하여 의심을 사지 않을 화공을 보낸 것이었다. 물론 붓통을 메고 싸돌아다니는 걸 봤을 때만 해도 화공이겠거니 어렴풋이 생각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보통내기가 아니라서 더 안심이 되었다.


"거기 속지 없수? 이상하다. 같이 놓으셨댔는데."


문간에서 겸인이 건넨 말에, 승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병풍 밑에 둘둘 말아놓은 속지가 보이긴 하였다. 하지만 이미 꿍꿍이를 꿍쳐두고 따라나선 승윤인 만큼 속지를 찾는 시늉을 하며 오히려 서안 위아래의 종이뭉치까지 뒤적거렸다.


"이건 뭐예요? 속지 같은데?"

"속지? 이건 그냥 초주진데?"

"그럼 이건가?"

"그건 아녀."

"아 진짜...속지가 어딨어, 속지가?"


승윤이 짜증을 내며 서안 위를 흩어놓았다. 노씨가 질겁하여 승윤의 두 손목을 붙들었다.


"이놈이...여기가 어디라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요기가 우리 전방廛房인 줄 알어?"

"아니...속지도 갖다놓았다는데 안 보이잖아요. 그냥 우리한테 맡기지 왜 따로..."

"찍소리 말어. 이댁은 속지만 바꾸는 거잖어. 알 만한 놈이..."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그림이 누리끼리하니 오래됐으면 속지도 누리끼리하니 오래된 걸로 해야지. 왜 새하얀 종이들만 갖다놓고 속지로 쓰라는 건지!"


승윤이 짐짓 흥분하다 보니 살짝 영남쪽 억양이 나왔다. 영남이야 본래 남인쪽 근거지인데다, 평소 상전들을 찾는 손님들도 종종 쓰는 억양이니 만큼 겸인은 승윤에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화하는 본새만 봐도 딱 화공이었다. 이놈들이 문갑에만 손을 대지 않으면 되었다. 그는 승윤이 서안 위아래의 종이들을 살피면서 그중 허견의 필체가 섞인 종이들을 찾는 족족 슬쩍 속지 틈새에 감추는 것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


노씨는 움찔하였지만, 문간쪽 눈치를 살피고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흘렸다. 다행히도 눈치 못챈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이놈이 찾는 건 허견이 누군가와 주고 받은 서찰 쯤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겸인은 꾸물대는 승윤을 보고서 그저 으름장을 놓았다.


"빨리 챙기지 않고 뭐해? 밀화(호박) 하나라도 없어지면 네놈들부터 잡아다가 치도곤을 내실텐데."


치도곤 좋아하네. 승윤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윗잇몸만 슬쩍 들어 겸인에게 싹싹하게 웃어보였다.


"예예, 다 됐습니다. 갑니다 가요오!"


눈꼬리에 감춰진 승윤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이런 일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거제에서 최석정을 빼돌린 일로 병판대감의 눈밖에 난 탓에, 이번 일이라도 해내야 했다.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다음에는 눈칫밥이 아니라 제삿밥을 먹게 될 거라고 병판대감이 으름장을 놓았으니.


승윤이 노씨와 함께 허적의 집을 나와서 유난히 높다란 담벼락 모퉁이를 지나는데, 두자 가량 되는 짧은 죽봉 같은 것을 팔에 끼고 그늘진 담벼락에 가만히 기대어 선 누군가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석하였다. 승윤은 석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고 석하는 씁쓰레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침묵한 채로.



- 훈련대장을 바꾸는 일은 모든 사람과 의논할 수 없는 일이다. 도승지 경최는 감히 자신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과인의 면전에서 방자하게 나섰으며, 편당을 범한 이원정을 감히 신구하려 들었으니 매우 해괴하다. 도승지 경최를 파직하라.


춘사월의 밤바람은 마치 겨우내 숨어 있던 물귀신이 뭍으로 기어나와서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영의정 허적은 도승지 경최의 파직 소식에 좌의정 민희, 우의정 오시수를 비롯하여 대사헌 민암, 예조판서 오정창 등 여덟명의 대신들을 일제히 거느리고 황망히 통명전 앞을 찾았다. 아들 허후가 묵묵히 밤바람을 견디면서 보초를 서는 참이었다.


"전하께 영의정 허적이 뵙기를 청한다고 고해주게."


허적이 품속을 더듬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허후는 눈앞의 허적을 쳐다보고, 또 어깨너머로 민희와 오시수 등을 쳐다보았다. 이 으슥한 밤중에 시뻘건 홍단령을 입은 고관대작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배알을 청하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허후가 걸음을 떼려는데, 옆에 섰던 동료가 한발 먼저 걸음을 떼어 협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허후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허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동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허적은 고개를 틀어 자신의 머리를 찍어누를 듯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얄궂게도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한분씩 들어오라는 분부십니다."


다시 협문이 열리고 금군이 되돌아와 전하였다. 허적은 금군이 활짝 열어젖힌 협문을 게슴츠레히 노려보았다. 왕이 대청에 서서 문간을 쏘아보는 참이었고, 통명전 구석구석을 지키던 금군들도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참이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는가?"


왕의 옥음이 흘러나오는 그 순간에도 통명전 앞에 깔린 너른 박석 표면에 달빛이 미끄러져 하얗게 반짝였다. 달밤의 통명전 뜨락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름답다더니, 지금 허적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허적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품속을 더듬어 몇날며칠 가슴 속에 품어왔던 사직소를 무릎맡에 꺼내놓았다. 바로 사배례四拜禮를 치르려는 것이었다. 한번, 두번, 세번, 마침내 네번...그렇게 사배를 마치는 허적의 구부정한 등줄기를 통명전 뜨락 구석구석에 세워진 횃불이 비추었다.


"천신...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만 향리로 돌아가 조용히 살고자...."


허적이 품속을 더듬으며 답하였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어왔던 사직소를 꺼내어 내려놓는 마당에, 박석의 차가운 촉감이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가납한다."


허적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숙종이 차디찬 음성으로 대번에 사직소를 수락했다. 허적은 귀를 의심하고 두눈을 치떴다.


"두고 가라."


허적은 무릎맡에 내려놓은 사직소를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며 두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왕이 정말로 사직소를 수락해버렸다. 사직소란 세글자를 미처 입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야멸차게도 가납했다.


다 끝났다...허적이 통명전 뜨락에 망연자실 엎드려 있자, 숙종이 턱짓으로 이만 나가보라고 신호했다.


허적은 겨우 사배를 마치고선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무릎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채로 협문에 이르러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왕은 여느때처럼 등허리는 물론 고개까지 꼿꼿이 세운 채로 허공을 쳐다볼 뿐, 그 짙은 눈동자에 자신의 존재는 없었다.


허적의 목화 끝이 발치에 닿자, 민희가 두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품속에서 사직소를 꺼내어 숙종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무릎맡에 사직소를 내려놓고 엎드려 사배를 마치고 물러나왔다. 민희 다음에는 오시수가, 오시수 다음에는 민암이, 민암 다음에는 오정창이, 그렇게 하나둘씩 뜨락에 사직소를 차곡차곡 내려놓았고, 땅위로 드리운 시꺼먼 땅거미는 그들의 사직소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以不欲偏係之故,

見忤彼此, 煢然孤立,

而竟以平生所不爲者,

被譴於仁愛之天,

將何面歸拜先王乎?

荒江冷寓, 達宵自訟,

一則臣罪, 二則臣罪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이쪽저쪽에 미움을 받아서 외롭게 고립이 되었더니,

마침내 평생을 하지 않은 일로 하늘의 어진 사랑으로 견책을 입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선왕을 뵙겠나이까?

황량한 강변에서 더부살이 하며 밤을 지새워 자책하니

첫째도 신의 죄이옵고, 둘째도 신의 죄이옵니다.


아침 햇살이 장지문을 환히 비추는 양화당에서 백광현의 진료를 받으면서도, 숙종은 손에서 문건을 놓지 않았다. 보고 또 봐도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숙종의 족삼리혈에 침을 놓겠다고 아까부터 악전고투를 벌이던 광현이 침을 쥔 손을 꿈틀했다.


"전하, 상소는 나중에 읽으심이..."


광현은 가느다란 침을 쥔 오른손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왕이 머리맡에 상소를 한더미 쌓아놓고 읽으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 바람에 침도 한대도 제대로 놓질 못하였다. 원망 섞인 음성으로 광현이 마침내 애원하듯 아뢰자, 숙종은 오히려 광현을 원망하듯 노려보았다.


"이게 상소인 줄 아시오?"

"네?"

"바로 영의정 허적의 사직소요."

"..."


광현은 할 말을 잃었다. 자잘한 상소라면 자신을 애먹이는 이 고약한 환자를 원망하겠는데, 하필이면 영의정의 사직소였다. 그런데 왕은 머리맡에 수북한 나머지 상소들을 하나하나 광현의 눈앞에 펼쳐보이면서 설명을 이었다.


"이건 좌의정 민희, 또 이건 우의정 오시수, 또 이건 예조판서 오정창, 또 이건 대사헌 민암, 또 이건 응교 심단의 사직소."

"다...요?"

"일이 이 지경인데 뭐가 우선이겠소?"

"..."


너무도 침착하고 덤덤하게 사직소들을 한장한장 광현의 앞에 펼쳐보이는 왕의 손길에, 광현은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랐다. 이 많은 상소더미가 하나같이 사직소라니. 일전에도 남인들은 허적을 필두로 하여 한꺼번에 사직소를 내어 왕을 압박한 적이 있었다. 누가 이기자 해 보자는 실력행사였다. 이번에도 실력행사일까?


하지만 왕은 조금도 불안하거나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부응교 최석정을 불러앉혀 놓고 열심히 교지를 받아쓰게 하였다.


"김수항을 영의정으로 삼는다."

"..."


석정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김수항이란 이름이 나왔다. 다른 이름도 아니고 송시열의 정치를 대변하던 김수항의 이름이 나왔다. 그냥 사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영의정에 김수항을 앉혔다.


"뭘 하시는가? 어서 쓰지 않고?"


스승이 아니라 신하의 예우로 왕이 핀잔을 주었다. 석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저 붓을 들고 꼼짝도 안했다. 남인들에게 밀려나기 전까지도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김수항이라 그다지 달가울 것도, 반가울 것도 없었다. 석정 자신도 사람이었기에 가슴 속의 앙금이 아주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붓을 휘둘렀다. 왕의 옥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지화를 좌의정으로 삼는다."

"..."

"정재숭을 이조판서로 명한다."

"..."

"이익상을 대사헌으로 명한다."

"..."

"심유를 장령으로 명한다."

"..."

"이상진을 판의금으로 봉한다."

"..."

"조지겸을 지평으로 명한다."

"..."

"유상운을 대사간으로 명한다."

"..."

"이언강을 정언으로 명한다."

"..."

"여성제를 예조판서로 명한다."


의망이니 삼망이니 하는 절차도 없었다. 이조판서가 공석인 만큼 번갯불에 콩 볶듯이 숙종은 특지로 임명할 뿐이었다.


석정은 이를 악문 채로 입안 가득 매운 가자미식해라도 삼킨 듯이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왕이 편당을 하지 않고 남인, 서인 골고루 등용하려 하였다면, 이렇게 서인 일색으로 고신을 내리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왕은 남인들이 발을 붙일 틈도 주지 않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아니, 곁불이라도 쬐게 해주려 하여도, 이토록 굶주린 서인들을 한꺼번에 불러다 놓으면, 서인들이 남인을 한꺼번에 물어뜯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했다.


"전하, 아까부터 줄곧 서인들만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줄곧 서인들의 이름만 써넣으면 되는 거요."

"하오나..."

"혹시 얘기 들었소? 허적이 시호연에서 암탉 한마리를 잡아죽이면서, 유인인지, 여인인지 스스로 망할 거라 저주를 퍼부었다던데. 허적이 죽인 암탉이 누구를 뜻하겠소?"


허적이 죽인 암탉...석정은 가슴이 섬뜩하고 머리가 섬찟했다. 대체 시호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닭은 서쪽을 뜻하고, 하필이면 수탉도 아니고 암탉이니 서인의 핏줄인 대비전을 뜻하거나, 중궁전을 뜻하거나...너무도 위험했다.


"그러니 쓰기나 하시오. 팔이 빠지면 여기 백어의가 침을 놓아줄 것이니."

"..."


한시진이 더 흘러서야 석정은 양화당을 나서며 너럭바위 앞에서 오른손목을 열심히 왼손으로 주물렀다. 붓을 쥐고 한참이나 교지를 써내린 탓에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다 시큰거렸다.


왕은 이미 남인들의 사직소를 모조리 가납했다. 남인들이 실력행사를 할 틈도 주질 않았다. 거침없이 물갈이를 해버렸다. 같은 서인인데도, 석정은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것이, 설렘인지, 불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하, 대사간 유상운, 정언 이언강이 사은을 청하옵니다."

"벌써?"


여전히 상참과 경연을 정지한 채로 동온돌에서 온갖 상소와 문건을 훑어보던 숙종은 두광이 두장의 사은단자를 받쳐들고 들어서자 혀를 내둘렀다. 서인들이 언제 이렇게 부지런했나 싶었다. 남용익이나, 최석정이나, 오도일이나, 한번 관직을 제수하면 몇날며칠을 질질 끌다가 한달은 흘러서야 사은을 한답시고 양화당을 찾았다. 헌데 유상운과 이언강은 어제 직첩을 내렸을 뿐인데, 오늘 사은을 하겠다고 나섰다.


"빠르군. 특히나 누구에 비하면."

"누구라 하오시면..."

"누구겠나."


숙종은 석정을 흘끗 쳐다보며 콧잔등을 찡그리곤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서인에게 동아줄을 내렸고, 그들은 덥썩 붙잡았다. 그는 더 지체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서서 동온돌을 나섰다. 두광 역시 사은단자를 둔 소반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숙종이 대청마루를 내려서니 통명전에 나란히 붙어 있는 양화당 너럭바위 앞에 유상운과 이언강이 백단령白團領에 오사모를 갖추고 엄숙하게 홀을 쥔 채로 엎드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헌데 배석하여 기록해야 하는 부응교 최석정이 그들 뒤에 청단령에 붓과 행연을 쥐고 엎드린 모습도 숙종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는 아직도 버티는데 말이지."

"그러네요 진짜..."

"맘 같아선 호분胡紛(조개껍질을 빻아만든 흰색 안료)을 확 뿌려서 백단령으로 만들고 싶은데 말이지."

"도화서에 일러 대령시킬까요?"


두광의 우스개소리에 숙종은 피식 웃었다. 정말로 호분을 최석정의 청단령에 뿌려서 강제로라도 사은례를 집행시켜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당장 사관으로 나설 서인들이 없는 탓에, 유상운과 이언강이 최석정을 끌고 오긴 하였지만, 문제는 저 최석정 역시 아직도 사은을 하지 않은 몸이란 사실이었다. 사은을 해야지만 정식으로 부임할 수 있는데도. 업무를 볼 수는 있어도, 권한은 발동시킬 수가 없는데도. 숙종은 석정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양화당으로 다가섰다.


"들어들 가지. 시간이 없으니 한꺼번에 들어들 오라."

"예 전하."


양화당 안에서 사은례가 소략하게 집행되었다. 의관을 갖추고 미리 사은단자를 올린 후에 사배례를 올리는 정도였다. 열려 있는 장지문 너머로 석정이 사은 장면을 기록하려니 그다지 기록할 것도 없었다.


유상운과 이언강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숙종에게 사배례를 올리자마자, 두광이 또 다시 소반에 사은단자를 쌓아올리고서 사뿐사뿐 들어섰다.


"전하, 대사헌 이익상, 장령 심유가 사은을 청하옵니다."

"들이라."

"예 전하."

"참으로 빠르군. 임명한지 하루 이틀 만에, 쏜살같이 사은이라.."


숙종은 핀잔어린 눈길을 던졌다. 유상운과 이언강은 그저 눈꺼풀을 꿈틀하며 헛기침을 했다.


"누구는 부응교에 임명된 지 벌써 한달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사은은 커녕 사죄도 않고 있다지?"

"..."


유상운과 이언강이 뒤를 돌아보며 문간의 최석정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조심스럽게 양화당 방 안으로 들어서던 대사헌 이익상과 심유도 최석정을 흘겨보았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사은례를 차일피일 미루는 건지? 같은 서인이 맞냐고 따지고 싶었다.


"전하, 최부응교가 아직도 사은을 안했사옵니까?"

"유감스럽게도."

"신하의 본분을 망각하다니."

"그 스승 남구만도 부끄러워할 노릇입니다."


다시 한번 따가운 눈총이 최석정의 한몸에 쏟아졌다. 석정은 남들의 눈총을 한몸에 받으려니 괜히 얼굴이 근질근질했다. 검지로 오른쪽 볼을 긁고 보니, 왼쪽 볼도 가려웠다. 다시 왼쪽 볼을 긁고 보니 코끝도 가려웠다. 손가락 끝이 꼬물거리는 것을 보고, 유상운과 이언강, 이익상과 심유가 다시 한번 험악한 눈길로 석정을 쏘아보았다. 석정은 목젖마저 간지러워 검지 끝으로 살살 긁었다. 스승님이 아시면 사은을 미루는 것도 청출어람이라고 자랑스러워 하실텐데.



"전하, 장령 심유와 대사간 유상운이 윤대를 청하옵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양화당에서 윤대를 거행하는 숙종에게 두광이 장지문 밖에서 아뢰는 말이었다. 숙종은 묘한 눈웃음으로 장지문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틀 전에 장령에 임명하였더니, 고작 이튿날로 사은을 치르고, 또 그 이튿날로 윤대에 끼다니. 아무래도 서인들이 당장 칼을 갈고 남인들의 목을 베겠다고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심유부터 들라 하라."

"예 전하."


장지문이 열리고, 갓 마흔을 넘긴 나이에 청단령을 급한 대로 누군가에게 빌려 입은 듯한 장령 심유가 안으로 들어섰다. 벼르고 벼른 서인들의 반격이 뻔히 예상되었다. 숙종은 긴장된 눈빛으로 들어서는 심유의 얼굴이며, 소매를 빤히 쳐다보았다. 팔이 약간 짧았는지 소매가 길어서 홀을 쥔 손끝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숙종의 얄궂은 눈길에 장령 심유는 딸꾹질을 하듯 숨을 가쁘게 들이켰다.


"장령 심유?"

"예 전하, 신 장령 심유, 전하를 뵈옵니다."


심유가 홀을 잡은 두손을 모으고 엉거주춤 부복하여 사배를 거행할 기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숙종은 거추장스런 예를 생략하고 싶은 지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만! 과인이 미령하니 사배는 생략하고 계달만 하라."

"예? 알겠사옵니다."


심유는 긴장된 얼굴로 품속에서 계서를 꺼내어 무릎맡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미 계서를 쓰고 수십번도 더 눈으로 읽고 또 입으로 외웠다. 왕에게 어리숙하거나 어설픈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오랫동안 남인의 발밑에 짓밟힌 끝에 모처럼 잡은 서인의 기회였고, 자신은 죄 많은 남인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서인의 예봉이었다.


"우찬성 윤휴는 바로 광해군의 얼신 윤효전의 아들로, 아비의 허물을 덮으려고 선비의 이름을 빙자하여 세상을 속이고 출세를 꾀하다가, 마침내 높은 관직에 오르자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이 성총을 속이고 사리사욕만 탐하였습니다. 시전에서 뇌물을 받아서 전사를 옮기고 바꿔주며, 돈을 받고 금령禁令을 빙자하여 시체를 파내고 백성을 학대하고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이는 국법으로 다스려야 할 일입니다. 헌데 감히 자성慈聖(대비전_의 동정을 조관照管하라는 말을 탑전에 진달하였으니, 이는 감히 신하가 입안에 담지도, 입밖에 내지도 못할 발언입니다. 그가 자성과 성상을 이간시켜 사감을 풀었으니 이 또한 왕법으로 다스려야 할 일입니다. 청컨대 극변에 멀리 귀양보내소서."


조관이라...언제적 일인가. 숙종은 열려 있는 장지문 너머로 엎드려 빠르게 붓을 놀리는 석정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윤휴와는 이미 감정이 틀어질대로 틀어진 석정으로선 윤휴의 죄상을 고변하는 심유의 음성이 추운 겨울의 끝에 불어오는 봄바람이고, 무더운 여름의 끝에 드는 찬바람일 터였다. 그냥 잠깐 추위를 달래고 더위를 식히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정치보복을 시작한 서인들은 윤휴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또한 전 대사헌 민암과 그 조카인 전 부제학 민종도는 야비하고 간사한 자질로 항상 역관과 상인의 무리와 어울려 재물과 여색을 탐하여 전혀 행검行檢(점잖고 바른 품행)이 없었으니, 청컨대 민암을 삭탈관작하여 문외출송 하시옵고, 민종도는 원찬遠竄(멀리 귀양보냄)하시옵소서."


숙종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이제 시작이었다. 벼르고 벼른 칼끝이 보였다. 어심이 허적에서 떠난 것을 알아차린 서인들이 인정사정 없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계달한대로 하라."


숙종은 바로 심유를 내보내고, 신임 대사간 유상운을 들였다. 그간 서인들이 벼르고 벼른 탓에, 그들은 임명된 지 고작 하루만에 부랴부랴 의관을 갖춰서 사은을 거행했다. 그리고 사은례를 마치기 무섭게 남인들을 탄핵하는 계서를 들고 와서 아뢰더니, 유상운 역시 득달같이 계서를 들고 와서 아뢰는 참이었다.


"전 교서정자 허견은 성품이 음적陰賊(음험하여 남을 해침)한데, 그나마 문필을 겸한 덕에 아비의 적자가 없는 것을 기화로, 아비의 권력을 빙자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사옵고, 여기저기 청간請簡(청탁편지)을 돌려서 조선팔도 각지에서 뇌물을 수로로 또 육로로 옮기고, 상인에게 온갖 금을 약탈하고, 영남의 역참에서 백명도 넘는 관노를 강탈하였으며 명류名流(이름난 사람들의 무리)를 친압하고 효변驍弁(무력을 갖춤)을 체결하는 데엔 그 죄상이 무상하니, 비록 엄숭의 아들이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나라의 우환이고 후환이 될 만 하니, 청컨대 절도에 안치시켜주시옵소서."


드디어 허견의 이름이 나왔다. 당상관도, 상참관도 아니었던 당하관 하나를 두고 나라의 우환이니 후환이니 해가면서 절도에 안치하라 한다. 숙종은 가슴 한켠에 거꾸로 얼어붙은 고드름이 녹아 한방울이 가슴 한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계달한대로 하라."


계달한대로 하라. 석정은 자신이 기록을 해놓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두눈을 깜빡였다. 방금 허견에 대한 처분이 내렸다. 절도에 허견을 안치하라. 곧 형조에서 배소단자를 꾸며서 왕에게 올릴 터였다. 그저 얼떨떨하여 자신의 손을 주물러 볼 뿐이었다.


허견을 절도에 안치하라?


"끝났군."


대사간이 조용히 입술을 달짝이며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석정의 귓전에 들렸다. 징그럽던 쇠말뚝이 빠지게 생겼다. 아예 빈주먹을 꽉 쥐고 소리없는 쾌재를 부르는 대사간의 모습에 석정은 자신도 붓을 꽉 움켜쥐었다.


그동안 허적 부자의 전횡은 해도 너무했다. 저들이 사는 인달방 일대가 내수사, 자시, 봉상시 등 왕실 및 나라의 재정을 맡은 관청들이 모조리 인달방에 소속되어 있어 저들 허씨들의 수중에 있는 셈이었다. 왕의 유악을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쓸 정도로 아예 온갖 집기들을 저기서 갖다 쓴다 하였으니. 인달방 인근 연희방에도 사축서가 있어 거기서도 닭, 양 같은 것을 얼마든지 갖다 썼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허견은 차옥과 같이 얼굴 좀 반반하다 싶은 여인들도 가져다 제 욕심을 채웠으니...


그런 말종의 말로는 마치 자신의 해묵은 산증을 순식간에 씻은 듯이 낫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석정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양화당을 물러나오다가, 먼저 나간 유상운과 심유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대는 대화를 들었다.


"고작 귀양? 그걸론 안되지."

"그 개놈이 한 짓에 비하면 형벌이 너무 달콤하지요."

"이제 시작이야, 이제 시작."


석정은 가만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절도에 위리안치하는 것이 이제 시작이라고? 그러고 보니 저들은 배소를 어디로 할 지도 추측하며 즐거워하지 않는다. 있는 죄를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없는 죄도 얼기설기 엮어서 고해바칠 태세였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났다. 그것도 몹시 진한 피비린내가. 오랜만에 피맛을 본 서인들이 배가 터지도록 피맛을 보겠다고 남인들에게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작가의말

조선후기에 써진 연려실기술이란 책이 있는데, 숙종시대 기록을 봐도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참고해서 썼는 지 날짜며 이름, 사건들이 정확해서 참고했습니다. 암탉이 제삿상과 잔칫상을 엎어놓은 일이며, 유인 즉 서인이 스스로 망할 징조라던 허적의 발언은 거기 적힌 일이지만 상상으로 더 살을 붙였습니다. 허적이 작년 10월 중순 운운하는 장면은 기록이 되어 있고, 진홍의 세번째 회임이 난산으로 이어지고 다음날 공주가 죽은 것으로 숙종이 폭발하는 것으로 시점을 잡은 건데 어쩌다 보니 시기가 일치하네요. 당시 백홍관일 이변은 실제 승정원일기에도 적힌 것입니다. 그냥 천문 기록일 뿐인데, 인경왕후 불행은 묘하게도 맞아떨어져서, 무지개를 포인트로 삼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3.01 08:47
    No. 1

    숙종이 당파를 이용한 신하들의 길들이기 달인이라고 알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게 한편으로는 신하들이 그렇게 만든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명분에 집착해서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지금상황과도 비교해볼만 합니다
    쩝~
    중도는 곧 배신으로 비춰지니 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05 01:48
    No. 2

    예, 저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무살 때 숙종이 뭘 얼마나 노련해서 저랬겠나...생각을 해보면 역시 서인 남인들의 본성이 워낙 만족을 모르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3.01 17:13
    No. 3

    서로 물어뜯도록 해서 일을 풀어나가기에는 시간이 참 부족할텐데...
    아아 진홍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3.05 01:49
    No. 4

    엔딩 쓰는 게 부담스럽...ㅠㅠ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4 해의 그림자 193 +4 14.06.28 1,861 36 40쪽
193 해의 그림자 192 +4 14.06.21 2,016 31 41쪽
192 해의 그림자 191 +5 14.06.15 1,838 26 42쪽
191 해의 그림자 190 +5 14.06.09 3,270 38 41쪽
190 해의 그림자 189 +4 14.06.01 2,195 47 41쪽
189 해의 그림자 188 +12 14.05.26 3,055 43 40쪽
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7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0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181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8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6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4 31 42쪽
178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5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2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2 38 36쪽
175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8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9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9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5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3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3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