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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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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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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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10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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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해의 그림자 180

DUMMY

"교지는 다 썼는가?"

"예? 예 전하."

"허면 이리 내놓으라."

"예, 전하..."


숙종이 득달같이 보챘다. 석정은 얼이 빠진 채로 엉거주춤 종이를 집어들어 두광에게 전하였다.


헌데 두광이 종이를 받다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한눈에도 해서체가 아니라 초서체였다. 하루이틀 왕을 모신 것도 아니고, 교지를 초서체로 쓰는 법은 없었다. 두광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종이의 글귀를 살폈다. 워낙 급하게 흘려써서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글씨였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글귀는 호생지독好生之毒이었다.


"이건 교지가 아니라 사초...이온데..."


두광이 머뭇머뭇 석정에게 도로 종이를 건네며 하는 말에, 석정은 귀를 의심하고 두광을 쳐다보았다. 두광이 고개를 바짝 기울여 석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소인도 그 정도 눈은 있어서..."


그제야 석정은 황망히 사초를 받아들었다. 희정당 안 신료들이 일제히 석정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밖에 주서를 데려왔다가 그냥 돌려보낸 터였다. 이미 왕이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서 주서들을 들들 볶은 터라 요즘은 주서들도 몸을 사렸다. 그렇게 최석정을 지제교 겸 사관으로 왕이 붙여두는 통에 우스갯소리로 최주서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최석정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왕에게 사초를 보였다. 조보라면 모를까. 결코 왕의 생전엔 보여서는 안된 사초를.


어이없는 실수가 스스로 생각해도 열없어서 석정은 혀를 빼어물곤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그런데 두광과 눈길을 마주치고 보니 대신들보다도 두광이 더 날카로운 눈살을 쏘아대는 참이었다.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어 호생지독好生之毒이란 글귀를 가리키면서.


"..."


석정은 입을 열지 않고 그대로 손바닥으로 글귀를 가렸다. 함부로 사초를 보여줄 순 없었다. 두광이 석정에게 모종의 눈총을 던지자, 숙종은 의아한 눈길을 석정에게 던졌다.


석정은 이번에는 해서체인지 확인하고 두광에게 교지를 건네었다. 두광은 또 다시 의심스레 교지를 살펴보고 숙종에게로 다가가서 두손으로 공손히 서안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두광을 숙종이 빤히 쳐다보자, 두광은 손가락 끝을 실수인 척 벼루 위 먹물에 찍어서 재바르게 독毒자를 서안 한귀퉁이에 써보이면서 입모양으로 '호생지독'이라 소리없이 속닥였다.


호생지독

好生之毒


숙종은 두눈을 지그시 감으며 코웃음을 쳤다. 이내 두눈을 뜨고 석정을 보는 숙종의 두눈은 독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석정은 물론 신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서안 위 자신의 손을 지켜보는 것을 느끼면서, 숙종은 자신의 옥인을 교지에 내리찍었다.


"그리 알고, 이만들 물러가라."


숙종은 왼쪽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면서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차피 자신이 분부를 하더라도 삼복계三覆啓, 줄여서 삼복三覆이라 하여 사형수의 옥안을 세차례에 걸쳐서 심리하여 복계覆啓하는 절차가 남았으니, 그 복계를 내세워서 불복할 요량인가 싶었다.


왕의 축객령에 영의정 김수항은 고아한 풍모를 잃지 않은 채로 좌의정 정지화와 대사간 김만중의 소맷자락을 틀어쥐고 말없이 희정당을 나섰다.


하지만 장지문이 닫히는 순간, 숙종은 문틈으로 비치는 김수항의 야릇한 눈빛을 보았다. 말 없이 허공을 더듬으며 기쁜 듯, 슬픈 듯 뒤범벅이 되어버린 두눈이 말했다.


설마...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숙종은 그런 김수항의 두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김수항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이대로 자신의 진의를 의심하다 말고 넘어갈 태세였다.


김수항은 숙종 자신을 잘 몰랐다. 알았으면 애초에 송시열과 함께 자신의 도끼질에 찍혀나가지도, 그래놓고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다.


"전하와 뜻을 같이 하신다구요? 법을 굽혀 호생지덕을 펼치심이 옳다구요?"


희정당 계단을 내려오기 무섭게 김만중이 김수항의 등뒤로 바짝 붙어서는 신랄하게 비꼬았다.


장지문이 닫히는 순간 김수항도 문틈으로 왕의 두눈을 똑똑히 보았다. 왕의 유독 짙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비웃는 듯 하였다. 김수항은 머릿속이 혼잡하여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김수항이 머릿속이 어지러워 대꾸도 없자, 만중은 더욱 날카롭게 혀를 놀렸다. 다소 흥분한 듯 금속성을 띤 음성이 김수항의 고막을 후벼팠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을 해보시지요. 정말로 전하와 뜻이 같으십니까?'

"..."

"아들이 반역죄인데 아비가 목숨을 부지하다니요? 그것도 귀양도 안 가고 멀쩡히?"

"멀쩡히?"


김수항이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되받았다. 만중을 보는 그 고요한 눈동자는 풍파에 부서지고 으깨져버린 사금파리 같은 파편들이 뭉쳐 있었다. 닿으면 베이고, 베이면 피가 날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멀쩡히?"

"..."

"멀쩡히?"


김수항의 청아한 음성이 한순간 짓눌렸다. 만중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여 조금 온순해진 눈빛을 띠자, 김수항은 눈시울을 붉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뜻 그리운 빛이 구름따라 두눈에 스쳐갔다. 그는 조근조근 만중을 달래듯이 말하였다.


"어차피 허적은 죽네."

"그 말씀은..."

"자네 말대로 아들이 반역죄인데 아비가 목숨을 부지해봤자...며칠이나 가겠나."

"하오나..."


김만중이 계속해서 불복할 기미를 보이자 김수항은 느긋하고 은근한 말투로 대꾸했다.


"어차피 복계할 것 아닌가?"

"그야...그렇지만..."

"여기 조정에서 허적을 살려두고 싶은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

"자네들이라면 두고보겠는가?"

"..."


김수항이 확인하듯 정지화와 김만중, 이정영에 이어 최석정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 눈길은 이내 최석정에게서 머물렀다. 그는 석정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왕이 허적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하였을 때 석정이 유난히도 당황했던 것이 이상했다.


"제 얼굴에...뭐가 묻었습니까?"


석정은 빤히 쳐다보는 김수항의 눈길에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뻔뻔히 너스레를 떨었다.


"5년만에 보니 자네도 늙긴 늙었으이. 그새 눈가에 주름살이 보이는구먼."

"..."


최석정은 할 말을 잃고 그저 헛웃음을 토했다. 지금 희정당 앞엔 자신보다 주름살이 적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주름살이라니. 자신은 이제 새끼손톱 만큼 작은 주름이 비칠 뿐이지만, 김만중은 이미 눈가에 엄지손톱만큼 그어졌고, 김수항은 아예 자글자글 접혔으며, 이정영은 논두렁 같이 파여서 눈가에 물을 뿌리면 고일 것만 같았다.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주름살을 논하는지. 하지만 김수항은 담백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속에 많이 담아둘수록 겉에 빨리 주름이 진다네."

"네?"

"자네가 그 짧은 주름살에 혼자 담아둘까봐 하는 말일세."

"..."

"우리는 이만 빈청으로 가세나."


석정의 눈가에서 웃음이 가시는 순간, 김수항이 석정을 내버려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는 석정의 두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들은 지금 빈청으로 가서 복계를 논할 터였다. 사형 만이 확실할 뿐 아직 처형이 결정되지 않은 허견과 복선군 등을 위한 복계가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게 생긴 허적을 겨냥한 복계일 터였다. 하지만 도무지 김수항의 속을 알 수 없었다.


- 멀쩡히?

- 멀쩡히?

- 멀쩡히?


그렇게 연거푸 되묻던 김수항의 음성이 아직도 고막을 간질였다. 김수항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자신을 돌아보는 눈빛에서도 뭔가 심중에 접어놓은 의혹이 짙었다. 그 눈가의 깊은 주름살처럼.



"이것도 싱겁고, 저것도 싱겁고...나더러 뭘 먹으라는 거냐?"


숙종은 짜증스레 수라상 대원반에 놓인 반찬들을 해작거렸다. 기미상궁이 곁반에 놓인 기미용 수저를 도로 들려다 왕의 눈치만 보았다. 책상반에 승기악탕을 올려놓고 대원반으로 막 옮기려던 수라간 상궁이 움찔하니 두광의 눈치를 보았다. 두광은 어깨를 움츠리고 입가를 실룩였다. 아무래도 전하의 입맛이 고약하신 모양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는 참이었다.


"그래도 싱겁게 드셔야..."

"차라리 안 먹을란다."


숙종은 마침내 수저를 수라상 대원반에 내려놓아버렸다. 두광을 비롯하여 수라간 상궁과 나인들의 표정도 슬며시 일그러졌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날이 덥다 싶었더니 왕이 입맛이 또 까다로워졌다. 상궁들과 나인들이 두광에게 모종의 눈짓을 하였다. 이럴 때 왕에게 따박따박 반박을 하든, 고분고분 사죄를 하든, 대변해줄 사람은 두광이 유일했다.


"전하?"

"뭐 하느냐. 어서 내어가지 않고?"

"하오시면 밖에 승정원에서 기다리는 중인데...복계를 청한다는데...들라 할까요?"


두광이 장지문 쪽을 곁눈질로 흘기면서 꺼낸 말에 숙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미 복계를 예상하긴 했지만 벌써 와서 기다린다니. 숙종의 얼굴이 이내 험악해졌다.


하지만 숙종의 두눈은 장지문쪽이 아닌 곁에 선 두광을 노려보았다. 이놈이 이제는 저 밖의 승지들을 핑계대고 자신을 협박하니 얄미웠다. 여전히 두광은 고약하게도 으름장을 놓는 참이었다.


"들라...할까요?"

"..."


숙종은 콧김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결국 도로 수저를 들었다. 어쩐지 수라간 상궁과 나인들이 두광에게로 고마움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끼면서, 부아가 치민 숙종은 콩자반부터 민어찜까지, 딱딱한 알맹이든 부드러운 살점이든 유난히도 꼭꼭 씹고 또 씹어 삼켰다. 그와중에도 두광을 뼈째로 씹을 듯한 눈길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수라상을 물리고 숙종은 도승지 유상운을 비롯한 승정원의 관료들을 맞이했다. 이미 식사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도승지와 승지들이 자신에게 할 말을, 또 자신이 대답할 말을 예상하고 또 곱씹었던 숙종이었다. 그저 머릿속에 준비한 말은 그저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 여덟자였다.


"전하, 허적을 고향에 고이 내쳐서 돌려보내시는 것은, 역심을 품은 자들에게 법을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폐단을 가져오는 만큼..."

"내 이미 연석宴席에서 유시諭示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오나 전하..."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오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


숙종은 도승지 유상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때를 봐서 도승지도 교체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말귀를 찰떡같이 알아듣는 이들은 조정에 단둘인가 싶었다. 김석주, 그리고 최석정...


"복계를 해야할 의정부, 의금부, 형조의 관료들이 하나같이 과인에게 승복하고 물러갔다. 허니 도승지도 이만 물러가라."


단번에 자신의 입을 봉해버리는 왕의 심중을 유상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은 변덕이 죽 끓는 듯하였다.


허견과 복선군이 단매에 맞아죽어서는 안된다면서 반드시 사형을 시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더니, 또 허적은 곱게 벼슬만 지워서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는 왕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왕의 말마따나 이미 김수항이 승복한 사안이면 더더욱 자신은 왕에게 따질 주제도 되지 않았다.


두광은 유상운의 붉은 옷자락이 장지문 문턱을 넘기 무섭게 장지문을 닫았다. 흘끔 눈치를 살피니, 왕은 짜증스레 열손가락으로 이마를 긁는 참이었다. 이마까지 핏대가 솟구친 모양이었다.


"두광아."

"예."


자신을 부르는 왕의 옥음에 두광은 어금니를 악물고 답하였다. 두광은 소매춤에서 접선을 꺼내어 왕의 목덜미며 등골이며 열이 식을 수 있도록 부채를 살살 부쳤다. 워낙 몸에 열이 많은 왕 덕분에 두광의 소매춤엔 항시 접선이 있었다.


두광은 열심히 부채질을 해대어 어심을 달래면서, 조용히 웃음을 삭였다. 아까는 워낙 어안이 막혔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마침 왕도 똑같은 글귀를 생각한 건지, 아니면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건지, 왕의 옥음이 하필이면 두광의 머릿속을 딱 짚어버렸다.


"호생지독 好生之毒이라..."

"..."


두광이 흠칫하여 흘끗 왕의 눈치를 살피니, 왕은 가만히 서안의 서랍을 열어보며 뒤척이더니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주지가 다 떨어졌구나."

"비망기를...쓰시게요?"


방금 승정원에서 다녀갔다. 그들에게 교지를 받아쓰게 하면 될 것을, 혹은 그냥 초주지에 써도 될 것을, 왕은 구태여 비망기에 쓸 종이를 찾았다. 두광은 어쩐지 기분이 오싹하여 무르춤히 뒷걸음질쳤다. 다시 왕의 날선 눈빛과 마주치자 두광은 수라상을 들일 때의 호기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황망히 장지문을 나섰다.


두광이 도련저주지를 챙겨오자, 숙종은 그새 머릿속으로 글귀를 생각해 두었는지, 거침 없이 붓을 놀렸다. 한눈에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해서체였다. 순식간에 비망기를 다 쓰고서 숙종은 붓을 벼루 위에 툭 놓았다.


두광은 종이를 받아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다 다시 주춤했다. 반듯하고 수려한 해서체인데도 짙은 독기가 두눈을 쑤셔들었다.


楠以王室至親,

自孝廟、先朝養育宮中,

蒙被不世之恩。

渠雖謀逆,

予不忍斷以邦刑,

特爲處絞


이남은 종실지친으로서

효묘 이래 先朝(현종)조에 궁중에서 양육하여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모역을 했다 해도

내가 차마 방형(나라의 형률)로 처단할 수가 없으니

특별히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라.


두광의 얼굴이 대번에 핼쑥해졌다. 목맬교絞? 왕족인 복선군을 사사賜死도 아니고 교형에 처한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처사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복선군은 두광 자신도 어릴 때부터 먼 발치로, 또 가까운 발치로 보고 자란 인물이었다. 왕의 골육지친이자, 누구보다 왕족다운 왕족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복선군이 종종 궐에 들어 연통을 넣을 때는 몇마디씩 말을 섞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교형에 처해지다니.


두광은 왕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더 충격이 컸다. 왕에겐 3촌의 숙부도, 4촌의 형제도 없었다.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 5촌인 삼복三福, 즉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었다. 그런데 복선군을 교형에 처하라 비망기를 쓰셨다. 곧 나머지 복창군과 복선군도 연좌를 물어서 교형에 처할 것이 자명했다.


"뭐 하느냐, 어서 승정원에 가져가지 않고?"

"..."


두광은 눈을 실룩이며 입을 비죽였다. 임창군 형제는 목숨을 보전시켜주신 전하께서, 복선군 형제는 처단하기로 어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걸 승정원에 가져다주는 순간 제대로 피바람이 불 터였다. 그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가락끝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어서."


얼음 같은 옥음에 두광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차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왕족인 복선군을 곱게 사약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졸라 죽일 작정이시니 그저 두려웠다.


복선군이 교형...그럼 허견은?


왜 허견에 대한 처분은 남겨두신 건지. 허적을 용서했듯 허견도 용서하실까.


그래서는 안되었다. 복선군은 몰라도 허견은 죽어도 싼놈이었다. 유부녀를 납치해서 욕보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결코 세상에 살려둬선 안될 놈이었다. 지은 죄에 비해 참 오래도 살았다.


"하오면..."


두광은 말끝을 흐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광이 비망기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주섬주섬 소반에 비망기를 받쳐놓고 두광이 장지문을 여는 순간, 그 틈새로 정오의 햇살이 희정당 안으로 짓쳐들어왔다.


"문을 닫지 말거라."


숙종은 잠자코 앉아서 문틈으로 쑤셔드는 춘사월 정오의 햇볕을 즐겼다. 구들에 불을 때우지 않는데도 방바닥이 순식간에 뜨끈뜨끈해졌다. 가만히 손을 뻗어보니 역시나 뜨거웠다. 춘사월의 햇볕이 어떻게 이리도 뜨거운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이 햇볕 뿐인가 싶었다. 이렇게 뜨거운 것이 자신의 심장을 점령한 분노려니 싶었다. 이렇게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심장 속 불꽃이려니 싶었다.



"그래서, 복계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주벽主壁은 김수항이, 동벽東壁은 정지화 및 이정영이, 서벽西壁은 김만중이 앉아서 날선 눈빛으로 도승지 유상운을 맞이했다.


왜 나만...유상운이 답답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복계를 추진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다그치는 참이었다. 의정부와 의금부, 형조나 사간원에서 복계를 논할 것을, 오히려 왕의 면전에선 뜻을 같이 한다느니 호생지덕이니 하고 입에 발린 소리나 해놓고선 뒤에선 자신을 닥달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영감! 영감! 영감!"


빈청 안에서 영감이라 불릴 사람은 도승지 유상운과 대사간 김만중 뿐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걸걸한 음성이 장지문 밖에서 들리더니 승지 윤계尹堦가 하얀 두루마리를 두손에 들고 헐레벌떡 뛰쳐들어왔다. 반백의 수염이 뒤엉킨 채로, 빈청 안을 돌아보고 자신의 상전인 도승지 유상운을 찾는 시선도 엉클어졌다.


"윤승지? 무슨 일인가?"

"도대체..."

"뭔가 그건?"

"..."


윤승지는 얼이 반쯤 빠진 채로 입술만 달싹였다. 그는 유상운을 보자마자 가쁜 숨을 내쉬면서 손안의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윤계의 손으로 시선을 내린 유상운은 두루마리의 재질이 닥나무껍질로 만든 것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도련저주지搗鍊楮注紙였다. 이미 이번 옥사를 통해 왕의 비망기를 여러번 접한 터라 익히 아는 재질이었다. 눈감고도 만져보면 알 수 있을 거라 자부할 정도로 잘 아는 종이였다.


"또...비망기인가?"

"보, 보시지요."


도승지 유상운이 가만히 종이를 쓰다듬으면서 묻는 말에 윤승지는 비망기가 마치 불에 달군 쇳덩어리라도 되는 듯이 황망히 손끝을 떼었다. 유상운은 그런 윤승지를 책망하는 눈길로 흘겨보곤 잠자코 비망기를 펼쳐들었다.


비망기가 맞았다. 너비와 길이 각각 1척 4촌에 1척 6촌으로 역시 익숙한 규격이었다. 하지만 비망기인가 아닌가를 가늠할 때가 아니었다. 표구도 안된 이 두루마리는 여느 비망기와 달랐다. 익숙해진 종이 재질을 쓰다듬으면서 시선으로도 쓰다듬던 그는 이내 목맬교絞자에 혼이 나가버렸다.


"대감..."


유상운도 아무 말도 못한 채로 김수항을 돌아보았다. 이 안에 대감은 셋이나 있었다. 김수항, 정지화, 이정영까지 합이 셋인데도, 유상운은 그저 애매한 호칭으로 김수항을 부르면서 비망기를 펼쳐보였다.


"교絞...자입니다..."

"교?"


김수항이 두눈을 깜빡이고 비망기의 글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실사변糹에 사귈교交자가 합쳐진 글자의 뜻은 무시무시했다. 왕족인 복선군을 사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교수형을 내렸다.


"그래도 왕족인데 어찌..."

"광해도 자신의 형제들에겐 왕족이라 하여 사약에 그쳤을 뿐인데..."

"전하께는 형제도 친척도 아닌 신하라, 이건가..."

"무섭군요."


얼떨떨한 눈빛으로 다시금 목맬교絞자를 내려다보면서 모두 몸서리를 치는 가운데, 김수항은 허견의 처결에 문득 생각이 미쳤다.


"복선군이 교수형이라면...허견은?"

"..."


이정영은 차마 벨참斬자를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도승지 유상운은 그나마 입모양이 좀더 분명했지만 역시 목소리가 목청에 걸렸다. 그런 그들을 비웃듯이 김만중이 차갑게 목소리를 내었다.


"당연히 참형이겠지요. 벨참斬자가 똑똑히 적혀서. 그것도 군기시에서 부대시참不待時斬으로."

"..."

"상투를 줄로 묶어 머리가 땅에 오도록 비스듬히 엎어놓고, 장대에 이어놓은 다음, 망나니가 월도를 휘둘러 목을 자르면, 그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가 장대의 줄을 타고 높이 올라가서, 지나는 백성들이 똑똑히 볼 수 있겠지요. 피가 굳기도 전에 그 밑을 지나갔다가는 갓이나 깃에 피가 뚝뚝 떨어져서 묻을 수도 있고."

"..."

"일벌백계란 이런 것이지요."

"..."


김만중이 참형 장면을 붓끝이 아닌 혀끝으로 그려내자, 유상운과 윤계, 이정영은 눈앞에 그려지는 장면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때였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또 다른 좌부승지 신후재가 또 한장의 비망기를 들고 안으로 한발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귀신에게 홀렸는지 안색이 온통 핼쑥했다. 신후재는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주춤했다. 대신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몸에 꽂혀들었다.


"또 뭔가?"

"..."

"비망기를 환수하신다던가?"

"..."

"허견의 처분이 내린 거지?"

"..."


마냥 대답을 못하는 신후재가 답답하여 김수항, 정지화, 김만중이 저마다 질문을 바꾸어 대답을 보채었다. 신후재는 비망기를 들고 달려와서도 차마 펼치지 못한 채로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이 사람이..."


도승지 유상운이 신후재의 손에서 비망기를 나꿔챘다. 그리곤 마뜩찮은 눈길로 신후재를 흘겨보곤 비망기를 펼쳤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하고 올곧은 서체가 유상운의 두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토록 유려한 서체에서 한획한획이 무시무시한 독기를 내뿜으며 유상운의 눈코입을 죄다 막아버렸다. 그중 단 네글자가 유난히 유상운의 눈시울을 콕콕 찔러들었다.


許堅爲轘

허견을 거열車裂(능지처사)에 처한다.


만중은 이미 자신이 부대시참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는데도 유상운이 공포로 질리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만중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비망기를 엿보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충격받은 눈빛으로 김수항을 쳐다보았다.


김수항은 아직 비망기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모두 넋이 빠진 채로 자신에게 비망기를 보여줄 생각도 못하는 모습들을 그저 지그시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유상운이 비망기를 자신에게로 뒤집어보이기도 전에 이미 내용을 짐작했다.


"혹 허견을 능지처사 시키신다는가?"


이미 빈청 안이 얼어붙었다. 모두 입시울이 달라붙어 달싹이지도 못했다. 대담한 김만중조차도 할 말을 잊은 모양이었다.


능지처참이 전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잔인하여 대역죄의 경우에도 함부로 적용하지 못하고서 참형에 그칠 뿐이었다. 오직 부모나 형제를 죽여 천륜을 어긴 자만 능지처사에 처했는데, 능지처사의 사례는 수십년에 한두번 나올까 말까 했다.


김수항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왜들 그리 놀라는가? 원래 대명률大明律에도 모반한 자는 능지처사, 16세 이상 80세 미만의 아비와 아들은 연좌하여 교수형, 그 숙부와 조카는 유流 삼천리에 위리안치에, 60세 이하의 그 어미는 노비가 되는 법. 전하께선 그 대명률로 복선군과 허견의 처결을 명한 것일세."


김수항은 한번은 짐작을 했던 것처럼 차분하게 대명률을 들어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팔다리 자개미에 온통 소름이 돋은 유상운과 김만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실제로 대명률을 따라 능지처사에 처한 일은...지극히 드뭅니다. 어디까지나 친족을 살해한 이들만, 그 죄상이 끔찍했던 자들만 능지처사에..."

"사실 허견도 직접 전하를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그저..."

"허견이야 그동안 쌓아둔 죄가 있지 않은가?"


김수항은 침착하게 대꾸하곤 가만히 돌아섰다. 하지만 허공을 보는 그 눈시울은 이미 잘게 경련했다. 한번쯤 짐작은 했었다. 왕이 허적에 대한 적개심이 깊다는 소문을 그도 들은 탓에 혹시나 했었다. 그래도 아니다 싶었다. 주상의 보령이 이제 스물. 그리 어린 연치로선 지극히 인자하거나, 지극히 잔인하거나, 둘중 하나겠지만...그래도 후자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후자라면, 이 어린 왕은 자신들의 머리꼭대기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두팔의 자개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가만히 두손을 소맷부리 속으로 깊숙하게 팔짱을 꽂았다.


공포로 동공이 커졌던 석정의 두눈이 떠올랐다. 어쩌면 최석정은 진작 짐작했을 터였다. 왕이 그 아비 허적에게 벼슬만 깎아서 백성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선처를 하였지만, 그 아들 허견에겐 가장 지독하고 끔찍하게 처벌을 할 것임을. 그 의미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수항 자신은 알았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최석정보다도 더 뼈저리게 알았다.


"우리가...성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김수항은 허공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이 자리에 있는 정지화와 이정영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였고,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속에 자리하는 천공穿孔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자신의 심장 속엔 남들은 잘 모르는 구멍이 하나 있다. 그 구멍으론 해마다 정월 초엿새만 되면 아기울음이 들린다. 생후 스물하루만에 죽은 막내 칠룡이의 자그마한 얼굴이 보인다. 그 딱딱하게 굳은 체온이 잡힌다.


그 천공으로, 지금은 허적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쯤 허적은 이 잔인한 처분 앞에 심장이 찢겨나갈 터...



해거름이 되어서야 서간의 문이 열리고, 허적은 문턱에 이르러 가만히 서간 밖을 내다 보았다. 서간 밖엔 그저 허적을 방면하라는 영을 받들기 위해서 최석정과 금부도사가 대기하는 참이었다. 석정의 어깨너머로 흐리터분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어, 신시申時에서 유시酉時로 넘어가는 시각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때보다 해는 시뻘겋게 반짝였다. 마치 핏물 속에 손가락을 가운데에 찔러넣어 휘젓는 것처럼 해가 핏빚으로 회오리치는 것이, 어쩐지 착각인가 싶었다.


허적은 자신을 방면하는 최석정과 의금부도사의 얼굴을 데면데면 쳐다보곤 아무 말도 없이 서간을 나섰다. 왕이 자신을 벼슬만 지워서 방면했다. 어쩐지 그 교지의 깎을삭削자를 굳이 지운다는 뜻으로 석정이 발언한 것이 찜찜했다.


허적은 최석정의 옆을 지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척 하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왕의 지근에 있는 최석정이니 누구보다 어심을 잘 알 터였다. 왕이 진정으로 자신을 예우하려 벼슬만 깎아서 놓아주는 것인지, 그 속을 가장 투명하게 들여다볼 터였다.


헌데 줄곧 최석정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회피했다. 그런 최석정의 곁을 지나가려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허적은 석정의 눈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있을 리가요."


맺고 끊는 것이 눈물겹게 정확한 최석정이었다. 이미 허적이 삭탈관직되자 호칭도 대감大監이나 상국相國에서 대번에 어르신으로 바꿔버렸다. 그런데도 허적의 눈길만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참이었다. 허적의 깊숙한 시선이 동공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꼈는지, 석정은 슬며시 시선을 떨구어 목화의 피묻은 앞코를 내려다 보았다. 죽은 홍유하의 원혼이 자신의 목화 앞코에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어르신?"


허적은 석정을 흘겨보고 걸음을 옮겼다. 보름사이 사람이 부쩍 변한 느낌이었다. 괜한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좀더 자신에게 방자해진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짐짓 방자한 태도를 꾸며서 자신을 자극시킨 것 같기도 했다. 제놈이 아는 게 뭔지 혼자만 꿍쳐놓은 것이 괘씸하기도 했다.


그렇게 허적이 석정에 대한 반감을 삭이며 의금부 중문을 지나 망문에 이르니, 어쩐지 눈에 익은 별군직別軍職 한명이 말 두필을 대령하고 망문 사이에 서 있다가 자신에게로 한발 다가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자네는..."

"별군직 이입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는 이입신을 보니 허적은 또 한번 불안을 느꼈다. 전하께서 보낸 사람이다. 별군직 자체가 왕을 호위하는 일을 하는데다 신하들의 비리를 남모르게 잡아내는 일도 했다. 꼭 저렇게 생긴 얼굴이 자신이 양화진으로 가든, 인달방으로 가든 몰래 뒤를 밟아 기찰을 했던 것도 같았다.


"자네가 왜?"

"전하께서 은밀히 독대를 하고자 하십니다."

"독대?"

"예, 저를 따라오시지요."

"독대라...대신을 독대를 하셔선 아니 될 말."


허적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자 이입신은 언짢은 눈빛으로 흘겨보더니, 이내 시건드러진 턱짓으로 비웃었다.


"노인장께선 이제 대신이 아니시지요. 전하께서 일개 백성을 독대를 하든 뭘 하든 아무 문제 없는뎁쇼."

"..."


허적은 할 말을 잃었다. 왕과 대신은 독대를 해선 안된다. 하지만 이 시건방진 무관의 말대로 자신은 이제 대신이 아니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했다. 헌데 왕은 왜 자신을 보려는 것인가. 정말로 이번 역모를 몰랐는지 한번 더 확인을 해보려는 것인가. 어쩐지 가슴 속에 묵직한 납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왕과의 독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서라도, 아들 견이의 선처를 구해야만 했다. 그 전에 왕의 의도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왜...나를 보자고 하시나?"

"제가 압니까?"


별군직 이입신은 자신의 고약한 반응에도 허적이 잠자코 있자 힐끔 눈길을 돌려 허적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곤 크게 선심을 쓰듯이 뻐기며 답하였다.


"뭐, 전하께서 대감, 아니 나리께 아드님을 살릴 기회를 주시겠다 하셨지요."

"..."


허적의 노둔한 두 눈알이 경련하듯 떨렸다. 전하께서 아들을 살릴 기회를 주신다 하셨다. 타는 갈증으로 바짝 마른 입속에 순식간에 군침이 고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선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무려 근 6년간을 극진하게 보필한 충정을 왕이 알아주었나. 견이를 살릴 기회라니.


"정말...인가?"


허적은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천천히 되물었다.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작년 늦가을 무렵, 중궁이 열달 뱃속에 품었던 아기가 생후 하루만에 숨진 그날, 백홍관일白虹貫日의 징후가 하필이면 역심을 비추던 그때, 자신을 쏘아보던 왕의 눈빛은 살의 그 자체였다. 헌데 왕은 자신한테도 그저 삭탈관직만 하여 방면해 주었고, 아들한테도 목숨을 건질 기회를 주겠다 하였다. 왕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가시지요."


이입신의 독촉에 못이겨 허적은 쭈뼛쭈뼛 말위에 올라탔다. 타고 보니 유독 말갈기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는 것이 제법 귀한 내구마를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허적은 손을 뻗어 말갈기를 조용히 어루만졌다. 헌데 이입신은 대궐 쪽이 아닌 광통교 쪽으로 말을 몰았다. 허적은 두눈을 실룩이며 미심쩍은 눈빛으로 이입신을 쳐다보았다.


"혹여 날 보자는 이가 전하가 아니라 병판 아닌가?"

"네?"

"대궐은 북쪽이고, 재산루는 남쪽인데, 네놈은 남쪽으로 가질 않느냐? 혹시 날 속여서 김석주와 만나게 하려는 거면...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재산루가 아니라 황토마루黃土峴으로 가는 길인뎁쇼."


이입신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황토마루?"

"도성 전체를 보려면 재산루로 가고, 도성 중심을 보려면 황토마루로 가라는 말이 있다지요. 전하께선 모처럼 전망 좋은 곳에서 오붓하게 나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시지요."


이입신은 말을 타고 황토현 쪽으로 뚜벅뚜벅 말을 몰았다. 견평방을 나선지 일각이 되어서야 겨우 허적은 이입신을 따라 황토현에 이르렀다. 관악산에서 산불이 나더라도 궐 주변으로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예방 목적으로 돈대처럼 쌓아놓았다는 황토 언덕이지만, 여기에 서면 궐 주변의 장관이 손에 잡힐 듯 들어와서 이제는 전망대가 되어버렸다.


이곳 황토마루가 허적의 발치에 닿자, 너비만 해도70척尺 안팎으로 탁 트인 대로가 광화문부터 흥인문까지 온갖 관아와 집채들을 낀 전망이 코앞에 닿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허적의 두눈에 어느 선비의 앳띤 선비의 옆얼굴이 들어왔다. 검디 검은 명주로 지은 행의를 입고, 한눈에도 귀한 황칠선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남쪽을 향해 돌아서서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그 뒷태가 눈에 익었다.


"전하?"


선비가 뒤를 돌아보며 부채를 탁 접었다. 엷은 웃음이 입시울에 걸렸지만, 눈시울엔 걸리지 않았다. 유난히도 짙은 눈동자가 그저 고요히 반짝일 뿐이었다.


허적은 두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전하께서 자신을 만나러 황토현까지 친림하실 줄은 몰랐다.


"오랜만이오."


왕의 옥음은 은근했다. 허적은 황망히 말에서 내렸다. 부복을 하려 하였지만, 이내 왕의 옥음이 그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되었소. 사람들이 우릴 이상하게 보겠소."

"..."

"사람을 부리는 법은 오직 권할권勸과 징벌할징懲, 그 두 글자만 있다지. 허니 이리 와서 경치나 구경하시오."


숙종의 권유에 허적은 조심스레 그 뒤로 다가들어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광화문에서 흥인문 일대가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특히나 걸어서 반각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의 경치는 그대로 시야에 닿았다. 조갑소造甲所, 궁전소弓箭所,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 등 온갖 군기시의 시설들이며, 그 앞 대로에 수많은 백성들이 뭉게구름처럼 운집한 장관이 똑똑히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군중들 한복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내 한명이 다섯필의 말에 묶여 있는 모양이었다.


능지처사?


허적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참형은 군기시, 교형은 당고개란 말이 있었다. 현재 이 군기시 앞에서 거열을 당할 자는 단 한명, 자신의 아들 뿐이었다. 왕족인 복선군은 그저 사사奢肆나 교형에 처해질 것이고, 아들은 그보다 천한 신분이니 참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런데 머리와 두손, 두 다리까지 각각 밧줄에 묶인 채로 군기시 땅바닥에 엎드린 저 사내는 비록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누군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겨, 견..."


설마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려서 왕을 보았다. 순식간에 두눈에서 불안이 소용돌이치는 자신과는 달리 옆에서 말없이 군기시 앞을 내려다보는 왕의 두눈은 그저 잠잠하고 고요했다.


"맞소. 죄많은 그대의 죄많은 아들이지."

"전. 전하...!"


허적은 두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목을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두눈이 실핏줄이 터지면서 튀어나왔다. 그가 한발 왕에게로 다가서자, 이입신이 민첩하게 환도를 빼어들고 허적을 겨누었다. 여기저기 숨어있던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허적에게 칼을 겨누고 활을 겨누었다.


"이러려고...저를 불러냈단...말입니까? 이러려고?"


허적의 입속에서 소리가 잘근잘근 씹혔다. 당치도 않은 역모죄였다. 직접 왕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왕의 불행을 대비했을 뿐이었다. 왕이 죽으면 복선군을 옹립하겠다...그 정도 실없는 수작을 벌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왕이 자신을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잔인하게 아들에게 능지처사의 처분을 내리고, 자신을 군기시에서 가장 가까운 이곳으로 불러서 그 광경을 직접 목도하게 하였다.


"이래놓고...아들의 목숨을 살릴 기회를 주시겠다?"


치를 떠는 허적을 돌아보며 숙종은 칠흑처럼 짙은 눈동자로 차갑게 대꾸했다. 어차피 죄인의 아비요, 백성의 신분이니 더는 재상으로 예우할 것도 없었다.


"나는 너에게 허견을 살리겠다 말한 적이 없다."

"뭐?"

"네게 또 다른 아들이 있다지?"

"..."


왕의 물음에 허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미 왕은 허후의 존재까지 알았다. 어차피 김석주도, 김석하도 이미 허후의 존재를 알았으니 언제든지 왕의 귀에 들어가긴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도 아들을 통명문에 방치해두었다. 헌데 지금 왕은 허견을 능지처사로 사지를 찢어죽이려 하는데다, 심지어는 또 다른 아들 허후까지 그 목숨을 틀어쥐었다.


"무슨 짓을...하시려고..."


숙종은 차갑게 응수하며, 허적의 두눈을 직시했다.


"말했지 않은가. 사람을 부리는 두가지 방법은 권勸이거나 징懲이라고."

"..."

"마지막 하나 남은 아들, 허후라도 살리고 싶으면 여기서, 똑똑히 지켜봐라. 네가 그리 싸고 돌던 허견의 최후를."

"..."


왕은 지독한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명하고서 차갑게 돌아섰다. 그리고 황토바닥에 그 발자국을 꾹꾹 누르듯이 걸음을 옮겼다. 허적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왕의 뒷모습을 노려보는데, 어느 틈에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웬 무관 놈 둘이서 아들 허후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사지에 차꼬를 채운 채로 시야를 가로막았다.


"후야!"

"..."


무관놈이 허후의 목덜미에 시퍼런 비수를 바짝 들이대었다. 당장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허후는 두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자리에 끌려왔는지 똑똑히 인지한 탓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아비는 형이 죽는 장면도 두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서라도 죽어버리고 싶었다.


"부자상봉에 대화가 없어서야 곤란하지."


무관 한놈이 허후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주었다. 허후는 벼르고 벼른대로 당장 혀를 깨물고 자진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아비의 두눈이 어쩐지 심장에 박혀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후야..."


허적은 간절히 둘째 아들 허후의 이름을 불렀다. 차마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는 아들을 보니 더욱 애가 탔다. 이미 왕은 자기들 부자를 응징하려 칼을 빼들었다. 그 결과가 이토록 참혹한 세 부자의 참상이었다. 허적은 두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저주스런 왕의 면상도 흐려졌다. 그는 두눈을 깜빡여서 눈물을 떨구고는 이를 악물고 씹어먹듯 숙종에게 물었다.


"허후는...살려주실 것입니까?"

"물론."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적은 목울대가 아릴 정도로 힘겹게 침을 삼키고서 군기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현기증이 일며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는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누런 흙이 두손바닥에 잡힌 채로, 아들 허견의 최후가 시야에 똑똑히 잡혔다.


느낌 탓인가. 군관 한명이 다섯필의 말에 묶인 아들에게 다가가더니, 아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이며 눈길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이쪽을 보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들이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발버둥을 치자, 그의 사지에 연결된 말들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두 팔과 두 다리에 묶인 동아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안돼...안...."


차마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공포와 분노로 고개를 숙인 채로 부들부들 떠는 허적의 등줄기 위로, 왕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이곳 황토마루에 옴짝달싹 못하게 해놓고서 홀로 자리를 뜨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두눈을 감는 것도 허락지 않겠다."

"..."


서릿발 같은 왕의 옥음에 허적의 등줄기가 그대로 굳었다. 허후는 살려주시겠다? 그 대신 여기서 아들 허견의 참혹한 죽음을 지켜봐라? 이토록 잔혹한 이 어린 것은 누구인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왕의 옥음이 고막을 파고 들었다.


"그것이...너와, 네 아들의 업보다."


그때 허적은 처음으로 후회했다. 중궁을 지워버릴 것이 아니라 저놈을, 저 왕을 먼저 지워버릴 것을, 왕을 먼저 치워버릴 것을. 갈기갈기 찢어죽여버릴 것을.


작가의말

1. 실제로 1680년 4월 12일자 실록을 보면 복선군과 허견의 옥사에서 숙종은 허적을 교수형에 처하지도, 귀양을 보내지도 않고 백성의 신분으로 풀어준 바가 있습니다. 그날 바로, 허견의 능지처사를 집행했습니다.


2. 열려실기술에 보면 허적이 작년 10월 중순부터 왕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인경왕후의 세번째 회임이자 두번째 출산이 잘못된 것이 1679년 10월 22일 경입니다.


3. 그 기록들을 토대로 상상으로 재구성한 장면입니다. 좀 잔인하지만, 저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추가로, 허견의 능지처사를 집행할 때 유독 해가 붉었다고 실록에 따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기록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색적이라는 석자 입니다. 무슨 징조라도 되나, 무슨 의미라도 있나 해서 찾아보았는데 잘 모르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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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2

  • 작성자
    Lv.99 눈겨산환
    작성일
    14.04.10 12:15
    No. 1

    장희빈이 워낙 유명(?)해서인지, 숙종이 상대적으로 폄하된 느낌이지만, 냉철하고 뛰어난 군주의 면모를 보였던 역사속 숙종이 작품에서 그대로 부활한 듯~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7 00:29
    No. 2

    고맙습니다. 캐릭터와 인물관계는 역사속 실물에 근접하게 재현해내고 싶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4.10 12:40
    No. 3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만 숙종 개인의 능력도 탁월했지 않았나 합니다.
    스물에 저런 독한놈이 되려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7 00:30
    No. 4

    숙종은 개인사가 정말 불우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안 미치고 버텼나 싶네요. 역시 독종이라서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4.10 14:01
    No. 5

    장희빈과 관련된 부분을 빼면 숙종과 관련된 직접적인 글들이 많지 않을 텐데 기본적인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서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하시는지... 참 감탄이 나옵니다.
    꺽정이가 숙종의 복심이 맞기는 맞는것 같은데... 답답하네요.
    허견이가 아주 처참하게 죽게 되어서 그나마 후련하네요.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7 00:33
    No. 6

    고맙습니다. 그나마 숙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평전이나 방송물이 많은 듯 해요. 하지만 숙종을 외면하고 쓴 것 같아서, 자꾸 숙종 얘기를 쓰고 싶어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4.10 15:36
    No. 7

    글을 읽는 것으로만도 섬찟섬찟하네요
    허적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이 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7 00:35
    No. 8

    섬뜩하게 그리고 싶었습니다...예전에 미스테리나 스릴러 좋아하던 기질이 남아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4.04.11 00:31
    No. 9

    소름 소름 소름!!! 역시나 절 빨아들이는 필력!
    오늘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7 00:36
    No. 10

    고맙습니다. 댓글 보니 더욱 힘이 나네요.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4.11 09:14
    No. 11

    말 많고 탈 많단 허견은 결국 지은 죄 이상으로 당하는군요...

    숙종도 확실히 자기 울타리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독해지는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5.07 00:37
    No. 12

    예, 울타리를 위협받으면 사나운 맹수로 돌변하는 듯...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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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해의 그림자 193 +4 14.06.28 1,862 36 40쪽
193 해의 그림자 192 +4 14.06.21 2,018 31 41쪽
192 해의 그림자 191 +5 14.06.15 1,839 26 42쪽
191 해의 그림자 190 +5 14.06.09 3,270 38 41쪽
190 해의 그림자 189 +4 14.06.01 2,196 47 41쪽
189 해의 그림자 188 +12 14.05.26 3,055 43 40쪽
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9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1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9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6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5 31 42쪽
178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5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2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3 38 36쪽
175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8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9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9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6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3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4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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