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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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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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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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6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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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88

DUMMY

"네번째 회임 감축...드린다 전해달라?"


석정이 양화당 너럭바위 앞에서 붉은 석양을 등지고 조용히 허적의 유언遺言을 고하자, 숙종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곰곰 곱씹었다. 씹고 또 씹을 수록 숙종의 눈시울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숙종은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 채로 너럭바위 주변을 서성였다. 이미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다 못해 통명전과 양화당 뜨락마저 붉게 물들였다. 숙종이 발을 딛는 너럭바위도 마냥 불그스름했다. 덕분에 발치의 그림자도 벌건 느낌이었다. 숙종은 발밑도, 그림자도 온통 핏빛인 현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키고 싶었다. 지켜야만 했다. 네번째 회임은 중궁을 칼날 위에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무도 검은 손길을 뻗칠 수 없도록 중궁의 회임을 극비에 부쳤다. 회임懷姙의 회懷자도 입에 담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자경전도, 만수전도, 중궁의 회임을 몰랐다.


이상했다. 두분께도 기밀로 한 일인데, 벌써 새어나갔다.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나뭇가지에 모가지만 달랑 걸린 신세였던, 한줄기 바람도 들지 않을 것처럼 아무도 찾지 않던, 그 허적의 귀에 들어갔다.


"허적이 안다는 건...두분도 이미 안다는 뜻..."


한참을 초조히 서성이며 되짚어보던 숙종은 문득 눈앞의 최석정이 생각보다 조용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비 맞은 중처럼 홀로 어정거릴 동안 최석정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두눈을 내리깔고 너럭바위만 내려다보았다. 너럭바위에 비친 자신의 도깨비 같은 그림자를 그저 응시만 하면서.


"헌데, 사부는 왜 아무 말도 없소?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는 거요?"

"..."

"하고 싶은 말도 없소?"

"..."


석정은 여전히 시선을 너럭바위에서 떼지 않았다. 머릿속이 뒤엉켜서 한올도 끄집어낼 수 없었다. 인달방에서 여기 양화당까지 반시진 가까이 걸어오면서도 생각이란 것을 하질 못했다. 그냥 엉킨 실을 풀면 풀 수록 계속 엉키고 또 엉키는 꼴이었다. 그저 반질반질한 너럭바위에 어린 자신들의 그림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혹시 삐친 거요?"

"..."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말하고 싶지 않은 변덕도 들었다. 아무래도 조금은 야속한 심정인 모양이었다. 석정은 그저 싱겁게 웃기만 했다.


"뭐요?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정말로 삐친 거요?"

"전하께선 일부러 중궁전하의 회임을 숨기셨습니다. 천신賤臣에게도..."

"또한 척신戚臣(성이 다른 친척인 신하)에게도..."


숙종은 석정의 말을 되받았다. 김만기와 김석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석정은 왕이 자신에게까지 중궁의 회임을 감춘 이유를 확인하고 싶었다. 천신인 자신, 그리고 척신인 저들에게 회임을 감춘 것은 다른 이유에서일 터였다.


"아니...저한테 쉬쉬하신 것은 다른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지요."

"다른 목적?"

"중궁전하의 회임을 감추면서까지, 허적의 목숨을 거두고 싶으셨던 것이...아닙니까? 제가 알면, 국경에 저촉된다, 그리 반대할 것이 뻔하니까...맞습니까?"


석정은 정곡을 찔러 숙종에게 여쭈었다. 모름지기 국경과 국기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왕실에 경사가 있으면 사형수들도 사면을 하는 법이었다. 정히 사면할 수 없는 사형수는 좀더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왕은 석정 자신이 알면 원리원칙대로 국경國慶을 내세워서 형 집행을 좀더 미룰 거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 국경과 국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국경과 국기엔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아뢸 당시, 왕이 유독 눈에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자신을 쏘아보며 곱씹듯이 되물었던 이유를. 그리고 왕은 석정의 의문에 속시원히 대꾸했다.


"자갈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잖소."

"..."

"돌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거요."

"..."

"분하오. 더 오래 숨길 수 있었는데. 더 오래 속일 수 있었는데. 더 시간을 벌 수 있었는데."


석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왕의 옥음은 미안함보다도 불안함이 앞섰다. 오른손엔 주먹을 쥔 채로 왼손 바닥을 꾹꾹 누르면서, 이성으로 억누르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흘리고 만 음색이었다.


"이번 만큼은...중궁의 회임이 잘못되면 아니되오. 무려...네번째요."

"..."


결의가 깃든 눈빛으로, 숙종은 핏빛 노을을 바라보았다. 이제 허석을 사사하였으니, 다음엔 윤휴였다. 다 갈아엎어야지 중궁과 용종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렇게 모조리 화근禍根이란 화근은 모조리 뽑아버릴 결심으로 핏빛 눈길을 노을에 두는 숙종을 석정은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왕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하지만 그렇게 피를 흘려도 지킬 수는 있을까. 오히려 복선군과 복창군, 허적까지 더욱 짙은 핏빛 저주를 중궁에게 다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그때 누군가 낑낑대며 뒤뚱뒤뚱 걸어오는 기척이 두사람의 고막을 긁었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두광이 물단지를 한팔로 안아들고, 또 한팔로 매미관 틈새로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잰걸음으로 걸어오고, 그 뒤로 우희가 파김치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뜬걸음으로 뒤따랐다.


-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겼으니...


불현듯 허적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석정은 의심어린 눈길로 두광과 우희를 돌아보았다. 말도 안되었다. 저 둘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었다. 두광은 왕의 충직한 수족이고, 우희는 겨우 열살 배기였다. 아니 열한살이던가. 주변에 나쁜 짓을 시킬 만한 어른들도 없었다. 있었나. 문득 석정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번, 꼬박 채워왔느냐?"


까탈을 부리는 왕의 질문에, 우희도 앙탈을 부리고 싶은지 입을 비죽이며 슬그머니 눈을 흘기는 참이었다. 두광이 콧잔등을 실룩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골백번도 더 끓였습니다."


석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골백번, 즉 일만번을 끓였을 리가 없었다. 그쯤이면 물이 다 증발되고 한방울도 남지 않을 터였다. 헌데 다른 누구에게 기미를 시킬 것도 없이, 왕은 이번에도 직접 물단지로 손을 뻗었다. 의심 많은 왕도 두광과 우희 만큼은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한모금 물맛을 보더니, 왕은 또 다시 인상을 와락 썼다.


"또 비리지 않느냐?"

"예에? 아니 왜 자꾸 비리다고 하시는지..."

"버리거라."

"어우 전하!"


두광이 두눈이 기어이 헤까닥 돌아버려선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린 우희 역시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하지만 왕은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물을 너럭바위 위로 쪼로록 쏟아버렸다. 그리곤 너럭바위 앞에 물단지를 내려놓았다.


"다시 끓여오너라. 이번엔 제대로."


그대로 숙종이 걸음을 옮겨 통명전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뒷모습에 두광이 사납게 눈을 흘겼다. 아무리 두광이라 해도, 무더운 여름날에 백비탕을 끓이고 또 끓이는 건 인내심의 한계에 달하는 모양이었다.


석정은 의혹어린 눈길로 왕과 두광, 우희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둘이서 입이 댓 발은 나와서 한숨을 연거푸 내쉬는 것을 보니, 왠지 자신도 한모금 마셔보고 싶었다. 무더운 날씨에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유독 갈증도 일었다. 그는 물단지로 손을 뻗었다. 왕이 쏟아버리긴 했어도 몇모금 마실 정도는 물이 남아 있었다. 석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단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꼴깍꼴깍 마셔버렸다.


석정의 돌발행동에 놀라서 두광과 우희가 두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두광은 이내 석정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안 비리죠? 하나도 안 비리죠?"

"..."


석정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비리지 않았다. 후각이 예민한 서종태를 데려와서 물맛을 보라고 해볼까. 후각이 예민하니 미각도 예민할 것 같았다. 석정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며 물단지 속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물을 한모금 마셔보았지만, 역시 조금도 비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디달고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다.


"전하께오서 일부러 저러시는 거라니깐요. 우리 우희 못살게 구시려구!"

"..."


석정은 입을 꾹 닫았다. 정말로 일부러 우희에게 심통을 부리시는 건가 싶었다. 서종태라면 물맛을 검증해줄 수도 있을텐데. 새삼 서종태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석정의 귀에 두광과 우희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중전마마야 입...맛이 예민해지셔서 저러시지만...우리 전하께오선 왜 저 야단이신지..."

"남자도 입덧을 해요?"


두광은 입덧이란 말을 내뱉다 말고 얼렁뚱땅 넘겼다. 하지만 우희의 입에서 기어이 입덧이란 두글자가 나왔다. 두광은 몹시 당황해서 얼른 우희의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에이, 남자가 무, 무슨 입덧을 해? 얘가 가끔 가다 어, 엉뚱한 소릴 한다니까."


두광의 말이 자꾸만 더듬더듬 끊겼다. 차마 입에 담아선 안될 말이 자꾸 혀끝에 감기는 탓이었다그제야 우희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두눈을 뻐끔거리며 석정의 눈치를 살폈다. 들었나, 못 들었나? 눈치챘나, 못 챘나? 석정은 아무 것도 못 들은 것처럼, 알지 못한 것처럼 마냥 담담했다.


"남자도 입덧을 한다지. 간혹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히 넘치거나, 통풍痛風이 몹시 심하거나..."

"전하께오선 너무 예민하셔서 그런 거죠..."


감히 왕의 험담을 했다. 석정의 예리한 눈초리를 느끼고 두광은 눈치껏 얼버무렸다.


"아니...없는 데선 나랏님도 욕하는 법이고..."

"하긴..."


의외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석정의 반응에 두광이 반색을 했다.


"어? 나리...아니 영감님도 전하께 불만 있으시옵니까?"

"나라고 없겠나."

"예? 뭔데요?"


두눈을 반짝이며 귀를 바짝 기울이는 두광이었다. 그 옆으로 우희도 두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크게 떴다. 그런 둘을 보며 석정은 피식 웃었다.


"어디가서 떠들고 다니지 말게나."

"예? 물론입지요. 쇤네들이 어디 가서 떠들겠사옵니까?"

"맹세할 수 있는가?"

"예이!"


두광이 씩씩하게 답하자, 석정은 손짓을 하여 두광의 귀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고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전하의 제일 큰 단점은..."


말을 하다 말고 석정은 가만히 뜸을 들였다. 마른침을 한번, 두번, 세번까지 삼키면서 딴청을 부렸다. 고름이 대신 관복에 달린 가느다란 끈을 손가락에 친친 감으면서 딴짓을 했다. 두광은 감질이 나서 석정을 보챘다.


"뭔데요? 왜 말씀을 하다 마세요?"

"..."

"어서요. 제일 큰 단점은요?"

"전하의 제일 큰 단점은...귀가 너무 밝다는 것일세. 그럼 이만."


석정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곤 껄껄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두광과 우희가 석정을 쳐다보았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고 반 충고 반 자신들을 보기 좋게 놀리고서, 유유자적 양화당을 나서는 모습을 보니 분통이 터졌다.


두광은 그 자리에서 자신도 물단지를 들어 마지막 남은 한방울까지 입안에 탈탈 털어넣었다. 옆에서 우희가 눈을 흘기거나 말거나, 당장 목이 탔다.


"씨이, 비리긴 뭐가 비리다고."

"심술이 한바가지..."


이내 가슴 한구석 불안해져서 그들은 숙종의 험담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땅거미가 드리워져서 통명전이고 양화당이고 마냥 어두웠다. 벌써 처소마다 등롱을 밝혀서 장지문에 불빛이 비치는 참이었다. 이렇게 어두워질 때는 사람의 귀가 더욱 밝아지는 법이었다.


- 전하의 제일 큰 단점은...귀가 너무 밝다는 것일세. 그럼 이만.


석정의 농담이 뒤늦은 메아리가 되어 두광과 우희의 고막을 울렸다. 사나운 바람 앞에 후들거리는 창호지처럼 고막이 마냥 떨렸다. 동온돌에서 불빛이 환히 비치면서, 서안 앞에 앉은 왕의 그림자는 미동도 없었다. 두광은 더욱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어깨를 움츠렸다. 때로는 충직한 수하도 상전의 험담을 하고 싶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부디 상전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허적이 죽었다. 이튿날 아침 편전 앞 행각아래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허적이 죽은 사실이 충격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수십년을 당상관으로 우뚝 솟았던 거물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텐데도, 신료들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하필이면 중궁이 회임을 했다는 소문이 쉬쉬하며 번지는 참이었다.


마냥 축복할 수도, 저주할 수도 없었다. 무려 네번째 회임이었다. 그간 세번의 회임이 모두 결실없이 어긋나버린 이후에 찾아든 또 한번의 회임이었다. 서인의 명운이 중궁에게 달린 탓에, 그들은 마음놓고 숨을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하였다. 그저 가슴을 졸이면서 예의 주시했다.


특히 석정은 혼란스런 눈빛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악귀 같았던 허적의 웃음이 계속해서 귓전에 메아리쳤다. 허적의 목소리가 부서지고 또 반사되고, 부서지고, 또 반사되어 석정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 전하께...네번째 회임 감축드린다 전해주시게.


진심으로 축하를 한 것이 아니었다. 비웃음이 어린 그 눈빛은 차라리 저주였다. 석정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서 계속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이 스물이면 애가 둘인 세상이지만, 중궁은 여염의 여인들보다도 회임이 갑절로 번다했다. 그런데도 결실이 없었다. 그런 중궁에게 네번째 회임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이보시게. 최영감...중궁전하의 회임을 자네는 진작 알았지?"


오도일이 살금살금 최석정의 등뒤로 다가들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물은 거라 주변엔 들리지 않을 얘기였다. 하지만 오도일이 손으로 입을 가린 것 자체가 이미 사방의 이목을 끌었다. 오도일이 물어볼 얘기도 뻔한 탓에, 신료들의 눈길이 일제히 최석정에게 쏠렸다.


"무슨...소린지?"

"시침 떼어봤자 소용 없으이. 이미 소문 좍 퍼졌으이."

"무슨..."

"어허, 안 통한대도...전하께서 중궁전하의 회임을 숨기고, 허적에게 사약을 기어코 내리셨다는 거...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네."

"..."

"전하께서도 참...대단하시이...어떻게 그런 걸 숨기나 몰라...독하셔, 암 독하셔..."

"..."

"그나저나 이번엔 무사히 원자를 순산하셔야 할텐데..."

"..."

"사람들이 참 말이 많아. 처음엔 조산, 두번짼 소산, 세번짼 난산, 네번짼 소산 차례 맞나? 이것도 다 일정한 규칙이..."

"말이 씨가 되니 그 입 다무시오. 부정타게 하지 말고."

"..."


석정의 면박에 오도일은 움찔하여 시선을 돌렸다. 이미 자신들도 등뒤에서 저마다 한번쯤은 내뱉은 얘기인데도, 신료들은 오도일을 향해 눈을 부랴렸다. 집중포화가 오도일에게 쏟아졌다.


"누구야?"

"감히 어디서 그런 망령된 말을 입에 담아?"

"왜 저래? 꼭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처럼."

"누구야 누구? 최응교가 그랬나?"

"오도일."

"이보게 관지貫之(오도일의 자字)! 그 입 조심 좀 하게나!"


오도일은 억울했다. 정말로 자신은 누군가한테 듣고 최석정에게 똑같이 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아닌 척, 입도 벙긋 안한 척, 닭 잡아먹고 오리발이니 애꿎은 오도일 자신만 속터질 노릇이었다. 사슴같은 눈망울로 주변을 둘러본 오도일은 사방에서 꽂혀드는 따가운 시선에 몸서리를 쳤다.


오도일은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무녀의 굿을 흉내내어 한 곡조 뽑아냈다. 부여 엿바위골에서도 태자방이란 무녀가 신당에서 곧잘 부르던, 괴기스런 음색을 고스란히 재현하여.


"오도吾道...일이관지一以貫之...!"

"서파西坡(오도일의 별호)형?"


어떻게 오도일이 태자방의 노래를 아는 건지, 석정은 의문어린 눈길을 오도일에게 던졌다. 하지만 워낙 오도일의 노래와 춤이 요란하여 정신을 쏙 빼놓았다.


"자왈子曰 삼호參乎아,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니라, 자출子出커시늘 문인門人이 문왈問曰 하위야何謂也잇꼬? 증자왈曾子曰 부자지도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충서이이의니라.”


석정이 화들짝 놀라서 옷소매를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었다. 논어의 이인里仁 제 15편의 문구지만, 서당에서 훈장이 읊을 때는 공자의 귀한 말씀이 되는 것이, 신당에서 무당이 부를 때는 굿의 주술이 되었다. 오도일은 꿋꿋하게 춤까지 곁들여서 노래를 꿋꿋하게 불러 젖혔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편전 앞에 신료들이 상당수 모인 와중에 무당 특유의 창법으로 주술呪術을, 심지어는 신무神舞까지 흉내내다니.


"서파형, 그만 좀!"


오도일의 입을 틀어막는 순간 석정은 깨달았다. 오도일은 오늘도 멀쩡한 정신이 아니었다. 간밤에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는지, 시큼한 술냄새가 풀풀 났다. 하지만 오도일은 이 파행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쌍겹의 눈꺼풀에 더욱 힘을 주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자왈子曰 삼호參乎아,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니라, 자출子出커시늘 문인門人이 문왈問曰 하위야何謂也잇꼬? 증자왈曾子曰 부자지도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충서이이의니라.”

"서파형!"


최석정이 만류해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세번의 북소리까지 오도일의 노랫소리에 묻혔다.


"저저! 뭐하는 짓이야? 지가 무당이야?"

"왜들 그러는가? 그냥 논어 이인편 아닌가?"

"논어 이인편을 성균관 개구리처럼 낭송하는 게 아니라, 엿바위골 태자방처럼 부르니 문제지."

"미쳤어, 미쳤어!"

"자기 자字를 관지貫之로 지을 때 내 알아봤지. 오도일이관지! 이름이 오도일인데 자까지 관지라니. 왜, 이왕 관지로 자를 갖다붙이는 김에 호號도 서파 말고 충서忠恕(충실하고 너그러움)로 짓지 왜?"

"왜들 이러는가? 저 친구 하루이틀 보는가? 원래 저런 잘세."


땡볕을 피해서 행각 아래로만 모여든 신료들의 웅성거림이 어문까지 뻗어나갔다. 어느틈에 활짝 열린 문간에 서서 숙종이 얄궂은 표정으로 오도일의 노래를 듣는 참이었다. 오도...일이관지...


공자가 말하기를,

삼參아, 내 도는 한가지만 이루었느니라.

공자께서 나가시니

제자들이 무슨 말씀이시냐고 물어보자

증자가 말하기를

스승님의 도는 충서忠恕니라.


"충서?"


충서란 단어가 나오자, 오도일은 또 한술 더 떠 노래를 바꾸었다. 여전히 무녀가 만신굿이라도 하듯, 오도일은 을씨년스런 춤사위를 곁들였다.


"자공子貢이 문왈問曰하니 유일언가이종신행지자호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고? 자왈子曰 기서호其恕乎인저 기소불욕己所不欲을 물시어인勿施於人하니라."


자공이 물으니

한가지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서恕이니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지니라.


중궁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어의동 별궁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꽁꽁 얼어붙은 잠룡지란 연못에서 붉은 잉어를 보며 역린逆鱗이 있는 잉어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자신에게 고집을 부렸다. 당시 숙종 자신이 늙은 서후행한테 그 엄동설한에 연못에 뛰어들어 잉어를 잡아오라 시켰더니 진홍이 직접 연못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기어이 잉어를 잡아서 오들오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에게 내밀었다.


- 내가 하기 싫으면...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때는 중궁도 자신도 마냥 어렸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중궁은 공자가 평생을 섬겼다는 충서忠恕의 도리를 알았다. 그리고 몸소 실천했다. 학문의 깊이도, 생각의 깊이도, 그때 그녀가 제발로 걸어들어간 연못보다 깊었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녀에게 눈길이 묶였는지도 몰랐다. 늘어질 지언정, 풀어지진 않는 그런 시선 같았다. 그리 고운 중궁에게 벌써 몇년째 몹쓸 짓을 해온 자들을 숙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저, 전하!"

"전하를 뵈옵니다!"


신료들이 당황하여 그 자리에서 부복하는 한편, 방금까지 신명나게 한곡조 뽑아댔던 오도일에게 손을 사납게 휘저어서 중지를 명했다. 오도일은 두눈을 꿈틀하곤 엉거주춤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편전 앞이 조용해졌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것을 보니, 신료들이 아예 숨을 죽이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숙종은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산선傘扇을 든 두광과 내시들이 뜬걸음으로 뒤따르다 놀라서 잰걸음으로 따라잡았다. 하지만 숙종은 그들에게 보조를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엔 마음이 한가롭지 않았다. 그 뒤로 신료들도 엉거주춤 뒤따르는 기척이 고막에 잡혔다. 물론 보조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편전에 들어 각자 자리에 좌정하자마자 김수항이 운을 떼었다.


"전하, 중궁전하의 회임을 경하드리옵니다."


숙종은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석정을 돌아보았다. 석정 역시 놀란 얼굴로 김석주를 돌아보는 참이었다. 김석주가 허적을 만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허적은 중궁의 회임을 먼저 알았다. 어쩌면 김석주가 허적에게 흘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수상쩍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왕이 최석정에게만 밝혔는데, 최석정이 김석주에게 흘리고, 김석주가 김수항을 비롯한 신료들에게 퍼뜨린 꼴이었다. 그 와중에도 숙종은 최석정의 불신어린 눈길이 김석주에게 닿은 것이 이상하여 그 둘을 지켜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김석주는 자신에게 혐의가 쏠리자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경하의 말을 꺼냈다.


"감축드리옵니다."

"왕실의 홍복이옵니다."


신료들의 두눈이 시꺼먼 뱀의 비늘처럼 번뜩였다. 숙종은 머릿속에 한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저들도 진작 알았더라면, 알고도 여태 기다려왔더라면...이제야 자신에게 경하를 하는 것은 의뭉스런 계산이 있었을 터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혹여 회임을 구실로 송시열의 방면을 요구하진 않을 지, 내심 불안해졌다..


"하옵고 전하, 역적 이정李楨, 이남李楠과 교류했던 죄인 윤휴를 분부 받들어 금옥禁獄(옥에 가둠) 하였나이다."


김수항이 눈치를 보며 고하는 말에, 숙종은 한숨 돌렸다. 송시열의 얘기가 아니다. 숙종은 힐끗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어쨌거나 이번엔 윤휴를 처결할 차례였다. 윤휴에게는 숙종이 잠시 묻어두고 지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윤휴의 이종조카 이환이 썼다던 벽서...당시 병조판서 김석주를 겨냥하여 파자교에서 돈의문 사이에 붙었던 그 벽서는 이환이 범인으로 지목되었고, 윤휴가 배후로 지목되자, 윤휴는 은밀한 차자를 올려 행간의 표현으로 허적을 배후로 지목했다. 그 배후가 이미 죽은 허적이든, 윤휴이든, 당시 죽을 목숨을 붙여두었으니, 이제는 거둬야만 했다.


"내병조內兵曹(궐안에 있는 병조관할 관청)에 정국庭鞫을 설치하라."

"의금부가 아니고 내병조...말이옵니까?"


김수항은 놀란 눈빛으로 되물었다. 왕은 의금부가 아닌 내병조에 칼자루를 넘겼다. 당시 벽서로 곤욕을 치른 것은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그런 김석주에게 그때의 설욕을 할 수 있도록 칼자루를 쥐어준 것이었다. 왕의 성품을 어쩐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받은 만큼 철저히 갚아주는, 또 돌려주는 성정이었다.


"내병조. 궐안에서 추국을 해야 과인이 장차 친국을 하기도 좋을 게 아닌가?"

"그리하겠나이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김석주의 음성에 김수항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완전히 돌아보진 않은 탓에, 살짝 올라간 김석주의 입꼬리만 보였다. 거무튀튀한 살갗이 흔치 않아서, 다른 사람과 착각할 리도 없었다. 김석주로선 내심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어차피 진짜 배후였을 지도 모르는 허적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 윤휴가 남았다. 윤휴가 이환의 일에 아주 연관이 없었을 리도 없었다. 알고도 묵인했거나, 사주를 해놓고도 부인했거나...큰 차이는 없었다.


윤휴...넌 이제 죽었다.


편전 안 신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한편, 어쩐지 혀끝이 매운 기분으로 어탑 위의 왕을 힐끔거렸다. 왕은 이미 도승지가 서안 위에 쌓아올린 상소와 계문들을 바삐 살피는 참이었다. 내의원 의녀들이 약두구리니 금두구리니 속닥거렸을 정도로 몸이 병약했던 위인이 맘은 왜 이리 고약한지. 내병조에 정국을 설치하게 하여 김석주에게 통솔권을 주었으니, 김석주의 선택은 너무도 뻔했다. 죽은 허적보다 산 윤휴를 잡는 데에 총력을 다할 김석주임을, 왕은 알고도 도맡게 한 터였다.


"또한 대신들을 모함하는 고변서를 붙인 이환을 엄문토록 하라."

"예 전하."


신료들이 자못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숙종은 계속하여 서안 위의 상소와 계문을 뒤척였다. 눈길이며 손길이며, 하나같이 분주했다.


"부호군副護軍(종4품 무관직이지만, 벼슬을 맡지 않은 거물 문관들에게 녹봉을 주는 자리) 이유태의 사직소로군."


편전에 들어왔던 발길 만큼 손길이 마냥 급하던 왕이었다. 하지만 이유태의 사직소를 펼치면서, 손끝이 천천히 굳었다. 숙종은 부쩍 둔해진 손끝으로 이유태의 사직소를 만지작거렸다. 빠르게 사직소를 훑던 눈길도 더뎌졌다. 이유태란 이름만 들어도, 이미 편전 안 서인 신료들은 사직소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은 왕의 속길도 훤히 보였다.


臣以誤禮之罪, 投配塞上,

신이 예를 그르친 죄로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는데

不意前秋疏決時, 因其時大臣之所達, 伏蒙寬宥之典

대신의 소달로 뜻밖에 소결시에 용서받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오례誤禮라는 두글자 자체가 송시열과 한통속이라는 의미였다. 송시열과 함께 오례의 죄로 귀양을 갔던 이유태가 이제는 용서를 받고 풀려나고, 또 서용이 되어 부호군에 올랐다. 그런 이유태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그동안의 한풀이를 하듯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仍伏念, 甲寅年間竊聞,

엎드려 갑인년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都愼徵上疏有大王大妃千秋之後,

도신징의 상소에 대왕대비의 천추(장수를 누림) 후를 언급한 것이 있어,

殿下將不以適孫自處乎之語,

장차 전하께서 적손 노릇을 못한다는 것이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又聞宰臣亦有爲此說者, 其意, 蓋謂臣等不以孝廟爲適子也。

또 신이 듣기로 재신(정2품 이상 대신)들도 신등이 효종대왕을 적자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니

語極凶險,

그 말이 참으로 흉험합니다.

故臣在全義飛庵寺, 宋時烈適在水原萬義寺時, 相與往復曰:

하여 신은 전의 비암사에서, 송시열은 수원 만의사에서 서로 서한을 주고 받아 말하기를

“宋英宗以旁支入承大統, 程子亦謂之適子。況孝廟以次適, 陞爲適, 而可謂非適子乎?”

"송나라 영종은 방계에 있으면서 대통을 이어 정자程子 또한 적자라 하였는데,

하물며 효종께선 차적次適으로서 승격되어 적자가 되었으니 적자가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宋時烈亦以爲然矣。

송시열 또한 그리 생각했습니다.


숙종은 더 읽어나가기도 짜증났다. 이유태의 상소는 자신의 결백만 호소한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의 결백마저 강조하다 못해 강요했다. 이유태 자신을 사면하였으니 송시열도 사면해라, 그래야 믿고 도성에 상경할 수 있다...한글자한글자 숙종의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을 서용하고도 송시열을 유배시킬 수 있을 성 싶냐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였다. 숙종은 이를 악물고 명하였다..


"불윤不允. 행行 응교 최석정은 부호군 이유태의 사직소에 불윤비답을 내리도록 하라. 지나간 일을 제기할 필요는 없으니 안심하고 다시 직임에 힘쓰라 이르라."

"예 전하."


석정은 씁쓸한 눈빛으로 무릎맡을 내려다 보았다. 송시열에 대한 방면까지 은근슬쩍 강요하는 이유태의 사직소에 왕은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말로 달랠 생각도 없는 듯하였다. 그저 만류는 하였어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석정은 눈밑을 실룩이며 비답을 짤막하게 적어버렸다.


王若曰云云

왕이 이같이 말하노니

省疏具悉卿懇。旣往之事, 今不必提起,

지나간 일을 제기할 필요는 없으니

卿其勿辭, 調理上來, 以副予望

바라건대 안심하고 다시 직임에 임하라.


그다지 살을 덧붙인 것도 없었다. 그저 왕의 말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어버렸을 뿐이었다. 받는 사람 보기 좋으라고 윤색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검은 글자들 속에 꽉 닫혀버린 왕의 인내심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쯤 하면, 왕도 더는 버틸 수가 없을 터였다. 송시열 만큼은 사면하고 싶지 않았어도, 이미 김수항을, 이유태를, 민정중, 민유중을 용서했다. 서용했다. 그리고 그 끝은 송시열의 귀환歸還이었다.


"전하, 이유태의 말대로 대로大老(큰어른, 송시열을 뜻하는 조정의 존칭)는 결백합니다. 대로는 효묘를 차적에서 승격하여 적자로 인정하였습니다. 헌데 저들이 말의 앞뒤를 자르고서 대로가 효묘를 서자로 폄훼했다 주장한 것입니다."

"예, 전하...이유태를 서용하셨으니, 대로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중궁전하의 회임까지, 이토록 기쁜 날 은전을 베풀어주시옵소서."


김수항과 민정중의 목소리가 석정의 귓전을 비꼈다. 그들이 포문을 열자, 계속해서 다른 신료들도 송시열의 신구를 위해 한마디씩 한 탓이었다. 정말로 송시열이 귀환을 할 터였다. 자신의 주군은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중궁의 회임까지 알려진 지금. 윤휴는 몰라도 송시열은 풀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저들은 오늘만 기다렸을 지도 몰랐다. 왕이 허적을 죽인 다음, 중궁의 회임을 폭로하고, 송시열의 방면을 요구하기까지...이날만 손꼽아 기다렸을 지도 몰랐다.


- 자네는 역시...아직 멀었으이. 김석주만도 못하이.


허적의 말을 곱씹는 최석정의 곁으로 한줄기 붉은 바람이 날카롭게 스쳐지나갔다. 석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틈에 왕이 어탑에서 내려와 편전을 나서는 참이었다. 붉은 용포자락을 펄럭이며 햇살이 환히 짓쳐들어오는 문간으로 곧장 걸어나가는 그 뒷모습이 어쩐지 신료들의 눈을 의식해서 일부러 더욱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 듯한 느낌이었다. 중궁과 복중태아를 지키겠다고 일체 서인으로 조정을 채운 왕은, 어쩐지 그들 틈바구니에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


"전하, 가져왔사옵니다."


숙종이 통명전 동온돌로 돌아오니, 뒤따라온 두광이 숙종의 서안 위로 상소와 계문 더미를 올려두었다. 하지만 숙종은 등불도 밝히지 않고 홀로 깊은 상념에 젖었다. 조정에 서인들을 한명씩 꽂고 또 꽂으면서, 심장에 꽂기나 한 것처럼 통증을 느꼈었다. 그래선지 숨이 턱턱 막히고, 편전에 들어서기도 싫어졌다. 전처럼 편전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 수도 없었다. 그저 문건들을 동온돌로 가져와 서안 위에 쌓아두고 홀로 느긋하게 살펴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상소더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숙종은 한손을 휘저어 서안 위의 문건들을 모조리 서안 아래로 쓸어냈다.


이제야 서안 위가 깨끗해졌다. 남은 건 자신의 연적, 벼루, 붓, 붓걸이, 시명보施命寶, 대보大寶 정도였다. 일단 서안 위에 그것 뿐이니 좋았다. 헌데, 가슴이 홧홧한 탓일까. 계속 쳐다보니 이 문방사우마저 보기 싫어졌다. 그는 서안마저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문갑 속에 있던 하나의 바둑판과 두개의 바둑함을 꺼내어 자신의 무릎맡에 내려놓았다.


바둑은 결코 홀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아니었다. 숙종은 두개의 바둑함을 열어젖히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바둑을 두기는 자신이 생각해도 볼썽사나웠다. 숙종은 손을 뻗어 흰돌이 가득 든 옥함 속으로 집어넣었다. 역시나 솜씨 좋은 석하가 이름을 한명한명 새겨준 터라, 뒤적이다 보니 궁宮이라 금빛으로 새겨진 흰돌을 집어들 수 있었다.


일단 포석을 깔아둘 요량으로 나머지 돌을 뒤지니 김수항, 정지화, 민정중, 민유중, 김석주...이런 이름만 나왔다. 숙종은 짜증스레 흑돌함을 뒤져서 흑돌 궁宮을 꺼내어 백돌 궁宮과 자리를 바꿔버렸다. 최석정의 이름을 겨우 찾아 손에 쥐었지만, 이미 흑돌 궁宮자는 다른 서인들 열댓의 백돌에 포위된 채였다. 숙종 자신의 현실처럼.


이젠 사방이 적이었다. 중궁을 보호하려, 온통 자신의 적으로 사방을 에우고 말았다. 그래서 이젠 숙종 자신이 외톨이었다. 느낌 탓인지, 유독 크게 새긴 듯한 이름 하나가 백돌함 속에서 유난히 눈시울을 찌르는 듯 했다.


송시열送時烈...


숙종은 두손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눈이 쓰라렸다. 마음도 쓰라렸다. 허적을 죽이고 나니, 벌써부터 서인들이 송시열을 풀어달라 자신을 압박해오니 콕콕 두눈을,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 금홍빛 석양에 물든 장지문에 두광의 그림자가 바짝 달라붙었다.


"전하, 분부하신 불윤비답을 응교 최석정이 제찬制撰(왕의 명령이나 분부를 대신 지음)하여 왔사옵니다."


최석정도 서인이었다. 그나마 송시열에 대한 분노를 가슴깊이 묻어두었을 뿐, 자신이 서인이란 뿌리 만큼은 감히 잘라내지 못하는 서인이었다. 그래도, 충심 만큼은 믿을 수 있는 자신의 복심腹心이었다. 어느틈에 석양이 금빛으로 동온돌을 가득 메우더니, 이제는 적빛으로 에웠다.


"들라 하라."

"어찌 양화당에서 맞이하지 않으시고..."

"바쁘다. 그냥 들이라."

"예에..."


두광이 떠름하니 대꾸하더니, 장지문에 붙은 두광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숙종은 고개를 숙이고 바둑판을 치울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최석정을 믿는다 해도, 바둑판을 보면 한마디 쓴소리를 할 것 같아 껄끄러웠다. 사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더군다나 이유태에게 내리는 불윤비답을 확인하고 시명보施命寶(관인에게 내리는 교지, 교서에 찍는 국새)를 찍어줘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미 들라 했다. 상대가 최석정이고 보니 별 생각 없이 습관처럼 윤허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손끝으로 자기 입술을 꼬집어도 소용이 없었다.


장지문이 열리고 석정이 숙종의 무릎맡의 바둑판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온통 서인의 백돌에 흑돌 궁宮이 포위된 형국에 한숨도 나오다가 막혀버렸다.


"전하..."

"중궁을 지키겠다고, 서인들을 조정에 빼곡히 채워넣고 보니...나는 사방이 적이더군? 모두가 내 아비를 독살했거나, 방조했거나, 방관했거나...그런 적들을 내 손으로 하나하나 불러들였어. 중궁을 살리겠다고, 날 죽이는 꼴이지..."

"..."


석정은 한숨은 물론 이젠 숨도 턱턱 막혔다. 선대왕의 독살이란 말을 왕이 내뱉았다. 그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귀를 씻어도 씻어낼 수 없는 말이었다. 헌데 왕의 입속에서 더 무서운 말이 감돌 것만 같았다. 복선군이 했던 말이 마치 모기의 날갯짓처럼 사납게 맴돌았다.


-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것을...


"원래는 편전에서 이미 완성한 것인데, 전하께서 그냥 나가시어...이렇게 늦게 가져왔습니다."


석정은 그저 발목까지 내리깐 듯한 음성으로 바둑판 옆에 불윤비답을 내려놓았다. 숙종은 쳐다보기도 싫은지 눈밑을 실룩거리더니, 결국 똑바로 눈을 뜨고 불윤비답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더욱 커졌다.


"뭐요? 아까 내가 한 말 그대로잖소? 그렇게 쓰기가 싫었소?"

"더 이상의 말을 보태는 건 전하께서 원치 않으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 그래,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사부 뿐이지."

"황공...."

"그런데 힘이 없어. 사부는."

"..."

"사부는 송시열은 커녕 허적 만큼도, 김석주 만큼도 힘이 없어."

"..."

"이제 송시열까지 불러오면, 나는 더 고립될 테지."

"전하께선...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무너지고 찢어지는 듯한 왕의 옥음이 안타까워 석정은 진심으로 위로했다. 격려했다. 하지만 왕의 젖은 웃음소리만 되돌아왔다.


"지켜? 무슨 수로?"

"..."

"그 전에 사부의 세력을 더 키워. 남구만이든, 이민서든, 이정영이든, 오도일이든, 박태보든...사부의 사람들은 모조리 조정에 심어줄테니, 제발 힘을 키워. 그래서, 내가 중궁을 살리겠다고 송시열의 개들을 모두 조정에 풀어놓기 전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내 심장을 물어뜯기 전에."

"..."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왕의 자괴감이 가슴에 닿았다. 하지만 석정 자신은 너무도 힘이 약했다. 조선의 의리를 팔아넘겼다는 조부 최명길의 굴레가 자신에게 덧씌워진 한은, 자신은 온전히 세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송시열은 커녕 김수항을 대적할 연륜도, 경륜도 없었다. 너무도 젊었다.


"앞으로 3년은...걸릴 것입니다."


석정은 머뭇머뭇 아뢰었다. 남구만, 박세채 같은 스승들의 세력을 키우는 데만도 앞으로 최소한 3년은 걸릴 터였다. 자신에게는 오도일과 박태보 뿐이었다. 이서구, 서종태와 홍만종, 김석하까지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출사하여 송시열에게 칼을 맞댄다면, 그나마 해볼 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셋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병약하다는 것이었다. 무예가 출중한 석하조차도. 그런 석정의 답변에 숙종은 미칠 듯한 웃음이 비져 나왔다.


"3년?"

"..."

"3년? 당장 송시열을 풀어달라, 사방에서 내 목을 옥죄는 판국에?"

"..."

"3년?"

"..."


숙종은 허공에 눈길을 두고 헛웃음을 연신 뿜어냈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그건 최석정도 잘 알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자신들 편이 아니었다. 중궁이 회임을 좀더 천천히 했더라면, 그래서 3년을 벌었다면 모를까...아니, 그런 생각을 하면 중궁이 슬퍼할 터였다. 그동안 세번의 회임이 모조리 부러진 칼날이 되어 중궁의 심장에 틀어박힌 터였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중궁이 이제야 네번째 빛을 품었다. 그러니, 중궁의 회임을 기뻐해야 했다. 어차피 숙종 역시 대가 끊기면, 임창군에게 보위를 물려주어, 조부 효종, 선부 현종, 그리고 자신까지 삼종三宗이 아무 의미 없이 후대에 의해 지워질 터였다. 송시열의 붓끝으로, 혹은 그 문인들의 붓끝으로,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찌지가 붙은 채로. 그러니 대는 이어야 했다. 어떻게든 왕통은, 종통은 이어야 했다.


"이만 물러가시오."


숙종이 서안 위의 시명보를 찍어 앞으로 불윤비답을 거칠게 밀었다. 석정은 송구한 기분으로 불윤비답을 받아들었다. 흥분하여 시명보가 거꾸로 찍혔지만, 왕도, 석정 자신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더는 입도 벙긋할 면목도 없었다. 석정은 침통해진 얼굴로 조용히 동온돌을 물러나왔다.


"중..."


석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채 말을 내뱉지 못했다. 대청 한복판에 중궁이 창백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등허리를 꼿꼿이 하고서 두눈은 허공에 못박은 채로 꼼짝도 하질 않았다. 울고 싶어질 때면, 내외가 똑같이 오히려 등허리를 곧추세우는 모양이었다. 중궁은 석정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거나 피하지도 않은 채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 중궁을 살리겠다고, 날 죽이는 꼴이지.


넋 빠진 얼굴로 통명전 대청에서 붉은 뜨락을 내려다보는 진홍을 보고, 석정은 고개를 조아리고 황망히 물러갔다. 진홍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뜨락을 바라보고 미동도 없었다. 심지어 속눈썹도 깜빡이지 않았다. 온힘을 다해서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가만히, 아직 불러오지도 않은 자신의 배를 달래듯이 조용조용 쓰다듬었다.


어느덧 거무스름한 어스름이 동온돌을 가득 메웠다. 숙종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두광이 조반을 차려서 안으로 들였다. 하지만 숙종은 수라상을 보는 둥 마는 둥 서안 위의 붓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서안의 서랍을 뒤져서 도련지를 꺼내어 올려두었다. 떨리는 손길이 붓끝에 닿았다. 그리고 손끝이 움츠러들었다가, 결국 다시 뻗치더니, 힘껏 움켜쥐었다. 뜨거운 한숨과 함께 검은 먹물이 붓끝으로 흘러나왔다. 백여글자가 썩은 누룩처럼 시꺼멓게 눈앞을 덮었다. 자신의 손으로 쓰고도 믿어지질 않았다. 숙종은 머뭇거리면서 비망기를 끝맺었다.


朝廷之用罰者, 本欲開其自新之意,

조정에서 벌을 쓰는 것은 본디 새 사람이 되도록 열어주려는 것인 바,

而上年惟泰之先放, 亦以此也。

작년에 유태를 먼저 방면한 것도 이 때문이다.

今者時烈之意, 與惟泰無異, 則不可獨爲仍置於栫棘之中。

지금 시열의 뜻이 유태의 뜻과 다르지 않으니, 홀로 천극栫棘(가시덤불) 속에 가둘 수도 없다.

特爲解圍籬, 中途付處。

특별히 위리를 풀고 중도부처(극변원찬이나 변원정배보다 약한 유배형) 하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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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2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5.26 08:00
    No. 1

    참 왕노릇 해먹기 힘들었겠다
    한 발 후퇴하는거 같네요, 숙종이...송시열에 대해서.
    꺽정이가 부지런히 커야 할텐데 아직 시간이 안된 모양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6.23 14:03
    No. 2

    3년쯤 걸리지 않을까요. 적어도 6년 뒤엔 김석주급은 되어있을지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눈겨산환
    작성일
    14.05.26 10:57
    No. 3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나머지 하나가 사는 운명'...이처럼 가혹한 운명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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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6.23 14:04
    No. 4

    제가 좀 잔인한가 봅니다. 왜 여주들이 하나같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더마냐
    작성일
    14.05.26 11:36
    No. 5

    숨조차 죽여가며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6.23 14:04
    No. 6

    저도 댓글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5.26 12:47
    No. 7

    숙종의 성격과 후대의 평가가 서로 어긋나는 이유가 여기 있네요
    내 사람 내 재물 내 시간이 없는 왕…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6.23 14:05
    No. 8

    얼마전엔 일본인이 숙종을 두고 조선시대에 가장 왕권이 약했다고 비하하기까지 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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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5.27 15:15
    No. 9

    꺽정이가 나름의 역할을 할 때까지 최소 3년...
    서로 아끼는 어린 왕과 왕비에게는 시간이 없는데... 참 모진 세상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6.23 14:06
    No. 10

    그러게요. 꺽정이에게도 좀 시간이 모자라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눈겨산환
    작성일
    14.05.29 15:21
    No.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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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매하고 있는 작품중에도 대여가 가능했으면 대여를 했지 굳이 구매하지 않았을 작품도 있는데, 김은파님 작품은 꼭 구매해서 보고싶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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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6.23 14:07
    No. 12

    격려 고맙습니다. 속편은 유료로 써볼까 고민도 해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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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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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해의 그림자 193 +4 14.06.28 1,862 36 40쪽
193 해의 그림자 192 +4 14.06.21 2,018 31 41쪽
192 해의 그림자 191 +5 14.06.15 1,839 26 42쪽
191 해의 그림자 190 +5 14.06.09 3,271 38 41쪽
190 해의 그림자 189 +4 14.06.01 2,196 47 41쪽
» 해의 그림자 188 +12 14.05.26 3,056 43 40쪽
188 해의 그림자 187 +8 14.05.22 1,957 31 42쪽
187 해의 그림자 186 +8 14.05.18 2,169 32 40쪽
186 해의 그림자 185 +13 14.05.11 2,178 35 43쪽
185 해의 그림자 184 +12 14.05.05 2,100 37 42쪽
184 해의 그림자 183 +10 14.04.27 1,861 34 37쪽
183 해의 그림자 182 +8 14.04.21 2,182 45 35쪽
182 해의 그림자 181 +8 14.04.15 2,307 32 42쪽
181 해의 그림자 180 +12 14.04.10 1,899 33 39쪽
180 해의 그림자 179 +12 14.04.06 2,127 29 41쪽
179 해의 그림자 178 +10 14.04.02 1,765 31 42쪽
178 해의 그림자 177 +7 14.03.29 1,685 32 41쪽
177 해의 그림자 176 +7 14.03.25 2,322 32 43쪽
176 해의 그림자 175 +6 14.03.21 2,233 38 36쪽
175 해의 그림자 174 +2 14.03.17 2,108 24 39쪽
174 해의 그림자 173 +4 14.03.13 2,259 98 37쪽
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9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9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7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4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4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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