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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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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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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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0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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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90

DUMMY

"이건..."

"누가 가져왔소."


왕이 더는 말할 기분이 아닌 지 질색을 하고 대꾸하자, 석정은 눈을 끔뻑였다. 격식마저 생략하고 약식으로 왕에게 청원하는 글이 차자箚子였다. 하지만 차자 역시 승정원을 통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차자는 정말로 말 그대로 비밀차자였다. 왕 외엔 아무도 본 적 없고,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은 글이었다. 왕과 윤휴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은밀하게 차자와 비답을 주고 받았을 것이 뻔하였다. 이 비답을 누군가 윤휴의 집을 뒤진 끝에 찾아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석정이 조는 사이에 다녀간 이는 판의금 이상진 뿐이었다.


"이상진입니까?"

"누가 이상진의 손을 빌렸지."

"이번에도...병판입니까?"

"아마도. 덕분에 서인들은 윤휴를 처리할 좋은 명분을 얻은 거고."


석정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말로 윤휴가 익명서의 배후였을까. 윤휴처럼 똑똑한 사람이, 그리 어설픈 익명서로 정체를 노출시켰을까.


물론 정황으론 윤휴였다. 그 이종조카...외이종조카란 말도 있고, 첩조카란 말도 있었다. 익명서가 나붙은 다음날로 윤휴가 익명서에 거명된 서인들을 국문하자는 청을 올린 사실도 미심쩍었다.


하지만 곧바로 허적에 의해 윤휴가 배후로 몰리면서, 오히려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그 익명서로 덕을 본 것은 허적 뿐이었다. 차옥의 일로 등청도 못하고 인달방에 틀어박힌 채로 자신의 측근들을 부추겨서 왕에게 일괄사직으로 압력을 넣던 허적은, 익명서 덕택에 입조할 명분을 얻었다.


기껏해야, 윤휴는 이환이 연루된 줄도 모르고 허적의 입김을 받아서 차자를 올렸을 터였다. 그리고 바로 허적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배후가 사실은 허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차자를 왕에게 올린 일 정도였다. 그래도, 윤휴가 동참했던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내막은 석정 자신보다도 왕이 더 잘 알 것 같았다.


"윤휴는..."

"사약을 내릴 거요."

"전하, 아직 제대로 밝혀진 건 아무 것도..."

"밝혀져야 할 것도 없소."

"전하..."

"이번엔, 아니 이제는 찾아가지 마시오."


찾아가지 말라니. 석정이 말귀가 어두운 편이 아닌데도, 한순간 못 알아들을 뻔 했다. 하지만 이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윤휴의 유언은 받아오지 말라는 얘기였다.


석정 자신이 국청에 가 있는 사이, 혹은 통명전 담벼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사이, 왕은 누군가에게서, 아마도 이상진에게서 이 비답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석정 자신에게 윤휴와의 접촉을 금했다.


어쩌면 김석주가 몰래 이상진에게 전하였고, 이상진은 우연히 얻은 척 이 비답을 들고 왕을 찾아 담판을 지었는지도 몰랐다. 윤휴가 왕의 손을 빌려 살인을 한다고, 왕이 윤휴에게 놀아나서 살인을 범한다는 식의 불경한 언사를 입에 담는 자들이니...


"윤휴를 만나지 말라...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정은 당황해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뭔가 흑막이 있었다. 윤휴의 죽음을 원하는 자들이 왕에게 압력을 넣었거나, 왕도 윤휴의 죽음을 원하거나...의혹이 들러붙었는지 목뒤가 뻐근했다. 꼭 혹부리가 된 기분이었다. 괜히 종기라도 생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없는 종기를 백광현한테 가서 째어달라 할 수도 없고.


"끝내, 윤휴를 버리실 것입니까?"

"왜, 이제 와서 아깝소?"

"예."


왕이 비꼬듯이 묻는 말에,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대뜸 대답해 버렸다. 입에 손이 달렸는지, 발이 달렸는지 몰라도, 그냥 대답이 튀어나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송시열이 돌아오려니 윤휴가 아까워졌다. 자신 역시 윤휴를 잡아먹고 싶었는데도, 또 막상 윤휴가 아까웠다. 그래서 조금은 장난기를 담아서 답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은 웃지 않았다.


"윤휴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배후로 몰릴 판인데?"

"..."

"승정원을 통하지 않고 몰래 윤휴와 차자와 비답을 주고 받았으니, 저들이 내게도 덮어씌울 거요."

"전하께선 당시 익명서에 거명된 서인들을 국문하지 않으셨습니다. 헌데 어찌..."

"그 익명서는 꼬리를 늘어뜨린 채로, 밟아보라는 식이었소. 윤휴처럼 똑똑한 자가 그리 허술한 익명서의 배후로 몰린 마당에, 나라고 무사할 수 있겠소?"

"..."

"저들이 비질 한번만 더하면 나까지 쓸어버릴 거요."

"..."


오늘따라 왕과의 대화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어지질 않았다. 평소에도 사석에선 남의 얘길 귀담아 듣지 않는 왕이라선지, 지금도 석정의 말허리를 수차례나 톡톡 분질렀다. 답답했다. 그런데 왕은 왕대로 숨막히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송시열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 독기가 내 코를 막는군."


왕은 손바닥으로 힘껏 코를 틀어막았다. 범아귀로 코끝만 빼꼼 내민 채로 투덜거리느라, 조금은 맹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정은 자신의 귀를 문질렀다. 그래서 귀가 먹먹한 건가? 아니다. 귀가 아니라 정신이 멍멍했다. 어쩌면 왕이 마음놓고 송시열을 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신하가 자신일 터였다. 하지만 자신 역시 아직은 송시열에 맞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김석주가 뒤에서 온갖 모략으로 왕과 송시열 사이에서 온갖 농간을 부리는 마당에.


"전하, 도승지 윤계, 형방승지 최일이 당도했사옵니다."


장지문에 두광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비치더니, 도승지와 형방승지의 도착을 알렸다. 숙종은 입맛을 쓰게 다시며 눈시울을 실룩였다.


"들라 하라."

"예 전하."


장지문이 열리고 도승지와 형방승지가 조심스레 양화당 안으로 들어서다 석정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들은 이미 왕이 자신들을 부른 연유를 알았다. 비답의 출처를 '승정원일기'로 밝히기로 판의금 이상진과 이미 말을 맞춰둔 터였다.


"전하께서 신들을 어인 일로 부르셨사온지..."

"윤휴의 차자에 대한 비답의 일이다."

"아, 그건 저희 승정원일기에 끼여 있던 것을 판의금이 가져다가..."

"되었고, 그 차자를 꼭 돌려주야 하는가?"

"아무래도 비답이 있으니 차자도 있어야...."

"익명서 다음날 윤휴가 그 차자를 올렸기에 내가 경연 때 몇몇 대신들과 연신筵臣(경연관)들과 논의를 하였더니, 모두 익명서를 수상쩍다 하여, 일단 보류한 적이 있었지. 그 뒤로 윤휴의 차자는 아예 잊고 지냈는데, 그 차자가 꼭 필요하다면 내 나중에 찾아서 승정원으로 보내주겠다."


왕의 옥음을 듣는 도승지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애써 웃음을 참는 듯 하면서도, 그 웃음이 비릿했다. 도승지는 왕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눈길을 내려 서안만 쳐다보았다.


왕의 해명만 들으면, 경연에서 윤휴가 차자를 올리고, 왕은 단순히 차자를 보류하기만 한 것처럼 들렸다. 우스웠다. 군색한 변명이나 둘러대며 자신들 서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딱하기도 하였다.


물론 왕의 말이 사실이어도 믿어줄 수 없었다. 이미 기미己未년 4월 9일자의 정원일기를 찾아보았다. 그땐 주강晝講이 열렸다. 당시 경연관들은 윤휴, 권대운, 권대재, 민희 같은 남인들이었고, 최석정 역시 문외출송을 당한 뒤라 서인들은 당시 정황을 제대로 알 수도 없었다.


"흉서에 이름이 적힌 자를 윤휴가 심문하자 청한 것은 사실이다. 허니 윤휴를 다시 잡아와서 심문토록 하라. 또한 윤휴에게 이환의 익명서에 적힌 남산대가오자南山大家奧者라는 문구와 어군 삼백명 운운하는 문구, 충효노인김읍서忠義老人金泣書라는 문구를 특히 추궁하라."

"..."

"또한 윤휴는 엄히 형신하여, 원찬하라."


도승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귀밑으로 누군가의 시선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 자신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던 최석정이 왕의 전교를 적다 말고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이제 만족하냐는 눈빛으로.


어느덧 땅거미가 짙은 거미줄을 쳤다. 만족할 리가 없었다. 이환으로 윤휴를 잡았듯, 윤휴로 또 누군가를 잡아올려야 했다. 미끼에 미끼를 물리다 보면 대어를 낚을 수 있는 법이니. 그러니 대로의 분부대로 부지런히 낚싯대를 휘둘러야 했다. 짧디 짧은 여름날의 밤이 지나가기 전에.


밤은 금세 바뀌어 아침햇살은 일찌감치 궐담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마음껏 궐안 구석구석을 들쑤셨다.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 뜨락을 환히 비추는 것도 모자라서, 내병조 처마 밑까지도 파고들어, 흑회색 전돌마저 은회색으로 반짝일 정도였다.


홍단령 차림의 민정중은 내병조 앞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늘 저편의 은금빛 뜨락을 지켜보았다. 나장들이 정丁자형의 형틀을 갖다놓았다. 그러자 서리들이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기단에 안석 세개를 갖다놓고, 또 기단 밑으로도 서탁과 안석 세개를 설치했다. 벌써 나와 있는 민정중의 존재가 신경쓰이는지, 그들은 힐끔거리면서 쳐다보고, 소맷부리로 눈두덩까지 흐른 땀을 닦아대며, 바삐 뜨락을 돌아다녔다. 벌써 겨드랑이며 등골이 온통 땀에 젖어 딱할 정도였다. 서리 한놈이 기단 앞에 서 있다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괴로운지 두발을 번갈아서 깨금발을 했다. 민정중은 유난히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빛 뜨락이 마음에 들었다. 고문하기 좋은 햇볕이었다.


"아니, 우상대감..."


진선문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동의금 이민서와 오두인이 민정중을 발견하고 서둘러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문랑 오도일이며, 나머지 문랑 세명이 황망히 뒤따랐다. 민정중은 그들을 지켜보며 빙긋 웃었다.


"어서오게."

"..."

"판의금, 지의금은?"

"상소를 준비하시느라...저희에게 맡겼사온데...대감께서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동의금 이민서가 희미한 웃음으로 답하였다. 삼정승이 국청에 참여하지 않을 때는 판의금이 위관석에 앉지만, 판의금이 부재시엔 지의금인 김우형이, 지의금 김우형마저 부재시엔 동의금인 자신과 오두인이 위관석에 앉아야 했다. 위관석에 앉는 것이 내심 부담스럽다 보니, 서로 미루고 미루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의정 민정중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참이었다.


"나는 잠시만 있다가 갈 것이니, 자네들이 위관석에 앉게나."

"아닙니다. 우상께서 앉으시지요."


이민서는 가운데 위관석을 양보하고 얼른 왼쪽 안석에 척하니 앉아버렸다. 오두인도 냉큼 오른쪽 안석에 앉아버렸다. 가운데 위관석만 남았다. 민정중은 마지 못해 앉는 듯이 엉거주춤 위관석에 앉으면서도,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윤휴를 형문할 준비가 모두 갖춰졌다. 이제 윤휴만 오면 끝난다.


민정중은 왼쪽 품속을 더듬어 서찰 한통을 꺼내들었다. 좌우에서 이민서와 오두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곁눈질을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민정중은 보란 듯이 서찰을 펼쳐들었다. 한눈에도 세찬 파도 같은 기운이 뻗는 듯한 서체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 削草除根삭초제근

풀을 없애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


낮이 길어선지, 촌음마저 길게 느껴졌다. 나장들이 제대로 거동도 못하는 윤휴를 질질 끌고 왔다. 고작 형신 한번 만에, 윤휴는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탓에 유독 형장을 못견디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엇비슷한 이태서는 독하게도 몇날며칠을 버티다가 결국 압슬과 낙형까지 받고 죽었는데, 윤휴는 고작 형신 하루 만에 저리 죽는 시늉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20년 전에, 함께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팍삭 늙었다니. 나장들이 윤휴를 형틀에 엎어놓고 볼기를 발가벗기자마자, 민정중은 차갑게 물었다.


"방금 전에 이환이 군기시로 끌려간 것을 아느냐?"

"..."

"죄인 윤휴, 이제 네 죄를 승복하겠느냐?"


윤휴는 힘없이 두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추궁하는 민정중의 음성을 그저 듣기만 하였다. 자신보다 열한살이나 어린 민정중이 하대를 하는 날도 있다니. 현실 같지가 않아서 꿈결처럼 아득했다. 한때는 3백리길도 마다 않고 자신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던 젊은이가, 이제는 자신을 형틀에 엎어놓고 냉엄하게 하대를 하는 것이, 격세지감이 들었다. 물론 그 시절엔 송시열과도 친분이 돈독할 때였다. 윤휴 자신이 주자를 감히 욕보였다는 명목으로 송시열과 틀어지기 무섭게 등을 돌린 것이 민정중이었다. 지금도 민정중이 두손에 쥔 저 서찰은, 송시열의 필체였다.


"나는 죄가 없네. 그건 대수大受(민정중의 자字) 자네도 알지 않는가?"


오랜만에 윤휴의 입에서 들어보는 자신의 자에 민정중은 한순간 멈칫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도 이상했다. 이미 오래 전에 건넌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온 듯한 연어처럼, 형틀 장판 위에서 꿈틀거리면서 자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니, 기분이 더욱 해괴했다.


"죄인이 감히...내 자를 부르다니? 여봐라! 저놈을 매우 쳐라!"


민정중은 발끈하여 나장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윤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나장들이 경직된 얼굴로 민정중을 돌아보았다. 김수항과 이상진과는 사뭇 달랐다. 오시수가 간혹 흥분하면 문사낭청들을 제치고 자신이 나서서 죄인을 형문하더니, 지금 민정중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죄인에게 곤이며 장이며 가차없이 휘두르는 것이 자신들의 업인지라, 그들은 한사람씩 교대로 둔장을 휘둘러댔다. 윤휴의 벌거벗은 볼기가 물크러지고, 희붉은 살점이 튀어 그들의 턱밑까지 묻었다. 그들은 위관석의 민정중이 형신을 중지하라 명한 후에야 비로소 턱밑의 피묻은 살점을 닦아낼 수 있었다. 민정중이 잔칫상을 포식하기나 한 듯한 음색으로 윤휴에게 물었다.


"이제 좀 공사가 구분이 되느냐?"

"..."

"묻겠다. 네놈이 그 비밀차자로 누구를 국문하자고 청했더냐?"

"나는 그저, 익명서의 진위를 가릴 수가 없으니 그 범인들을 국문하라고 한 것일...뿐이오."

"이환이나, 신성로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소."


정말로 윤휴는 고분고분해졌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굳이 공대를 않는다고 매를 더 벌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시울에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한때 함께 뱃놀이를 하며 술과 시를 나눈 이에게 고문을 당하는 설움인지, 한집에서 호수 같은 연못에서 바짓단을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서 물고기를 잡던 이종조카 이환이 방금 전에 군기시로 끌려간 슬픔인지...하지만 그 눈시울을 내려다보는 민정중의 입시울은 건조하게 비틀렸다.


"웃기시네. 이환? 신성로? 그 익명서에서 겨냥한 대신들의 이름 중엔 내 이름, 민정중도 있었다. 네놈이 나를 없애고자 이환을 사주하여놓고, 뭐? 이환? 신성로?"

"그게 아니래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놈이 해묵은 원한을 풀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거늘..."

"글쎄 아니래도..."

"병권을 쥔 대신들을 교체하란 글귀는 무엇이냐? 그것도 딴소리를 할 테냐?"

"그건 대신들이 아니고 무신들을 말하는..."

"참으로 비루하구나. 무신? 여전히 이정과 이남을 모른다고 할테냐?"

"글쎄 난 그둘의 얼굴을 분간도 못했소..."


윤휴는 계속해서 힘없이 부인했다. 자신은 사실 누가 왕이 되든 상관 없었다. 점점 윤휴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떼는 왕이 밉기도 하였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식으로, 왕은 자신을 외면했다. 그 눈길은 아직 새파랗게 어린 최석정에게 닿아 있었다. 최석정이 있으니 자신을 버려도 된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 왕 대신 차라리 삼복 중에서 한사람이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은근히 있었다. 하지만 역심을 인정해선 안되었다. 곤장을 맞아 죽더라도, 자신과 삼복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가는 역당으로 묶일 터였다.


"허! 아직도 정신을...여봐라, 다시 저놈을 매우..."

"대감! 이러다 윤휴가 죽겠소이다. 죄를 승복하지도 않고 죽게 하실 겁니까?"


오두인이 벌떡 일어나서 민정중의 앞을 가로막았다. 민정중은 두눈이 충혈되어 오두인을 쏘아보았다. 자신보다 네살이나 많은 오두인이지만, 품계와 직위도 자신보다 다소 낮았다. 하지만 여차 하면 손을 뻗어 자신의 팔까지 잡을 기세였다. 괘씸했다. 상대가 명안공주의 시아비라는 사실은 당장 생각나지도 않았다. 헌데 오두인은 한발짝도 비켜서질 않았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자네도 최석정과 같은 소리를 하는구먼. 사돈지간이라 그런가?"

"여기서 사돈이 왜 나옵니까? 전하께서 분부하신 바를 대감께 상기시켜드렸을 뿐이외다."


민정중은 할 말을 잃었다. 오두인의 옆구리 틈새로 곤죽이 된 윤휴의 몰골이 반절만 보였다. 처마 밑으로도 짓쳐들어온 햇살 탓에 눈이 따가웠다. 관모 틈새로 땀이 차서, 줄줄 흘러내린 끝에 눈꺼풀까지 스며들었다. 그래서 더 눈이 따가웠다. 그나마 처마 밑이 조금 더 시원했다. 하지만 마냥 여기 얌전히 앉아서는 윤휴의 목숨을 거둘 수가 없었다. 스승은 이미 뿌리까지 뽑으라고 명하였다. 어떻게든 윤휴의 목숨을 거두어야 했다.


"그래? 허면, 누가 이기나, 해봐야겠지."


민정중은 윤휴를 쏘아보며, 위관석에서 일어서더니 그 자리에서 관모를 벗었다. 오두인이 놀란 눈으로 민정중을 돌아보았다. 민정중은 싸늘한 눈빛으로 형틀 위의 윤휴를 내려다 보았다.


"윤휴가 사주한 익명서에 내 이름이 적혔으니, 윤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지. 궐문 밖에서 대죄하겠네."

"대감! 이미 윤휴가 형문을 받는 마당에 이러실 것까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음이야..."


민정중은 세차게 단령자락을 펄럭이며,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이민서와 오두인이 당혹스런 음성으로 소리쳐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뜨락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햇볕은 잔인하게 뜨거웠다. 처마 밑에서 반쯤 얼굴과 목을 가린 채로 추국을 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작열하는 햇살에 들볶이는 듯한 모래알들이 발밑으로 밟히면서, 하필 민정중의 머릿속엔 하필이면 오래 전에 윤휴가 자신에게 지어준 답시가 한글자한글자 튀어올랐다.


학사투잠불學士投簪紱

임호결소루臨湖結小樓

시시래문아時時來問我

공나조어주共拏釣魚舟


학사가 잠불簪紱(관모에 꽂는 비녀와 인끈)을 벗어던지고

호숫가에 와서 작은 누각 지었더니

때때로 내 안부를 물으러 찾아와서

함께 고깃배를 끌어 건지네.


민정중으로선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한 시였다. 하필이면 윤휴의 입으로, 대수大受라는 자신의 자를 듣자마자, 그 오언절구가 떠올랐다. 고작 스무글자라서, 너무 짧아서 잊히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눈에 그린 듯한 묘사로 자꾸만 기억을 되살리는 건건지, 왜 생각이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정중은 왼쪽 옷깃을 힘껏 부여잡았다. 반듯하게 풀을 먹인 홍단령 앞섶이 꼬깃해지는데도, 품속의 서찰이 손끝에 닿을 때까지, 품속에서 바스락거릴 때까지 틀어쥐었다. 스승의 서찰에 적힌 네글자가 집채 만한 파도처럼 뇌리를 덮쳤다. 삭초제근, 삭초제근, 삭초제근...



해가 지기도 전에, 동온돌로 차자가 물밀 듯이 올라왔다. 차라리 격식인 상소라면 한뭉치로 추렸다가 다음날 편전 어탑으로 도승지가 가져올 것을, 약식인 차자는 밑도 끝도 없이 동온돌 문틈새로 흘러들어왔다. 지금도 두광이 대여섯필의 두루마리를 받친 차자를 받친 소반을 두손으로 꽉 움켜쥔 채로 숙종에게 차마 내밀지도 못하고, 물리지도 못하고서, 안절부절했다.


"이리 내지 않고 뭐 하느냐?"

"전하, 차자...너무 받아주지 마시옵소서."


옆에 도승지가 있는데도, 망설이다 결국 말을 내뱉고야 마는 두광이었다. 다음날 상소를 편전 어탑으로 한꺼번에 올리면 될 것을. 왜 자꾸 차자를 써서 올리는 건지, 또 왜 자꾸 받아서 전하는 건지, 괘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왕을 모시는 두광 자신도 이렇게 노여운 기분이 드는데, 왕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하지만 도승지 윤계는 윤계대로 그런 두광이 괘씸하여 매섭게 눈을 흘기면서 자신이 직접 두광의 손에 들린 소반을 맞잡았다. 불알 두쪽도 없는 환관 주제에 나설 자리, 물러설 자리를 분간도 못하고 설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헌데, 이 괘씸한 환관 놈이 소반을 놓지 않고 두눈에 힘을 주어 지릅뜨고 자신을 마주보았다. 손 놓으라고 윤계가 입술을 달싹하여 을러대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작 정6품 상세 주제에. 그 순간 왕의 부드러운 옥음이 그들의 치열한 눈싸움을 말렸다.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위기가, 또 누군가에겐 기회인 법이니."

"..."


도승지 윤계는 뜨끔한 표정으로 왕의 눈치를 보았다. 왕은 담담히 대꾸하고 어수御手를 내미는 참이었다. 얼핏 손가락 마디가 시뻘겋게 종기라도 난 것 같았다. 윤계는 흠칫하여 다시금 어수를 힐끔거렸다. 일전에 중궁전이 손가락에 종기가 나서 백광현이 직접 침으로 째기까지 했었다는 소문이 귓전을 스쳤다. 중궁 손가락에 종기가 날 일이 무언가 싶었다. 하지만 왕이나 중궁이나 시도 때도 없이 붓을 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면 손가락이 짓물러서 종기가 날 법도 했다. 왕이 모든 교지와 비답을 친필로 쓰는 것도 아니니 손가락이 문드러지고 물크러질 일이야 없지만서도, 허구한 날 자기 손으로 직접 쓴 비망기와 비답도 종종 내리는 성정이니 어수가 저 모양이 되었다 싶었다.


"왜 그러는가?"

"아니...어수에 종기가..."

"물집과 종기도 구별 못하는가?"

"예?"

"내 손은 걱정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하라."

"하오나..."


도승지 윤계가 왕의 어수만 보며 머뭇대는데, 장지문 너머에서 대전상궁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최응교가 왔나이다."

"들라 하라."


한순간 도승지 윤계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안타깝게 왕의 어수만 쳐다보던 눈길도 순식간에 메말라버렸다. 장지문이 열리고 최석정의 그림자가 문턱을 넘었다. 도승지 윤계는 두광과 소반을 맞잡았던 손을 놓고서 물끄러미 최석정의 두손만 쳐다보았다. 옥당 소속인 최석정은 지금쯤 빈손이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빈손이었다. 도승지 윤계는 차가운 눈초리를 최석정의 얼굴로 휘둘렀다. 하지만 최석정은 그런 도승지의 눈총을 외면하고 사뿐사뿐 걸어들어와서 자신에게서 서너뼘 떨어진 자리에 부복했다. 무릎맡으로 두손을 모은 최석정 역시 손가락 마디마디가 올록볼록하니 붓대에 눌린 자국이 역력했다.


"그래, 손가락은 괜찮소?"

"염려해주신 덕분에, 붓을 쥘 정도는 되옵니다."

"그렇소?"

"예, 전하."


참으로 괴팍한 왕이었다. 정3품 당상인 윤계 자신에겐 하대를 하면서, 정3품 준직인 최석정에겐 존대를 하는 심보라니. 윤계는 속이 거북했다. 안 그래도 주는 것 없이 미운 최석정이었다. 정말로 주는 것도 없었다. 지금 최석정은 빈손으로 와선 안되었다.


"왜, 최 행行 응교 손에도 뭐가 났는가?"

"아니...없사옵니다."


윤계가 어색한 웃음으로 둘러댔다. 그러자 두광이 차자를 받친 소반을 왕의 서안에 올렸다. 이제 최석정이 왔으니 차자를 전하는 것이었다. 왕은 재바른 눈길로 차자와 계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환의 사형을 집행했다?"

"예, 전하, 하오나 윤휴의 사사는 아직..."

"윤휴의 일은 좀더 신중을 기할 것이다."

"지당...하시옵..."

"또 이것은 이환의 익명서에 자신의 이름이 적혔으니 궐문 밖에서 대죄待罪를 청한다는 민정중의 계문...?"


바삐 차자를 훑어보던 숙종의 손끝이 멈칫했다. 민정중이 대죄를 청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윤휴는 이환이 서인들을 모함한 익명서의 일로 내병조 앞 마당에서 혹독한 국문에 시달리는 마당에, 민정중은 자신이 모함을 입었으니 대죄를 하겠다니.


"예, 전하, 지금 우상이 뙤약볕..."


도승지가 민정중의 입장을 설명하려는데, 이번에도 왕이 말허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그것도 차디찬 냉소로.


"대죄라? 대죄는 자신의 죄값을 기다리는 것이거늘, 거꾸로 남의 죄값을 기다리다니?"

"..."

"익명서 자체가 무고인 걸 아니, 우상은 안심하고 직임에 힘쓰라 전하라."

"..."

"뭐 하는가? 계속하지 않고?"

"예, 예 전하...이건 권대운과 민희를 중도부처하고, 허목을 파출하라는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의 합계合啓인데..."

"양사가? 옥당玉堂(홍문관의 현판 이름이자 별칭)은?"

"홍문관은 아..."


도승지 노릇도 힘들었다. 도승지 윤계는 왕이 자신의 말을 도통 귀담아 듣지 않고 차자와 계문들을 빠르게 살피는 바람에 대답을 한문장도 온전히 끝맺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대답도 차마 마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얄궂게도 왕은 그런 윤계를 힐끔 노려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건가?"

"예?"

"옥당은? 아 뭐? 아직 안했다는 얘긴가, 아예 않는다는 얘긴가, 아마 할 거란 얘긴가?"

"..."

"이거 원...말끝을 흐지부지 흐려놓으니 알아들을 수가 있나?"

"..."


도승지 윤계는 왕에게 말려든 느낌이 들어 입안이 온통 쓰라렸다. 홍문관은 동참하지 않았다. 남인 정국일 때는 서인인 김석주가 홍문관 수장을 겸하며 버텨준 덕에 삼사三司 중 양사兩司만 남인의 수중에 있었다. 이제 서인 정국이 되었으니 당연히 삼사가 모두 서인의 수중에 들어와야 했는데, 오히려 홍문관이 빠져나왔다.


이게 다 최석정 때문이었다. 최석정이 홍문관의 수장 남구만에게 뭐라 입김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도승지 윤계는 최석정을 사납게 흘겨보았다. 하지만 최석정은 마침 문방사우를 챙겨다가 자기 무릎맡에 놓아주는 두광을 향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최응교?"


어쩔 거냐고 윤계가 석정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하지만 석정은 윤계를 무심히 쳐다보곤 대꾸도 없이 먹을 갈기 시작했다. 새파란 놈한테 무시당한 기분에, 도승지 윤계는 아랫입술을 삐딱하게 씹어댈 뿐, 더는 큰소리로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따질 수가 없으면 떠넘길 수 밖에.


"옥당은 합계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직인지, 아예인지, 아마인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오니 최응교에게 물어봐 주시옵소서."

"..."


물귀신처럼 물고늘어지는 도승지 윤계의 발언에, 석정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물론 합계할 생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저들도 굳이 옥당의 합계까진 필요 없다는 듯이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대청臺廳(사헌부, 사간원이 회의를 여는 곳)에 모여 합계를 합의해 놓고서, 옥당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괜히 스승과 자신을 탓하는 느낌이었다.


"최 행 응교, 옥당의 입장은 어떻소?"

"권대운과 민희, 허목의 죄상이 크지 않으니 중도부처는 과하다는 중론입니다."

"허면?"

"문외출송이 합당합니다."


최석정의 입에서 나온 넉자에 도승지 윤계의 얼굴이 굳어졌다. 최석정 역시 송시열을 비호하고 왕의 잘못을 간한 죄로 남인조정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원찬遠竄을 간하였다. 하지만 왕이 워낙 감싼 탓에 문외출송으로 끝났다. 그나마도 왕이 명안공주의 혼사 때 최석정의 아들 창대를 삼간택에 올리면서 최석정마저 소결疏決(관대히 처분함)을 해버렸다. 그리 후한 은전을 입었으니 최석정으로선 과한 형벌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권대운과 민희, 허목을 일체 삭출하라."


왕의 옥음이 도승지 윤계의 고막을 긁었다. 윤계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석정을 흘겨보았다. 최석정은 붓을 들어 벼루 위 먹물을 콕 찍어 왕의 전교를 받아적었다. 윤계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왕이 또 한필의 차자를 펼쳤다. 이번엔 아주 눈에 익은 서체였다. 병조판서 김석주의 차자였다.


"허견, 삼복과 내통한 죄목으로 유배를 갔던 박상원이 기실은 윤휴의 사람이었으니, 그를 잡아 엄히 추국하라? 윤휴를 흉서가 아닌 역모 혐의로 다시 추국하라?"


차자의 논지를 되짚어보고서 숙종은 할 말을 잃었다. 이들 서인들은 이번엔 윤휴까지 씨를 말릴 기세였다. 물론 윤휴는 자신이 버린 존재였다. 윤휴가 내어놓는 개혁안들은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산이 많아서 길이 좁고 험한 조선의 지형에 맞지도 않는 병거의 과도한 제작을 주장했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 셈이었다. 북도의 여인들에게 화포 쏘는 법을 가르쳐서 청나라 군대를 상대하게 하자는 송시열의 주장 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 휘하에 거느리는 문인들이 송시열의 절반도 안되는 것이 윤휴의 불운이라면 불운일까.


"전하, 대사헌 신정, 대사간 유상운이 윤대를 청하옵니다."


대전상궁의 목소리가 장지문 밖에서 들려왔다. 숙종은 입가에 한올의 실소를 머금고 장지문을 쳐다보았다. 저들이 한발 늦었다. 권대운과 민희, 허목까지 이참에 역당의 한패로 몰아서 쓸어버릴 요량인가 본데, 이미 문외송출로 전교를 내렸다. 남아일언중천금보다 무거운 것이 어명이었다. 저들이 이제 와서 뒤집어 엎을 수는 없었다. 숙종은 석정의 붓끝에 시선을 던지며 차갑게 대꾸했다.


"들라 하라."


장지문이 열리고, 대사헌과 대사간이 두손에 홀을 맞잡고 조심스레 걸어들어왔다. 이미 양사가 합계하여 허목 등의 일을 청했겠다, 입시하여 강력하게 요구할 셈이었다. 하지만 마치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최석정이 두광에게 교서를 건네면서, 두광이 왕의 서안 위로 교서를 올려놓았다. 숙종은 가만히 손을 뻗어 서안 위의 대보를 움켜쥐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한발한발 안으로 걸어들어오던 대사헌과 대사간이 멈칫하여 서안을 내려다 보았다. 서안 위에 놓인 한장의 교서에, 마침 왕의 어수가 시명보도 아닌 대보를 찍는 참이었다. 대사간 유상운은 할 말을 잊었다.


"권대..."


왕은 그들의 흔들리는 두눈을 흘끗 들여다 보고선, 그들의 두눈에 한자한자 똑똑히 보이도록 교서를 어깨높이로 펼쳐들었다. 마치 자신은 먹물이 다 말랐는지 살피기라도 하듯이.


"날이 더워선지 먹물이 벌써 다 말랐군."

"..."


대사헌 신정과 대사간 유상운이 할 말을 잃었다. 이미 왕이 한번 정한 일을 바꾸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개정을 청할 수는 있더라도, 자신들이 끝내 왕의 뜻을 꺾으려 들다가는 불경죄 명목으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홍문관이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지금은 특히.


"권대운 말인가?"

"윤휴...의 일 말이옵니다."

"윤휴라?"


왕이 놀리듯이 되물었다. 유상운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 안쪽을 씹고 말았다. 입술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옆에서 신정이 흠칫 놀라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유상운은 애써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예, 전하, 윤휴의 일을 아뢰려 하옵니다."

"말해보라."

"이미 이환이 윤휴는 무관하다고 끝내 부인하고 죽었는데, 익명서의 일을 윤휴에게 추궁하는 것은 사체事體(일의 이치와 체통)를 그르치는 일이오니...윤휴가 이남과 이정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거짓말로 둘러댄 것과, 밀차密箚(비밀차자)에서 병권을 쥔 대신을 교체하라 주장한 것, 그리고 체찰부의 복설을 꾀한 것, 이들을 문목으로 삼아, 그가 병권을 독점하려 한 일을 추궁하시옵소서."


숙종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 싶어서 가만히 귓등을 긁었다. 손가락 끝이 시뻘개질 만큼 손톱을 잔뜩 세웠다가 도로 낮췄다. 숙종은 짐짓 온유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하기야, 무고誣告와 모역謀逆은 경중이 다르니,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의 관료 통칭)의 말이 옳다."


왕이 순순히 수긍해버리자, 대사헌과 대사간은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쉽게 윤휴의 씨를 말리게 생겼다. 단순히 무고이면 반좌反坐(모함을 한 사람이 도리어 똑같은 죄를 입는 형벌)에 의해 윤휴 본인만 결딴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모역이면 윤휴는 물론 삼족, 혹은 구족까지 결딴낼 수 있었다. 또한 꼬리에 꼬리를, 미끼에 미끼를 물려서 윤휴와 친밀했던 허목까지도 역모로 엮을 수 있었다. 이미 팔순이 넘은 허목의 목숨은 거둘 수 없더라도, 최소한 그 삼족을 멸할 수 있었다. 허목의 제자들까지도 엮을 수 있었다. 지금 왕을 구슬려서 무고가 아닌 모역으로 윤휴를 형문하다 보면, 허목의 구족과 문하를 씨를 말릴 수도 있었다.


"이는 숙고해야 할 일이니, 사관은 가서 국청 대신들을 데려오라."

"예 전하."


왕이 그저 사관이라고만 말했지만, 역시 사관을 겸임하는 최석정이 고개를 조아렸다. 대사헌과 대사간은 왕이 승전색을 보내지 않고 사관을 보내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승전색이든 사관이든 아무나 다녀오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 사관이 하필이면 최석정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최석정이 자리를 비운다면야, 좋았다. 왕과 한데 앉아 딴죽을 거는 꼴을 지켜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밖으로 내돌리고 싶었다. 어차피 최석정이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국청의 신료들엔 최석정의 사람이 없었다. 기껏해야 오도일 정도였다. 그 오도일은 대신 축에도 끼지 못했다.


헌데, 최석정이 나가더니 반시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동온돌 장지문이 붉은 석양에 물들었다. 콩기름을 바른 구들장도 불그스름한 빛이었다.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는 최석정의 빈 자리가 대사헌과 대사간에겐 눈엣가시처럼 틀어박혔다.


"아니, 무슨 함흥차사야. 아까 가서 왜 아직 안와?"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대사간과 대사헌은 느낌이 좋지 않아서 아직이 속닥였다. 국청이 예전처럼 견평방에 있는 것도 아니고, 궐안으로 옮겨놓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리가 없었다. 한군데가 아니라 여러군데를 두루 도는 것처럼, 아니면 장소를 착각하여 견평방까지 다녀오는 것처럼 마냥 시간이 걸렸다. 두손으로 홀을 쥐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도 한계였다. 날이 덥다 보니 손에 땀을 쥐었다. 눈치껏 홀을 두손에서 한손으로, 한손에서 다른 한손으로 바꿔들고 단령자락에 손을 비볐다. 그 순간 그들의 무릎맡에 그윽한 향이 감도는 은침차銀針茶가 찰랑이는 연꽃문양 찻잔이 놓였다.


"시간이 걸릴 듯 하니, 차나 들며 기다리시오."

"..."

"예..."


왕의 느긋한 옥음에, 대사간과 대사헌은 대답이 나오다가도 콱 막혔다. 당장 동온돌 밖으로 나가서 둘러보고 싶은 것을 애써 꾹 참고 지긋하게 기다리려니, 그저 지긋지긋했다. 마냥 엎드려 기다리는 것도 고문이었다. 이러다 등허리가 굳어서 끊어질 것만 같았다. 차마 왕 앞에서 무례를 범할 수도 없어 애써 고개를 조아리고 등허리를 납작 구부리고 차를 마시자니 또한 괴로웠다. 자신들도 모르게 온몸이 뒤틀렸다. 그나마 홀 대신 잔을 쥐었으니 손이 조금 더 편안했다. 하필이면 뜨끈해서 땀이 차는 사실만 빼고.


"전하, 국청 대신들이 당도했나이다."

"들라 하라."


대전상궁이 장지문 밖에서 고하더니 드디어 문이 열렸다. 대사헌 신정과 대사간 유상운은 신경질적으로 장지문을 돌아보았다. 어전御前이라 감히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저 눈초리나 사납게 휘갈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두눈을 부랴리며 장지문을 보는데, 하필이면 장지문에 모습을 드러낸 건 최석정이 아니라 영의정 김수항이었다. 하필이면 영상대감에게 그악스런 눈길을 건네다 들킨 셈이었다. 그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김수항의 어깨너머로 눈길을 던지니, 궐 밖에 있어야 할 우의정 민정중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우상."


왕이 차가운 눈웃음으로 민정중을 반겼다. 민정중은 고개를 조아리며 그대로 문간에서 엎드려 울먹였다. 김수항은 그런 민정중을 의식하고 옆으로 살짝 비켜서 부복했다.


"신臣 민정중, 불민하고 불충하여 심려를 끼쳐드렸나이다.'

"아니오. 우상 역시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소."


김수항과 민정중이 품계에 걸맞게 앞쪽으로 두어발 더 나아가 부복했다. 계속해서 판의금 이상진, 지의금 김우형이 속속 장지문 안으로 들어섰다. 민정중이 돌아온 사실에 정신이 팔렸는지, 대사간 유상운이 앞켠에 앉은 민정중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최응교는요?"

"아직 안 왔는가? 두 동의금을 데리러 간댔는데?"

"동의금..."


유상운의 얼굴이 굳었다. 동의금이 누구누구더라? 당장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 보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유상운은 여러번 두눈을 깜빡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동의금은 이민서, 오두인이었다. 지금 문간으로 모습을 드러낸 저 둘을 보니 비로소 생각이 났다. 그들 어깨 사이로, 어깨너머로 최석정의 얼굴이 보였다. 셋이 함께 선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이민서는 최석정의 스승 남구만의 죽마고우에다, 최석정의 친인 이민철의 형이었다. 오두인은 최석정의 사돈이었다. 유상운은 소스라쳐서 국청 대신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판의금 이상진을 제외하고, 지의금 김우형에, 동의금 이민서에, 또 다른 동의금 오두인까지.


"다들 왔는가?"

"예, 전하."

"다들 앉으시오."


왕의 손짓에, 김수항 이하 대신들은 품계대로 차례로 부복했다. 두광이 얼른 찻잔들을 치우는 것을 보니 괜히 기분들이 요상했다. 하지만 더는 한가하게 차를 들며 시간을 축낼 수도 없었다.


"이환이 끝내 윤휴를 끌어들이지 않고 죽어, 익명서의 일로 더는 윤휴를 형문할 수 없으니, 차자의 일로 윤휴를 국문하자고 대간이 의견을 내었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왕이 견해를 묻자 국청 신료들이 섣불리 의견을 내지 못하고 김수항의 눈치를 보았다. 어서 자신들을 대표하여 포문을 열라는 눈짓이었다. 김수항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못견디고 입을 열었다.


"윤휴가 대비전에 대해 감히 조관照管이란 말을 입에 담은 것과 체부의 일을 도모한 것은 죽을 죄까진 아니옵니다. 하오나 밀차를 올린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엄히 다스려 주시옵소서."

"..."

"예, 전하, 이미 유배를 명하시고, 같은 죄목으로 다시 추국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하오니 밀차密箚를 갖고 결단하여주시옵소서."


왕이 아무 대꾸도 없자, 우의정 민정중도 한마디 덧붙였다. 아예 결단해 달라는 말로, 왕의 어수를 붙들어 윤휴의 목덜미로 가져가는 꼴이었다.


숙종은 매캐한 연기가 목울대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차자라고 못박는데도, 저들은 말끝마다 밀차密箚라고 은밀한밀密자를 꼭꼭 갖다붙였다. 정말 이대로 윤휴가 배후가 되면, 자신도 배후가 될 판이었다. 숙종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머지 국청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른 대신들은?"


왕의 눈길이 지의금 김우형에게로 향했다. 김우형은 흘끔 눈길을 돌려 동의금 이민서와 오두인의 반응을 살폈다. 오두인이 보일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눈웃음으로 최석정을 돌아보았다. 석정은 조용히 구석에 배석하여 붓대를 놀리는 참이었다. 하지만 혀끝도 소리없이 놀렸다.


명정전형明正典刑

(법에 따라 공개적으로 처형하다.)


죄수가 형장刑杖 아래 고문 도중 죽기보다, 형장刑場 위에서 정형을 받아 죽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명정전형은 조선이 건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법法이라는 것이 싹을 틔운 이후로 이땅에 뿌리내린 길이었다. 오두인은 차분하게 아뢰었다.


"윤휴는 죄가 이미 드러난 것만도 죽고도 남습니다. 헌데 다시 형문하다 고문 도중 죽게 만든다면, 명정전형은 없어질 것입니다."


김수항과 민정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들은 윤휴를 차자의 일로 추국하라 진언했는데, 오두인 저자가 끼여들어 일을 그르쳤다. 형문 도중 죽지 않게 하려면 두가지 길 뿐이었다. 형문을 하지 않거나, 사형을 집행하거나. 하지만 이미 결론은 났다.


"윤휴를 사사하라?"

"..."


죽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오두인은 자신이 의견을 내놓고도 뭔가 꿀을, 아니 더 끈끈한 부레풀을 한입 가득 잘못 삼킨 것처럼 목울대가 달라붙어버렸다. 그저 눈시울을 꿈틀하며 고개를 조아릴 따름이었다.


"동의금 이민서, 지의금 김우형, 그대들도 견해가 같소?"

"그렇사옵니다."


김수항과 민정중의 따가운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이민서와 김우형도 고개를 숙였다. 김수항은 목울대로 터져나오는 한숨을 고개를 비틀어 잠그려 했지만, 입김처럼 흘러나왔다. 어쩐지 최석정이 의금부에 없다 했다. 최석정을 당상으로 승격을 시켜놓았으니 문사낭청으로도 의금부에 꽂아넣을 명분이 없자, 왕이 최석정의 친인들을 의금부에 꽂아넣은 모양이었다.


"전하? 하오나 윤휴가 허견과 이남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남았사온데, 어찌 더는 추국을 하지 않고 이대로 사사를 하려 하시옵니까?"

"오두인의 말대로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환이 익명서를 내걸고, 윤휴는 다음날 차자를 올려 병권을 쥔 신하들의 관직을 물갈이하자 청했으니, 이는 병권을 해제하고 이남과 더불어 역모를 일으키려는 음모였다. 허니 장사杖死(장형을 받다 죽음)가 아닌 사사賜死로, 명정전형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윤휴의 사사를 명하고서 숙종은 서안 위에 올려둔 자신의 오른손을, 오른손 아래로 비친 검은 손그림자를 흘끔 내려다 보았다. 손바닥이든 손등이든 한번쯤 더 뒤집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이 너무도 추악해질 것만 같았다. 그럴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부디 자신의 두손을 한번 더 핏물에 담그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작가의말

1. 작은 악플에 기운이 꺾여서 며칠 정신을 못차리다 겨우 연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2. 뒤늦은 댓글엔 리플달지 않는 것이 제 방침이라, 악플에도 웬만해선 대응을 안합니다만. 속편에서 숙종에 대한 몇가지 오해들을 바로잡을까 합니다. 부디 속편을 쓸 시간이 제게 주어지길 바라면서...그 전에, 정사와 야사를 두루 검토해본 바로는, 제게는 명성왕후 김씨는 최악 그 자체였습니다. 김석주보다 더한 악역으로 그릴 생각입니다. 막장소설이 되더라도, 대비 김씨에 대해선 조금도 우아하고 품격있게 그릴 마음이 없습니다.


3. 제 글을 추천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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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해의 그림자 172 +6 14.03.09 2,329 39 36쪽
172 해의 그림자 171 +6 14.03.05 2,467 32 39쪽
171 해의 그림자 170 +4 14.03.01 2,759 27 35쪽
170 해의 그림자 169 +5 14.02.26 2,587 29 39쪽
169 해의 그림자 168 +2 14.02.22 2,978 32 30쪽
168 해의 그림자 167 +3 14.02.19 2,084 26 38쪽
167 해의 그림자 166 +4 14.02.15 1,784 30 38쪽
166 해의 그림자 165 +4 14.02.11 2,178 29 40쪽
165 해의 그림자 164 +5 14.02.07 1,920 33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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