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장유유서는 없다. (4)
이제 소년티를 벗기 시작한 남자의 반항적인 눈빛을 보며 김홍준은 그 사실을 직감했다.
“아, X됬네.”
주먹이 날아왔다.
그 덕에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김홍준은 남자를 와락 끌어안고 앞으로 밀어 붙였다. 남자의 주먹은 김홍준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고 둘은 바닥을 굴렀다.
현실이란 으레 그렇다.
주먹다짐이 멋들어진 타격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싸움은 주먹질에서 시작해 바닥을 뒹구는 걸로 끝나게 마련이었다.
김홍준은 바닥을 뒹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취객들의 싸움을 목격하며 자신은 절대 저렇게 추해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왔었다.
그런 다짐이 이역만리 타지에서 깨질 줄 누가 알았을까.
말리는 사람 하나 없는 카페를 뒹굴며 김홍준은 하염없이 경찰을 기다렸다.
그 사이 찻잔이 깨지고 탁자가 넘어졌다. 생판 처음 보는 소년과 한 몸이 된 김홍준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카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갔다.
그때 또다시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더해 사람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홍준은 자신들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이도미의 날카로운 외침이 고막을 때렸다.
“조심해요!”
눈가를 찌푸렸다.
강한 빛이 김홍준의 눈을 때렸다.
눈부신 빛에 김홍준이 눈을 감은 사이 소년이 김홍준의 몸을 밀치고 일어섰다.
소년을 놓친 순간 김홍준은 서둘러 몸을 웅크려 다음 충격에 대비했다.
일어선 소년이 발차기를 해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당황한 목소리와 째지는 여자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했지만 네덜란드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김홍준은 슬며시 눈을 떴다.
이내 김홍준은 자신의 눈을 부시게 한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칼이었다.
카페를 벗어나 도망쳤던 여자가 칼을 들고 남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김홍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이었다면 직접 말이라도 걸어 봤을 테지만 이곳은 네덜란드였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며 김홍준은 새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알빈 반 브링크는 차창 밖을 쳐다봤다.
아약스 클럽 하우스 인근의 카페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차가 스쳐지나가는 짧은 시간, 골목을 채운 인파를 바라보던 알빈 반 브링크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엄한 일에 관심을 보이기에는 심사가 너무 복잡했다. 알빈 반 브링크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도로를 쳐다봤다.
영화의 엔딩 크래딧 같은 단조로운 도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단조로움 속에서 알빈 반 브링크는 요한 루이스를 떠올렸다.
선수 생활을 끝마치고 아약스에서 코치 생활을 할 때, 알빈 반 브링크는 처음으로 요한 루이스를 봤다.
당시 막 14살이 된 요한 루이스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순진한 축구 소년이었다.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축구에 대한 애정이 더 돋보이는 유망주였다.
당시부터 감독직을 꿈꿨던 알빈 반 브링크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단 한번이라도 요한 루이스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한 루이스가 18세가 된 올해 드디어 기회가 왔지만 흘러가는 전개는 알빈 반 브링크의 예상과 달랐다.
인생이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빈 반 브링크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4년이 흐르는 사이 요한 루이스가 그렇게 변하고 알빈 반 브링크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알빈 반 브링크는 깊어지는 고뇌에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게 알빈 반 브링크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스티비 포츠가 정지 신호에 차를 멈춰 세우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나 본데요?”
경찰차 두 대가 스티비 포츠의 차를 지나쳐 갔다. 둘이 지나온 방향을 향해 이동하는 경찰차를 보며 스티비 포츠가 말했다.
“어, 아약스 클럽 방향인데..?”
스티비 포츠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던 알빈 반 브링크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호 바뀌었어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스티비 포츠는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알빈 반 브링크를 보며 슬며시 농담을 걸었다.
“요한 루이스가 또 뭐라도 저지른 걸까요? 일전에는 자동차를 몰고 여자 교도소로 돌진 했다던데.”
시덥지 않은 농담이었다.
알빈 반 브링크는 눈을 희번덕 뜨며 말했다.
“그걸 농담이라고 합니까?”
“예? 아..아닙니다.”
기분을 풀어주고자 하는 작은 배려가 묵살 당하는 순간이었다.
알빈 반 브링크는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와 관계없는 일에 관심 가지지 말아요. 우리 일에만 집중합시다. 예?”
“무..물론이지요.”
소심한 어투로 대답하며 스티비 포츠는 운전에 집중했다.
경찰차가 달려가고 거기서 무슨 일이 있던지 그게 스톰포겔스 텔스타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알빈 반 브링크의 말대로 였다.
스티비 포츠는 지나간 경찰차에 신경을 끊었다.
김홍준은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여자와 남자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김홍준은 무슨 용감한 시민상이라도 받겠다고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불쾌한 상황을 매듭짓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반응해 단순하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일은 김홍준의 생각과 달리 의외의 방향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김홍준은 칼을 든 여자와 남자 사이에 서서 이도미를 바라봤다.
이도미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열심히 통역해 주고 있었다.
과연 통역사 지망생다운 능란한 통역이었다.
오가는 둘의 대화를 이도미의 입을 빌어 들으며 김홍준은 괜히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칼을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자가 그녀를 불렀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 김홍준은 막장은 국적을 가리지 않음을 절감했다.
“동생이면 누나 말을 들어야지!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억 소리 나게 해준다니까!”
빨갛게 부은 볼을 하고 여자는 그렇게 소리 쳤다.
“니가 무슨 누나야! 그냥 X년이지! 동네 건달들이 하는 소리 듣고 집에 있는 돈 갖다 쓴게 몇 년이야!?”
바닥을 굴러 엉망이 된 머리를 흔들며 남자가 말했다.
김홍준은 오가는 이국의 언어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XX구 XX동의 지구대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막장의 향기 속에서 김홍준은 헛기침을 하며 좌우로 손을 들었다.
“이도미씨, 이거 통역 좀 해줘요."
- 작가의말
오류 및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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