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I am 대표에요.
잠시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는 행동이 어설프긴 해도 앙피가 얼마나 대단한 소년인지에 대하여.
흔하지 않은 마법사. 그중에도 소환술이라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대마법사 이후로 처음으로 능력을 강화한 인물이다.
여왕의 총애까지 받는 이 소년은, 어쩌면 엄청난 일을 하게 될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야. 얘 이상한데? 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냐. 완전 멍청이 아냐.”
카힐이 지저를 쿡쿡 찌르며 무시했다.
지저는 기분 나쁜지 납작한 꼬리를 바닥에 팡팡 쳐댔다.
“그런 소리 마라. 지저는 고지능 동물이야. 생긴 걸로 판단 말게나.”
“그런 적 없···.”
“어찌 되었든 지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 허나...”
교장이 앙피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엔 얼빵한 소년이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녀석이 ‘출발 모퉁이’의 선택을 받는다고? 교장은 그렇게 믿기 힘들었다.
“크흠. 재검사를 한번 받아보는 것도 좋겠구나. 지저가 틀렸을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 저 카힐이랑 비비란 것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실수했을 수도 있어.’
교장은 다시 교장실 뒤편으로 가 책장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각기 다른 색깔의 명찰 4개를 들고 왔다.
교장은 친히 명찰을 하나하나 달아주었다. 아무리 꼴받게 한다 해도 명색이 교장이니 학생들을 아끼는 것이다.
그가 달아준 명찰은 본래 명찰 위에 스며들었다. 당연히 바탕색은 각자 기숙사 색이었다.
그리고 앙피의 바탕색은 검정이었다.
“...? 왜 갈색이 아니라 검정이에요...?”
“잘 나오지도 않는 거 색깔 넣으면 비싸. 어차피 너 포함 두 명밖에 없으니 괜찮다.”
“그게 아니라.. 이름이 안 보이는···.”
“그럼 다들 기숙사 특성에 맞게 충실한 학교생활을 하도록. 만약 눈에 띄는 성과를 낸다면, 내 친히 도장을 찍어주겠다.”
교장이 거만하게 말하며 도장을 꺼내 보였다. ‘수장’이란 단어가 희미하게 보이는 검지의 인장이었다.
이번 목표는 다름 아닌 저 도장을 받는 것이다.
원활한 교우관계? 우수한 성적?
다 필요 없다. 눈에 띄는 사건으로 도장만 받아내고 도망가자.
“좋아. 여차하면 훔치자.”
“...네. 신기한 종이도 받았으니까요...”
이미 훔칠 생각부터 하는 중인 그들이었다. 이게 과연 영웅 아카데미에 맞는 전학생들인가.
앙피가 말한 신기한 종이란 왕국에서 받은 종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3개의 인장이 찍혀 있던 이전의 종이는 나르여앙에게 주었다. 그리고 대신 전송 마법이 걸린 종이를 받았다.
인장이 찍히면 자동으로 나르여앙에게 보내지는 편리한 종이다.
역시 왕국은 편하게 산다는 것을 느낄 무렵, 누군가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좀 늦었구나. 들어와라.”
교장실 문이 서서히 열리며 학생 세 명이 들어왔다. 조금 전 정문에서 봤던 학생 중 일부였다.
“자, 인사들 해라. 기숙사 대표들이다,”
헤라, 슈, 지컬. 각각의 대표가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제일 먼저 나선 건 역시나 열정 넘치는 헤라 대표였다.
“반갑소! 소인은 남도라고 하오. [두이지기 시르므 헤라]의 대표를 맡고 있소. 소인의 통제를 따르지 않으면 피떡이 되도록 패주겠소!”
남도가 개량 한복 같은 옷을 입고는 하하 웃었다. 뭔가 입이 험한 기분이지만 생긴 건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 체격도 작고 옷도 하늘하늘해서 그렇게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다음으로 말을 꺼낸 건 지컬 대표였다.
수녀 옷을 입은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테리아. [No.1 지컬]의 대표입니다. 그대들의 아둔한 신념을 깨우쳐드리겠습니다.”
둘의 소개가 끝났음에도 나머지 한 명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남도가 익숙한 듯 대신 나섰다.
“이 친구가 [슈 SU 쉬욱] 대표인 파시라고 하오. 벙어리는 아니니 걱정 마시오. 그저 말수가 적은 변태 새끼라오.”
“불가능.”
파시는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지 짙은 선글라스와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였는데도 덩치는 비비만큼이나 작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자 기숙사에 가서 하도록 하고. 어서 데려가.”
“그러겠습니다.”
“알겠소!”
카힐과 비비, 나영웅은 대표들을 따라 교장실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교장은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 시가를 꺼냈다.
존재감 하나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앙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어떡하죠...?”
“아. 맞다, 깜빡할 뻔했구나.”
시가에 불을 붙이려던 교장이 급하게 마이크를 켜고 누군가를 불렀다.
잠시 후 교장실로 익숙한 남자가 찾아왔다.
“왔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일외동이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교장에게 충성스러운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앙피의 뒷덜미를 붙잡고 잽싸게 교장실을 떠났다.
“그랴랴랴..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드디어 혼자 남은 교장은 시가를 꺼낼 힘도 없이 축 늘어졌다.
***
일외동은 앙피를 들고 본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이. 꼬맹아 반갑다. 난 일외동이다.”
그가 한껏 불량스러운 말투로 인사했다.
“어이. 양아치 님 반가워요.. 전 앙피에요..”
다른 마을의 인사법을 존중하는 앙피도 그를 따라 했다.
“듣자 하니 너도 무소속이라며. 나도야.”
일외동이 자신의 명찰을 가리켰다. 그 역시도 앙피와 같이 검은색이었다. 다만 그는 똑똑하게도 이름을 흰 실로 박아놨다.
앙피 이외의 한 명이 있다더니, 그게 일외동이었다.
“무소속이라고 기고만장할 생각하지 마.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건 누구도 널 챙겨주지 않는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라?”
“앗... 네.”
앙피가 고분고분 말을 듣자 일외동은 만족한 듯 웃었다. 그는 앙피를 데리고 옥상 끝으로 이동했다.
본관 옥상에선 학교 전역의 풍경이 보였다.
얼핏 보니 학교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 듯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사방을 뒤덮은 커다란 벽이었다.
바다에 잠겼던 대지를 위해 만든 벽. 그 안에 들어와 있으니 왠지 우물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벽 위에선 가끔씩 파도에 밀려온 바닷물이 흘렀다.
“저 멀리 저기 보이냐? 저기가 기숙사다. 그리고 우린 바로 여기.”
일외동은 옥상 정중앙을 가리켰다.
그곳엔 허름한 종이 박스가 쌓여있었다.
앙피가 쓰레기를 쌓아둔 줄 알았던 그곳이 무소속을 위한 기숙사였다. 앙피가 오기 전까진 일외동 혼자였기에 건물이나 장소를 내어줄 수도 없었던 노릇이다.
“저번에 강풍이 오는 바람에 조금 젖긴 했지.”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아도 강풍이 오면 바닷물이 흘러넘쳐 짜디짠 비가 내린다.
“...불쌍하게 사시네요...”
“불쌍하다니! 난 힘도 1등, 속도도 1등, 시험도 1등. 모든 것에서 1등인 학생회장이라고.”
그래봤자 본관 옥상에서 노숙하는 처지는 바뀌지 않지만 말이다.
“...차라리 꼴찌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게 좋지 않아요....?”
“멍청하긴. 1등 외엔 똥이야. 너도 1등이 되려고 노력하라고. 뭐, 내가 있는 이상 기껏해야 2등이겠지만. 크하하!”
굳이 1등을 해야 하나.
어차피 교장의 도장이 목표인 앙피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교장이 말하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저 벽을 부수면 그것도 성과인가...?’
앙피가 바닷물을 가로막은 벽을 빤히 쳐다봤다. 그에게 벽을 부술만한 힘은 없었지만, 만약 정말 그런 일을 한다면 수장 마을은 정말로 수장 마을이 되어버릴 것이다.
차라리 교내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기숙사 대표 자리를 넘보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앙피가 교장을 암살하는 방법까지 생각했을 때, 일외동이 툭툭 어깨를 쳤다.
“너. 당장 매점에 가서 박스를 구해와라.”
“ㅈ..제가 왜요...”
“그야 넌 전학생이니까. 난 3학년이니 내가 너 선배야. 선배 말은 들어야지 않겠나?”
이 영웅 아카데미의 학년 기준은 나이가 아니다. 여긴 교장에게 받은 도장의 개수가 곧 학년이다.
앙피와 다른 녀석들은 이제 막 들어온 신입생. 교장의 도장이 없는 그들은 1학년이다.
반면 일외동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녀석이 아니다. 그는 벌써 교장의 도장을 2개나 받은 3학년이다.
“알았으면 잔말 말고 박스나 사와.”
“...돈은요..?”
“야. 왕국 출신인 놈이 돈도 없냐? 알아서 사와!”
“...네.”
결국 일외동의 성화에 못 이겨 앙피는 옥상을 떠났다.
매점이 어딨는지는 몰라도 돌아다니다 보면 나오겠지 싶었다. 지나가는 학생 아무개에게 물어도 알려주는 걸 좋아하는 검지인 특성상 좋다고 알려주겠지만, 앙피는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거 직접 찾아볼 생각이었다.
기숙사가 정해진 나머지 셋이 각 기숙사에서 기본 교육을 받는 동안, 우리의 앙피는 하나뿐인 무소속 선배에게 셔틀을 당하고 있다.
물론 나르여앙이 용돈을 두둑하게 챙겨주긴 했다.
하지만 앙피는 옥상을 떠나기 전 종이 박스 안에서 일외동의 지갑을 챙겨왔다.
‘... 알아서 하랬으니까.. 괜찮겠지..? 이것도 알아서 한 거니까...’
앙피는 일외동의 지갑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본관을 나섰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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