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좀 나와!!
‘물건 다 샀는데 왜 안 나와... 원래 아카데미생은 이렇게나 한가해..?’
돌진과 동시에 튕겨 나온 앙피가 중얼댔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은 휴일이다. 정기수업은 내일부터 시작이니 오늘 하루쯤 놀면서 보내도 괜찮다는 소리다.
매점에서 앙피를 방해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과연 용사가 될 인물들에게 맞는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무 정신없어서 들어갈 틈이 안 보여...”
앙피는 매점 내부를 엄청난 속도로 서성이는 학생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고루 섞여 있다. 그리고 각자 옷에 노란 막대기가 하나 혹은 두 개가 붙어있다.
노란 막대기, 아마 몇 학년인지 표시하는 용도일 것이다.
그나저나 슈 기숙사생들은 망토를 착용하지 않고 있다. 속도에 방해되니까 당연한 건가?
“알았다. 나도 망토를 벗으면 돼..!”
앙피는 어깨에 달린 망토를 힘껏 움켜쥐었다.
끙.
이르하라의 정교한 바느질은 앙피의 힘으로 뜯을 수준이 아니었다.
‘좋아... 포기..’
앙피는 이번엔 지나가는 학생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무리 정신없어 보인다 해도 결국 규칙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한 명도 부딪히지 않고 움직일 수 없다. ‘매점에서 부딪히지 않고 움직이는 강의’ 따위를 듣지 않는 이상 분명 그들만의 약속이 있을 것이다.
앙피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눈으로 학생 하나를 쫓았다. 노란 머리에 노란 눈썹인 노랑노랑한 학생. 척 봐도 눈에 띄는 학생이라 움직임을 파악하기 가장 좋았다.
‘어디.. 왼쪽으로 돌아서, 다시 오른쪽. 뒤로 도는 척 앞으로. 좌, 우, 좌좌 우, 좌 우우우.’
한참을 바라보던 앙피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복도에 놓여있던 훈련용 마법구를 머리 위로 높게 들었다.
“노란... 감자.. 너무 크면 쪼개면 돼...!”
아니야. 노란 감자가 아니라 노란 학생이야. 마법구 같은 철 뭉치로 쪼개지면 죽는다고.
앙피의 돌발적인 행동에 매점 내부를 수호하던 학생들이 잠시 움찔했다. 덕분에 잠시나마 매점 안으로 진입할 틈이 생겼다.
하지만 앙피는 눈알을 너무 많이 굴린 탓인지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ㅎ... 으엑...”
앙피는 이제 매점 내부를 움직이는 학생들이 보글보글 끓는 스프로 보일 정도였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그는 결국 힘없이 마법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제 강제로 학생들을 멈추는 방법은 포기한 건가, 싶을 때 앙피가 이번엔 신문을 집었다. 그리고는 매점 안으로 신문을 던져 넣었다.
신문은 맥없이 팔랑팔랑 날아가 매점 안에 흩뿌려졌다.
“대단해! 역시 언네임드입니다! 슈 기숙사에서 가장 인기 많고 잘 팔리는 내 신문을 던지다니!
무소속의 통찰력은 예사롭지 않나 봅니다. 정말 대단해!”
기러기가 이때다 싶어 자신의 신문을 홍보했다.
그 정도로 예찬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러기의 신문이 인기 있긴 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가 100가지 넘게 빼곡히 적힌 두꺼운 신문. 기러기가 매주 출간하고 있다.
이 신문에는 슈 기숙사생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사실 모든 기사의 본문은 똑같은 내용이다. 별 의미 없는 ‘비버의 습성’에 대한 정보.
하지만 애초에 본문은 읽지도 않고 제목만 핥는 슈 기숙사생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매점에 흩어진 신문을 하나씩 낚아챘다.
“그래. 이번 주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알아야 해!”
“좋아. 이 자극적인 농축액! 짜릿해, 바로 이거야!”
학생들은 멈춰서서 신문의 헤드라인에 집중했다. 자극적인 제목들에 중독되어 이제 앙피가 매점에 들어오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신문 한 부가 여러 명에게 흩어진 탓일까, 학생들은 감질맛 난다는 듯 나머지 기사를 읽기 위해 매점을 뛰쳐 나와 기러기에게 달려들었다.
“역시 언네임드입니다! 신문을 단 한 부만 던져서 경쟁심을 불타오르게 하는 작전!
아... 잠시만... 저리가!”
기러기는 금세 다른 학생들에게 파묻혀버렸다. 덕분에 정신 사납던 기러기의 중계도 파묻혔다.
‘그냥 신문으로 시야를 가려서 부딪히게 하려던 건데...’
의도가 어쨌든 간에 앙피는 성공적으로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빠지니 매점은 생각보다 더 작았다는 게 느껴졌다.
고작 이런 공간에서 슈 기숙사생들이 어떻게 그런 속도로 움직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박스... 박스 어딨어...”
앙피는 매점 내부를 어슬렁대며 박스를 찾았다. 이제 누가 박스 성애자지?
하지만 일외동이 원하는 박스는 없는 것 같았다. 집으로 만들 박스니까 최소 앙피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한다.
그나저나 매점에 있는 물건들도 슈 기숙사의 취향을 한껏 머금었다.
[30초 완성 컵라면]
[조리된 비조리 스파게티]
[제로 탄산 콜라]
슈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빨리빨리 음식이 가득했다.
‘컵라면.. 스파게티.. 이게 다 뭐지...? 콜라는 나영웅 님이 말했던 그건가..? 구정물처럼 생겼는데 저게 맛있나..?’
앙피는 처음 보는 음식들이 딱히 궁금하진 않았지만 콜라는 호기심이 갔다. 하지만 다행히 남의 돈으로 콜라까지 사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딜 봐도 넉넉한 크기의 박스가 보이지 않아 매점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이 매점엔 그런 큰 박스가 없다.’였다. 그렇다는 건 또 다른 기숙사까지 가야한다는 소리다.
아카데미생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이상 그만큼 귀찮은 일도 없었다.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기사군요. 정말이지 불경함 그 자체입니다. 이런 걸 좋다고 읽다니 정말 어디까지 멍청한 걸까요.”
그때 갑자기 뒤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앙피가 돌아본 그곳엔 테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달달한 과자류를 잔뜩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지컬 기숙사 대표인 그녀가 여기엔 무슨 일일까. 애초에 앙피가 들어온 이후로 매점에 들어온 이가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부터 있던 거지?
‘그 난장판 안에 계속 있던 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안 휩싸이고 있던 거지..?’
앙피는 여러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테리아는 어떻게 눈치챘는지 답했다.
“멍청한 질문입니다. 슈 기숙사생들은 모두 같은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뇌가 제자리에 있다면 단순히 모두의 속도를 계산한 후 그분의 은총을 더하면 될 뿐입니다.”
앙피는 저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싶었다.
“... 아, 네.”
‘그렇게까진 안 궁금했는데. 그나저나 그분은 뭐지. 교장 선생님인가..?’
“그럴 리가요. 교장은 그분이 아닙니다. 흥. 제 입으로 그분을 설명하길 바랐다면 꿈 깨시길 바랍니다. 그분은 그분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대답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대답한다. 독심술사라던가 그런 걸까?
‘...아니면 사이비 같은 건가..’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지 말길 바랍니다. 저에겐 그분을 통해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니까요.”
테리아가 과자를 아직도 고르지 못한 채 답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녀라 해도 자기 생각은 읽지 못하는 모양이다.
‘.. 기분 나빠....’
“다 들립니다.”
‘과자 돼지.’
“들린다고.”
둘은 매점 앞 빈 교실에 나란히 앉았다.
사실 앙피는 딱히 테리아와 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컬 기숙사 매점에 박스가 있는지 알아낼 가장 쉬운 방법을 버릴 필요는 없었다.
앙피는 테리아를 따라 책상에 걸터앉았다. 쿰쿰한 냄새만 맴돌던 교실에 테리아가 뜯은 과자 냄새가 퍼졌다.
“음. 역시 슈 매점 과자가 맛있습니다. 입에서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이 부드러움.”
테리아가 잔뜩 사 온 과자를 하나씩 입에 넣었다. 볼이 붉어질 정도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과자를 맛보고는 앙피에게도 하나 건넸다.
별 모양에 검은 가루가 잔뜩 뿌려진 과자였다.
“...달라고 생각 안 했는데요...”
“그냥 드리는 겁니다. 먹어봐요. 맛있으니까.”
앙피는 과자를 받아 입에 넣었다. 별 모양의 과자는 사르르 녹다 못해 블랙홀에 빨려 소멸하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앙피는 무슨 맛인지 느끼지도 못했다.
“어때요. 맛있죠.”
‘랴롸라라. 나나나. 으나브에에엙.’
앙피는 생각이 읽힐까 머릿속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덕분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라는 게 다 드러났다.
“앙피는 악한 인간은 못 될 상이네요.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일외동이 그 볼품없는 상자 집을 공유하기 싫다고 합니까?”
“아뇨.. 혹시.. 지컬 기숙사엔 박스를 팔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 기억상 헤라 기숙사에서 팔았던 것 같습니다. 박스를 부수는 거에 쾌감을 느끼는 멍청이들이 많거든요.”
테리아는 과자 네 봉지를 해치우고는 손수건으로 입을 싹 닦았다.
어쩐지 수녀의 느낌이 나는 그녀가 식탐을 부리는 것이 퍽 웃겼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탐욕을 더 드러냈다.
“혹시. 돈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얇은 지갑이 과자 네 봉지 덕에 텅텅 비었다.
아무리 호구인 앙피라도 무턱대고 돈을 턱턱 넘겨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ㄷ...돈 없어요.”라고 해봤자 마음을 읽는 그녀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한테 100 골드만 빌려주실 수 있나요?”
테리아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경건하게 말했다. 근데 저렇게 인자하게 말해도 어차피 삥뜯는 거 아닌가?
‘100 골드..! 슾밥이 100그릇... 혁명 여관에서 33일....’
앙피가 충분할 리 없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테리아는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더니 이내 장황한 헛소리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40골드만 줘도 괜찮습니다.”
“... 싫어요.”
“왜죠? 원래 100골드를 원했던 걸 60골드나 깎아드린 겁니다.
제가 60골드 양보하고 그쪽은 40골드만 주는 거니 오히려 그쪽이 20골드나 이득입니다.”
천하의 보석상도 이런 사기는 안 칠 것이다. 이런 개소리를 앙피는 잠시나마 진지하게 받아들일 뻔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테리아는 바짝 붙으며 더욱 몰아붙였다.
“아니면 40골드를 빌려주시면 제가 이 손수건을 드릴게요. 잘만 파시면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럼 직접 파시면...”
“만약 40골드의 과자를 먹고 수표로 100골드를 줬습니다. 그런데 잔돈이 없다면···.”
결국 테리아의 기세에 휩쓸린 앙피는 순순히 40골드를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대에게 그분의 은총이 깃들길. 좋은 일 하신 겁니다.”
테리아는 빵빵해진 지갑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헤라 기숙사 매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호구처럼 돈을 뜯긴 앙피는 사실 별 타격 없었다.
‘... 어차피 일외동 님 돈이니까 괜찮겠지..?’
일외동 지갑엔 돈이 넘쳤으니까.
- 작가의말
선호작과 댓글, 추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