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번복되는 결과
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힘겨루기를 하던 둘은 어느덧 원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 그리고 원 밖까지 단 한 발자국만 남은 앙피를 본 천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아아악!!”
“... 이이익..”
앙피와 천재의 팽팽한 균형이 천재의 기합으로 무너졌다.
천재가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앙피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의욕이 너무 과다했는지 하마터면 천재가 먼저 원 밖으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 찰나, 넘어질 뻔한 천재를 앙피가 잡아주고는 자신이 원 밖으로 넘어졌다.
쿠당탕-!
앙피는 세상 우스운 자세로 넘어졌다.
“으으으...!”
그리고 원 안에 남은 천재.
“이겨따!!!!”
「앙피 원 밖으로 다운!
이렇게 기숙사 대전의 승자는 천재로 결정 났습니다!!」
미처 교장이 방송실로 다녀오기도 전에 심판은 마무리 멘트를 했다.
“야호! 야호!!”
천재는 잔뜩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이제 지저 왕과의 행복한 나날을 지내는 것만 남았다.
“... 아..”
앙피는 교장의 도장은 물 건너갔단 사실에 의기소침해졌다. 속으로는 이제 남은 건 쿠데타뿐이라고 생각하며 비밀 폭로전을 준비해야겠다고 느꼈다.
천재는 그런 앙피의 마음도 모르고 다가와서 손을 뻗었다.
“고마어! 일부러 날 잡아준 거지?”
그는 앙피가 자신을 위해 마지막 순간, 넘어지는 걸 잡아줬다고 생각했다. 그가 계속해서 우승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합당한 추론이었다.
반면 앙피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 넘어질 뻔해서 본능적으로 잡은 건데... 잡지 말걸...’
그렇게 기숙사 대전은 천재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아니, 끝이 날 뻔했다.
천재는 이 우승을 계기로 아카데미를 탈출하고 남은 앙피도 계급의 진실을 까발리며 도장을 얻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늦게나마 방송실로 뛰어간 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둘 다 올라오도록! 내 직접 우승 축하를 해줄 테니 둘 다 내 좌석 뒤편 담소 방으로 올라오도록 해요!」
거기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우승 축하를 하는데 왜 둘 다 올라오라는 것일까. 탈락한 앙피 앞에서 인성질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막상 교장의 담소 방으로 간 앙피는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ㄴ..느에?”
“못 알아들었나? 기숙사 대전 우승은 앙피, 자네라고!”
교장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사실 그가 앙피의 편의를 봐주고 있단 사실은 진작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ㅇ... 왜...? 내가 이겼는데...”
갑자기 우승을 뺏기게 생긴 천재는 말을 떨었다.
교장은 잠시 방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애초에 참가자가 네가 아니었잖아. 테리아인가 걔가 원래 참가자 아니야?”
“추첨으로 다시 뽑은···.”
“조용히 해!”
교장은 천재의 말을 조금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천재는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을 잘 아는 교장이 마지막 한마디를 붙였다.
“게다가 개백 주제에 어딜 기어올라. 규정상 개백은 애초에 참가가 불가였어!”
거짓말이다. 규정에서 개백을 언급했을 리가 없다. 교장이 만든 규정에 개백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천재도 알았다. 하지만 왜 반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놈의 계급 때문에?
검지의 계급은 어느새인가부터 이상하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원래 단순히 지시하고 명령할 상대를 구분 짓기 위해 만들어진 계급이었다. 실제로 신분이 천하거나 사람의 가치가 낮은 게 아니라, 단순히 조금 더 따를만한 사람을 높은 계급에 앉힌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새부터 계급은 단순한 신분제도처럼 바뀌었다. 낮은 계급은 천한 취급을 받고 높은 계급이 떵떵거리는.
잘 이끄는 사람이 아닌 잘 시켜 먹는 사람이 된 것이다.
“ㅎ... 훌쩍..”
그러나 이미 천재도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후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지저 왕과의 자유가, 여유로운 낚시를 향한 꿈이 눈앞에서 아스러져도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다.
‘ㄱ... 개이득..’
그런 자세한 구조 따위 모르는 앙피는 마냥 기뻤다.
검지의 계급제도가 어쩌고, 소년의 꿈이 어쩌고. 어쨌든 자신은 원하던 교장의 도장을 받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앙피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런 소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앙피가 옆에서 조용히 우는 천재를 보고는 동요했다.
‘..... 그래도 이건 좀 아닌가..?’
앙피는 논리적으로 천재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목적을 달성했고, 천재야 앞으로도 교장의 도장을 받을 일은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지금 자신이 잘못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가슴이 자꾸 조여오는 게 마치 하면 안 될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 넌 나가고. 앙피는 잠시 남아라. 도장을 언제 줄지 이야기해보자꾸나.”
천재가 당연히 애처럼 징징댈 줄 알았던 교장은 그가 의외로 얌전히 수긍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말에 쉽게 수긍하는 다른 이를 보는 게 교장은 즐거웠었다.
그렇게 천재가 울며 뛰쳐나갔고 혼자 남은 앙피는 생전 안 보던 눈치를 봤다.
‘.... 조금 불편하네...’
“도장 언제 줘요...?”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앙피였다.
사실 도장을 받으면 떠날 곳이니까, 뭣하면 천재에게 탈출 방법이라도 알려줘야지 싶었다.
“교장실에 있으니 바로 주지. 먼저 가 있어. 곧 따라가마.”
교장은 이 억지스러운 결과를 어떻게 아카데미생들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차피 천재가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들어줄 이도 딱히 없었지만, 앙피가 2학년이 된 건 순식간에 퍼질 테니까.
나중에 이상한 소문이 돌 바에야 지금 자신이 ‘앙피의 우승’이 어떤 합당한 이유에서인지 지어내는 게 나았다.
“ㄱ... 그럼 전..”
앙피는 분명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담소 방을 나왔다.
“야! 넌 그걸 지냐!?”
밖으로 나오자마자 반기는 건 카힐의 호통이었다.
하긴, 무기도 없는 천재한테 패배했으니 한 소리 들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옆의 비비와 나영웅도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앙피는 하찮은 신음을 내며 카힐의 주먹을 피해 말했다.
“ㅈ... 제가 이겼는데요....”
“이 새끼가 이제 거짓말까지.”
카힐이 앙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무리 그래도 앙피가 주인인데.
근데 사실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패배했으니 거짓말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앙피는 금방 담소 방 안에서 교장과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다들 잠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진짜 인간들 존나 무섭다. 똑같은 벌레들끼리 왜 자꾸 위치를 나누는 거냐? 무슨 고기 등급 나누냐?”
카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일세. 우린 당장 교장의 도장을 얻게 되었으니, 이 아카데미와는 작별이군.”
“야. 너도 앙피 옆에 있더니 사회성 다 떨어졌냐? 그 꼬마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물론 가엽기는 하네. 허나 우리가 영웅은 아니지 않은가? 우린 마스터의 소환수네. 마스터의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게 운명이라네.
아, 물론 나는 영웅이 맞긴 하지.”
카힐은 나영웅의 발언에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도 나름 정의로운 돼지인 줄 알았건만 앙피랑 너무 붙어있었나 저렇게까지 냉철해지다니.
그러자 나영웅은 이미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다시 말했다.
“카힐. 그대는 마스터를 딱히 못 믿는군?”
“믿어? 뭘 믿어. 쟨 어차피 지금 도장 받았으니 개이득~ 이러고 있겠지.”
아, 아까 그러긴 했다.
“마스터를 보게. 뭔가 결심한 표정이지 않은가.”
나영웅은 앙피의 곁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카힐이 그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앙피는 평소와 달리 눈에 조금의 생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앙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명령했다.
“천재를 도와주죠....”
그의 입에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이 나온다니. 이곳에서 잠시나마 혼자 있던 덕에 남을 생각하게 된 것인가? 혼자였던 덕에 남을 생각하게 되다니, 정말 아이러니했다.
“와.... 실화냐? 도와주자고? 진심이야?”
“ㄴ... 느에..”
앙피의 조금 바뀐 모습에 카힐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과장되게 씨익 웃으며 앙피의 머리를 또 쥐어박았다.
“그래! 생각해둔 작전은 있고?”
“일단. 비비 님이랑 카힐 님이...”
앙피는 반짝 떠올린 작전을 그대로 읊었다. 사실 기숙사 대전에 실패했을 때 실행하려고 했던 ‘쿠데타’ 작전이었다.
“후후후. 가능은 하네. 그런데 굳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 아이를 도우려면 그냥 몰래 밖으로 꺼내주면 그만이지 않은가.”
“쿠에에엙!”
나영웅이 약한 소리를 하자 비비가 꾸짖었다. 비비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이 팡팡 두드리고는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앙피는 분명 비비에게 카힐과 같이 움직이라고 했었다. 카힐은 먼저 뛰어나가는 비비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야! 같이 가!”
그리고는 따라 출발하기 전 한마디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여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거든. 앙피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계획 짰는데 그냥 따르자?”
카힐이 나영웅의 볼을 찰싹 때리고는 비비를 따라 쫓아갔다.
“어유! 쟤 왜 저렇게 빨라졌어!?”
카힐은 앙피의 부탁으로 이런저런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이미 아카데미 밖으로 여러 번 나갔다 들어왔다. 그녀가 왕궁에서 왔단 사실만으로도 검지 안에서 어떤 물건이든 무료로 구할 수 있었다.
즉, 그녀는 앙피 일행 중 유일하게 아카데미 밖 검지 세상을 본 사람이었다.
카힐이 본 검지는 생각보다 더 썩어있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아카데미 밖의 메이커들은 전부 교장과 엇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됐다.
그렇기에 카힐은 이렇게 믿고 싶었다.
천재를 도와주는 건 단순한 명분이라고. 앙피는 분명히 이 검지도 갈아엎고 싶어 하는 게 분명하다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그였으니까.
앙피가 정말로 그렇게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곳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소환수들을 보낸 앙피는 교장실로 가서 교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교장은 추악한 변명을 얼마나 길게 하는 건지 한참이 지나서야 교장실로 들어왔고 그 덕에 앙피 일행은 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 왠지 아까보다 마음이 편해..’
앙피는 교장의 권위적인 의자 맞은편의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그래. 우승 축하한다, 앙피!”
교장은 속마음을 꾹꾹 누르며 악수를 청했다. 사실 그의 마음 같아선 어떻게 다 떠 먹여줘도 패배를 할 수가 있냐고 지탄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ㄱ.. 감사합니당..”
앙피는 교장의 악수를 보지 못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작전의 시작이 앙피에게 달려있어서 교장에게 눈길조차 가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교장이 검지의 도장을 꺼내 들었다.
저 하찮은 도장 하나 받겠다고 지금까지 고생했다. 그러니 돌려줄 때 제대로 돌려줘야지.
‘ㅈ... 작전 곧 시작이야...’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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