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에잇. 부서져라. 부서져라!
의문이 들 수도 있었다.
검은 구슬은 말 그대로 검은 점의 약점. 심장과도 같기에 절대 파괴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검은 점과 태초에 같이 태어난 존재들은 이 검은 구슬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데 왜 이딴 허술한 곳에 검은 구슬을 놨냐고?
그건 질문부터가 잘못되었다.
검은 구슬은 심장이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 그 기능이 같았다.
세상에 심장을 다른 위치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어딨는가. 당연히 심장을 강제로 옮기면 사망하는 것이 당연지사.
실제로 검은 구슬은 검은 점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렇기에 검은 구슬이 파괴되면 검은 점도 사라지는 것이지.
물론 검은 점은 계속해서 몸집을 불려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구슬은 애초에 검은 점과 함께 생겨난 것이니 가장 초입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검은 점들은 대체로 암울하거나 무거운 분위기를 잡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어서 빨리 어딘가로 이동하고 싶어질 테니까.
그래, 생각해보면 귀신의 집인 그곳도 입구 바로 앞에 파묻혀 있었다. 그땐 이 사실을 몰라서 바로 눈에 띄는 집으로 들어가 버려서 한참 고생했었지.
[검은 구슬은 검은 점 초입에 있다.]
해당 사실만 알면 검은 점은 더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검은 구슬을 찾아내기 더욱 쉬워질 테고 그렇게 되면 현재 존재하는 검은 점도 금방 없앨 수 있었다.
앙피는 이 사실을 나중에 나르여앙께 말하기로 했다.
딱히 그녀가 애지중지해서는 아니었고 손바닥을 바로잡으려 몸소 뛰어든 사람이니 이 정도 도움은 주고 싶었다.
뭐, 그렇다고 앙피가 진짜로 말을 할지는 미지지만 말이다. 원래 생각이 꼭 행동으로 이어지리란 법은 없으니까. 게다가 앙피는... 앙피니까.
“이거 왜 안 부서지지....”
앙피는 검은 구슬을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그러나 검은 구슬은 약점이라면서 앙피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원래 몸집이 커질수록 심장은 커지고 두꺼워지는 법. 미궁의 탑이 100층까지 생긴 지금, 검은 구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만 없는 자도 있었다.
[로딩. 보스 뿌글 사망. 조종 가능 몬스터 없음. 더 이상의 중복 퀘스트 불가. 비상]
육체가 없는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앙피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럼 되려나..”
앙피는 검은 구슬을 바닥으로 휙 던졌다. 하지만 있는 힘껏 던진 것도 아니고 저렇게 떨어뜨린 정도로는 깨지지 않았다.
[비상! 비상! 비상!]
뭐, 이쪽에는 충분히 위협이 된 것 같았다.
시스템은 앙피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빠르게 앙피를 막을 방법을 계산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간섭하려면 몬스터 혹은 퀘스트를 통한 방법뿐이었다.
지금 1층의 보스까지 죽어버린 이상 몬스터를 이용해 앙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앙피 일행을 대상으로 퀘스트를 부여한 상태이기에 같은 대상에게 중복으로 퀘스트를 부여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빠르게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퀘스트 수정 가능. 튜토리얼 취소 가능. 오류 없이 코딩 시작···.]
시스템은 새 방법을 찾았는지 냉철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악. 이상한 사람. 빠른 작업 필요!]
“에잇... 에잇...!”
앙피가 구슬을 발로 꽝꽝 밟고 있었다. 그는 의도치 않게 시스템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힘도 몸무게도 딱히 보잘것없었다. 결국 그는 구슬을 들고 일단 비비의 머리를 챙기러 갔다.
“꾸어얽!”
비비는 머리만 데굴데굴 남아 있는데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앙피는 양쪽에 비비와 구슬을 끼고 카힐을 찾아 움직였다.
‘... 카힐 님한테 깨달라고 해야지...’
그래도 이제 비비 머리만 들고 있어도 징그러워하진 않았다. 원래 계속 보면 익숙해진다고 앙피도 좀비는 이제 익숙했다. 근데 왜 매일 보는 사람이랑은 이야기를 잘 못 하는 걸까.
어쨌든 앙피는 다시 중앙 방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문 쪽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혹여라도 도전자가 보면 달려들까 조심하며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그러다 방 정중앙에 도전자가 잔뜩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앙피 쪽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단체로 뭘 공격하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 사이에 카힐의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카힐 님...?”
아무리 봐도 카힐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표정도 무언가를 잃은 듯 허망하고 초연했다. 이때가 나영웅을 생각하며 구속구를 집어 던지기 직전이었다.
‘... 기분 안 좋나?’
그러나 앙피는 카힐이 밀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말을 걸면 화낼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비비 님. 몸통 어디에 있어요?”
앙피는 비비에게 깨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몸통만 찾아서 머리를 붙여주면 검은 구슬을 깨줄 수 있었다.
비비는 혀로 낼름 방향을 가리켰다. 떨어져 있어도 자신의 몸이니 대강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저쪽···. 으악!”
그리고 그때 갑자기 뿌글이 앙피에게 달려들었다.
“뿌그르륵! 이상하지 않나! 왜 이렇게 센 건가!”
뿌글은 쫓아오는 도전자들을 피해 열심히 꿈틀거리며 뛰었다.
앙피는 그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갔다. 딱히 뿌글이 쫓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워낙 크기가 커서 자칫 깔릴뻔했다.
“앗... 저기 있다...”
그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비비의 몸통을 발견했다. 아까 모습 그대로 바닥에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쪽에서 쉬고 있던 도전자들에게 시스템 창이 떴다.
시스템 창의 위쪽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튜토리얼 #2 - 의지 증명]
“뭐야. 이미 깬 거 아니야? 왜 또 떠.”
“오류로 떴겠지. 우린 이미 통과라고~”
도전자들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부분 창을 즉시 닫아버렸다.
그러나 ‘혹시 퀘스트 보상인가?’ 싶은 생각으로 내용을 읽어본 도전자들이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을 닫았던 도전자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시 튜토리얼의 내용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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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2 - 의지 증명>
[빼앗을 의지]
현재 ‘앙피’라는 도전자가 검은 구슬을 훔쳐 갔다. 이는 2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귀중한 구슬이다. 즉시 그에게서 뺏어 가장 안쪽 방의 분수 위로 돌려놓아라.
난이도 : 최상
제한 시간 : 3분
상세조건
- 앙피가 검은 구슬을 파괴할 시 도전자는 모두 죽는다.
- 검은 구슬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날 시에 도전자는 모두 죽는다.
- 앙피의 현재 위치 : 중앙 방의 북서쪽 구석
보상 : 2층 진입
실패 시 : 전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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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퀘스트는 수정되었습니다. 이전의 내용 및 보상은 취소됩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앙피라는 자에 의해 일어난 소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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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있던 튜토리얼 퀘스트를 시스템이 급하게 고친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게다가 이번엔 대놓고 ‘죽는다’라는 말을 넣을 정도로 시스템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편 이미 튜토리얼을 클리어했던 도전자들은 마음 편히 쉬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데!”
“앙피? 앙피가 누구야!”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 [03:00]이라는 타이머가 설정되었다.
시간의 압박감을 느낀 그들은 일단 퀘스트에 나온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웬 조그만 남자애가 시체 하나랑 검은 구슬을 갖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네가 앙피냐!?”
“쟤 맞아. 저게 그 검은 구슬이다!”
“ㄴ... 느에...?”
비비의 몸통을 찾아서 이리저리 끼워보던 앙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답변 대신 주먹이었다.
앙피는 꼴사납게 놀라며 뒷걸음질 쳐 도망쳤다.
도전자들은 이미 튜토리얼을 통과했던 자들이라 [시스템의 가호] 버프를 받고 있지 않아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근데 문제는 애초에 앙피도 강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으갸가가각.”
앙피는 허우적대며 도망갔고 그를 쫓는 도전자들도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무슨 놀이를 하는 것처럼 하찮은 풍경이었다.
[01:21]
머리 위의 시간이 계속해서 줄어들자 도전자들은 더욱 사력을 다해 달렸다. 튜토리얼에 [실패 시 사망]이라는 문구가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초조함에 도전자들은 수적 우위를 이용해서 앙피를 둘러쌌고 결국 그를 잡는 데 성공했다.
도전자 중 가장 몸집이 큰 남자가 앙피를 짓누르고 구슬을 뺏었다. 이젠 익숙한 얼굴의 그 남자였다. 앙피 일행에게 파티 제안을 했던 그 덩치의 남자. 옆에 같이 있던 힐러인가 하는 여자가 없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됐다.”
남자는 머리 위의 멈춘 타이머를 보며 안심했다. 시스템도 그 모습을 보며 한시름을 놓았다.
“그나저나 이게 뭐길래···.”
남자는 앙피에게서 뺏은 구슬을 눈앞에 들어봤다.
그리고 그때 구슬이 말을 했다.
“우어어어어!”
“꺄아아악. 뭐야!!”
깜짝 놀란 그가 구슬을 내팽개쳤다.
구슬이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익숙한 울음소리를 보니 저건 구슬이 아니라···.
“꾸에에엙! 낅낅.”
비비의 머리통이었다. 비비가 남자를 또 놀린 게 재밌는지 낄낄 웃어댔다.
“이 시발. 머리통 년이 또!!”
[오류. 구슬 위치 파악 불가. 비상!]
앙피가 들고 달리던 건 검은 구슬이 아니라 비비의 머리통이었다. 그가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빠르게 판단을 내린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검은 구슬은 어디 있을까?
비비의 머리통에 관심이 쏠린 사이 앙피는 도전자들 사이를 기어 나왔다.
검은 구슬은 다름 아닌 비비의 몸통에 있었다.
조금 전, 비비의 머리를 몸통에 이리저리 끼어보고 있던 앙피였다.
그러나 잘못 끼우면 보기 흉해지니 제대로 끼우려다 시간만 지체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도전자들이 뛰어왔고 앙피는 얼떨결에 비비의 머리통을 들고 도망간 것이었다.
그래도 도망가며 검은 구슬을 비비의 몸통으로 밀친 덕에 이렇게 완벽한 속임수가 가능했다.
비비의 몸통은 눈치껏 검은 구슬을 몸으로 덮어 가렸다. 비비의 의지라기보다는 그냥 허기를 느낀 몸통이 구슬을 삼킬 목적으로 껴안은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앙피는 충분히 거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비비의 머리통을 넘겨주고 조용히 빠져나온 것이었다.
도전자들 사이를 빠져나온 앙피는 그대로 사람이 한적한 곳으로 달리며 시스템 창을 켰다.
“ㅅ.. 시스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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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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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스템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는 앙피의 모든 시스템 권한을 없애버렸다.
“ㅇ... 왜 안 나오지....?”
앙피는 아무리 시스템 창을 외쳐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
시스템이 막지 못한 기능이 있었다.
그건 바로 소환술사와 소환수 간의 대화였다. 미궁의 탑에 소환술사라는 직업이 없었던 탓에 이런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시스템조차 잊었던 것이었다.
=====
<앙피> : ㄲ... 끝났어요...! 빨리 100층으로 소환해주세요...!
<윈스> : 부탁할 땐 단답이 아니구나.
<앙피> : 빨리요...!! 지금 ㅇ···.
=====
시스템이 뒤늦게 기능을 차단했지만, 이미 늦었다.
앙피 일행이 일제히 100층으로 이동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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