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저 새끼 흑막이다. 잡아!
‘뭐냐.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나. 역시 여왕이 보낸 녀석들이군. 마왕을 토벌하러 온 녀석들이다.’
비비가 르방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본 고브는 침을 꿀떡 삼켰다.
하지만 자신의 할 일은 해야겠다고 생각한 고브였다.
“킬킬킬. 르방을 물리치다니. 덕분에 힘도 안 쓰고 마왕을 만날 수 있다. 너희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고브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마왕의 힘이 잔뜩 묻어나다 못해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게 멀리서 보였다.
하지만 그가 칼집에서 칼을 꺼내기도 전에 카힐이 무참히 밟아버렸다.
“이 새끼가! 역시 마왕군이었네!”
그가 혹여나 반격이라도 할세라 카힐은 손목부터 아작내주었다. 덕분에 고브는 뭘 시도도 못 하고 바닥에 뒹굴었다.
“으갸갸갹! 끄기으이야가각!”
고브는 괴상한 비명을 내면서도 단검을 놓지 않았다. 비비도 재밌어 보이는지 합세해서 고브의 얼굴을 꼬집으며 괴롭혔다.
셋이 뒤엉켜 있으니 누가 마왕군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때, 르방의 안식처에서 기다리던 마왕이 감싸고 있던 현무암을 깨부수며 밖으로 나왔다.
“쾅쾅쾅, 징징징, 시끄럽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마왕을 불러내다니! 어쩔 수 없네, 죽어라 고브!”
“으꺄아악!”
“누구냐 그 녀석은. 우리 마왕군 아니네.”
마왕이 머리에 묻은 현무암을 털며 말했다.
카힐은 거의 꺾어버리던 고브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눈물범벅이 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에? 뭐야 너 그럼.”
“아니다.. 너희가 사천왕을 잡아줬으니 마왕과는 내가 이야기하겠다고 한 거다... 왜 때리냐...”
“뭐야 시발. 괜히 힘 뺐네. 왜 흑막처럼 이야기하고 지랄이야!”
“으어어엉..”
고브가 꺼이꺼이 울어댔다. 하긴, 고맙다고 뒷일을 맡기라고 했는데 갑자기 죽도록 맞았으니 억울할 만했다.
“근데 르방 이놈은 어디 갔느냐.”
마왕은 커피잔과 르방을 동시에 찾았다. 그에게는 이 둘이 비슷한 위치인 걸까.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아까부터 눈앞에 보이던 거대한 더미가 르방이란 것을 눈치챘다. 쓰러진 자신의 부하를 쓰레기 더미와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안 돼!!”
마왕이 르방의 몸에 손을 올리고 절규했다.
“내 커피잔을 깔고 누우면 어떡하느냐!”
아, 르방 때문은 아니었나 보다. 역시 마왕인가.
그사이 고브가 아까의 그 단검을 품에 안고 뚜벅뚜벅 마왕에게 걸어갔다.
마왕은 낑낑대며 르방 밑에 깔린 커피잔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 꺼낸 커피잔은 이미 깨진 손잡이 파편이었다.
“내.. 커피잔...”
“저.. 마왕. 나다.”
“기분이 별로니, 하급 몬스터 주제에 말 걸지 말거라.”
마왕이 손잡이만 남은 커피잔을 부들부들 든 채 말했다. 함부로 가까이 갔다가는 즉시 소멸당할 분위기였다.
하지만 고브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더 다가갔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마왕을 만나고자 했는지 이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고브는 부러진 손목(카힐 때문에)을 바들바들 떨며 단검을 보여주었다.
“... 티아나빈. 나다.”
그가 내민 단검을 본 마왕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단검과 고브를 쳐다봤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고브. 너냐?”
“응.”
고브의 대답을 들은 마왕은 짧은 숨을 들이켜고는 곧장 달려가 그를 안아주었다. 둘은 마치 헤어진 연인처럼 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으엙... 그런 취향..”
앙피는 고블린과 마왕이 눈을 마주치며 껴안는 모습이 썩 보기 안 좋았다. 게다가 둘 다 남자고.
그 소리를 마왕이 들었는지 앙피의 눈치를 보며 잠시 고브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단검을 받았다.
“우선 저주부터 풀어주겠다.”
마왕이 단검을 받아들자 연하디연하던 그의 뿔이 강렬한 보랏빛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카힐이 구속구를 풀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단 두 번의 손짓으로 죽었던 르방을 부활시키고 고브에게 걸린 저주를 풀었다.
“부활했다. 고맙다 마왕.”
기뻐서 덩실덩실 움직이는 르방 뒤로 저주가 풀린 고브가 걸어 나왔다.
“ㅇ... 엥... 진짜 저주였네...”
별 반응 없는 앙피와 달리 카힐과 나영웅의 눈은 점점 커졌다.
“후후후... 아름다운 모습이군.”
“잠시만. 저 샊... 아니.... 쟤 여자였어!?”
또각또각 걸어 나온 고브는 이전의 흉측했던 고블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나타났다.
숲을 품은 듯한 연두색 머리카락이 나뭇잎처럼 찰랑였고 그의 동그란 눈동자에는 호수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네.”
마왕은 돌아온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으엙...”
앙피는 여전히 이런 쪽에 내성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마왕은 고브를 옆에 세우고는 앙피 일행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이이는 내 아내였네. 갑자기 사라진 탓에 한참을 찼다가 이 인간계까지 내려왔네.”
이제야 마왕이 오른섬에 나타난 이유가 밝혀졌다.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잠시만. 너 저기 그그 마을인가 고고 마을인가 사람이라며?”
“네 맞아요. 이곳으로 강제소환당한 이후에 지낸 곳이 고고 마을이었어요. 그전까지는 마계에서 살았죠.”
“설마 인간계로 왔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내가 너무 늦었는가?”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봐서 기뻐요.”
걸걸했던 고브가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니 썩 어색했다. 겉모습만 바뀌었다고 안에 들은 영혼까지 바뀐 느낌이었다.
어쨌든 마왕은 예상외로 호전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목표도 아내를 찾는 것이기에 더이상 여기에 머물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근데 여보. 섬의 손가락들은 왜 없앤 거예요?”
“아, 내가 한 짓이 아니네. 어떤 인간이랑 거래를 했지. 당신을 찾아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당신한테 주고 남은 나머지 절반의 힘을 주입한 장갑을 주었어. 아마 그 인간이 한 것 같군.”
마왕이 뿔을 긁적였다. 지금도 충분히 강해 보이는데 아직 절반의 힘만 얻은 것이라고 했다. 하긴, 카힐 같은 녀석이 넘쳐나는 마계를 다스리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힘을 절반만 주입한 장갑만으로 오른섬을 박살 냈으니 원래 힘은 얼마나 강했던 것일까.
‘... 보기엔 그냥 고모 또래의 아저씨인데... 그리고···.’
“ㅈ... 저기... 대마법사는 어딨어요...?”
마왕의 러브스토리고 오른섬의 멸망이고 안 궁금한 앙피였다. 대마법사 어딨냐고 대마법사! 마왕이 데리고 있다면서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 백발의 노인 말이냐? 잠깐 이야기를 나누더니 사라지더군. 아, 저 마왕 성도 그자가 만들었다. 실력이 참 좋은 노인이야.”
“ㅇ... 어디로 갔어요...?”
“으음. 기다려라. 아내를 찾아준 은인들이니 특별히 기억해보마.”
마왕은 망가진 소파에 앉아 끙끙대며 기억을 되새기는듯했다.
잠시 후 그는 기억이 떠올랐는지 대마법사의 행방을 말해주었다.
대마법사는 오른섬이 곧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왼섬과 오른섬 중앙에 새로운 섬을 만들고 그곳으로 오른섬의 주인을 대피시킬 거라고 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못 봤다고 했다. 아마 오른섬의 마을이 다 없어진 지금, 그도 중앙의 섬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 나 봤어! 오는 길에 섬 하나 있더라고!”
카힐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녀가 배에서 봤던 섬이 헛것이 아니었다. 그 섬이 바로 대마법사가 있던 중섬이었다.
“지나쳤네요... 하지만 돌아갈 배도 항구도 없어졌는데....”
“그것참 안타깝군.”
“어떡하지....”
앙피는 노골적으로 마왕을 바라봤다. 그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염치없이 이것까지 부탁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에게 그대들을 옮겨달라는 것인가? 나 마왕인데?”
“ㅇ... 느에.”
“당돌한 인간이군. 이미 충분히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건만.”
“그냥 해드려요. 여보.”
고브가 마왕의 옆에 착 붙어 말했다.
아까 앙피 일행이 그렇게 팼는데, 첫 만남부터 꾸준히 의심만 했는데. 그런데도 저렇게나 선의를 베풀다니, 어떻게 마왕과 결혼했는지가 신기한 인물이었다.
“ㄱ... 고브 님이 아깝....”
“그래. 알았다. 그럼 지금 당장 중섬으로 보내주지.”
마왕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을 때였다.
서걱-.
마왕의 손이 잘려 나갔다.
“여보!!”
“인간, 너냐.”
마왕이 표정 변화 없이 쓰레기 더미를 바라봤다.
그곳에선 익숙한 모습의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가 왜 여기 있지?
“어머~ 앙피 잘 있었니?”
능글맞은 목소리.
나르여앙이었다.
“뭐야. 니가 왜 여깄냐?”
“으흥. 무슨 말버릇일까. 여왕한테.”
나르여앙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민간인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공중에 대고 가로로 그었다.
“후후후. 나치식 경례인가?”
그녀가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왕이 말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카힐은 그 장갑이 무엇인지 바로 눈치챘다.
마왕과 거래한 인간. 마왕의 힘이 담긴 장갑. 마왕의 반응.
세 가지만 조합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마왕과 거래한 인간은 나르여앙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끼고 있는 장갑은 마왕의 힘이 담긴 장갑. 그런 장갑을 끼고 공중을 그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분명했다.
“피해!”
카힐은 즉시 앙피와 나영웅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하지만 늦었다.
앙피와 나영웅 쪽이 아니다. 카힐 쪽을 말하는 것이었다.
바닥에 처박힌 앙피와 나영웅 옆으로 카힐의 머리가 떨어졌다. 스스로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다. 둘을 먼저 챙기는 탓에 너무 늦은 그녀는 그대로 목이 떨어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쓰레기 산도 순식간에 밑동만 남기고 사라졌다. 주변 일대에 나르여앙의 어깨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높다는 걸 말하듯이.
“여왕에겐 그렇게 고개를 숙이는 거란다?”
앙피는 그 말을 무시하고 곧장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금방까지 서 있던 카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머리가 날아갔지만 살아있는 비비와 달리 카힐은 절대 무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순한 마족. 머리가 떨어지면 죽는다.
농담이 아니다. 죽는다. 하지만 그녀는 소환수이니까, 시체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았다.
“.... 이런 제기랄!!”
흥분한 나영웅이 그대로 나르여앙에게 달려들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돌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반격도 없이 그대로 나르여앙의 손에 닿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영웅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걸로 2명.
이제껏 여정을 함께한 소환수 2명이 의식을 잃었다.
“ㄴ.. 나영웅님..!”
“쿠어어어. 드르렁.”
나영웅이 팔자 좋게 코를 곤다. 그녀가 죽이지 않은 모양이다.
“나영... 에잇... 걱정 안 해.”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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