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흑막이 칼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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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dos
작품등록일 :
2023.11.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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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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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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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채의 기연(1)

DUMMY

무공(武功)은 적공(積功)이기도 하다.

후학들은 선대가 정립한 기틀을 계승하고 또 전수한다.


따라서 무(武)는 누대에 걸쳐 쌓아 올린 석탑과도 비슷하니.

근간이 되는 주춧돌, 형(形)과 의(意)는 흔들려선 안 된다.


명문정파의 제자 사영풍은 이리 배웠다.


‘······무슨.’


그렇기에 눈앞의 광경은 잔인하리만치 비현실적이었다.


쏴아아아!


다섯 갈래로 나뉘었던 검광이 한 점으로 모인다. 그 동작에는 어떤 위화감도, 군더더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변초가 아니다. 허초도 아니다. 이건······!’


카가각!


예상치 못한 변화에 검영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독사처럼 그사이를 파고드는 여섯 번째 검격.


사영풍은 순간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촤악!


“큭!”


사영풍의 오른팔에 기다란 상흔이 새겨졌다. 핏물이 튀고 검영은 거짓말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아직, 아직이다!’


고작 초수를 교환했을 뿐이다.

승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불현듯 손에 힘이 풀리며 그만 검을 놓쳐버린 것이다.


흑의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쩡!


흑의인이 협봉검을 가볍게 휘둘러 사영풍의 검을 쳐냈다. 애검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멀찍이 날아갔다.


연무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전의는 충만했지만 이번에는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사영풍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검수가 검을 놓쳤으니 더 이상 승부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끝났다.


군중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연무장을 떠나갈 듯이 울렸다.


“백학무관이 최고다! 내 이길 줄 알고 있었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대단하다는 것만은 알겠네. 번쩍하더니 순식간에······.”

“저자는 누군가? 백학무관에 저만한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완전히 백학무관의 압승······.”


사영풍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뚝뚝.


팔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 지경이었지만 지혈 따윈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이 첫 패배. 분할 만도 하지. 게다가 이런 상황,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졌으니······.’


원래 그가 패배의 쓴맛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이나 후의 일이었다.


오늘의 패배가 과연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안유조차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오만하고 고고한 사내였다.


사영풍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한기와 열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네가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도 나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았겠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관끼리의 경합, 그것도 친교의 장이었으니까요.”


으득.


사영풍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입놀림이 제법이구나.”

“전력을 다하진 않았습니다.”

“······너와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기대해라. 그땐 지금처럼 실실거리지 못할 테니.”


사영풍은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내려갔다.


“검, 안 가져가십니까?”

“······.”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또 한 줄기, 핏물이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기대되는군. 역시 자넨 재밌는 사람이야.’


“이보시오! 얼굴은 왜 안 보여주는 거요?”

“이름은? 당신은 대체 누구요?”


안유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몇 사람이 그를 뒤따랐지만 의문의 고수는 귀신처럼 종적을 감춰버렸다.


“관주! 그 고수는 어디 갔소? 당신 제자니 알 거 아니오.”


백학무관주 감지승 또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니 끝내 흑의인의 정체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


“후.”


감 씨 부자는 술시(戌時)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땅거미는 진작에 내려앉았건만 뒤처리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저도 무인이 다 되었나 봅니다. 사람 상대하는 게 어찌나 힘든지. 죽도록 검을 휘둘러도 이렇게 진이 빠지진 않을 겁니다.”

“검만 휘두른다고 무인이더냐? 우린 무관이다. 수련만큼이나 무관의 대소사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감지승이 은은한 노기를 띠며 말했지만 감명은 이전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피식 웃으며 객당 문을 여는 감명. 차를 홀짝이던 안유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하오, 안 소협.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소. 군중들이 소협을 내놓으라며 성화를 부리는 데다 참관인들과 천수무관까지 상대하다 보니 그만······.”

“그래도 붐비는 쪽이 낫지요. 앞으로 바빠지시겠습니다.”

“참으로 그렇소. 늦었지만······.”


감지승과 감명이 동시에 두 손을 맞잡아 내밀었다.


“소협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우리 백학무관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안유가 일어나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은혜보다는 인연으로 여겨주십시오. 잊지 않기보다는 이어지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안유는 묘한 눈빛으로 감명을 쳐다봤다.


‘이어졌다. 인연도······ 그리고 무공도······.’


손을 한번 내밀었을 뿐인데 많은 것이 바뀌었다.


형산파가 이대로 곱게 넘어갈 리는 없겠지만 지금의 백학무관이라면 괜찮으리라.


그리고 백학무관이 건재한 이상 강호에 ‘철혈여일’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을 건 비무행 따위는 필요 없으니, 천하를 주유하며 얻은 심득은 과거의 철혈여일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 소협. 그런데 소협의 철혈무위는 대체······.”

“감 소협 덕분입니다.”


안유가 감명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감 소협과 겨루며 어떤 깨달음이 찾아오더군요. 그 깨달음이 새로운 검로를 열어주었습니다.”

“깨달음?”

“제게 철혈검법을 이어주신 분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

“‘철혈’은 부동심(不動心)에 그쳐서 안 된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지승은 무언가를 골몰하며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반면 감명은 영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부동(不動)과 전진(前進)이라, 어렵군요. 상충하는 것들끼리 어떻게 함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감명은 감지승과 달리 심득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고민할 시간에 검이나 더 휘둘러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제 길은 아닌 듯합니다.”

“호오?”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전에 저만의 ‘철혈’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감지승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입만 살았구나. 하지만 네 말이 옳다. 이번에는 내가 흔들렸구나. 하마터면 바쁜 은인을 붙잡아두는 염치없는 놈이 될 뻔했구나.”


세 사람은 얼마쯤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새로 끓인 찻물이 동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우리가 소협을 거들게 해주시오. 언제든지, 어디든지 찾아가겠소.”

“열심히 정진해서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아무쪼록 보중하십시오.”

“언젠가 또 뵙지요. 그나저나 감 대협.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소이까. 물론이오.”


웃으며 찾아와 웃으며 떠난다.


안유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었다.


불과 며칠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족히 몇 년은 동고동락한 기분.


벌써 그의 미소가 그리워지는 것 같아 부자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오랜만입니다.”


신전흥은 외딴곳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마차 옆, 불가 주위로 술병과 나무 꼬챙이가 보였다.


“여어! 오랜만일세. 어서 앉게. 참으로 대단한 승부였네. 무관의 검법은 또 언제 익힌 건가.”

“신선곡이 괜히 신선곡이겠습니까.”

“아무렴 그렇겠지. 내 자네 몫까지 마셔주겠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닌가?”

“좋은 날이지요. 그러는 신 대협도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제가 다 기분이 좋군요.”


하하하하!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형산파의 기재를 그렇게 무참하게 쓰러뜨리다니! 대단한 위업이야. 호남 전역이 떠들썩해질 걸세!”

“아하하. 별거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따름이지요.”

“가슴 졸일 날도 얼마 안 남았군. 고죽방의 친우들이 좋다고 달려올 테니!”

“실로 그러합니다!”


신전흥이 히죽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흐흐. 난 아직도,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네. 속에 능구렁이를 백 마리쯤 품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제가 비밀이 좀 많긴 하지요.”

“자네가 이긴 직후, 이거 큰일 났구나 싶으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신전흥이 피식 웃었다.


“고죽방 놈들, 고생 좀 하겠구나. 하핫! 내가 이럴진대 놈들은 오죽하겠나? 골머리 썩는 모습이 눈에 훤하군그래.”

“바로 그겁니다. 자, 쭉 들이키시지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발버둥 쳐보세. 일이 잘못된다 한들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크하하하!”


‘달관했다기보다는 내려놓은 느낌이지만······ 괜찮군.’


조금 엇나간 듯해도 안유로서는 썩 긍정적인 변화였다.


‘신전흥뿐만이 아니다. 장차 목련서각 또한 이렇게 바뀌어야 해. 살아남기 위해선 익숙해져야 한다.’


무림에는 수많은 암중 세력이 존재한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혹은 어떤 기물이나 영약을 얻기 위해.


혹은 어떤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이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좇아 음지로 스며든다.


그러나 한없이 창대한 시작과는 달리 대부분의 암중 세력은 뜻을 이루기도 전에 무너진다.


그 이유는 무수히 많겠지만 안유가 생각하기로 가장 큰 요인은 하나뿐이었다.


‘모든 암중 세력은 사냥꾼임과 동시에 사냥감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자신들이 사냥꾼이라고만 생각하지.’


시위를 겨누는 것은 익숙하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누군가가 시위를 겨누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숲속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냥꾼들이 바글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언가를 노린다면 자신이 노려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안유가 알기로 이러한 암중 세력은 중원 무림에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회귀 이전의 암천회.

암천회는 최고의 사냥꾼이면서 또한 최고의 사냥감이었다.


안유는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시위이자 이빨.


반면 고죽방은 전생에도, 그리고 금생에도 암천회의 일개 지단에 불과했다.


‘조만간 알게 될 거다. 너희가 쫓고 있는지, 아니면 쫓기고 있는지 말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이빨을 박아넣을 순간이 머지않았다.

안유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그래. 잘 되겠지. 하핫!”


신전흥이 웃자 안유도 따라 웃었다.


‘좋구나!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심지어는 단전마저도 가벼웠다.


얼마 되지 않던 내공이 사영풍과의 일전으로 기어코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 안유의 몸은 밑 빠진 독이나 마찬가지. 심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채우려면 우선은 비워야지요. 여기. 안주도 챙겨 드십시오.”

“흐흐, 그렇지! 크, 좋다, 좋아.”


그러나 안유는 태평하기만 했다.


채우려면 비워야 한다.

비단 주도(酒道)에만 통용되는 이치는 아니다.


무공, 특히나 체내 진기의 운행을 관장하는 심법 또한 이러한 이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채우려면 비워야 하고, 비우려면 채워야 하니.

이번에는 채워야 마땅하리라.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로 가려는가?”

“무관 다음에는 산채(山寨)가 어떻습니까?”

“산채? 산적? 뭐. 괜찮겠지. 자네 뜻대로 하게. 어차피 마음대로 할 작정 아닌가?”

“명주는 약주라고도 하지요. 왜 술이 약이 되는지 지금에야 그 뜻을 알겠습니다.”


이번 대호채(大虎寨) 행은 채우기 위함이었다.


산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다.

자연히 명분과 조건 따위도 없다.


대리 비무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흉험할 테지만 전부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릇 기연 중의 기연은 역시······ 하하. 이거 설레는군.’


드디어 심법에 입문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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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각비사(1) +1 23.12.27 696 10 13쪽
22 일망타진(5) +1 23.12.26 691 12 16쪽
21 일망타진(4) 23.12.25 678 10 13쪽
20 일망타진(3) 23.12.22 708 13 13쪽
19 일망타진(2) 23.12.21 695 12 13쪽
18 일망타진(1) 23.12.20 712 13 13쪽
17 대호채의 기연(5) 23.12.19 727 19 14쪽
16 대호채의 기연(4) 23.12.18 684 14 13쪽
15 대호채의 기연(3) 23.12.15 693 15 13쪽
14 대호채의 기연(2) +1 23.12.14 754 14 13쪽
» 대호채의 기연(1) 23.12.13 775 14 12쪽
12 백학무관(5) 23.12.12 717 15 13쪽
11 백학무관(4) 23.12.11 732 10 13쪽
10 백학무관(3) 23.12.08 754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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