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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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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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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폰, 끝없는 의심

DUMMY

흑기사는 이미 진작에 사라져야 했다.

엄밀히 말해, 단검의 테이밍 마법 밸런싱을 제외하더라도 흑기사는 이미 사라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


리스폰.


게임에서 몬스터는 일반적으로 죽더라도 다시 살아난다. 이를 리스폰이라 한다.

리스폰된 몬스터를 반복적으로 처치함으로써 캐릭터는 성장에 필요한 경험치를 얻고, 확률적으로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


[데빌슬레이어] 게임도 비슷했다.

장군급 미만의 몬스터는 죽은 후 몇 시간 뒤에 리스폰되며, 장군급 이상의 몬스터는 죽은 지 하루가 지나면 리스폰된다.

여기서 하루는 플레이어가 여관이나 안전지대에서 일회 휴식하는 시간을 포함한다.


흑기사는 프린세스급 몬스터이므로, 대략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니 리스폰을 위해 이미 사라져야 했다.

분명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 경험치가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퀘스트가 수행된 것은 확실했다.


“퍼킬이 아닌가?”


보통 장군급 이상의 몬스터를 처음 처치하는 것을 "퍼스트 킬"이라고 한다.

이 "퍼스트 킬"이 발생하면, 해당 몬스터와 연관된 퀘스트가 완료된다.

완료된 퀘스트는 반복 퀘스트가 아닌 이상 다시 완료되지 않는다.

이는 추가 경험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현은 열병으로 인해 남겨진 몸의 기억을 되짚었다.

이 몸의 역사 속에는 흑기사를 처치한 기억이 없었다.

이를 보아 흑기사를 제압한 것은 이번이 처음임이 분명했다.


상태창에 경험치가 추가된 것을 확인했으니, 퀘스트 완료는 확실했다.

그렇다면 흑기사 퍼스트 킬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생각해 보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자] 퀘스트 완료와 경험치,

흑기사의 대검,

흑기사의 갑옷 세트 파츠 중 하나.


흑기사의 갑옷 세트는 탑티어 아이템이었다.

퍼스트 킬에서 고정된 파츠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파츠는 반복적으로 흑기사를 처치하여 획득해야 했다.

드랍율은 극악에 가까워, 고인물이 아닌 이상 모든 파츠를 모아 세트를 완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여하튼, 현재 상황에서 흑기사는 아이템을 드랍하고 사라져야 했지만,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현이 알고 있는 게임 시스템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고 있었다.


“끙”


어느 순간부터인지, 이러한 괴리가 발생할 때마다 한현은 강한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고통인지, 아니면 단순한 신체적 고통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한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한현은 찌뿌둥한 몸을 쭉 폈다.

며칠 동안 굳어 있었던 몸이라 여기저기 쑤셨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흠칫-


한현은 깜짝 놀랐다.

노집사가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다.


열병으로 얻은 기억 속에는 귀족이 쉽게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소양이 떠올랐다.

한현은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


“괜찮다.”


귀족의 소양과 기억을 얻고 나서, 한현에게는 몇 가지 의식 변화가 있었다.

그 첫 번째 변화는 노집사에게 반말하는 것이, 어느샌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신 이름이 허먼 멜빈이었나?”


“네, 멜빈이라 불러 주십시오.”


한현은 노집사를 살폈다.

그가 말했던 만월이 될 때 알려주겠다는 “가주 의식”이 떠올랐다.

한현에게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공략 정보에도 없는 부분이라 몹시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 나을 듯했다.

더욱이 그가 피의 일족, 즉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한현은 그를 더욱 꺼리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인이라곤 그밖에 없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공작가의 가주로서 수습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한현은 기억 속 교육에 따라 말을 꺼냈다.


“가문을 살펴야겠다.”


“준비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멜빈은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한현을 서재로 안내했다.


스- 스-

저벅, 저벅

척. 척. 척.


거대한 저택에는 오직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왕궁으로도 쓰일 수 있는 대저택이라면 수많은 사용인이 필요할 게 분명했지만, 멜빈 외에 단 한 명의 사용인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없어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저택의 복도에는 수십 개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대략 스무 개 정도로 보이는 초상화들은 역대 공작들의 것이었다.

복도의 마지막 지점에는 전대 공작의 초상화가 있었고, 그 옆에는 죽은 숙부의 초상이 보였다.


“쯧, 이 그림은 없애는 걸로 하지.”


“네, 이행하겠습니다.”


그림이 걸린 복도를 지나, 멜빈은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어 주었다.

한현은 멜빈이 열어준 방으로 들어섰다.


한현이 들어선 서재는 기억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수십 개의 책장이 마치 작은 도서관을 연상케 했다.


서재는 남향으로 창이 나 있었고, 빛이 들어오는 창가에는 거대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색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과 집기들은 한눈에 봐도 이곳이 가주의 집무실임을 느끼게 했다.


한현은 검은색 원목의 책상을 스윽 만져보았다.

고급 바니쉬로 칠해져 매끄러운 표면의 책상은 다행히도 잘 관리되어 있어 먼지 한 점 묻어나지 않았다.


털썩-


한현은 책상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백색의 검치호 가죽으로 덮여 있어 매우 푹신했다.


척! 척!


한현을 따라온 흑기사는 마치 자신의 자리가 여기라는 듯이, 한현의 의자 뒤 창가에 서서 박물관에 전시된 갑옷처럼 우뚝 섰다.

특별한 공격이나 명령이 없으면 그대로 부동자세를 유지할 듯싶었다.


멜빈이 책상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무엇부터 준비해 드릴까요?”


한현이 얻은 기억에 따르면,

귀족의 혈통, 족보, 왕립 면허증, 명칭 변경, 국기 등과 같은 관리 업무는 모두 문장원이라는 곳에서 처리했다.

이것은 단순히 고인물인 한현으로서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문장원이라는 곳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문장원은 귀족들을 위한 구청이나 동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어쨌든 새로운 집주인이 왔으니, 구청에 전입신고를 해야 했다.


“문장원에 제출할 서류부터.”


멜빈은 한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의 책장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왔다.


“여기 있습니다.”


한현은 금박으로 장식되고 까슬까슬한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서류의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글자들은 영어 스펠링이나 라틴어와 비슷해 보였다.

게임에서 많이 보던 문자 그림이라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에효...”


한현은 육체의 기억을 더듬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나자, 조금씩 문자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문자들은 일상의 말과 뜻을 전달하기 위해 표음문자로 정리된 대륙어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문자로 만들어진 표의문자인 고대어가 섞여 있었다.


마치 한글과 한문을 혼용해 쓰던 옛날 신문처럼, 대륙어와 고대어가 혼용되어 작성된 서류였다.


“뭐야? 족보가 아닌데, 이건 영토에 관한 서류가 아닌가? 잘못 준 건가?”


집사는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류를 잘못 가져왔습니다.”


한현은 당황스러웠다.

멜빈을 보건대 이런 단순한 실수를 하는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멜빈운 왜, 아무런 이유 없이 토지대장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멜빈이 한현을 진짜 귀족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뭐야? 지금 의심한 건가?’


영토 관련 토지대장과 귀족의 혈통을 나열한 족보는 형식이 비슷하게 보인다.

토지대장에는 누구의 아들이 누구의 아들에게 영토를 할양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족보에는 누구의 아들이 누구의 아들에게 작위를 계승한다고 쓰여 있다.


몇 가지 단어만 다를 뿐이다. 그렇기에 정확한 고어와 귀족적 교양을 쌓지 못하면 이 두 문서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일을 구분하기 위해 문장가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찐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작위보다는 영지를 더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문장원에 제출하는 서류에서 얼핏 보면 족보보다는 전입신고를 위한 영토 관련 서류가 더 우선시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귀족이라면, 분명 대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영토보다는 족보를 더 우선시하는 문화적 소양이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어야 했다.

대귀족으로 태어나서 교양을 쌓지 않거나 후천적으로 교양을 얻는 자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분명 이러한 사안은 멜빈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장난하나?”


척!


한현의 기분 나쁜 기색을 읽었는지, 뒤에 있던 흑기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수하였습니다.”


멜빈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한현은 멜빈을 내려다보면서 골치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타 소설에서는 회귀나 빙의한 주인공을 주변 인물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믿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클리셰가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멜빈은 한현을 위한 충직한 집사가 아니었다.

멜빈의 충성심은 공작가의 전통과 비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그의 실수가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후계자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인지는 불확실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한현이 진정한 후계자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사실 공작을 수행하던 멜빈과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한현의 몸은 직접적인 관계가 적었다.

전대 공작이 있을 때만 해도 공작가는 규모가 대단했었고, 그러기에 어린 시절에는 공작의 전용 저택보다는 별장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공작이 죽고 나서도 대부분의 일은 숙부가 처리했기에, 멜빈과의 만남은 더욱 적었다.

따라서 그와 이 몸은 어떠한 유대감도 없다고 봐야 했다.


현실적으로 몇 년 동안 죽었는지도 모르던 가주가 돌아왔다고 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믿는 일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멜빈도 한현의 생김새가 본래 후계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현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긴가민가했을 수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목걸이 하나로 누군가를 믿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다.

게다가 악마들이 판치는 세계관에서는 더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멜빈은 한현이 문자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 번 판단해 본 걸 수도 있었다.


귀족적 소양을 떠나서, 이 세계관에서 글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게다가 귀족으로서 교양을 쌓지 못했으면 고대어를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더욱이 그가 읽은 서류는 일반적인 대륙어가 아닌 귀족들만 쓰는 고어들이 가득했다.

고어는 귀족들만 알음알음 배우기에 일반 평민은 평생 볼 수 없는 문자였다.


어쩌면, 목걸이와 육체는 공작가의 후계자가 맞으나, 영혼도 본래의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행히 열병으로 얻은 기억 덕분에 이 시험을 통과한 듯했다.


“됐다. 족보를 가져와라.”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다른 책장에서 제대로 된 족보를 꺼내왔다.

영토 할양서와 비슷한 형식의 문서에는 공작 위를 내린다는 황제의 직인과 역대 가주의 문장, 그리고 혈통을 보증한다는 문장원의 글귀가 보였다.


한현은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멜빈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문장원과 작위 계승에 집중했다.


“공작 위 계승이라...”


귀족 사회에서는 명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작 위를 계승하기 위해 다음 3가지가 필요했다.


황제의 직인.

문장원의 인증서.

작위 계승식.


황제의 직인은 작위의 적법성을 보증하며, 문장원의 인증서는 혈통의 정통성을, 작위 계승식은 귀족 사회의 인정을 가져다준다.


참고로, 가짜 숙부는 공작의 직계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공작 위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는 귀족 혈통을 중요시하는 문장원과, 귀족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황제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이다.

게다가, 선민의식을 가진 귀족 사회는 정통성 없는 고위 귀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한현은 천천히 족보의 마지막 문단을 살펴보았다.


사각, 사각


깃털 팬을 들고, 숙부가 그렇게 적어보고 싶었던, 옛 공작의 이름 바로 아래에 버려진 귀족의 본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에드워드 조드 디 오블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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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맹을 구하는 방법 (2) 24.08.28 33 1 13쪽
11 동맹을 구하는 방법 (1) 24.08.27 30 1 13쪽
10 법과 질서를 위하여 24.08.26 38 1 13쪽
9 뜻밖에 등장 24.08.22 39 1 13쪽
» 리스폰, 끝없는 의심 24.08.21 39 1 12쪽
7 피의 연회장 24.08.20 37 1 12쪽
6 다시 만난 숙부 24.08.19 38 1 12쪽
5 경험치 그리고 퀘스트 24.08.15 47 1 13쪽
4 단검의 쓰임 24.08.14 48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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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으로 +1 24.08.08 10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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