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발해국은 어떻게든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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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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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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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기 35화. 모용세가와 연燕

DUMMY

-


곰기병들과 적토대가 맞부딪히기 직전.


백단과 모용청은 서로 검을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모용청이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대칭을 이루며 도는 백단.


그는 숨을 헐떡였다. 숨결이 고르지 못했고 입술을 퍼석거렸다. 모래를 씹는 느낌에 그가 억지로 입술을 집씹었다. 피가 배어 나오며 입술과 혀를 축였다.


“지쳐 보이는군. 부단히도 뛰어왔나 보군.”


그것을 눈치챈 모용청이 운을 떼며 검 끝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잠시 얘기를 나눠보자는 제스처였다. 이를 이해한 백단도 숨을 고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누구 덕분에.”


“흐응?”


자연스레 하대하는 백단의 말투에 당황한 모용청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틈을 노려 백단은 모용청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활력이 넘쳐 보였고 지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숨겨진 여력마저 엿보였으니 그는 만전의 상태다.


‘시발.’


열세. 백단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오랜만이구나. 한 십년 만인가?”


모용청도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한껏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참 오랜만에 뵙네요. 시발놈아.”


이를 눈치챈 백단은 구시렁대며 답했다.


“허. 십년 좀 안 되는 새에 말투가 많이 변했군.”


“그럼.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잖아.”


“허. 그런 속담도 있었나?”


“있어. 저 해동(한반도)에.”


“과연. 그대는 참 많이도 변했군.”


모용청은 백단의 머리 뒤에 떠오른 광배를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봤는데 욕설이라니···. 무림인으로서 예의(협)는 완전히 버린 거냐?”


“예의고 자시고 씨발. 저 꼴을 보면 욕이 안 나오겠냐?”


백단이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그의 뒤에는 무너지다 못해 아예 중앙이 뻥 뚫린 성벽이 보였다.


백단이 반년이나 개고생하며 만든 역작 중의 역작.


동시대 최강의 성벽을 모티브로 만든 상중 성벽, 백리장성이 허망하게 무너져있었다.


그로선 욕이 나오려야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먼저 공격한 주제에 지랄이야. 지랄은.”


“흐음. 그래도 너무 싸가지가 없는데···. 과거랑 너무 달라진 것 아닌가?”


“그때는 네가 강했으니까. 그리고 어디서 친한 척이야. 나를 이용해 먹으려 한 주제에.”


“으응? 그걸 알고 있었나?”


“그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했는데 모르겠냐?”


“허. 그때는 순진한 것처럼 보였는데···. 과연. 속을 숨긴 건가?”


“아니, 그냥 용이 한번 보고 싶어서 참아준 거야.”


“그렇군. 그대는 과거에도 싸가지가 없던 셈이군.”


“이 새끼가?”


“하하하.”


아까부터 속을 살살 긁는 모용청에 발끈한 백단이 검 자루를 꽈악, 쥐었다. 그러자 손목에서 핏줄이 돋아났다.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어 재끼는 모용청. 그는 이 대화가 나름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다가 이내 정색했다.


“왜 그랬나.”


한겨울의 얼어붙은 호수보다도 더 차가운 표정으로 그는 물었다.


“······.”


“왜 률을 어겼지?”


모용청이 제 손에 쥐인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기는커녕 일체의 기도 서리지 않은 검. 그러나 검에 서린 예기銳氣만큼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살벌한 기세만큼이나 그 안에는 응축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반드시, 백단을 죽이고 말겠다는. 그런, 무언가가.


“어째서 천년의, 현묵의 률을 어긴 것이냐. 악적惡狄. 백단이여.”


“···허. 악적이냐···.”


백단은 모용청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인 칭호를 듣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참으로 맑았다. 빌어먹을 그날처럼.


그가 잠시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미묘한 대치 사이 잠시간의 적막을 음미한 그가 눈을 희번뜩 뜨며 모용청을 노려보았다.


“내 백성을 죽였기 때문이다.”


-


“백성을···. 죽였다라···.”


백단의 말을 들은 모용청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가 떠오른 걸까?


아주 오래전, 옛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지은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미련을 털어버렸다. 그리곤 다시 정색하며 그에게 물었다.


“건방진 말이로고.”


그리고 백단의 대답을 단 한마디로 평했다.


“오만하구나.”


“······.”


―――오만.


모용청이 단언했다. 백단은 오만하다고.


“너는 네가 힘을 가졌다고 이 세상 전부를 가진 듯싶으냐? 무공을 배웠다고 네 안뜰과 같으냐? 세상이 그리 물러 보이더냐? 세상이 그리도 우스워 보이더냐?”


“······.”


“세상은, 그리 무르지 않다.”


모용청은 백단에게 훈계하듯, 동시에 자기에게 상기시키듯 말하였다.


“절정에 올랐더라도 군대 앞에선 빛이 바랜다. 초절정이라 한들 대군 앞에선 한낱 촛불에 불과할지니, 세상의 흐름은 강고하다.”


모용청은 이제는 안쓰러움마저 담아 백단에게 말했다.


“힘을 가졌다고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리도 왕 노릇이 하고 싶더냐? 그래서 여기서 토인들을 부려 먹으면 왕이 될 줄 알았더냐?”


“······.”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


“너는 왕이 아니다. 그저 힘만 믿고 세상 다 가진 듯 까불며 날뛰는 애송이에 불과할 뿐···.”


“아니.”


“···흠?”


모용청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던 백단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왕이다.”


백단이 모용청에게 한 걸음 내디뎠다.


“힘으로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백단은 제 어깨에 매만지며 무형의 무게를 느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지만 때때로 느껴지는 무게감.


그를 왕으로서 믿고 옹립해준 백성들의 의념이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랴.”


백단은 왕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왕을 자처했으니 백성들이 옹립했다.


그는 겁박할지언정 강요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반발할지언정 단 한 번도 백성을 숙청한 적 없다.


그리하니 모두가 그를 믿고 따랐다.


“나는 힘으로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힘으로 신뢰를 보여주어 왕이 된 것이다.”


그는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왕을 자처하면 어떠냐?”


백단은 사할린의 역사를 떠올렸다.


전생의 사할린은 청나라의 휘하에 들어가 그저 변방의 일부로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러시아와 일본의 패권주의에 휘말려 거의 모든 부족이 학살당하고 강제로 동화되었다.


그는 그런 땅의 왕이 된 것이다.


“나는 이미 역사를 바꿨거늘.”


그럼으로써 그는 미래의 비극을 막았다. 역사의 흐름 자체를 비틀어버렸다.


“왕은 백성을 지켜야 한다. 그리하니 지켰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지?”


백단은 검을 쥔 팔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나는 이미 무림인이 아니다. 률 따위 어기지 않았다.”


“궤변이다. 백단.”


모용청은 백단의 말을 더는 듣기 힘들다는 듯 학을 떼며 소리쳤다.


“네가 왕을 자처한다고 네가 무림인이었다는 과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도 너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백단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내 백성들이 나를 왕이라고만 생각하면 돼!”


그리고 땅을 박차며 모용청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고 모용청이 검을 대각선으로 올려 베면서 그의 검을 막았다.


카앙! 불꽃과 금속음이 터져나갔다. 모용청이 백단을 향해 외쳤다.


“그래. 백번 양보해 네가 왕이 되었다고 치자. 그렇다 한들 네가 성군이라도 된 것 같으냐?”


그가 백단의 검을 거둬내며 발을 들어 복부를 쳤다. 명치에 정통으로 발차기를 맞은 백단이 땅을 굴렀다. 그는 오히려 그 반발력을 이용해 뒤로 굴러 거리를 벌렸다.


모용청이 검지를 들어 무너진 백리장성을 가리켰다.


“저 성벽을 짓겠다고 토인들을 부려 먹은 놈이 가증스럽게 성군인 척 굴지 마라! 같은 무림인, 전前 무림인이라고 부르기도 역겨우니까!”


그의 말에 백단이 당당히 소리쳤다.


“저 성벽은 내가 지었다!”


“하?”


그 말만큼은 정말 예상외였는지 처음으로 모용청이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뭐, 뭐라고···?”


“왜? 내가 저 성벽을 지었다니 놀랐나?”


백단이 큭큭, 웃으며 명치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왜? 내가 내 백성들을 부려 먹기라도 했을까 봐?”


“······.”


‘···아니. 그걸로 놀란 게 아닌데.’


모용청은 백단이 백성을 부려 먹지 않은 것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니, 왜 성벽을 직접 지어?’


꼴에 왕을 자처한 놈이 직접 성벽을 축조했다는 소리에 당황한 것이다.


“너희 무림인들은 그게 문제야. 선민의식이 쩐다고.”


백단은 품위 따위 일절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말하면서 눈을 형형하게 떴다.


“모용청. 다시는 내 백성들을 토인 따위로 부르지 마라.”


“······.”


“내가 왕이 된 이상, 그 누구도 내 백성들을 토인으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


-


‘···뭐냐. 이놈은.’


모용청은 혼란스러웠다.


‘그저 률을 어긴 어리석은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째서 저 자에게서 현기賢氣와 품위品位가 느껴지는 거냐.’


그는 백단이 단순히 왕이 되고 싶은 욕심으로 왕을 자처한 어리석은 무림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거의’ 틀리지 않았다.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백단이 정말 진심으로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것뿐.


그는 왕이 되고 싶은 만큼 백성들을 사랑했으며, 백성을 사랑한 만큼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단순한 권력욕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때문에 백단에게 있어 ‘당연한 행동’이 모용청에게 있어 ‘이상한 행동’처럼 보였다.


“모르겠구나.”


그래서 그는 백단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모르겠어. 너는 뭐냐. 백단.”


“나는 발해국의 국왕=아바이. 백단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검을 치켜드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일국의 왕처럼 보였다.


그래서 모용청은 더욱 불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는 연燕의 후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긍지를 가지고 살아라.]


―――열등감.


옛 선조의 선조, 그 선조 대부터 내려오던 역사를 떠올린 그는 입술을 집씹었다.


‘선조의 선조의 선조도 옛 영광을 포기했거늘···.’


모용청이 핏발까지 선 눈으로 백단을 노려보았다.


‘왜 그 어떤 역사조차 없던 네놈이, 선조도 못 이룬 영광을 이룬 것이냐!’


쉽게 말해, 모용청은 긁혔다.


백단의 행동, 말투, 저 자신감마저. 모든 것이 모용청···, 더 나아가 모용세가의 자긍심 자체를 짓밟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렇군. 인정하겠다.”


모용청은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숙였다.


“너를 일국의 왕이라고 인정하지.”


옆에 다른 무림인들이 있었다면 ‘모용세가가 미쳤구나!’라고 소리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모용청은 고개를 들어 백단을 노려봤다.


“그러니 널 죽이겠다.”


그 눈빛에는 어떤 결의가, 옛 영광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널 죽이고, 네 왕국을 취해 옛 선조가 못다 한 업을 이루겠다.”


모용청은 목적을 바꿨다.


무림인으로서 악적, 백단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모용으로서 발해국 국왕, 백단을 죽여 그 왕국을 갈취하기로.


-


―――그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는 뒤틀린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번화는 별 다른 내용이 없네요.

요즘 글을 쓰기 너무 힘들어진 것.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쉬운 길(사할린 일통)울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후후. 모용세가. 백단을 악마화한 니브흐. 그리고 훗날의 홍건적.


조건은 조금씩 갖춰지고 있군요.


건국기도 슬슬 끝을 보이고, 완결하면 조금 휴재나 해볼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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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미리 올려보는 사할린 지도 24.08.23 115 0 -
» 건국기 35화. 모용세가와 연燕 NEW 12시간 전 17 1 11쪽
58 건국기 34화. 격돌 24.09.18 24 1 19쪽
57 건국기 33화. 발해 강철, 다가온 위기 24.09.17 33 1 18쪽
56 건국기 32화. 해군의 양성, 철 수확 24.09.16 25 1 19쪽
55 건국기 31화. 문화의 발전, 철광의 발견 +2 24.09.16 37 1 23쪽
54 건국기 30화. 사할린 공용어 24.09.13 42 1 25쪽
53 건국기 29화. 양식업과 언어 24.09.13 28 1 23쪽
52 건국기 28화. 양식업…을 시작하기 전에 24.09.13 31 1 13쪽
51 건국기 27화. 종이 = 꿀 24.09.12 38 1 16쪽
50 건국기 26화. 종이 만들기 +2 24.09.12 42 1 15쪽
49 건국기 25화. 방어선 재구축과 건국建國 +2 24.09.11 49 1 16쪽
48 건국기 24화. 전후처리, 내정의 시작 24.09.11 38 1 15쪽
47 건국기 23화. 완벽한 승리 24.09.11 37 1 24쪽
46 건국기 22화. 전쟁…? 24.09.10 35 1 28쪽
45 건국기21화 만반의 준비와 백리장성 24.09.10 34 1 23쪽
44 건국기 20화. 후회와 미련 사이 24.09.09 41 0 12쪽
43 건국기 19화. 악마와 악마 24.09.09 35 1 22쪽
42 건국기 18화. 남경南京 24.09.06 47 1 16쪽
41 건국기 17화. 모든 길은 로마…, 가 아닌 중경中京으로 통한다. 24.09.06 41 1 26쪽
40 건국기 16화. 보이텍Wojtek 혁명 24.09.05 39 1 28쪽
39 건국기 15화. 도토리 혁명Acorn Revolution(완) 24.09.05 31 1 25쪽
38 건국기 14화. 도토리 혁명Acorn Revolution(3) 24.09.04 34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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