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막거나 말리지 않았던 역사적인 사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 대학원 강의실에는 머리가 허연 노 교수가 마이크를 든 채 나지막하지만,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학생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노 교수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의는 이것으로 끝내고 다음 과제는 개인적으로 근현대사에 가장 아이러니한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막거나 말리지 않았던 역사적인 사건, 사전적 의미로는 516 군사 정변에 대한 거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1961년 5월 16일 모두가 잠든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종희 소장의 주도로 이루어진 3500여 명의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건너 주요 정부 기관을 점령하여 3년간의 군정 통치를 한 후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보통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경우 비밀 엄수가 기본이자 생명이고 기존 기득권 세력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쿠데타를 막으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516 군사 정변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막지 않았던 신기한 정변이었다.
어쩌면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지만, 만약 어느 누군가가 쿠데타 음모를 막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를 다음 달 10일까지 제출하도록.
이것으로 오늘 강의를 끝낸다.”
교수가 말을 끝내자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다음 달 10일까지면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좀 더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남학생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너도나도 동조하였다.
“맞아요. 교수님!”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인 배경까지 모두 조사해야 하기에 시간이 부족해요. 시간 좀 더 주세요.”
“플라자 합의 과제도 해야 하잖아요.”
학생들을 둘러보던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3명이 조를 짜서 제출하는 방식으로 하지. 분담해서 하면 시간은 충분할 거야.”
할 말을 마치고 교수가 나가자 앞에 앉아 있던 위호문이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징그러운 미소를 날렸다.
“콜?”
저놈은 분명 전생에 나랑 원수지간이었을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였다가 저놈은 외국어 고등학교로 진학하였고 난 일반고로 진학하여 서로 헤어졌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대학교에서 다시 만났고 대학원도 같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였다.
난 원래 대학 전공이 정치외교학부라 당연히 대학원도 정치외교학부였지만 저놈은 전공이 경제학이면서 왜 대학원은 정치외교학부로 와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경제와 정치를 두루 섭렵하겠다는 의도인가? 하여튼 징글징글한 놈이고 질긴 악연이었고 나의 두 번째 미스터리였다.
싫다고 거절하려는데 옆자리에 있던 유아영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위호문이 반색하며 바로 대답하였다.
“당연히 콜이지.”
“헤헤.”
그렇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가 결정 나 버렸다.
우리들의 대화를 듣던 다른 학우들이 부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고? 유아영은 우리 과의 여신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서울대학교 전체 여신이라고 해도 충분하였다.
유아영도 대학 전공이 미대 서양화과이면서 대학원은 정치외교학부였다.
지성과 미모를 갖춘 유아영은 굳이 대학원을 올 필요도 없고 더구나 전혀 성격이 다른 전공으로 올 이유도 없는데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의 첫 번째 미스터리가 유아영이었다.
저놈 유아영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어쩌냐? 유아영은 남자로서 너를 보는 것 같지 않은데.
유아영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민재야! 우리 밥 먹고 네 자취방에 가서 과제 분담하자.”
절대 노다.
대학 1학년 때 아무 생각 없이 내 자취방을 친구들에게 알려주었다가 수시로 찾아오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었다.
술 먹고 밤늦게 오기도 하고 어떤 놈은 집에 가기 싫다고 툭하면 자고 하여튼 별의별 것을 다 겪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시달린 후 이사하고 나서는 절대 내 자취방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근데 알려달라고?
유아영만 온다면 좋지만, 저 비릿한 미소를 짓는 위호문이 자기 집처럼 눌러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절대 알려줄 수 없지.
“나 알바 가야 해. 밥 먹으면서 나누자.”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안 돼?”
커피 마실 시간은 되지만 호문이나 아영이 처럼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커피숍에서의 커피는 나에게는 사치였다.
그렇다고 두 친구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시는 않을 테니까.
내 사정을 잘 아는 호문이가 나섰다.
“밥 먹으면서 하면 되지. 오늘 기분이다. 내가 밥 살게.”
날 생각해서 밥 사겠다는 호문이를 보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난 고아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 보육원 수녀님이 내가 부족함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자를 물색하여 내가 대학원 공부까지 할 수 있었다.
학비며 생활비면 누군지도 모르는 후원자가 지원하여 공부하고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언제까지 도움만 받을 수 없기에 없는 시간 쪼개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호문이는 이런 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툭하면 술과 밥을 사주겠다고 하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지,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가 부담되어 번번이 거절하자 이런 기회를 노린 거였다.
유아영은 이런 나의 사정을 모른다. 다른 학부생도 마찬가지고.
“뭐 사줄 건데?”
“아영이 먹고 싶은 거.”
“녹두 거리에 새로 생긴 파스타 집이 있더라. 내 친구가 가봤는데 맛있데. 우리 거기 가자.”
“오케이.”
호문이가 오케이 하자 아영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파스타 괜찮아?”
얻어먹는데 사족 달면 안 되지.
“나도 좋아.”
“나 배고파. 빨리 가자.”
파스타를 다 먹고 포크를 내려놓자 아영이가 나를 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어때? 맛은 괜찮았어?”
난 원래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집은 이상하게도 내 입맛에 맞았다. 아영이 친구 말대로 맛있었다.
“맛있었어.”
“입에 안 맞나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다.”
“난 아무거나 잘 먹어. 웬만해서는 음식 투정하지 않아.”
사실은 없어서 못 먹지, 있는 음식은 마다하지 않는다.
“음식 투정 안 한다니 민재랑 결혼하는 여자는 좋겠다.”
글쎄? 현재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가 결혼은 할 수 있으려나? 한다 해도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일 텐데.
그때 해서 뭐하나 싶었다.
요즘은 돈이 없으면 자식 낳아봤자 고생만 시키는데. 어쩌면 혼자 사는 것이 속 편하고 좋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됐을까?
“좋아할 여자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왜? 비혼주의야?”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음으로 넘기자 호문이가 끼어들었다.
“민재 모솔이야.
내가 대학 때부터 미팅시켜준다고 하는데도 계속 싫다고 하더라. 대학 때 미팅 한 번도 안 했어.
혹시 저놈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거 아니야?”
호문이와 아영이가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내가 소리쳤다.
“아니거든.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빨리 나누자. 나 알바하러 가야 해.”
“어떻게 나누면 좋을까?”
“내가 보기에 516 군사 정변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
그러니 호문이는 419 혁명 전반을 조사하면서 그 당시 국민들 여론, 민심까지 살펴봐.”
“알았어.”
“아영이는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장문 내각 정부를 조사하고.”
“알았어. 넌 뭐 할 건데?”
“난 그 당시 군부 세력을 조사할게.”
호문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교수님이 내준 과제는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한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 군사 정변을 막았을 경우 그 이후에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관한 내용이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 당시 상황을 잘 알아야 그 이후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있지.
교수님의 의도는 단순하게 자신의 이상을 바라거나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이 아닌 사실과 현실에 근거하여 현실적으로 추론하라는 거야.”
“나도 민재 말이 맞는 것 같아.”
아영이가 내 말을 옹호하자 호문이도 별 의견이 없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그럼 자료를 다 조사한 후에 그 당시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어떻게 역사가 흘러갈지를 또 생각해야 하는 거네.”
“그렇지.”
“시간이 부족하겠네.”
“그럴 거야. 그러니까 자료 조사부터 빨리해야 해. 늦어도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모든 자료 조사가 끝나야 해. 알았지?”
“알았어.”
*
알바 갔다 오느라 집에 늦게 들어와 햇반과 김, 김치로 늦은 저녁을 대충 때우고 책상에 앉았다.
오늘따라 피곤하여 그냥 자고 싶었지만, 이번 주까지 조사한 자료를 다 보고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과제를 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았다.
나와 호문이, 아영이가 자료 조사한 것을 취합하여 보고 있는데 노트북 자판에 핏방울이 하나둘 뚝뚝 떨어졌다.
‘뭐야?’
코를 만지니 이제는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얼른 휴지로 코를 막았다. 요즘 너무 무리했나? 오늘은 일찍 잘까? 아니야. 내 형편에 마음 편하게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다시 노트북 화면을 보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며 어지럽더니 정신을 잃었다.
고개가 노트북 자판을 덮쳤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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