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가 서자가 다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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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냑
작품등록일 :
2024.08.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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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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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화

DUMMY

로시안은 6개월이 지났음에도 손에 익지 않는 은식기가 어색했다. 정확히 말하면 은식기뿐만이 아니었다.


보드라운 옷감으로 지어진 세련된 셔츠와 바지, 벨벳 재질의 의자 그리고 두 눈이 휘둥그레 떠지도록 기다란 식탁은 가득 채운 만찬 등은 한순간에 뒤바뀐 그의 인생을 대변했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적응 되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다.


 


챙강.


 


손이 떨리는 탓에 식기가 저들끼리 부딪치자, 식당에 날카로운 소음이 일었다. 식탁을 빙 두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모두 한 번에 로시안에게로 몰려들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로시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를 보듯 주위를 살폈다.


 


역시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 상종하기 싫다는 듯한 눈빛. 혹은 아예 같은 자리에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지 무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로시안, 아직도 식사 예절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모양이구나.”


 


중년의 묵직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식사자리에 흘러들었다. 로시안은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려 중년 남성을 바라봤다.


 


멋들어진 은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미중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이프 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행동거지를 구사하는 그의 이름은 칼루이덴 트레덴스.


 


이 트레덴스 성의 아주 유력한 차기 가주 후보이자 로시안의 숙부였다.


 


성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족은 어머니가 전부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로시안에게는 천지가 뒤바뀌는 듯한 사실이었으나 생각 외로 로시안에게는 혈육이라고 부를 존재가 꽤 많았다. 다만, 대부분 로시안을 혈육으로 인정하지 않기는 했지만.


 


일견 다정한 듯 보이는 칼루이덴 역시 그렇다. 그는 늘 나긋한 화법을 구사하는데도 로시안은 그가 불편하기만 했다.


 


아마도 그것은 칼루이덴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의 눈이 로시안을 향할 때면 입꼬리는 올라가 있을지언정 눈은 웃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차가움이 벼려져 있는 눈은 마치 자신을 버러지라도 되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쓸모없는 것처럼 여기는 식사 자리에서 로시안은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분명 생활은 성에 들어오기 전보다 배는 좋아졌건만 오히려 그는 차라리 예전 생활이 그립기까지 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을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것처럼 취급했다.


 


“뭐, 천한 출신이 어디 가겠습니까?”


 


속닥거리며 저들끼리 나누는 대화 중 일부가 로시안의 귀에 걸렸다.


 


로시안은 결국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식사 자리를 겨우 마무리했다.


 


식사를 마치고 오늘도 역시 토할 것 같은 속을 억누르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도 평탄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발견한 로시안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인사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을 즈음 상대는 그를 보지도 않은 채 스쳐 지나갔다. 그 뒤를 수행원들이 따라갔고 소수의 몇몇은 가볍게 로시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로시안은 서둘러 고개를 마주 숙였다가 이내 예전 습관이 나와 지나치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의아한 눈빛 혹은 못마땅한 눈빛이 그의 뒤를 쫓아왔다.


 


그러다 가장 앞에서 선 이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심한 눈.


 


로시안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소년은 그를 곁눈질로 흘겨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기다란 복도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던 로시안은 깊은숨을 내쉬었다가 이것도 체통머리 없는 짓이겠지? 하는 생각에 다시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귀족은 신경쓸 것이 너무도 많았고 일평생 평민으로 살아온 로시안에게는 별세상 같은 구석투성이었다.


 


조금 전의 소년 역시도 그렇다.


 


지극히 귀족적인 소년의 이름은 아벨루스 트레덴스. 로시안의 동생이었다. 어머니가 달랐으므로 정확하게는 이복동생이지만.


 


로시안의 어머니는 평민이었지만 아벨루스의 어머니는 명문가의 귀공녀였다. 그러므로 반쪽짜리 취급받는 로시안과는 다르게 아벨루스는 완전무결한 귀족의 혈통이었다.


 


그래서일까. 고작해야 9개월 남짓한 차이임에도 아벨루스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다. 행동거지, 품위 등 모든 게 아벨루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순,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그러자 그는 곧 있을 수업마저도 받기가 싫었다.


 


그의 교육 담당 선생은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예민했으며 또한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루라도 윽박지르지 않는 날이 없었고 회초리에 손바닥이 발개지는 것은 일상이었다.


 


수업이 듣기 싫었다.


 


그러나 제 입으로 배우고 싶다고 한 수업이고 이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다는 듯이 쳐다볼 숙부와 가신들의 눈이 무서웠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식사 자리가 있을 때면 늘 그랬듯 속을 게우고 침대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옷 속에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성에 들어오기 전, 여관에서 지낼 적에는 혹여나 주인 부부가 눈독 들일까 늘 집에 숨겨두었지만, 성에서 지내면서부터는 항상 목에 걸고 지냈다.


 


성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로시안의 것보다 귀해 보이는 장신구를 달고 살았기 때문도 있지만 혼자 살 적과 다르게 트레덴스 성에서는 로시안이 방을 비우면 하녀들이 분주히 청소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냥 품에 지니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목걸이를 걸고 있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늘 곁에서 지켜주시는 것 같아 이 삭막한 고성 생활에서 유일한 안식이 되어주었다.


 


로시안은 게운 속이 차츰 쓰라리고 허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불에 고개를 묻고는 목걸이를 바라봤다.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목걸이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잡생각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창문에서 따뜻한 기운을 품고 로시안의 방 곳곳에 내려앉았다. 둥실둥실 먼지가 느릿하게 날아다녔다.


 


연무장에서 병사들이 훈련하는지 조그맣게 열어둔 창 사이로 서늘한 바람과 함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평화로운 순간이 아주 잠시 도래하는 이 짧은 시간은 로시안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수업도 받으러 가기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배부른 고민이구나.’


 


로시안은 과거 여관에서 이 시간대에 쉴 새 없이 일할 적을 떠올리고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몸이 고달픈 것과 마음이 허한 것. 어느 것이 인간을 더 괴롭히는 걸까.


 


하루아침에 뒤바뀐 신세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초라한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과연 트레덴스 성으로 무작정 찾아온 것이 잘한 선택이었을까. 어쩌면 그날 상단에 팔려 갔더라면 예상치 못한 행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로시안. 내 아들. 만약 네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레다폴로 가렴. 그곳의 성을 찾아가 클로트 경에게 도움을 청해보려무나. 아주 어쩌면 그가 무언가 도움을 줄지도 몰라.’


 


어머니가 해주신 말을 떠올리던 로시안은 지금에 이르러선 자신이 옳은 선택을 내린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여관 주인이 자신을 팔아넘긴다는 말에 도망치듯이 뛰쳐나왔다. 그도 자신에게 그런 실행력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는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절박한 심정이었을 뿐이었다.


 


도망치면 반드시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일 것이란 막연한 믿음만이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쳐나와 레다폴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트레덴스 성을 찾았고 혹여나 잊어버릴까 몇 번이고 속으로 외웠던 클로트 경을 성의 경비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청천벽력과도 같이 클로트 경의 이름을 아는 경비는 없었고 로시안은 연고 없는 지역에 홀로 덩그러니 앞길을 찾아 헤매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절박한 마음에 그는 경비병에게 몇 번이고 클로트 경을 만나게 해달라고 외쳤다. 그 탓에 성문 앞에서 소란이 일었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로시안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들이었다. 그러더니 곧 로시안조차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트레덴스 성의 주인이자 레다폴의 지배자 트레덴스 백작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높은 위치의 고위 귀족을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라 로시안은 황송하기보다 당혹스러웠다. 소란을 피운 죄로 목을 베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관에서 지낼 적 귀족들은 변덕스럽다는 이야기를 늘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통이 내려칠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백작은 로시안의 이름을 묻고 어머니의 이름을 묻고 출신 지역, 탄생 연도 등의 신상과 관련한 정보를 몇 가지 물어보았다. 그러더니 긴장해서 손에 꼭 쥐고 있던 로시안의 목걸이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인지 로시안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백작은 성에 방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곧 성의 일원으로 편입이 되었다. 뒤늦게 백작이 자신의 친조부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무슨 상황인지 도통 와닿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작이 지병악화로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처음 들었을 때도 그냥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뿐이었다.


 


다만 무상한 로시안과 다르게 저택 내부에서는 크게 변화가 일었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후계자 자리를 두고 숙부 파와 이복동생인 아벨루스 파로 세력이 나뉜 것이다.


 


피가 섞였지만 로시안이 설 자리는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애매한 상황에 놓였다.


 


백작이 직접 인정한 서자, 그러나 백작이 쓰러진 지금 가장 보잘것없지만, 눈에 거슬리는 만만한 상대가 바로 로시안이었다.


 


결국, 삼엄한 분위기에 내내 방에 처박혀 있던 로시안이 뭐라도 배워보고자 처음으로 숙부에게 청했던 것이 바로 교육 선생이었다.


 


지금에서는 후회하지만, 당시에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로시안 자신이 이 집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고 싶었다.


 


성을 뛰쳐나오고 싶어도 이미 한 번 여관에서 도망쳐 온 신세라 갈 데가 없었다.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혈육에게 무시당하고 이복동생보다 못한, 재주 없는 한심한 신세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릴 적, 여관에서 지낼 적에도 걱정과 고민은 많았다. 그때는 여관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돈 많은 귀족이라면 아무 걱정 없이 지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로시안같은 애매한 위치의 서자는 기반이 불안정했다. 어머니도 서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모르셨을 것이다. 아셨다고 해도 단순히 배곯지는 않겠거니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해보신 것일 테지.


 


그러나 로시안은 어머니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어른이 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이 모든 게 아직은 자신이 어려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4년 후에는 성인이 된다. 힘도 더 강해지고 저택 밖을 나가도 분명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로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살 잠에 들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로시안은 어느덧 성년을 앞두고 있었다.


 


그즈음 몇 년 동안 의식불명이던 백작이 숨을 거둔 이후 한동안 공석이던 백작의 자리에는 숙부가 오르는 것으로 후계자 다툼이 마무리됐다.


 


다만, 후계자 다툼이 한창일 때 로시안 진작에 바라던 대로 저택을 나왔고 백작령의 한적한 동네에 그런대로 혼자 번듯하게 살만한 집을 구해 전에 없이 평온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작위에 숙부가 오른다는 말을 호사가들의 입에서 전해 들었을 때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백작이 쓰러졌을 때,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취급할 뿐이었다.


 


어느 날 밤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방문할 사람이 없어 의아해하던 로시안이 마주한 것은 그의 이복동생이었다. 오랜만에 본 아벨루스는 이전보다 키가 컸고 여전히 말쑥했으나 피로 탓인지 눈가가 거뭇했고 볼이 푹 파였으며 얼굴이 핼쑥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입술이 떨어지고 로시안은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복동생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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