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가 서자가 다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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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냑
작품등록일 :
2024.08.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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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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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5화

DUMMY

“로시안 공자님 말이 사실일까요?”


로시안이 떠나고 남은 집무실에서 테르베온이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물었다.


“글쎄.”


흥미가 없다는 투로 아벨루스는 사각거리며 다시 펜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손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리다는 것을 줄곧 곁에서 보필해 온 테르베온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머릿속에 딴생각이 들어찬 것일 테지. 집중력이 좋은 아벨루스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테르베온은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서자 로시안은 줄곧 자신감이 없는 태도로 제 의견을 제대로 피력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소심하고 유약한 모습만 보면 도무지 트레덴스 가의 일원 같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로시안을 봤을 때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꼬질꼬질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지저분한 은색 더벅머리와 그 밑으로 보이던 황금색 눈동자는 틀림없이 트레덴스 백작가의 혈통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은 뭣하지만, 눈동자 색을 빼고는 모조리 외탁을 한 아벨루스보다도 생김새 하나만큼은 로시안이 더 트레덴스에 적합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아직 채 성장을 마치지 않았고 자신 없는 표정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부친인 로디시온 경을 정말이지 빼닮았다. 그가 어릴 적에는 딱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가문의 원로나 오랜 고용인들은 유독 그런 감상을 받고 있는지 로시안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단단하고 노회한 표정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꽤 신선한 장면이었다.


서자라는 신분 탓에 숙덕이고는 하지만 그의 혈통을 의심하는 말은 거의 없는 것만 봐도 트레덴스의 피가 얼마나 로시안에게 짙게 드러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서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고 몇 가지 교차검증을 거치면서 받아들여졌다고 전해 들었다.


그래도 무섭도록 닮았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그 철옹성 같은 백작이 인정하고 능구렁이 같은 두 사람의 숙부, 칼루이덴이 로시안만 보면 제대로 인상관리가 안 되겠는가.


‘은근히 감정을 못 숨기는 것은 도련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테르베온은 슬쩍 아벨루스를 내려다봤다.


칼루이덴과의 신경전에서도 능숙하게 표정을 숨길 줄 아는 아벨루스지만 유독 로시안에게는 냉랭했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


제 혈통에 자부심이 강한 아벨루스였으니까. 뜬금없이 튀어나온 서자의 존재는 거슬릴 것이다. 원래도 서자란 귀족들의 수치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렇기에 오늘의 로시안은 신기했다.


“의외였죠? 전 그 소심한 분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특히나 마지막에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몸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었다니까요.”


테르베온은 집무실을 떠나기 직전의 로시안을 떠올리며 웃긴다는 얼굴을 했다.


“쓸데없이 겁이 많을 뿐이다.”

“확실히 가주직을 칼루이덴 님께서 이어받을 경우를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과민한 걱정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고 말하지는 못하겠군요.”

“······.”

“그렇다면 썩 기특한 일 아닙니까? 제 살길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니까요.”


테르베온 개인으로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호감이었다. 애초에 그는 그다지 로시안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외견만 본다면 호의를 가진 편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도련님의 눈을 마주 보는 것도, 어설프게 말을 높이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죠. 제대로 각오를 하신 것 아닐까요? 얘기해준 정보도 꽤 솔깃했고요.”

“······검증은 해봐야지.”

“사실이라면 나름 칼루트 님께 한 방 먹일 수 있겠네요. 후계자 경쟁에서는 이런 것도 중요하죠.”

“알았으면 그만 떠들고 조사해 와.”


테르베온은 경쾌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쩐지 후계 경쟁이 물밑에서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하려는 지금 꽤나 재밌는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늘도 역시 선생의 수업이 있었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로시안을 쥐잡듯이 잡았다.


그가 침을 뱉으며 크게 소리를 지를 때는 귀가 따가워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선생에 대한 공포심은 이미 거의 희미해져 있었다. 그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덕분에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로시안은 수업을 끝내자마자 결연한 얼굴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성의 그 어느 방에 달린 것보다 커다란 문이 보였다. 미래를 통틀어서 처음으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볼 일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어제 아벨루스와 나눈 대화가 지나갔다.


로시안이 정보를 알려준 이후의 내용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그것 말고 당신이 무슨 도움이 되는 겁니까?”


호기롭게 모든 패를 꺼내버린 로시안은 차마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저도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여관 청소, 빨래, 요리 등의 재주가 있기는 하지만 아벨루스가 가주직을 이어받는 데는 하등 쓸모없어 보였다.


애초에 정보 하나 알려준 것 정도로 아벨루스가 자신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바보같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말부터 내뱉어 버렸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무슨 도움이 필요한데?”


할 수 있는 한 그의 필요에 따라 움직여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벨루스는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 포기라도 하는듯한 말에 로시안은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정보만 홀라당 잃어버리고 아무 소득도 없이 맨손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그 자리에서 얌전히 뒤로 물러섰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여기서 물러나면 죽음뿐이야.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설 데도 없었다.


그는 망부석처럼 자리에 서서 팽팽 머리를 돌렸다. 그가 최대한 잘할 수 있으면서 아벨루스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뭐가 없나?


문득 아벨루스의 주위로 정돈된 서류 더미들이 보였다.


“그 서류, 혼자서 보기 벅차지 않아? 도와줄 사람 안 필요해? 정리 같은 거 말이야.”

“헛소리 말고 그냥 물러가십시오. 애초에 당신 글도 못 읽지 않습니까.”


평소라면 여기서 한심하게 여기는 아벨루스의 태도에 주목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에 촛불이 켜진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글을 배우면 도움이 되는 거지?”

“······마음대로 하세요.”

“금방 배울게. 조금만 시간을 줘!”


거의 내쫓다시피 아무렇게나 말을 던지는 투로 아벨루스가 나가라고 손짓했다. 로시안은 비록 억지스럽지만 그를 허락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미친 사람 보듯 아벨루스가 놀라움과 질색을 담아 그를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지만 당장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했다.


하지만 글공부에 착수하려 하자 곧바로 문제에 봉착했다.


‘글을 무슨 수로 익히지?’


일단은 무턱대고 배우겠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도통 방법을 모르겠다는 커다란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선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로시안을 가르치려고 온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저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막혀버리다니.’


로시안은 초조한 심정이 들었다. 빨리 글을 익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벨루스가 내 말을 그냥 흘려들었을 수도 있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로시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조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은 뭐라도 잡아보는 심정이었으니까. 당시에는 순간의 감정에 급급해 무작정 아벨루스를 찾아간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뜬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로시안은 다리를 들썩거렸다. 불안했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미래의 꿈을 꾸었다고 한들 로시안이 아는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몇 차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그의 인격은 무참히 짓밟혔다. 미래에선 선생이 잘리고 나서 머지않아 다시 무언가를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는 완전히 방에 틀어박혔고, 이는 숙부가 바라는 대로였다.


그러니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다 로시안에게는 성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귀띔해 줄 사람도 없었기에 어지간한 큼직한 사건이 아니고서야 로시안의 귀까지 정보가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 뒤로는 성을 아예 나가버렸으니 아는 것이 호사가들보다도 적었다. 트레덴스 가에서 일어나는 일에 완전히 관심을 끊었으니까.


그 탓에 성에서 지내는 동안에, 성에서 나온 이후에도 글자를 제대로 떼지 못했다. 어차피 귀족들이 놀려먹는 것도 한순간이고 이후로는 영영 평민으로 살 생각이 가득한데 죽어라 글자를 익혀 뭐에 써먹느냐고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래의 자신은 배움을 완전히 놔 버렸다.


‘그래도 그건 딱히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아.’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큰 재산이다.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줄 알면 쓸모가 늘어난다는 것을 성 밖으로 나간 자신은 체감했기 때문이다.


‘일단 받는 보수의 단위가 달라.’


지식은 특혜를 받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은 익히지 못한다. 그렇다는 건 희소하다는 것이고 이는 고수익과 직결된다.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대우받을 수 있다.


로시안은 지금보다 키도 크고 힘도 강해져서 입에 풀칠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지만 선택지를 여럿 두는 것과 아예 두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설령 선생이 잘리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지식을 쌓고 싶었다. 글도 배우고 싶고.


그렇기에 비단 글을 익히려는 것은 아벨루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결국은 저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혹시나 아벨루스가 제가 말한 정보를 검토해서 자신의 쓸모를 찾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를 위해,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 글은 배워야만 했다.


분명 그러할진대 그 계획은 거의 물거품이 되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도서관!’


글자가 넘쳐나는 지식의 보고 말이다. 일단 얇은 책부터 닥치는 대로 계속 읽어나가면 어느 순간 글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도서관을 찾아갔다.


거대한 문을 앞두고 로시안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성에서 처음 가는 장소는 마치 금지구역에 발을 디딘 것 같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도서관에 무엇이 들었는지 생각하면 더 그랬다.


책은 귀중하고 값비싸다. 평민들은 평생 보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이 문 너머에 그 비싼 책들이 있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로시안은 곧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끼익하고 육중한 문이 느린 속도로 열렸다.


일단 고개부터 내밀고 내부를 살피던 로시안의 눈이 점차 큼직하게 변했다.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높은 천장과 방 서너 개는 합친 듯한 크기였다. 아마 이 성안에서 가장 큰 공간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입을 쩍 벌리게 만든 것은 그 거대한 공간을 벽면부터 다닥다닥 메운 책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건 모두 책이었다.


모두 다 해서 몇 권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게, 이게 다 얼마야?’


로시안은 순간 이곳이 도서관이 아니라 금고처럼 느껴졌다. 대충 보더라도 단단한 겉가죽에 말끔하게 씌운 금박이 호화로워 보였다.


그는 신기하고 새로운 기분에 휩싸인 채로 책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워낙에 공간이 크다 보니 아무리 살며시 걸어도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방대한 도서량에 한참을 압도되어 있던 그는 문득 끝 쪽 책장 사이에 있는 누군가를 알아차렸다.


‘······!’


워낙에 조용했기에 설마 누군가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깜짝 놀라 상대를 바라봤다.


혹시나 숙부 아니면 가신들 중 한 사람이면······.


로시안은 당장이라도 뒷걸음질을 칠 자세로 자세히 상대를 살폈다.


그 역시도 로시안을 알아차린 것인지 슬쩍 책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로시안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나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정체를 짐작하기 힘든, 낯선 얼굴의 노인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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