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가 서자가 다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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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냑
작품등록일 :
2024.08.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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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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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화

DUMMY

노인이 없는 도서관은 어딘가 낯설었다. 이제는 거의 제 것처럼 느껴지는 자리에 앉은 채로 로시안은 책을 읽다 말고 도서관을 빙 둘러보았다.


겨우 사람이 한 명 없을 뿐인데 오늘따라 유독 도서관이 크게 느껴졌다. 노인은 공부를 도와줄 때를 제외하고 특별히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간간이 들리는 사람 목소리가 없으니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럴수록 로시안은 책에 더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


그러나 누군가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이상하게 글씨가 눈에 잘 안 들어왔다. 자꾸만 흐트러지는 집중력에 로시안은 결국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한 장을 겨우 넘겼다.


어느새 그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선생이 오질 않았네.’


원래 오늘은 선생의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망설이고 있던 그는 일단 자리에 앉아 끝까지 선생을 기다렸다. 간혹 그가 느지막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수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렇게 통으로 시간을 날린 적은 처음인지라 로시안은 도서관으로 오는 내내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선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혹시 아벨루스가······?’


로시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다. 선생이 사정이 생겨서, 아니면 그냥 기분이 수업할 기분이 아니어서 무단으로 수업을 빠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로시안은 일말의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만약 그의 생각이 맞는다면 아벨루스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었다는 뜻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공부에 좀 더 의욕이 불어났다.


‘빨리 글을 유창하게 읽어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로시안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시 온전히 책에 집중했다.


끼익.


그렇게 천천히 책을 읽어나가고 있으니 어느 순간 내도록 미동도 없던 도서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로시안은 고개를 번쩍 들어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상대를 쳐다봤다. 혹시나 다른 사람일까 하는 일말의 걱정이 있었지만, 일주일 좀 안 되게 도서관에서 버틴 결과 알게 된 사실로 이 도서관은 사실상 노인 이외의 사람은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찾아오는 이들도 청소를 위해 간혹 들르는 하인들이 전부였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문이 열리자 노인이 들어섰다.


노인 역시 로시안이 언제나 이 시간까지는 남아있었기에 예상했는지 도서관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서는 인사를 건넸다.


“일정은 다 끝나셨나요?”

“예. 공자님은······. 아직, 예 그렇군요.”


그는 자연스럽게 로시안이 읽고 있는 책의 페이지를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랑 비교해서 큰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유독 속도가 느렸으므로 로시안은 그의 시선을 조금 모른 채 했다.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넘길 줄 아는 배짱도 생긴 것이다.


노인이 들어서자마자 로시안은 조금 차갑게 느껴지던 도서관이 활기를 찾은 것 같았다. 정확히는 도서관은 변하지 않았고 로시안의 기분이 달라진 것이지만 그만큼 도서관에서 보는 노인이 반가웠다.


‘······?’


그런데 노인의 반응이 여느 때와는 어딘가 달랐다. 원체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편은 아니었으니 눈에 띄게 이렇다 할 차이점은 없었지만,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게 왠지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느려서 그런가?’


일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무언가 관찰하듯 생각하듯 말없이 로시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결국 로시안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슬슬 글을 배우는 진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너무도 갑자기 예상외의 질문이 훅 치고 들어오자, 로시안이 되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냥 그게 궁금할 뿐이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노인은 제 궁금증을 묻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노인은 로시안의 앞자리에 앉으면서 그가 펼쳐놓은 책과 이제는 거의 너덜거리는 기본문자가 적힌 종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방에서 두문분출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글을 꼭 익혀야 할 이유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은 겁니다.”


‘음.’


아직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진지한 노인의 태도에 로시안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고민했다. 저번에 노인이 한 번 한 적 있는 질문이었고 그때는 대충 둘러댔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로시안이 그나마 시시콜콜한 감정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노인이 거의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꿈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으니, 로시안은 그 부분을 최대한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렇게 입으로 내뱉으니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달라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창한 대답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가장 본질적인 말이었다. 꿈에서 본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골몰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과는 다른 길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성에서 처박혀 있던 과거와 다르게 아벨루스를 찾아갔고 도서관을 찾아갔고 글자를 익혔다. 이전과 같아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생각을 담아 좀전의 대답을 한 것이다.


노인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로시안은 더더욱 부끄러워지면서도 자세를 꼿꼿하게 세워서 덧붙였다.


“말씀하신 것처럼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내면서는 안 될 것 같았고요. 그래서 일단 글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대로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숙부의 측근일지도 모르지만, 도서관에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주일 동안 나름의 정이 든 것이다. 그렇기에 로시안은 진심을 담아서 말을 전했다.


“그냥······ 그게 전부입니다.”


로시안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도 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으니 더더욱 어쩔 줄 모르겠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슬쩍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


기분탓인가 노인의 눈빛이 오묘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온통 로시안을 향해 쏠려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은······.


놀라움과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곧 노인은 순간적으로 눈빛을 갈무리했다. 노인은 로시안의 말을 곱씹는 듯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달라지고 싶었다······ 라.”

“······.”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온몸이 배배 꼬아지면서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공연히 기본문자가 적힌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정적이 유난히 길게 느껴져 뒤늦게 제 생각을 듣고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노인이 속으로 비웃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노인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죽다 살아나기라도 하셨습니까?”

“······!”

“아니면 곧 죽기라도 하는 겁니까?”


로시안은 숨을 헉 들이켜면서 놀란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그는 두 가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둘 다 맞는 말이었다.


혹시 노인은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워낙 별난 노인에 신기한 구석이 많은 도서관 관리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로시안이 보았던 믿기지 않는 꿈까지도 그는 알고 있는 걸까?


진지하게 생각이 그리로 흘러가려는 찰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농담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도 웃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시안은 왠지 맥 빠진 기분에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거의 동급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게 무슨 뜻인가요?”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죽도록 힘들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확실히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하고도 극단적인 경험이 필요한 법이었다. 로시안의 경우는 그의 말마따나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강제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말로만 달라지겠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바뀌는 사람은 손에 꼽죠. 만일 도서관에서 만난 첫날 공자님께서 제게 오늘과 같은 대답을 들려주셨다면 분명 저는 믿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요.”

“······.”

“그렇지만 지금은 그 말이 와닿는군요. 오히려 차라리 납득까지 되는 기분입니다. 소심하고 유약하고 한심하던 공자가 무려 일주일 동안 도서관을 오가면서, 하등 연도 없어 보이는 글공부에 머리 싸매고 온몸을 비틀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예?”


로시안은 눈을 두어 차례 깜빡였다. 방금 순식간에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대부분이 그의 험담인 것 같은데 자신이 잘못 들은 걸까?


그러나 노인은 로시안의 의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의 말마따나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해결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해했습니다.”

“저기, 방금 저한테 뭐라고 막 말씀하시지······.”

“그래서 아벨루스 공자님과 내기라도 하신 건가요? 그게 글을 배우는 것이었고요.”


소심하게나마 무어라 따져보려던 로시안은 곧장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앞선 모든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아벨루스와 있었던 일을 노인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걸 어떻게······?”

“좀 전에 아벨루스 공자님과 만나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대충 알게 되었죠.”


노인은 분명 조금 전까지 일정이 있었다. 무슨 일정인데 아벨루스를 만나기까지 했다는 건가. 로시안은 슬슬 노인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고 있었다. 원래 도서관 관리인이 이렇게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일까.


“아벨루스 공자님은 이토록 진지하게 공부에 임하고 계시는 줄은 조금도 모르는 눈치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제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으니까요.”

“공자님이 아벨루스 공자님께 말입니까?”


노인은 오늘만 해도 벌써 몇 차례 놀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히 제가 강하게 아벨루스 앞에서 주장을 밀어붙이는 일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네. 제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거든요. 너무 없어서 절망적이던 와중에 그나마 붙들 것이 글밖에 없었습니다.”


로시안은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냥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술술 말해주었다. 어차피 아벨루스와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했으니, 알만큼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흐음. 확실히 그렇군요.”

“······.”


제 쓸모가 이것밖에 없다는 말에 부정하지 않는 노인을 로시안은 저도 모르게 작게 노려보았다. 그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것이 그 어떤 악의를 담아 공격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보다 상처로 다가왔다.


그래도 결국 사실이었기에 로시안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도움이나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로시안은 아직 채 한 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책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일부러 그런 걱정을 한편으로 밀어놓고서는 억지로 책을 붙들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한탄을 내뱉을 때 돌연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로시안은 깜짝 놀라 문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어제처럼 숙부의 보좌를 마주칠까 봐 그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로시안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테르베온 경?’


테르베온이 로시안과 노인을 발견하고서는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마치 도서관에 로시안이 있다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그 점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예?”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도움이나 될지 모르겠다고.”


노인은 다가오는 테르베온에게 눈을 두면서 말했다.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마치 무언가 짐작 가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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