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14>
"이보시오...위대협...이게 어찌 된 일인지 속시원하게 설명 좀 해주겠소?"
당면(當面)하고 있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상념에만 젖어있는 모습을 본 유원학의 심기(心氣)가 매우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모여있던 마교 수장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것이었으므로 모든 시선은 위현룡의 입으로 몰려들었다.
위현룡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적무평과는 달리 자신에 대해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현상수배지를 본 그들이 자신의 설명을 곱게 납득해 주리라는 기대는 아예 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넌지시 권하는 홍후인의 말에 위현룡은 힘을 내서 결백을 밝혀 보이기로 하였다.
"제가 위현룡이고 청성파 출신인 것은 맞지만, 현상수배지에 적혀 있는 것처럼 장문인을 암살한 흉수(兇手)는 아닙니다! 진짜 흉수는 제가 아닌 청성파 대사형인 염청석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주장에 마교수장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각자 뭐라고 중얼거려댔다.
언뜻 보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았지만 종국(終局)에 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으로 귀결(歸結)지어졌다.
이때 백운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여기 소림사 방장과 무당파 장문인의 서명이 들어가 있소이다. 설마 이 분들이 청성파 대사형과 공범(共犯)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으나 위현룡은 물러서지 않았다.
"청성파 대사형 염청석이 어떻게 그 서명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제 추측으로는 소림사 방장과 무당파 장문인께서 염청석에게 속아서 서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허운이 갑자기 끼어 들었다.
"소림사 방장과 무당파 장문인이 자세한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그저 대사형이라는 사람의 말만 믿고 서명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왜냐하면 일개 낭인의 죽음도 아닌 청성파 장문인의 죽음은 무림에서 대사건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허운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위현룡은 어떠한 설명을 한다하더라도 그저 변명거리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더 이상 반박할 내용도 없었고, 모두 자신을 주범으로 확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결백을 주장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마교인들의 눈에서 속았다는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위현룡이 마교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무림에서 암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자가 아닌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심정으로 인해 마교수장들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은 제가 누명을 쓰고 도피중인 것이 맞습니다. 허나...언젠가 제가 직접 진실을 밝혀 보일 것입니다."
위현룡이 다시 한번 결백을 강조하고 나섰다.
허나 이미 그들의 생각은 확신으로 완전히 굳어진 상태였다.
백운과 유원학은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떴다.
원래의 그들이라면 당장 위현룡같은 악적을 잡아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나, 그 동안 위현룡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은 것을 생각해 그냥 물러가는 것뿐이었다.
떠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실망과 허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위대협....정말...결백하신 거죠?"
허혜린은 속으로 '제발'을 외치면서 위현룡에게 호소하듯 물어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위현룡은 문뜩 청성파에서 원연홍의 슬픈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난 늘 여러 사람을 실망시키고 슬프게만 만드는구나...)
잠시 자책하던 위현룡은 힘없이 대답해주었다.
"전 결백합니다!"
그의 대답이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허혜린은 무조건 그를 믿으려고 애썼다.
"전 믿어요...위대협을 믿어요...."
정신없이 소리치던 그녀의 눈에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신형이 힘없이 무너졌다.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곁에 서 있던 사검귀천이 깜짝 놀라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하였다.
"소교주...그 동안 고생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지신 듯 하니 들어가서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검귀천이 소교주를 모셔 주시오."
허운의 눈짓을 받은 사검귀천은 얼른 허혜린을 내실로 옮겼다.
흐릿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위현룡은 미안하고 또 미안하여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허운은 그런 위현룡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위대협을 포기해야 하다니...마교로서는 손실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허나 어쩔 도리가 없겠구나...)
그에게 다가간 허운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당황해하는 위현룡에게 절실하게 호소하였다.
"위대협...저도 위대협을 믿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지금 마교는 약왕문을 기점으로 다시 일어서려고 합니다. 이런 때에 만약 위대협이 같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마교의 명성은 되찾지 못하게 됩니다. 염치없지만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마교를 위해서...소교주를 위해서 처신해주십시오.."
허운은 차마 떠나달라는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의 속뜻을 어찌 짐작할 수 없겠는가.
기운이 빠진 얼굴로 사라지는 허운을 보면서 위현룡은 어떻게 행동해야 이들을 위할 수 있는 길인지 알 것 같았다.
마교 수장들이 거의 다 물러가고 남은 사람이라곤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유천뿐이었다.
잠시동안 두 사람의 사이에는 황량한 바람만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게 네 놈의 정체였나?"
주유천의 냉랭한 음성은 비수가 되어 위현룡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떠나라!"
주유천이 솟구치는 살기(殺氣)를 억지로 잠재우면서 최후의 통첩을 내뱉고 있었다.
"너 같은 천하의 악적이 소교주의 곁에 붙어 선인(善人)인척 살랑거리는 것을 보면 구역질이 다 난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네 녀석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만, 그간 마교를 도와준 일을 생각해서 참는 줄이나 알거라!"
순간 홍후인은 안면 근육을 실룩이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자식이...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딜 함부로 말하는 건가!!!]
위현룡은 굳은 얼굴로 주유천을 정면에서 응시하였다.
떠나는 것은 문제없었다. 어차피 마교에 소속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단대인께서 임종에 이르러 내게 마교와 소교주를 부탁하셨다. 정말 이대로 떠나도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만이 자꾸만 위현룡의 머리 속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뭘 망설이는 것이냐!! 당장 꺼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자신의 호통소리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서 있는 위현룡을 본 주유천은 입가에 진한 살기를 머금었다.
"순순히 못 가겠다 그거냐??"
그의 협박이 시작되자 정작 위현룡보다도 홍후인이 더 격분하였다.
[현룡아! 이런 건방진 놈을 당장 없애버려야...앗!!]
순간 주유천의 검날이 번쩍이더니 위현룡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지척(咫尺)인데다가 아무런 방어를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하마터면 위현룡의 목이 베어져나갔을 만큼 위험천만한 공격이었다.
[아니!! 저 자식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홍후인은 위현룡의 검을 잡으면서 고래고래 소리쳐댔다.
[어서 귀혼심법은 운행하거라!! 저 자식은 내가 직접 손을 봐줘야겠다!!]
마교에서 주유천의 거침없는 성정과 오만불손함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자신이 비록 무림공적으로 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교를 도우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사실 허석문 교주와 단대인의 은혜만 아니었다면 여기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위현룡은 홍후인과 적무평으로부터 마교인들이 거칠다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그렇기에 간혹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아도 참고 넘어가곤 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방치하다가는 자신보다도 오히려 청성파의 위신만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여기는 엄연히 무림(武林)이었고, 무림의 방식대로 당당하게 행동할 때가 왔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위현룡은 검을 들고 공세를 취하고 있는 주유천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약왕문을 떠나고 안 떠나는 것은 내 의지로 행하는 것이오! 주대협의 한마디에 움직이지는 않소이다!"
"떠나지 않으면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난 죽지 않을 것이오."
"정 그렇다면...."
주유천이 신법과 함께 미끄러지듯 일검(一劒)을 휘둘러왔다.
그 속도와 살인적인 초식에는 위현룡을 단칼에 끝장내려는 기운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위현룡은 뒤로 이장이상 물러나면서 크게 호통을 쳤다.
"어떤 사연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단지 그 현상수배지 하나만으로 날 범인이라 확신하는 것인가!!"
"시끄럽다!!"
주유천은 위현룡이 공격범위에서 벗어나려 하자 아예 끝장을 볼 요량으로 빠르게 돌진하면서 일초를 휘둘러갔다.
그때 누군가가 신출귀몰(神出鬼沒)하게 끼어 들더니 주유천의 검공(劍攻)을 대신 막아섰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면서 두개의 검(劒)에서 불똥이 튀었다.
"주군에게 함부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내가 용납 못한다!"
위현룡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지켜보면서 신변(身邊)을 보호하고 있던 녹무군이었다.
주유천은 자신을 방해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일단 뒤로 다섯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는 서릿발같은 음성으로 경고를 하였다.
"함부로 끼어 들면 아무리 약왕문 무사라고 해도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서 썩 물러나거라!"
"주군을 보호하는 것이 내 소임(所任)이오!"
녹무군의 말을 들은 주유천은 기가 찬 듯,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모실 자가 없어서 저런 악인(惡人)을 주군으로 모셨단 말이냐? 잘 들어라! 내 눈앞에서 악인을 비호하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설령 소교주의 모친을 호위했던 자(者)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 역시 내 눈앞에서 주군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려고 하는 자(者)는 용서할 수가 없소. 설령 그 자가 마교 교주라고 해도 말이오!!"
"이 놈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자(者)였다.
굵은 눈썹을 위로 치켜 뜬 주유천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검세(劒勢)를 앞세워 녹무군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이미 방비를 하고 있던 녹무군도 지지 않고 반격에 들어갔다.
주유천과 자신과의 일에 애꿎은 녹무군이 끼어 들게 되었으므로 위현룡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녹대협은 물러나시오!!"
마교와 약왕문과의 관계나 허혜린과 허혜린의 모친을 생각해서라도 이들 두 사람의 싸움은 절대로 일어나서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리고자 했을 때는 싸움이 너무나도 치열하여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주유천과 녹무군은 백중지세(伯仲之勢)의 균형을 이루면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접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대략 백 여 초식이 지나갈 무렵, 녹무군이 우세를 잡고 주유천을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허...녹무군 좀 보게나...주유천의 무학도 대단하거늘...그에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걸?]
홍후인이 마교에서 이름난 신진고수인 주유천을 농락하고 있는 녹무군의 무공에 탄성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골치 아프게 만드는군....)
주유천은 녹무군이 소교주의 모친인 은부인을 호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일부러 전력을 8할대로 낮추고 싸움에 임한 상태였다.
그러나 녹무군의 기세가 워낙 막강하여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날 원망하지 말아라! 네 놈이 자초한 일이니...)
몰아치는 녹무군의 검세를 몇 번 피해가던 주유천이 갑자기 우렁찬 기합과 함께 막강한 무형지기(無形之氣)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엄청난 기도를 체감한 녹무군의 얼굴색이 어둡게 변하였다.
무인(武人)이라면 상대방의 기도만으로도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주유천의 무학은 자신의 무학을 능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산 없는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녹무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으합!!!"
힘찬 기합을 넣은 녹무군도 전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지금이야말로 필살(必殺)을 위한 본격적인 혈투(血鬪)가 시작된 것이었다.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주유천의 검(劒)이 청광(淸光)을 뿌리면서 녹무군을 잡아먹을 듯이 휘감았다.
방금 전과는 판이한 소름끼치는 검세(劒勢)속에서 녹무군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 물고 주유천의 막강한 공격에 버티고 있었다.
[역시...주유천에게는 안 되는 건가...]
마음속으로 녹무군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던 홍후인이 이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이때 위현룡의 옷깃이 파르르 떨리면서 다소(多少) 음산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귀혼심법을 운행하여 귀혼내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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