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41>
천신만고 끝에 백운을 구출하여 대문 밖까지 물러 나온 마교인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아슬아슬했소이다!"
백운이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대협께서 큰 부상을 입으신 것 같습니다."
사검귀천은 위현룡의 허리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허혜린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가 없었더라면 과연 상경각 근처까지 도달이나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사검귀천뿐 아니라 모든 마교인들과 약왕문사람들까지도 위현룡의 부상이 전력 상 가장 큰 손실이라는데 공감하고 있었다.
"주군의 상처가 어떻습니까?"
녹무군의 물음이 들리는 가운데 허혜린은 매우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상처가 꽤 깊은 줄 알았는데 벌써 지혈이 되고 있네요?"
[당연하지. 현룡이의 불가사의한 회복력에 비하면 이 정도 부상쯤이야...]
처음엔 누구보다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던 홍후인이 겨우 냉정함을 되찾고서 이런 한마디를 내뱉고 있었다.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습니다."
위현룡은 부상부위가 붕대로 인해 잘 압박되어있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마교인들과 약왕문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 위대협! 나 때문에 이 무슨 곤경이란 말이오?"
곁에서 걱정스런 얼굴을 하던 백운이 고개를 떨구면서 미안한 기분을 전해왔다.
"백대협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저보다는 여기 많은 분들이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주유천대협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모두 싸늘한 시신으로 화(化)해있을 것입니다."
위현룡이 주유천을 보면서 감사의 포권을 취하자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무뚝뚝한 소리를 냈다.
"서로 한번씩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그것으로 빚은 청산되었소."
그의 냉랭한 반응에 사람들은 그만 머쓱해져서 위현룡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혹 그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허허, 저 녀석은 여전히 오만방자하구만...]
홍후인도 왠지 심사가 뒤틀려 냉소를 한번 쳤다.
하지만 주유천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위현룡은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녹대협! 여기서 상경각까지는 그리 멀지 않지요?"
"네! 일각정도를 달리면 상경각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저...저기 위를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하늘을 향하였다.
"저...저럴 수가!!!"
군중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인영(人影)이 담을 넘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약왕문을 이루고 있는 담은 굉장히 높기 때문에 어떤 고수라 할지라도 뛰어넘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마교 고수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왔다면, 그것은 필시 무학이 입신(入神)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교인들은 지면(地面)에 가볍게 착지를 하자마자 여유롭게 등뒤에서 두 자루의 도끼를 뽑아들고 태산(泰山)처럼 우뚝 서 있는 자를 보면서 복잡한 심정이 교차되었다.
방금 막 전투를 벌였던 대막천궁 무사들의 수장이었던 것이다.
"아직 제대로 싸움도 못했는데 당신들이 모두 줄행랑을 쳐버리니 말이오..."
대막천궁 수장은 눈앞에 마교 고수들이 즐비한데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호전적인 눈초리로 싸움을 도전해오고 있었다.
[저 놈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생각은 비단 홍후인만 한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의 정체를 되짚어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신의 위명(偉名)을 알려줄 수 있겠소?"
백운이 참다못해 먼저 물어보았다.
"무천동(武天董)."
짧은 이름석자가 흘러나왔다.
"무천동..."
군중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고수들을 총 동원하여 그들 중 혹 무천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허나 몇 번을 생각해봐도 무천동이라는 이름은 생소했으며, 더군다나 도끼를 무기로 쓰는 고수는 그들 머리 속에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하지만 단 한사람.
백운의 얼굴빛만큼은 기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무천동이라면...혹 청월귀부(淸月鬼 )라 불린다는..."
백운의 떨린 음성에 상대는 설마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운은 충격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백운대협! 저 자를 알고 있습니까?"
사검귀천 중 한 명의 물음에 백운은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은....적월교 고수인 청월귀부 무천동이오."
"저런 자가 적월교 출신이란 말입니까? 어째서..."
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한 것은 나름 그 이유가 있었다.
새외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무학이 높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대막천궁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그에 반해서 적월교는 대막천궁을 중심으로 새외를 움직이는 지도자적인 역할이기에, 지모(智謀)가 출중한 자라면 모를까 무학이 깊은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적월교 출신이라면 이는 적월교 내부에 어떤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저 사람의 무학이 적월교 내에서 어느 정도입니까?"
사검귀천의 연이은 물음에 백운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마 적월교에서 저 사람의 무학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오. 또한 적월교 뿐 아니라 새외에서도 최고일 것이오."
"그...그 정도란 말입니까?"
"아니...어쩌면 단순히 최고라는 명칭을 갖다 붙이는 것으로는 모자랄 지도 모르겠소. 예전에 저 사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으니..."
무림을 은퇴한 후, 백운은 남은 여생을 새외에서 마감하기로 결심하고는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적월교 수뇌부에 있다가 자신처럼 은퇴한 새외인과 작은 인연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현재 적월교에 천하를 진동시킬 뛰어난 숨은 고수가 있다는 것이다.
새외인은 그 고수의 별칭과 이름을 언급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덧붙였다.
-훗날 무천동대협은 새외 최고고수인 적무평과 평수를 이룰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오.-
"그때 난 대수롭지 않게 그냥 웃어넘겼소이다. 솔직히 허무맹랑하지 않소? 적무평 대협과 평수를 이룬다니..."
중원과 새외를 떠나서, 한 문파에 인재가 출현하면 으레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재' 또는 '문파 역사상 최고의 무학을 익힌 기재.' 라는 말로 과장을 하게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무림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백운 역시 적월교 수뇌의 말을 듣고 그저 허황된 호언장담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치부(置簿)해버렸다.
허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무천동의 기개를 직접 견식하고 있는 백운은 믿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악몽이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고있었다.
"백운대협은 그 말을 믿으십니까?"
듣고있던 마교 수장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단지 출중한 경신법 하나만을 가지고 감히 적무평 대협과 동급이라 운운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무천동은 마교 수장들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묵묵부답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은 마치 산보를 나왔다가 모여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뒤에서 한가롭게 귀동냥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저 자의 무학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적무평과 비교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과장된 게야! 하여간 새외인들이란...]
홍후인은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대뜸 새외인들의 허풍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선배님! 저 자의 행동이 뭔가 수상쩍지 않으십니까?"
무천동을 예의주시 하던 위현룡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홍후인이 예리한 눈빛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구나. 싸움을 목적으로 온 녀석치고는 지나치게 여유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공격을 하지 않으면 그도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행동을 보이고 있지 않느냐...]
그때 허혜린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적들이 불을 끄고 있어요!!"
그녀의 외침에 군중들은 둔기로 한대 얻어맞은 듯한 강한 충격을 맞이했다.
"아차!"
그랬다.
무천동은 자신이 마교수장들과 접전할 동안 수하들에게는 물을 길어와 불을 끄라는 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수적우세에 있는 그들인지라, 대문에 일고 있는 불길만 잡으면 삽시간에 마교인들을 척살 할 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홍후인은 무천동이 품은 계략을 알게되자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였다.
[뭐...뭐야!! 불을 끌 때까지 이 많은 마교고수들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는 겐가!!]
순간 사안이 급박함을 재빨리 깨달은 주유천이 비조처럼 무천동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무천동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더니만...이제야 싸울 생각이 좀 든 건가?"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적당하겠지!"
주유천은 자신의 절기를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무천동을 공격하였다.
상대가 어떤 자라는 것을 알게 된 만큼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모든 힘을 다 이끌어내 싸우는 것이었다.
"빠른 검법이군! 현란한 쾌검(快劒)이 특기인가 보오."
무천동이 찬사를 보내면서 쌍도끼를 앞세워 그의 검광을 막아냈다.
그리고 대략 십 여초식을 주유천에게 헌납하는 듯하더니 기합과 함께 맹렬한 기세로 주유천의 검을 도끼로 쳐냈다.
-챙.
청량한 금속성소리와 함께 주유천은 하마터면 검을 손에서 놓칠 뻔하였다.
(엄청난 괴력이다!!)
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강한 충격 때문에 마비증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검사(劍士)와 싸우다보면 너무 시시해서 말이오. 도(刀)는 그나마 힘이라도 있던데..."
무천동이 씨익 웃으면서 조롱을 해왔다.
"흥! 웃기지 마라! 내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너 따위에게 밀리겠느냐! 잔소리 말고 이번 공격이나 받아보거라!!"
주유천의 신형이 공중으로 도약하나 싶더니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그의 움직임이 허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무천동은 도끼를 휘둘러 얼른 방비를 하였다.
그러자 주유천은 허리를 노리려던 검날을 세우더니 위로 뻗으면서 번개처럼 무천동의 어깻죽지를 베어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천동의 제복이 날카로운 검에 길게 찢겨나갔다.
"음..."
상대를 경시하다가 오히려 낭패를 본 무천동은 입술을 들썩거렸다.
"소문으로 마교에서 주유천대협의 명성이 드높다고 들었는데 직접 싸워보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오."
이 말을 끝으로 이번엔 무천동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전개되었다.
두개의 섬광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변화하면서 주유천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버렸다.
(이렇게 살벌한 공격은 처음이다!)
주유천은 그의 묵직하면서도 숨돌릴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공격을 검으로 간신히 막아내면서 몇 번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였다..
"기력이 다 한 모양인데도 끝까지 버티는 것을 보니 훌륭하군."
이런 말을 하던 무천동은 단숨에 끝을 보려고 공세를 더욱 바짝 조였다.
주유천이 패색을 보이면서 밀리기만 하자 마교수장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문에 기름을 더 뿌리고는 있지만 저쪽에서 소화를 위해 뿌리는 물의 양도 만만치 않아 조만간 불이 진압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는 큰일나겠어요! 모두 협공을 해서라도 저 사람을 꺾어야해요!"
허혜린의 급한 음성에 녹무군이 검을 들고 뛰쳐나갔다.
"제가 돕겠습니다!"
주유천을 몰아붙이던 무천동은 녹무군이 싸움에 끼어 들자 피식거렸다.
"마교가 언제부터 정정당당한 싸움대신 떼거리로 달려드는 방식을 즐겼단 말이오."
그러나 녹무군은 격장지계(激奬之計)에 넘어가지 않고 그의 공격로를 차단하면서 신속히 주유천의 행동반경을 늘려놓았다.
"하하하, 멋진 개입이구료!"
짧은 감탄을 한번 터트린 무천동은 쌍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면서 주유천과 녹무군을 동시에 공략하였다.
세 사람이 섞여 극심한 혼전을 벌이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붉은 살기가 눈꽃처럼 휘날렸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군. 나도 협공에 가담하겠소."
"저희들도 갑니다!"
백운과 사검귀천이 서둘러 뛰쳐나가더니 힘을 합쳐 무천동에게 무차별적인 검공을 퍼부어 댔다.
그러자 효과가 있었는지 날뛰던 무천동이 즉각 잠잠해지면서 그대로 열세로 돌아섰다.
허나 그 뿐이었다.
마치 곰 한 마리를 사냥하는 사냥개들처럼 돌아가면서 갖은 공격을 해봤지만 무천동은 끄떡도 하지 않고 날이 넓은 두 개의 도끼를 방패삼아 효과적인 방어망을 펼치고 있었다.
척 보아하니 시간을 벌기 위해 철저히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는 듯 싶었다.
[저..저런...무...무서운 놈!!!]
무천동의 무학을 폄하(貶下)했던 홍후인이 싸움을 관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공포의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위현룡은 경직된 얼굴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허혜린이 급히 제지를 하였다.
"위대협은 부상중이니 그냥 계세요! 제가 갈게요!"
허혜린은 단번에 몸을 날려 무천동을 공격하고 있는 마교수장들과 합세하였다.
하지만 무천동은 주유천, 녹무군, 백운, 사검귀천, 그리고 허혜린의 물샐 틈 없는 협공에도 전혀 굴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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