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화룡점정(畵龍點睛) <07>
그제야 하후산은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이길 승산이 없는 상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대천마교에서 하후산의 무공은 자자한 편이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지 못하지만 열 손가락 안에는 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근래에 무학에 더욱 정진하여 높은 진전을 이룬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번 싸움에서 하후산은 아예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하후산이 밀리는 것이 뚜렷하자 관망하고 있던 그의 수하들이 못 참고 협공을 가해왔다.
그들도 위현룡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사방팔방으로 검이 찔러 들어왔다.
그 속에서 위현룡은 무수한 검상을 입었다.
아무리 무공이 월등해도 단신으로 고수들의 협공을 당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뒷걸음치지 않고 더욱 과감하게 전진하면서 무조건 하후산만 노렸다.
[어쩔 수 없다. 적의 수장을 제압하면 적들이 제풀에 물러날 수도 있으니 그것에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홍후인도 위현룡의 작전에 찬동을 하였다. 내력이 고갈되는 마당에 물불을 가리겠는가.
적들의 협공은 더욱 거세졌고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하후산은 협공을 가함에도 불구하고 위현룡의 전력이 점차 증가하자 놀라움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위현룡은 숲에 풀어놓은 한 마리의 사자와 같았고, 그 주위를 적들이 빙 둘러싼 채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는 형국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싸우는 내내 이런 의문이 하후산을 괴롭혔다.
이때 홍후인은 위현룡의 두 눈동자가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주시하게 되었다.
또한 그 색채가 진해질수록 귀혼심법을 기초로 한 무형지기가 점차 증가하는 것도 느꼈다.
그 때문에 홍후인은 깊게 관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한가닥 의혹을 드러냈다.
[이상하군...지금까지 현룡이가 휘두른 귀혼검법이 저토록 막강한 적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정체불명의 작자와 대적했을 때만 해도 저런 위력은 나오지 않았는데 어디서 갑자기 저런 위력이 나왔단 말인가...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군. 특히 저 붉게 물들어 가는 눈동자는 무슨 의미란 말인가...]
흔히 입신에 도달한 고수들이 말하길, 상승무공의 12성의 경지에 들어서면 마음이 호수와 같이 맑고 깊어지며 모든 무학의 원천을 단순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
허나 지금 위현룡의 마음은 맑고 깊은 호수가 아닌 혼탁한 흙탕물에 불과했고, 두 눈에는 섬뜩한 살기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더욱 희한한 것은 귀혼검법이 오히려 이런 상태에서 더욱 위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귀혼환령검을 극성까지 익히려면 기본 심성이 잔악해야 하는 것인가?]
현재 위현룡이 발휘하는 집중력이란 거의 무의식에 가까웠다.
허나 그의 움직임은 마치 냉철한 의식 속에서 끌어낸 것처럼 완벽했고 철두철미했다.
사실 지금껏 위현룡이 내질러왔던 귀혼검초는 그 위력이 막강했으나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이번은 뭐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야말로 귀혼검법과 일체가 된 듯 능수 능란하게 검초들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후산과 그의 수하들은 광분하여 덤벼드는 위현룡과 대적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껴보았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도 이런 기분을 느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싸움에 있어서 사기를 잃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질 수도 있겠다...)
불길한 예감이 하후산의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때 위현룡이 번개같은 몸놀림을 보이면서 검을 넓게 휘둘렀다.
그의 보법이 앞으로 다섯 보 그리고 좌측으로 세 보를 움직이는 순간 협공하던 하후산의 수하 네 명이 차례로 검상(劒傷)과 함께 퉁겨져 나갔다.
하후산은 자신의 앞쪽에서 싸우고 있던 이들이 일거에 사라지자 크게 당황했다.
협공이라는 것은 전방에 있는 이들이 공격을 할 때 자신은 공격하는 이들을 방어해주면서 기습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눈앞이 허허벌판이 되었으므로 하후산은 취하려던 모든 움직임을 내버려야만 했다.
상대가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다른 움직임으로 변환시킨다는 것은 찰나에 많은 약점을 노출시키는 법이 아닌가.
특히 상대가 고수일 경우에는 더더욱 요행을 바라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위현룡은 예리한 검초를 앞세워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이른바 궁신탄영(弓身彈影)(활처럼 몸을 휘게 하여 그 탄력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의 공격이었는데 그 시기가 너무나 적절하여 하후산은 평소답지 않게 허둥거리고 말았다.
서슬 퍼런 위현룡의 검이 하후산의 목으로 곧장 날아갔다.
그 속도와 위력이란, 과연 인간의 능력인가 싶을 정도로 빨랐고 매서웠다.
"으헉!"
이미 늦었음을 간파한 하후산은 사색이 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
[끝장을 보거라!!]
홍후인의 이런 외침을 마지막으로 주위는 팽팽한 살기를 머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마치 얼어버린 생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위현룡이 내지른 검은 부르르 떨면서 하후산의 목젖에 멈춰져 있었다.
하지만 하후산의 검도 위현룡의 심장에서 일촌(3.03cm)정도에 떨어진 거리에 중단된 상태였다.
즉 하후산의 반격도 재빨랐지만 아쉽게도 위현룡이 좀 더 빨랐던 것이다.
그의 수하들은 수장이 잡히게 되자 감히 공격도 못한 채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검은 하후산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있었고, 조금만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단칼에 모가지가 잘릴 판국이었다.
승패가 갈리자 하후산은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위현룡의 처분을 담담히 기다렸다.
위현룡의 검(劍)은 어서 주인이 하사할 피를 맛보기 위해 요동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참으로 집요하게도 공격해 들어갔구나. 그 놈을 죽일 것이냐?]
홍후인은 위현룡이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싹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서 슬쩍 물어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하후산을 잠시 쳐다보던 위현룡은 뜻밖에도 검을 거두었다.
"단대인을 존경하는 사람이고 단대인을 구할 노력을 하였기에 봐주는 것이오."
하후산의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였다.
위현룡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고 있던 홍후인이야 이미 예상한 일이겠지만, 하후산이나 그의 수하들은 관대한 처분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모두 물러가시오!"
위현룡은 무뚝뚝하게 차가운 명을 내려놓고, 시신이 된 단중을 등에 들쳐업었다.
그 역시 잔부상으로 몸 곳곳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려하고 있었다.
"저기...잠깐만 기다려주시오!"
하후산이 사라지려하는 위현룡을 붙잡아 세웠다.
"다시 겨뤄볼 생각이시오?"
위현룡의 물음에 그는 강하게 부인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단대인을 모시고는 협철곡을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단대인을 내게 맡겨주시오. 내가 맹세코 단대인을 정성스럽게 모시겠소."
하후산의 말을 들은 홍후인은 옳다구나 싶어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의 말이 맞다. 단중과 함께 간다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뒤따른다. 그의 말대로 단중을 맡기고 우리끼리 가도록 하자.]
그러나.
"거절하겠소."
위현룡은 그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버리고는 다시 자기 갈 길을 가려했다.
그러자 참다못한 하후산이 앞길을 막고는 다시 설득 조로 말했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오. 만약 단대인을 모시고 가다가 불행하게도 당신이 죽어버린다면 단대인의 시신은 이 깊은 협철곡에서 산짐승들에게 뜯기는 봉변을 당하실 것이오. 솔직히 당신이 단대인을 안전하게 모시고 나간다는 것을 어찌 장담한단 말이오?"
위현룡의 안색이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분명 하후산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대천마교에 마교 교주이신 허교주의 유골이 모셔져있소이다. 단대인은 한평생을 허석문교주와 함께 하신 분이기에 죽어서도 허석문교주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실 것이오. 그러니 나를 믿고 내게 단대인을 내어주시오."
하후산의 마지막 말은 위현룡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다.
심사숙고한 위현룡은 그리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하후산 앞에서 단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때 위현룡은 단중의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쳐주느라 몸을 깊이 숙이고 있었다. 헌데 이것은 하후산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기회였다.
약간의 움직임으로 재빨리 검을 휘두른다면 위현룡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후산의 수하들은 천우신조로 그를 없앨 기회가 생기자 은밀히 검병에 손을 댄 채 하후산의 명령소리만을 목 빠져라 기다렸다.
눈앞에서 태연하게 허점을 보이고 있는 위현룡을 보면서 하후산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현룡아...준비하고 있거라...저 놈들이 끝낸 암습을 가하려 하고 있구나.]
홍후인이 적들의 움직임을 미리 알려주고 있었다.
허나 그는 위현룡이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스런 표정만 지을 뿐 뭐라 나무라지는 않았다.
위현룡으로써는 하후산이 과연 단중을 제대로 모실 수 있는 인물인지 나름대로 시험해보고 싶었다.
만약 하후산이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압습을 해온다면 소인배로 간주하여 당장에 처결을 할 것이고, 그 반대라면 한결 마음 편하게 단중을 건네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후산의 수하들은 암암리에 한발자국 앞으로 움직이면서 위현룡의 사혈을 노렸다.
홍후인은 더욱 걱정스러워서 다시 언질을 주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제 몸을 일으키거라. 저 놈들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기습을 받으면 대응도 못해보고 죽고 만다.]
허나 위현룡은 못들은 척 그저 자기 할 일만 했다.
수하들이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내딛었다.
그들은 어째서 하후산이 명을 안 내리는지 안달하면서, 명이 없더라도 행동을 개시할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때 별안간 하후산의 진노한 호통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 뒤로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움찔한 그들은 얼른 검에서 손을 떼고 뒤로 일장이상 물러났다.
영리한 하후산은 이미 위현룡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의 무공으로 암습을 가한다면 뜻한 바는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허나 하후산은 평생을 무인(武人)의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치졸한 짓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행하고 싶지 않았다.
"단대인은 걱정 마시고 어서 가보시오."
위현룡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고맙습니다. 그럼 단대인을 모시러 갈 때까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후산의 언행에서 믿음을 얻은 위현룡은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는 단중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 하후산이 갑자기 물어왔다.
"잠시만...혹시...대협의 이름이 위현룡이 아니시오? 개방에서 흑사린과 일전을 벌였던 위장로가 아닌지..."
"맞습니다."
"아...역시...내 예상이 맞았군요."
하후산은 설마 하여 물어본 것인데 위현룡이 순순히 인정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협철곡에서 일어났던 모든 기습공격을 감행한 사람이 위현룡임을 확신하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인지라 지금껏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의 무학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저 놈이 끝낸 네 정체를 파악해냈구나... 앞으로 골치 아프겠군. 저 놈을 살려둔 건 큰 화근이 되고 말 것이다.]
홍후인은 무림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그때 뒤통수로 하후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협! 그쪽 길로 가다가 물길이 나올 때 서쪽 길을 타고 다시 북쪽으로 나가시면 협철곡을 빠져나갈 수 있는 협소한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쪽은 대천마교 무사들이 매복하고 있지 않으니 그리로 나가십시오."
하후산의 말에 위현룡과 홍후인은 동시에 놀랐다.
[저 놈이 웬일로 살길을 도모해주는 것이지? 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고맙습니다."
위현룡은 몸을 돌려 정중히 포권을 취하고는 곧장 그가 알려준 길목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설마! 저 놈 말을 믿는 것이냐?]
"그는 단대인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무슨 의심을 하겠습니까."
위현룡은 왠지 마음이 뭉클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원...단중이 뭘 그리 대단한 인물이 된다고...]
홍후인은 심사가 뒤틀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하후산은 저 멀리 가물 가물거리는 위현룡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위현룡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괜찮은 친구인데...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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