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07>
약왕문은 새외(塞外)에서 전혀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는 문파였다.
그렇기에 신비스러운 소문만 과장되게 나돌 뿐, 정작 약왕문의 지리적인 위치나 내력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고, 단지 어느 이름 모를 협곡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만 어렴풋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교인들은 지리에 어느 정도 익숙한 듯, 별 어려움 없이 약왕문까지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 끝까지 우뚝 솟아있는 기이한 암벽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허운이 입을 열었다.
"다 왔습니다."
백운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약왕문이란 말이오? 주위에 아무 것도 없소이다."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인 허운은 측면으로 나있는 거친 샛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돌을 하나 주워들고는 벽에다 다섯 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반대편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허운은 다시 강약(强弱)을 넣어서 세 번을 연달아 쳤다.
순간 암벽한쪽에 세워져있던 큰 바위가 유연하게 열리더니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를 모시고 오셨습니까?"
"그렇소."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들이 비켜서자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목이 보였다.
"소교주! 어서 드십시오."
허운이 뒤로 물러나면서 권하자 허혜린은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 뒤로 마교인들이 따랐다.
[이러니 내가 찾을 수가 없었지... 설마 이런 암벽 속으로 길이 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홍후인은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동안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자 갑자기 탁 트인 자연경관이 나타났다.
둘러보니 사방이 높게 솟아오른 기암절벽이요, 병풍처럼 빽빽이 들어서 있는 거목(巨木)들이었다.
백운과 유원학은 서로 감탄사를 주고받았다.
"과연 천하의 요새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숲을 따라서 한동안 걸어 들어갔다.
저 멀리 높게 솟은 탑들과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개의 좁은 관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본문(本門) 앞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셔야 합니다. 문주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려놓으셔서 그렇습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낯익은 수장(首長)이 정중하게 알려왔다.
허혜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게...저..."
그녀의 질문에 수장은 말끝을 흐리면서 입을 열기를 망설였다.
그 모습에 허혜린은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하세요!!!"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언성을 살짝 높였다.
그러나 수장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 이놈!! 소교주께 이게 무슨 무례한 짓거리란 말이냐!!"
참다못한 사검귀천 중 한 명이 검을 뽑아 들면서 호통을 치자 수장의 안색이 싹 변했다.
사검귀천은 허혜린을 호위하면서 늘 약왕문에 드나들었던지라 약왕문에서 그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또한 사검귀천이 소교주를 위해서면 불나방이 되어 불길로 뛰어드는 앞뒤 안 가리는 무지막지한 자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난 수장은 사검귀천이 뽑아든 서슬 퍼런 검날을 슬쩍 곁눈질하였다.
그리고 어차피 허혜린이 약왕문 출신인지라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한 수장은 더듬거리면서 상황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부문주께서 약왕문을 배반한 자를 처단하시고 계십니다."
"배반한 자?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죠?"
"네....그게...녹무군입니다."
"녹무군(鹿武君)!!!!!"
허혜린은 뜻밖의 사태에 화들짝 놀랐다.
"어서 길을 비켜서요!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녀가 허겁지겁 안으로 진입하려하자 수장과 그의 수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수장은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애원조로 만류했다.
"제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는 부문주님께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을 받..."
순간 허운이 눈짓을 보냈고, 수장의 건방짐에 분노를 터트리고 있던 사검귀천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연달아 백운과 유원학이 마교무사들과 함께 본문을 들이쳤다.
육중한 정문이 박살나듯 열렸다.
허혜린을 필두로 마교인들은 거침없이 안으로 내달렸다.
얼마안가서 그들은 넓은 광장에 운집(雲集)해 있는 약왕문 사람들과 맞닥트렸다.
약왕문 사람들은 난데없는 괴한들의 출현에 기겁을 하였다.
"웬놈들이냐!!!"
누군가의 호통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허혜린은 황급히 녹무군의 행방부터 찾았다.
때마침 검으로 한사람의 목을 후려치려던 자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행동을 멈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 양손이 묶인 채 바닥에 꿇려있는 한 사람도 같이 보였다.
"녹무군!!"
"아가씨!!"
대략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부자연스러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모진 고문이라도 받았는지 온 몸에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는 지친 몸뚱이와는 달리 어떤 강인한 정신이 깃들여 있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허혜린을 진정시켜주었다.
이내 냉정을 되찾은 그녀는 앞에 보이는 한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부문주님! 그간 무고 하셨는지요?"
인사를 올리는 그녀를 냉랭한 표정으로 대한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돌아왔으면 처소로 물러가 있거라!."
-은무적(殷武迪).
이 사람은 약왕문 문주인 은사풍(殷嗣風)의 장자(長子)로서, 부문주를 맡고 있었고, 허혜린의 외숙부였다. 즉 허혜린의 모친인 은자연((殷姿蓮)의 오라버니가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무적과 은자연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복남매지간이었다.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간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약왕문 부문주 은무적은 사람됨됨이가 편협(偏狹)한데다가 성정도 거칠어서 은자연을 첩의 딸이라고 대놓고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은자연의 딸인 허혜린도 같은 종자라 여겨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릴 적부터 그가 어머니에게 차갑게 대하고 모욕을 주는 모습을 종종 보고자란 허혜린은 외숙부를 절대로 외숙부라 칭하지 않고 부문주라고만 불렀다.
그녀의 마음속에 절대로 한가족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식이 각인 되었기 때문이었다.
허혜린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은무적을 도전적으로 쳐다보았다.
"녹무군을 죽여서는 안돼요. 그는 평생을 어머님 곁에서 충복으로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 놈은 약왕문을 배신한 놈이다."
"무슨 배신을 했다는 거지요?"
그녀의 건방진 태도에 은무적의 주름진 얼굴이 심하게 찡그려졌다.
그러자 은무적의 곁에 시립(侍立)해 있던 한 서생이 앞으로 나섰다.
이 서생의 이름은 노독천(盧獨天)이라 하며 은무적의 책사로 있는 사람이었다.
"약 반년 전 약왕문이 수 백년동안 힘들게 모아온 약초들로 다섯 알의 환약을 조제한 사실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약들이 조제되자마자 한달 만에 도난 당한 일도 알고 계시지요? 그 동안 저희들은 내부에 범인이 있다는 가정 하에 은밀하게 내사를 벌여왔습니다. 그 결과, 수일 전에 녹무군이 범인임을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노독천의 설명에 허혜린은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는 약왕문을 위해서 일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흥! 약왕문이 아니라 네 어미 은자연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했겠지!"
은무적의 빈정대는 소리에 허혜린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분명히 녹무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누명이에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누명을 운운하자 은무적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보아하니 녹무군에게 누명을 씌운 장본인이 자신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따귀라도 몇 대 쳐서 고얀 버릇을 가르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딱 네 어미를 빼 닮았구나. 앞뒤를 못 가리고 날뛰는 꼴이 말이다. 하긴 그러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허석문같은 작자와 혼인을 했겠지."
순간 허혜린을 비롯하여 뒤에 포진하고 있는 마교인들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특히 사검귀천은 눈동자에 핏발을 세우고 은무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주위에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은무적의 책사 노독천이 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가씨, 여기 사라진 다섯 알의 환약 중 한 알이 녹무군에게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녹무군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노독천이 작은 옥병을 하나 꺼내 들고 있었다.
이에 허혜린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녹무군에게 물었다.
"녹무군! 그대가 정말 환약을 훔친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녹무군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그러나 허혜린의 계속되는 다그침에 목쉰 소리로 실토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제가...훔쳤습니다."
녹무군은 충직하고 권모술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순순히 죄를 시인하는 그의 모습에서 허혜린은 큰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어째서...왜 그랬어요!!! 녹무군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던 녹무군은 다 죽어가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부인께서 제게 내린 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언이라구요?"
허혜린은 뜻밖의 사실에 할말을 잃었다.
이에 은무적이 그것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 충분하느냐? 이 놈과 네 어미가 짜고 약왕문의 귀중한 약을 빼돌렸단 말이다!!"
"잠깐만요!! 뭔가 이상해요!! 어머니가 녹무군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유언하셨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세요? 비록 그 환약들이 귀중한 약재들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제게 그것들이 특별하게 약효가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런 약효를 내는 환약은 약왕문에도 많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세요. 만약 녹무군이 정말로 물욕(物慾)이 있었다면 더 값비싼 귀한 환약들과 제조비법들을 빼돌리지 겨우 다섯 알에 불과한 환약들을 훔치면서 어머니의 유언을 언급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녹무군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허혜린은 분명 배후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약왕문에서 어머니 편은 유일하게 녹무군과 자신뿐이었고, 평소 외숙부인 은무적은 은자연을 보호하고 두둔하는 녹무군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터였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신마저 마교로 들어간 상황에서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녹무군을 온전히 놔둘 리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허혜린이 끝까지 그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버티자 은무적은 기가 막혔다.
약왕문 식구들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 그녀의 고집 때문에 부문주로서의 체면마저 크게 손상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은무적은 냉소적으로 비웃으면서 한마디하였다.
"네 말대로 그 환약들의 약효는 그저 그렇다. 허나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 환약들이 만약 만년하수오와 혼합된다면 약왕문 비전(秘傳)으로만 내려져 온 신력단(神力丹)을 조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순간 허혜린의 뇌리에 무엇인가가 강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교에서 천신만고 끝에 수중에 넣었다던 만년하수오.
아버지인 허석문이 자신에게 반쪽의 환약을 건네주면서 만년하수오로 조제한 것이니 소중히 간수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녹무군은 어머니의 충복이었고, 만약 그 환약들이 신력단의 조제비법과 함께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건네졌다면...)
이때 홍후인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랬었군...만년하수오 단독으로는 절대 내공증진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허나 약왕문에서 조제한 약과 혼합했다면 가능한 일이지. 약왕문은 수 백년동안 만년하수오를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정작 만년하수오는 마교에서 찾아냈다. 한쪽은 만년하수오를, 한쪽은 만년하수오를 위한 환약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서로 협력하지 않는 한 둘 다 무용지물에 불과하지. 그런데 저 녹무군이란 녀석이 마교측으로 환약을 빼돌렸고...덕분에 마교는 성공적으로 신력단이라는 것을 조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그 반쪽을 현룡이 네가 복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
그의 말을 들은 위현룡은 단단히 묶인 채 바닥에 꿇려있는 녹무군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만년하수오로 만든 영약의 반쪽을 복용한 이상 자신도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편 퀴즈 정답----------
마교 교주 허석문은 위현룡을 가리켜 '곁에 두고 싶은 사람', 그리고 천승비에게는 '마교를 위해 쓸 재목' 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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