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4화-시공(時空)(13)(642화)
"기본적으로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네.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나? 사람은 누군가를 가르칠 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군요."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의 생각은 다 비슷한 법이지. '세계가 다르더라도.' 사람은 저 높은 곳의 왕부터, 밑바닥을 기는 노예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지. 내가 가르친 다는 것은 그 재능을 개화 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요령을 내가 배운다는 것인고로 내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는 내가 배워나간다는 말과 썩 다르지 않다네."
벤하르트는 가슴이 싸하게 시렸다. 자신이 터무니 없는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네가 누구에게나 검을 만들어 주지 않듯. 나 또한 누구에게나 가르쳐 주거나 하지는 않아. 내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행위는 자네가 아무에게나 검을 주는 것 못지 않게 위험한 행위지."
벤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누가봐도 카실러스는 자신보다 떨어지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조언 하나로 벤하르트의 막힌 경지를 뚫을 정도의 간파를 해내는 사람이다. 그의 가르침에는 천금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하지."
"네?"
"누구에게나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은 돌려 말하면 나는 가르칠 사람을 가린다는 뜻이지. 일전에 케이슨은 어째서 자네에게는 말을 놓고 자신에게는 상투적이게 대하느냐고 물었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딱히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답했네. 자네의 지금 질문과 더불어 케이슨의 그 질문은 상당히 의미있는 질문이야. 어째서 나는 에르니아, 자네에 대한 경계를 풀었을까? 왜 나는 무언가를 가르쳐 줄 정도로 자네에 대해 호감을 느꼈을까? 하고 말야."
그 말을 듣고 벤하르트가 말했다.
"호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호감이라는 건 단순한 계산이 아니니 호감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은 없지. 하지만 일전에도 말했듯 나는 '보는 자' 타인을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하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야 했던 겁니까?"
카실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자네의 성격이 그리 싫지는 않아.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성격은 논외로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하필이면 케이슨과 제로가 위험에 빠진 상황에 금기의 영역에 나타나 구해주었다. 잘 짜여진 각본 같은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되려 이 상황은 에르니아 자네를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거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의심하는 것 이상으로 자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
카실러스가 아닌 본인조차도 의심을 살만한 상태였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럴진대 저 카실러스가 의심을 뒤로 할 정도로 무감각 했다는 이야기는 벤하르트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게 첫번째 문제다. 의심이야 사람을 대면하면 곧 풀리기 마련. 하지만 평소의 나였다면 의심을 벗겨낸 뒤에도 정상적이라면 자네를 가르치지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자네는 너무 강했으니까."
강하기에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구태어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다. 이미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강하기에 더더욱 무언가를 전수해 줄 필요성은 적어진다.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호감을 떠나 가르치는 것을 억제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에르니아 자네같은 인물은 싫지 않지만, 자네의 강함과 여러 정황을 고려 했을 때 내가 자네를 가르칠 정도의 호감을 가질 정도의 상황인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벤하르트는 카실러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행동 패턴이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비단 카실러스가 아니어도 특정한 상황 속 특정한 인물을 가정하거나 본다면, 벤하르트 자신의 그 인물에 대한 첫인상이 어떨지는 막연하게나마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타인이든 스스로든 파악하는 능력이 극한에 이르른 객관적인 카실러스가 하는 말이다. 얼핏 들어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속이 빈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벤하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교정을 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래. 선택한 거다. 나는 자네와의 만남에서 본래 내가 행할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그 상황에 의심을 하는 게 나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가르치고 자네에게 필요한 부분을 교정해 주어서 나는 자네와 친해지고 싶었고. 그 양갈래의 선택에서 나는 의심하기보다 호의를 베풀기를 선택한 거다. 그리고 어째서 내가 자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 보았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내 스스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게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 답은 자네가 가지고 있겠지."
벤하르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카실러스는 눈썹을 까딱이고 말했다.
"자네를 의심하고 있는 게 아냐. 자네가 그렇게 요령 좋게 행동할 리도 없겠지만, 이건 그런 외도와는 다른 영역의 문제야. 본능? 아니 이 경우는 운명의 영역 같은 느낌인가?"
'운명?'
카실러스는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자네는 처음부터 이렇게 타인에게 호의를 받는 사람이었나?"
순간 벤하르트는 몸이 굳었다. 그는 카실러스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의 검은 편린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질문이 이상했나? 그럼.."
"아니.. 질문 자체는 이해했습니다."
벤하르트는 질문을 고치려는 카실러스를 만류하고 그 질문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백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살아왔다. 물론 그 긴 시간 호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극히 일반적으로 사람이 남에게 가지는 관심을 벤하르트라고 받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모든 호의는 벤하르트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것이 기본이며 정상. 거절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담을 쌓은 사람에게 끊임 없는 호의를 가지거나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레니아와 만나고 난 뒤의 벤하르트에게 사람들이 보여주는 호의는 과연 '기본'이며 '정상'이었을까? 벤하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실러스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벤하르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뒤돌아 보았다. 사람은 자신에게는 언제나 무르다. 레니아와 여행하던 그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레니아와의 여행으로 자신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자기 위로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벤하르트는 레니아와 여행하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 마치 이전의 자신처럼 기본적으로는 타인과의 연을 맺으려 노력하지 않았고,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벤하르트는 바로 얼마 전 만났던 이니프를 떠올렸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거절했음에도 이니프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자신을 따라왔다.
'어째서?'
젊은 날의 자신이었다면 냉랭하게 대하는 것으로 끝. 더 다가오려 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내 관심을 끊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세계의 기본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자신과 무엇이 달라져 있었나?
벤하르트는 몸을 떨었다. 그 답을 아는 것이 두려웠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일세. 자네가 마음에 들었기에 가르쳐 주었다.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지만, 그 내면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테지."
카실러스의 말은 벤하르트의 두려움을 읽고 있는 듯 했다.
"이미 내가 자네를 가르친 행위는 지나간 일. 때문에 내가 자네에게 호감을 느낀 그 이유는 이제 내게 있어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야. 그보다도 자네의 그 고민하는 얼굴을 보니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네. 의미 없는 답보다 더 쓸모 있는 답을 들은 듯한 기분이야."
그 말을 끝으로 카실러스는 벤하르트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벤하르트는 생각했다. 진실을 아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여기서 알아둬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그의 머릿속에 멤돌았다.
하나씩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나간다.
언제부터?
'레니아와 만나고 난 뒤부터다.'
만난 것은 그저 간접적인 이유라는 것을 벤하르트는 알고 있다. 그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를 생각했다. 여행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고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곧 그 시작의 답을 찾아 냈다.
'레나스트..'
그의 일생을 바꾸어 버린 약. 자신을 젊게 만들고 레니아와 만나게 된 동기. 레나스트의 효능이 그런 단순한 것 뿐이었을까? 신의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만든 레나스트가 고작 젊어지는 효과로 끝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바랬나.'
순간 벤하르트의 눈이 뜨였다. 자신이 죽기 직전 바랬던 것. 연철장에서 살았던 때보다도 더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 때의 죽고자 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인연을.. 가지고 싶었다.'
벤하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장을 쥐어 짜이는 듯한 초조함이 몰려온다.
인정해 버리는 순간 벤하르트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레니아와의 만남도, 리스와의 만남도, 지금까지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은 진실이었나? 아니면 정체불명의 신약의 힘에 의한 장난이었나. 레나스트에 의해서 자신이 바뀌었다는 확증은 없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과연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하게 좋아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레니아가 인간에게 아니 '내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장소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좋게 해석해줘도 노시엘트에서 내쫓겼겠지. 그 경우..'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레니아가 봉인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유유자적 노시엘트의 산에서 약신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맛있어 보여서 먹었다는 그 행위 하나가 무엇을 어떤 결과를 만들어 버렸는가. 벤하르트의 속이 울렁 거린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런 벤하르트에게 잠자코 걷던 카실러스가 말을 걸었다.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카실러스.."
그 짧은 사이에 벤하르트는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카실러스가 아닌 평범한 사람조차도 그 변화를 곧장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모르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그 고민을 만들어 낸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두가지 조언을 해주지. 첫째. 자네가 생각한 답은 정말 이견의 여지 없이 맞는 답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확신은 없다. 심증은 넘쳐 흐르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레니아조차도 레나스트의 효능을 모르고 있을 정도인대, 약신은 커녕 일개 약초꾼들보다도 그 방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벤하르트가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경계하되, 그 답에 흡입되지는 말게. 그리고 두번째. 자네가 낸 그 답이 만들어 낸 결과는 답을 알면 해결할 수 있는 건가?"
카실러스의 질문은 하나 하나가 비수가 되어 벤하르트에게 꽃혔다.
"해결할 수 있다면 실컷 죽을때까지 고민하게. 그 고민은 해야 할 고민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쓸데 없는 고민을 하기 보다는 지금 자네가 해야할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게 더 좋을 거야."
"의미 없는 답이기 때문입니까?"
벤하르트는 방금 카실러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배우는 게 빠르구만."
벤하르트가 생각한 그대로 레나스트에 의해 모든 일이 발생했다고 해도 자신이 만난 모든 것이 설령 거짓이었다고 해도 벤하르트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게 설령 정답이라고 해도 레나스트의 약효를 제거할 수도 레니아가 봉인되지 않을 역사를 만들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그런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궁상을 떠는 게 아니다.
'레니아를 구해낸다.'
특별히 바뀐 것은 없다. 고민할 거리가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고 레니아를 구해야 한다는 건 언제나 그러했다. 하지만 벤하르트의 마음은 다시 한번 목표를 바로 잡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워 졌다.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레니아를 구하고 싶다는 벤하르트의 간절한 일념이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끈 카실러스나 어느쪽이든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일단은 이 시간 여행에서 본래의 시간으로 최선을 다해 돌아간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 벤하르트의 마음은 강철처럼 단단해 졌다. 그런 자신을 자각하고 벤하르트는 카실러스에게 말했다.
"천상 선생이시군요."
카실러스는 말 없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작가의말
전에 올렸던 화에서 조금 뒤에 써둔 게 있었는지라
3일 안에 써서 올려야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전 어째서 2주만에 이번 화를 올리게 된 걸까요.
꽤 수정하고 또 수정해서 지연되었는데도 개인적으로 매끄럽지 못해서 아쉽네요.
여튼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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